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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ㅣ 푸른숲 징검다리 클래식 25
로제 마르탱 뒤 가르 지음, 이충훈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09년 6월
평점 :
지금껏 해보지 못한 일 중 가장 후회되는 일은 가출이다. 다른 일은 뒤늦게나마 시도할 수 있지만, 물론 성년도 가출을 할 수 있는 노릇이지만 가출한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주지 않는다면 여행이나 다를 바 없다. 그보다는 구실을 마련할 목적이 없다.
기성세대에 대한 반감! 학습 중심의 메커니즘에 대한 거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 물결치는 자유에 대한 갈망! 그 얼마나 찬란한 구실인가. 하다못해 무라카미 류 소설 <69>의 켄처럼 어쩔 수 없이 참여해야 하는 마라톤이 징글징글하여 가출할 수도 있을 텐데……. 현재의 나에겐 100미터 달리기라도 해보라고 재촉하는 이가 없다.
나가면 고생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진리처럼 여겼던 과거의 내가 <회색 노트>를 진작 읽었더라면 최소한 시도는 하지 않았을까 싶다. 로제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의 첫 시리즈인 <회색 노트>는 열네 개의 톱니가 있는 자크와 다니엘, 두개의 축으로 돌아간다. 자크가 볼록할 때 다니엘은 오목한 부분을 내밀며 굴러갔다. 누가 힘을 전달하는 축인지 헷갈리게 잘도 굴러갔다. 이를 증명하는 노트 한권, 서로가 서로의 깊숙한 공간까지 도달했음을 알려준다.
그들의 작은 두 개의 톱니바퀴는 세상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자크와 털컥털컥 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아빠 티보. 그리고 티보와 연결된 거대한 로마 가톨릭 바퀴. 다니엘과 매끄럽게 돌아가지만 내구력이 의심되는 엄마 테레즈의 바퀴는 동시에 프로테스탄트와 맞물려 돌아간다. 사이클에 결함이 없는 듯 보이나 자크와 다니엘의 우정을 초월한 관계를 넌지시 비치는 노트가 주목받으면서 굉음이 쏟아진다. 열네 살이 할 수 있을 법한 최고의 반항, 가출이다. 낯선 역과 낯선 길과 낯선 잠자리와 그보다 더 낯설어진 그들. 정신적 유대감이 현실의 친숙함으로 발돋움질하려는데 지극히 가까운 거리는 오히려 그들을 낯설게 만든다.
성에 조숙해져버린 다니엘이 만들어낸 괴리감 때문만은 아니다. 숨김없이 주고받았던 노트는 잠시나마 그들의 맞물리는 자리에 기름칠을 해주었지만 나와 똑같았다고 믿었던 상대방의 형상은 처음부터 달랐음을 가출을 통해 확인한다. 관계가 예전 같지 않을 거라는 불안과 낯선 곳에서 우연찮게 목도한 죽음과 귀가 후 밀려드는 서글픈 안도감은 두 소년을 한층 성장하게끔 한다.
아들을 사랑하지만 가문과 자기의 명예에 해가 될까 저어하는 티보 씨와 오매불망 아들의 무사귀가를 바라는 테레즈 씨의 대비를 통해 한 사람을 이해하는 건 한 세상을 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크가 원한 건 스스로 자존감을 형성시킬 수 있는 가족의 이해다. 자크의 바람이 묵살되었음을 알고 마지막으로 다니엘에게 자살을 암시하는 편지를 휘갈겨 쓰는 장면과 디졸브되는 집에 도착하기 전 형 앙트완이 자신을 이해하고 있음을 감지한 자크의 표정. 참으로 안타깝다.
과거의 가치를 현재에 이르게 하는, 우리가 고전이라 칭하는 책과 친해지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고전에 대한 편견, 이를테면 지겹도록 지루한 내용, 뭔가 심오한 깨달음을 얻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 등은 고전의 오묘한 맛을 독자에게 전달하지 못한다. 감각적인 면을 선호하는 청소년에겐 더욱 그러하다. 게다가 청소년기에 읽지 못한다면 책장을 펼칠 확률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청소년을 고전 독자층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수단으로도 <회색 노트>는 만족스럽다. 표지에 실린 부자는 부모와 헛도는 청소년간의 불협화음을 상징하고 있다. 얼핏 봤을 때 아버지 한 사람으로 보이는 의도는 기성세대의 위압적인 모습을 강조하는 듯하다. 본문의 삽화도 독자에게 하여금 하나의 이미지로 남을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무엇보다 동시대에 놓고 작품을 재감상할 수 있는 책 뒤편은 어렵게만 다가오는 고전의 훌륭한 가이드 역할을 한다.
삶의 비타민 같은 고전을 우리 청소년에게 읽히기 위한 시도, 나쁘지 않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