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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제도에 반대한 여성들, 자유를 말하다 ㅣ 초록서재 1
재닛 윌렌.마조리 간 지음, 김인경 옮김 / 초록서재 / 2016년 2월
평점 :
절판

제목: [자유를 말하다] 노예제도에 반대한 여성들
지은이:
저자 재닛 윌렌은 30년 이상 작가이자 편집자로 일했으며, 치유를 위한 글쓰기 교육과정에서부터 건강과 안전에 관한 글까지 다양한 주제로 책을 썼다. 뉴욕의 뉴 스쿨에서 정치철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남편과 함께 메릴랜드 주 실버스프링에 살고 있다.
저자 마조리 간은 30년 넘게 교사로 일하며 아이들을 가르쳤고, 초등학생용 어학 교육 교재를 썼다. 애틀랜틱 캐나다에 사는 동안 《디스커버 캐나다, 뉴브런즈윅 편》을 쓰기도 했다.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남편과 함께 온타리오 주 토론토에 살고 있다.
재닛 윌렌과 마조리 간이 공동 저자로 집필한 첫 책 《끝나지 않은 노예의 역사 - 5천 년 노예제도를 말하다》는 국제독서협회(The International Reading Association)의 ‘2012년 국제사회가 주목할 만한 도서’에 선정되었고 미국 서평 전문지 포어워드 리뷰즈(ForeWord Reviews)의 ‘올해의 책’ 청소년 논픽션 부문 은상을 수상했다.
역자 김인경은 대학에서 영어영문학과 심리학을 전공하고 유아영어교사로 일했다. 어린이, 청소년 책을 기획 번역 중이며 <한겨레 어린이.청소년책 번역가그룹>에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일단 질러! 문제는 침묵이 아니라 용기야》(공역)가 있다.
출처: 교보문고
http://book.naver.com/product/go.nhn?bid=10185689&cpName=kyobo&url=http%3A%2F%2Fwww.kyobobook.co.kr%2Fcooper%2Fredirect_over.jsp%3FLINK%3DNVB%26next_url%3Dhttp%3A%2F%2Fwww.kyobobook.co.kr%2Fproduct%2FdetailViewKor.laf%3FmallGb%3DKOR%26ejkGb%3DKOR%26linkClass%3D%26barcode%3D9791195718702
내용:
근대부터 현재까지 노예제도와 관려해서 가장 많은 피해를 봐야 했던 약자인 어린아이와 여성들이 어떻게 노예제도에 대해서 대항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아픔을 다양한 실제 사례를 담담히 감정을 절제해서 기록해 놓은 책입니다. 책은 크게 14장에서 14명의 이야기를 해줍니다.
“ 단 일 분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이 땅에 자유의 몸으로 머물기 위해서” 1781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주인을 상대로 자신의 자유를 구하는 최초의 소송을 제기한 흑인 노예여성이었던 엘리자베스 프리먼.
“중도는 없습니다.” 작은 소책자와 지치지 않는 열정으로 1838년7월 영국 식민지에서 노예제도라는 괴물을 사라지게 하는데 큰 공을 세운 잉글랜드 레스터 출신의 백인여성 엘리자베스 헤이릭.
“차라리 자유로운 여성의 몸으로 영국에서 굶주리는 편을 택하겠습니다.” 1848년 조지아주에서 사랑을 위해 도망나온 백인의 피부를 가진 흑인 노예 여성이었던 엘렌 크래프트.
“내가 자유를 얻었으니 그 사람들도 자유로워야 했습니다.” 1850년대 후반 매릴랜드 주 동부해안에서 수많은 흑인 노예들의 탈출을 도운 지하철도의 모세라 불리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도왔지만 흑인들에 의해 겨우 겨우 잊혀지지 않고 있다가 1960년대에야 세상에 알려진 흑인 노예 여성 해리엇 터브먼
“살아 있는 한 나는 글을 쓸 것입니다.” 1862년 12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만나 노예 해방을 설득했던 [톰 아저씨의 오두막]의 저자. 백인 여류 작가, 해리엇 비처 스토.
“반인륜적인 극심한 범죄” 영국 연극배우출신이면서 조지아주 농장의 여주인으로 있었던 프랜시스 앤 켐블. 그녀의 저서 [조지아 농장 거주 일기, 1838년에서 1839녀까지] 는 노예제도의 참상을 세상에 알리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 사람들도 당신과 나와 같은 여성입니다.” 1904년 5월 어느 일요일 아침 젊은 영국 여성 선교사 앨리스 실리 해리스가 찍은 사진 한장과 그녀의 열정은 사람들의 분노를 일으켜 레오폴드 국왕의 콩고인 착취를 종식시킵니다.
“지구상에서 노예제도의 검은 얼룩을 씻어 내기 위해서” 1933년 조지5세로부터 노예제도 반대운동을 높이 평가 받아 대영 제국의 데임 작위를 받은 영국 여성 캐슬린 사이먼. 그녀는 홍콩의 메이짜이 제도를 종식시켰습니다.
