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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 카프카 단편선 세계의 클래식 9
프란츠 카프카 지음, 권세훈 옮김 / 가지않은길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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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 변신'. 역시 데미안과 마찬가지로 중학교 논술학원 다닐 때 접했던 책이다. 그때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아마 손 댔더라도 몇 자 읽다가 짜증나서 때려쳤을 게 분명하다. 그만큼 취향을 타는 작가라는 소리인데, 지금도 '카프카'라는 이름이 주는 어두움과 고독감이 참 부담으로 느껴지곤 한다. 그러나 이와는 별개로 그의 작품이 주는 비평적 가치는 흥미를 자극하는 부분이 맞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처럼 말이다. (이 책 또한 교수님1께서 추천해주셨는데, 물론 읽어보지 않았다.)


 '변신'은 꾸준히 비극적인 분위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난해하다. (앞서 카프카의 단편 '선고'가 실려있는데, 이 역시 마찬가지다.) 나이브하게 얘기하면 '꿈도 희망도 없다.' 절망, 혼돈 내지 파괴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그게 나는 아니다. 다만 비평을 통해 자산이 되고, 더 흥미로워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취향'은 아니지만 좋다고 하겠다. (꿈보다 해몽......) 이 소설을 포함한 카프카 문학세계의 전반을 실존주의의 맹아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작품해설은 좀 다르게 설명하고 있다. 카프카를 전공했다는 역자는 '변신'이라는 행위를 '돈 벌어다 주는 기계'로 전락한 주인공의 일탈이자 자본주의, 성과주의 체제의 부조리 폭로라고 설명한다. 인간이면서 인간성이 단절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벌레'와 다르지 않다는 것. 그래서 '벌레가 되었다'는 노골적인 설정이 작품을 이루는 골자라는 것이다. 주인공은 가족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더이상 재화교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없게된(벌레가 된) 주인공은 가족구성원으로부터 배제되고 만다. 이제 '그'는 '그것'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인공은 체제로부터 해방되었다. 완전히 무력해져 아무도 일을 시키지 않는(이상 - '회한의 장')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인간을 포기하고 얻어낸 해방으로, 주인공에게 돌아온 것은 구원과 같은 예견된 죽음이며, 가족들은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아 하는 모습을 보인다. 평생을 생업에 종사하며 글을 쓰다가 요절한 카프카의 일생에 대입하면 작품의 주제의식이 명확해지는 게 참 비장하게 느껴진다. 이러니 어찌 탄복하고 경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청소년들 읽으라고 추천해주는 20세기 고전들은 대체로 자본주의/성과주의 체제로부터 상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주제로 한 작품이 많다. 어쩌면 그 속에는 '어차피 힘든 세상이고, 잔인한 체제니까 문학전선에 뛰어들 생각이면 마음 똑바로 먹어라. 그런데 그때보다 상황은 훨씬 더 열악하다...'라는 무언의 압박이 담겨있지 않았나 싶다. (당시에 유행했던) 자기계발서도 아니고, 문학에서 체제순응적인 논리를 학습하기란 아이러니니까. 따라서 문학은 어딘가 어둡고 고독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세상 너머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사람들. 그들 내면의 깊이 만큼 문학은 구원에 이르는 양분이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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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제피네, 여가수 혹은 쥐의 종족'은 카프카의 예술관이 드러난 짧은 꽁트다. '그것은 뻔하지만 세계와 인간을 구원하는 것.' 생전 최후의 작품이라는데 죽음을 앞둔 거인의 초연함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영원한 평화'와 비견되지 않는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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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 욕망 + 모더니즘 + 제국주의 + 몬스터 + 종교 다섯 가지 힘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 뜨인돌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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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토 다카시의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역시 얇고 넓은 교양서적 답게 논지전개가 일률적이고, 이것을 개별 지식의 나열로 지탱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중  - 고딩 때 읽었을 때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정도로 넘어갔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빈약한 논거나 성급한 주의주장 등(또한 이런 부분들이 대중교양서적의 폐해이기도 하다) 여러 문제점들이 눈에 들어온다. 보다 심층적인 논의로 넘어가기 위한 노력이 재고된다. (그러려고 책 읽는 거니까.) 흥미유도를 위한 서적은 '지대넓얕' 정도로 끝내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물론 읽어보지는 않았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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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달인, 호모 아르텍스 - 구경은 됐다 신나는 나만의 예술하기!, 개정증보판 달인 시리즈 2
채운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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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론다 번의 시크릿과 이지성의 저서들을 위시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들의 가장 큰 특징-이자 유해함은 그 좋은 구절들을 '끌어다가' 노력만능주의 자기주문의 논리를 이어간다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은 그런 식으로 돈을 벌어왔다.) 특히 '틀을 깨부순다(구조를 해체한다)'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조를 그런 식으로 오독하는 걸 보면 부아가 치밀어오를 지경이다. 10여 년 전에 출판된 '호모-' 시리즈 역시 이와 다르지 않은데, 최소한 이런 책들은 한글을 떼고 교양(liberal arts)을 아주 처음(very first time) 접하는 시기의 유아들을 독자로 상정하는 편이 낫다. 또한 그말 그대로 그러한 책들은 '노력하라', '행동하라' 식의 유아적인 주문들을 강조한다. 따라서 인문학적 자기계발서의 주요 독자인 청소년층은 교양의 유아기적 상태에 머무르게 될 뿐이다. 어디 청소년 뿐이겠는가. 갓 인문학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인들은 어떻고. '깨부서라', '행동하라', '노력하라'. 뭐 그리 많은 주문들로 어디 '계몽'까지야 한다는 말인가. 결론은 항상 일차원적 노력만능주의로 수렴하는데. '계몽'하고자 한다면 그런 식으로 하면 안된다. '우매한 대중'들을 계도하겠다는 의도는 구시대적이며, 필패하기 마련이다. 칸트가 '계몽이란 무엇인가'에서 말했듯, 계몽이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인식의 유아기적 상태를 조장하는 대중마취서적들로 계몽을 한다? 이율배반도 이런 이율배반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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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4
헤르만 헤세 지음, 구기성 옮김 / 문예출판사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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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은 아마도 중학교 시절 논술학원을 다닐 때 접했던 책이다. 당시의 난 어른의 권위에 충실히 따르기에는 너무 많이 자랐지만, 방황을 멈추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었으므로, 중간도 채 읽지 못 하고 그만둔 것으로 기억한다. 대저 이런 식으로 내가 어린 시절에 놓친 고전이 한 두개가 아니다. 깊이 후회하고 반성한다. 지금이라도 죄다 읽어내어야지.