“이 지역은 사회 문제가 많은 곳” 1905년6월1일~ 1992년 10월4일. 스페인 내전 당시 자유를 위해 싸웠고, 프리벨로프 제도 알류트 족의 권리를 위해 앞장선 국제 평화주의자라는 묘비병을 갖고 지금은 세인트 폴섬에 묻혀있는 용기있고 포기하지 않았던 미국 여성 프레데리카 마틴 .
“모두가 소중한 존재랍니다.” . 2012년 12월14일 자원봉사 지도자상을 캐나다 총리에게서 받은 헝가리 출신의 티메어 너지. 그녀는 1998년 성노예로 헝가리에서 캐나다로 팔려 왔지만 그 후 고난을 극복하고 비슷한 처지의 여성들을 구출하는데 앞장서 "워크 위드 미"라는 단체를 이끌어 나갑니다.
“수치심을 없애는 최선의 방법은 수치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2008년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주 에이킨 대학에서 강연을 하면서 '레스타벡'이라는 교묘하게 감춰진 노예들의 이야기를 하며 그런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을 구해내야 한다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킨 용감한 아이티 흑인 여성 미셸린 슬래터리 .
“나는 염소처럼 팔렸습니다.” 2008년 10월 용기있게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자유를 쟁취한 서아프리카 니제르의 흑인 여성, 해디자투 마니 .
“바구니는 조금씩 조금씩 차오릅니다.” 카리브 해의 쌍동이섬 앤티카 바부다에서 노예제도 반대 활동을 벌인데 대해 2011년 미국 국무장관 힐러리 클린턴으로부터 영웅 상을 받은 쉴라 로소.
“구매자의 눈과 귀가 되겠습니다.” 1995년 굿위브 초창기 시절, 남아시아 지역에서 노예로 일하는 100만명의 아이들이 오늘날 25만명으로 줄어드는데 큰 공을 세운 니나 스미스.
이 14명의 위대한 여성들의 이야기입니다. 섬세하면서 강인한 이 여성들은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고 노예로 삼는데 용기있게 저항했습니다.
P31
헤이릭의 거침없는 언변과 강한 설득력, 숭고한 원칙과 고집, 이웃 여성들을 일일이 방문하는 것과 같은 적극적인 행동이 없었다면 여성들은 단결해서 설탕 불매 운동을 벌이거나 노예제도를 빨리 종식시키기 위한 여론을 모으지 못했을 테고, 1838년에 영국령 서인도 제도에서 노예제도라는 괴물이 죽는 일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헤이릭의 결단이 없었다면 오늘날 활동가들이 효율적으로 불의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오늘날 탄원서를 갖고 집집마다 찾아가 문을 두드리고, 불매 운동을 지지하고, 청원서에 서명을 하고, 정치적인 운동을 추진하기 위해 트윗을 쓰고, 칼럼을 써 의견을 피력하는 사람은 헤이릭의 본보기를 따르는 것이다.
- 저도 우연히 지나가다가 광화문에서 세월호 관련 탄원서에 서명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양의 탄원서가 작성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변한게 없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의 희망은 그냥 종이 꾸러미로 그치는 건가 생각하니 허탈합니다.
P65
캐나다에서 터브먼은 호전적인 노예제도 페지론자로 유명한 존 브라운을 만났다. 브라운은 폭력적인 전략을 구사한다는 점에서 터브먼이 알고 지내던 다른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는 크게 달랐다. 몇 해 전 , 캔자스 주에서 브라운은 아들들과 함께 무기를 들고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 맞섰다. 1858년, 브라운은 버지니아주 하퍼스 페리에 있는 연방 정부의 무기고를 습격할 계획을 세웠다. 노예 폭동에 불을 붙여 미국의 노예제도를 끝내려는 의도였다.
" 커트 보네거트의 [ 신의 축복이 있기를, 닥터 키보키언 ] " 은 실제로 미국인의 죽음에 대한 시각을 바꾸는데 큰 영향을 미친 실존 인물인 죽음의 의사 키보키언의 도움으로, 물론 작가의 상상으로,작가가 약 사분지 삼만 죽은 상태로 임사체험을 하면서 유명인사를 만나 인터뷰를 한 내용의 책인데 거기서 작가는 백사십년쯤 전에 노예해방을 위해 몸소 무기고를 털다 로버트E.리 대령에게 붙잡혀 법에 따라 교수형을 당한 존 브라운씨도 인터뷰합니다. 커트보네커트 글답게 재미있지만 묵직합니다. 여러 사람들, 물론 죽은 사람들이지만, 인터뷰 내용이 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존브라운이 작가가 그의 올가미에 대해 묻자. 하는 말인" 자네건 어디있나? 자네건 어디있지?" 라는 말입니다. 읽으면서 존 브라운씨가 제게 얼굴을 바짝 갖다대고 묻는 것만 같아 부끄러웠습니다.
P88
<톰 아저씨의 오두막을 쓰다>
스토가 '큰 선'을 행하도록 자극한 것은 다름 아닌 악법이었다. 1850년에 미국 의회는 도망 노예 법을 제정했다. 그동안에도 노예 주인들은 도망친 노예들을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자유 주에서 데려올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법은 이 일을 더 쉽게 만들었다. 다시 잡힌 노예는 재판을 받을 권리도 없었다. 흑인, 심지어 해방된 흑인이라 할지라도 다시 주인에게 돌려보내는 사람은 누구라도 보상을 요구할 수 있었다. 연방 법원 집행관은 자유 주의 시민에게 도주한 노예를 잡는 일에 협조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도주한 노예에게 음식을 주거나 거처를 제공해 돕는 이들은 누구나 벌금형을 받거나 감옥에 수감되었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쓴 [월든]의 한 구절입니다.
p199
첫번째 여름이 끝나가던 어느날 오후 , 나는 구둣방에서 구두를 찾으려고 마을에 갔다가 체포되어 투옥을 당했다. 그 이유는 내가 다른데서 도 기술한 바와 같이 나는 의사당의 문 앞에서 인간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축처럼 매매하는 국가의 권위를 인정할 수 없었고, 그러한 국가에게는 세금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내면의 양심의 소리를 듣지 말고 악법의 준수를 강요할 때 소로는 복종을 거부했습니다. 나찌 시대 독일 국민은 전부 다는 아니지만 대다수의 국민들이 악법을 준수 했고 그로인해 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습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초점을 비인간적인 제도속에서 개인이 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반성의 촉구에 있다고 이야기 했습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살펴보지 못하고 그저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만 하는 것은 평범한 삶에서 범할수 있는 악의 통로가 된다고 말입니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그 질문을 포기하면서 기능적으로만 삶에 응대한 것으로써 수많은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학살한 것입니다.
p115
거기 있던 사람들 중 한 명이 나뭇잎 더미를 들어 올리자 어린아이의 손과 발이 보였습니다. 다섯 살 정도 된 아이의 손발인 듯 했습니다. 깔끔하게 잘렸고 시간이 오래 흐르지는 않은 상태였습니다. 끔찍한 광경이었습니다.이 편지를 쓰는 지금도 그 광경을 볼 때 느꼈던 공포와 전율이 그대로 되살아납니다. 슬픔으로 넋이 나간 채 그 손과 발이 딸의 것이라고 말하던 아이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표정도 생생합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아이 아버지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경비병들이 아이의 엄마도 살해했으며 둘을 먹어 버렸다고 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지만, 사람고기를 먹는 풍습은 그 당시 콩고에서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 일제 강점기 독립투사들에게 가하는 고문은 친일파 조선인 경찰들이 주로 했다고 하더군요. 노덕술이라는 사람은 정말 대단하더군요.
" 노덕술(盧德述, 松浦鴻(마쓰우라 히로), 1899년 6월 1일 ~ 1968년 4월 1일)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경찰로, 본적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궁정동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고등계 형사 겸 친일 경찰이었으며 광복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부터 친일파 경찰에서 수도경찰청 간부로 활약하여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반공 투사"라고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된 바가 있었으나 반민특위 해체로 풀려나 경찰직 복귀 이후에도 대한민국 경찰직에서 고위간부로 지내는 등의 호사를 누렸다."
출처 :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5%B8%EB%8D%95%EC%88%A0
p162
너지의 이야기는 1998년 4월 헝가리에서 시작된다. 수개월 동안 너지와 너지의 오빠는 돈을 벌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집을 잃을 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너지는 캐나다에 단기 일자리를 알선해 주는 중개인을 알게 되었다. 중개인은 캐나다에 3개월간 머믈며 아이 돌보미나 청소부로 일할 수 있다고 했다. 귀가 솔깃했다. 캐나다의 일자리는 다른 나라에 가 볼 수 있는 새로운 경험이었고, 돈을 벌어 부다페스트에 돌아오면 집을 담보로 받았던 빚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토론토에 도착하자 너지를 맞은 것은 아이를 맡기거나 집 청소를 시킬 사람이 아니었다. 헝가리 남자 둘과 캐나다 남자 하나가 스트립 클럽으로 너지를 데려갔다. 거기서 너지는 음란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며 외설적인 말을 해대는 남자들 앞에서 춤을 춰야 했다. 클럽 주인인 알폰조는 너지를 성폭행하고 하루에 19시간 동안 일하도록 강요했다.
- 제국주의 일본은 우리 소녀들에게 이보다 더 심한 짓을 했습니다.
감상:
인간으로써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이리 잔인한 짓을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한다는 것은 인간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바구니는 조금씩 조금씩 차오릅니다.” 라고 쉴라 로소가 한말이 생각납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이런 끔찍한 일들을 인류 역사에서 몰아내는 노력을 멈추면 안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