 세계에는 내적인 방황에 빠져있는 꼬마 싱클레어들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많으며, 앞으로도 꾸준히 많을 것이다. 1차대전 발발 전의 유럽,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독일의 젊은이들은 확실히 니체의 절대적인 영향 아래 놓여있었음이 분명하다. 자신의 운명을 마주하고, 고독하게 걸어나간다는 테제는 당시 피끓는 청춘들에게 조명받기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보면, 데미안에게서 초인의 목젖이 만져지는 것이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광장에서 추락한 광대에게 손을 내미는 차라투스트라처럼, 자기 운명을 들여다보는 것을 감내할 수 있는 '표지'를 가진 이들에게 데미안은 지도자이자, 초인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일찍이 기독교-로고스주의의 이원론적 도덕관(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은 (니체에 따르면) 데카당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되었던 바 있다. 싱클레어가 처음 붕괴를 목도했던 세계 역시 기독교적인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후로 그는 점차 순종적인 유아(낙타)에서 방탕한 청년(사자)을 거쳐 운명을 그려내는(어린아이) 단계로 나아간다.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아프락사스는 운명 끝에 당도하여 다시 자기에게로 되돌아 올 자신의 형상이자, 세계에 도래할 초인의 또다른 이름인 셈이다.


 개인서사로 투영한다면, 데미안은 세상의 모든 싱클레어들을 위한 책이다. 세계를 깨어버려야 하는 운명을 짊어진 방황하는 청춘들을 위한 희망서사. 희망이라는 말이 잔인하게 변질되어버린 오늘날, 잠시 속세를 등지고 '희망'다운 '희망'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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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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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병철 저 '에로스의 종말'을 몇 달에 걸쳐아니 사실은 몇 달 전에 포기했던 걸 간만에 붙잡고, 다 읽어냈다. (한동안은 중간에 읽다 말았던 책들을 매듭짓는 데 시간을 보내야겠다.) 4장에서 6장까지의 논의는 추후 다시 독해하는 편이 좋겠지만, 7장에서 에로스가 사유의 선험조건이자 핵심이라는 주장을 밀고 나가는 데서 전율을 느꼈다. 한 자 한 자 숙고하며 읽던 책인데(거진 모든 책을 그렇게 읽지만) 그 맹렬한 추동을 따라서 7장은 열렬히 읽어나갔다. 역시 막판에 가서 총성을 질러대는 것이 멋있는 법...


 책에 서술된 '에로스' 개념은 내가 작년 무렵, 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사건과 비슷한 맥락이 있다. '그는 어느날 갑자기 나를 찾아와서는 새로운 세계로 이끌었다.' 헤겔의 '정반합' 개념처럼 나는 어떤 근원적 '진, 선, 미'에 대한 희망을 품게 됐고(쉽게 말하면 믿음이 들어 온 게다. 아브라함 계통의 인격신 개념이 배제된. 그래서 내가 가톨릭에 쉽게 친화될 수 있었다.) 여느 인문주의자들처럼 세계를 '구조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게 되었다. 이른바 사유의 힘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뿐이었다. 나는 금새 질려버렸고(에로스는 식었고 'Cupid's Dead'), 새로운 데이터를 동화해내지 못한 스키마는 점점 말라 죽어갔다. 일련의 시기를 거쳐, 결국 지금에야 가까스로 경종을 울리기는 했다.(잘 울렸는지 아직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그런데 그때의 이성은 지금에 와서 일정 때묻고, 다듬어졌겠지만(어느 방향으로든) 그때의 '에로스'는 여전한가. 그 열망을 재생산하기에 나는 여전히 순수한가...이것은 실존적 물음이다.


 목표가 더 구체화되고 있다. (좋은 징조) 우선은 문해력이 절실하다. (나는 너무할 정도로 이 부분에 약하다.) 다음은 작문력. 정확히는 내 사유를 포착(capture)하고 텍스트를 기록해내는 일련의 과정에 해당하는 능력들이 필요하다. '결국 기표에는 다 드러난다.' 이것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이것들을 지탱하는 에로스적 열망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지.


 타자와의 생동하는 관계를 사유 속으로 끌어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에로스'에서 시작하는 사유. '사유'로 시작하는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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