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 그리스 ㅣ 군주의 거울
김상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1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제목 : [군주의 거울: 키루스의 교육]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그리스
지은이:
저자 김상근은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및 연합신학대학원 교회사 교수. 동 대학교 신과대학장 및 연합신학대학원장을 역임하였으며 인문학의 심화와 확산을 위해 설립된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설립과 운영을 도왔다. 연세대학교 신과대학을 졸업하고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학교 석사, 에모리대학교 석사, 미국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학위(Ph.D.)를 받았다. 독보적인 르네상스 연구를 완성했으며, 창조적 도전과 탁월한 영감이 담긴 다양한 인문학 저서와 강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SBS <아이러브 人>, SBS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EBS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 EBS <인문의 시대, 르네상스> 외에도 다양한 공공 기관과 기업체 강연을 통해 인문학 확산에 노력해왔다. 주요 저서로는 『카라바조, 이중성의 살인미학』 『마키아벨리』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창조경영』 『인문학 명강 서양고전』(공저) 『나는 누구인가』(공저) 『어떻게 살 것인가』(공저)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공저) 등이 있다.
출처: 교보문고
http://book.naver.com/product/go.nhn?bid=10406416&cpName=kyobo&url=http%3A%2F%2Fwww.kyobobook.co.kr%2Fcooper%2Fredirect_over.jsp%3FLINK%3DNVB%26next_url%3Dhttp%3A%2F%2Fwww.kyobobook.co.kr%2Fproduct%2FdetailViewKor.laf%3FmallGb%3DKOR%26ejkGb%3DKOR%26linkClass%3D%26barcode%3D9788950963859
내용:
이 책은 저자가 2014년 가을에 총 8회에 걸쳐 강연한 EBS인문학 특강[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을 단행본 형식으로 풀어 쓴 것이라고 합니다. 제1부는 그리스의 고전이 기록된 그리스 아포리아 시대의 현실이, 2부는 아포리아 시대을 살아가는 리더의 가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책의 시작은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94년10월의 어느 가을 아침, 버스를 타고 등교하던 32명의 어린 학생들이 영문도 모른 채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이 일어난 것도 아니고, 백주 테러가 벌어진 것도 아니었다. 한강을 가로지르던 멀쩡한 다리가 갑자기 내려 앉은 것이다."로 시작해서 아포리아 시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포리아 시대의 필독서에 대한 소개가 책 전체에 걸쳐 이어집니다. 저자는 그리스의 아포리아 시대와 대한민국의 유사성을 설명하면서 그리스 시대의 군주의 거울이 된 책을 읽어야 할 필요성을 자연스럽게 이끌어 냅니다.
저자는 이야기에 앞서 간단히 그리스의 아포리아 시대를 미리 정리 해줍니다.
첫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5세기초, 즉 499-449년에 촉발된 페르시아 전쟁,
두번째 아포리아는 기원전 431-404년 페르시아 전쟁의 상처가 채 아물기전에 발발한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원전 399년,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BC469-399)가 독배를 들고 죽음을 맞이한 세 번째 아포리아입니다. 소크라테스의 수제자인 플라톤과 애제자인 크세노폰이 쓴 책이 [국가]와 [키루스의 교육]이라고 소개합니다.
그후 이야기는 첫번째 아포리아 후 그에 대한 대표적인 책, 헤르도토스의 [역사]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이야기,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 이야기,아테네의 영웅 테미스토클레스 이야기등이 흥미진진하게 이어집니다.
헤르도토스의 [역사]이야기로 다음으로는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야기가 이어지는데 영웅이었지만 역병에 쓰러진 페리클레스 이야기, 배신의 아이콘이자 스승인 소크라테스를 죽음에 이르게하는데 일조한 잘생기고 말잘하는 알키비아데스 이야기가 나옵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이야기 다음으로는 철학으로써 아포리아 맞선 플라톤의 [국가]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마지막 군주의 거울 이야기인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 이야기편에서는 왕중의 왕 , 키루스 대왕은 왜 군주의 거울이 되었나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여기까지가 1부 아포리아 시대의 기록입니다.
2부 아포리아 시대, 리더의 공부편에서는 메디아의 왕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를 방문했던 키루스 대왕의 어린 시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처음으로 전쟁을 지휘하는 키루스의 모습과 태도, 군사들에게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내는 등 지혜를 추구하는 키루스의 모습, 군주다움에 대한 이야기, 군주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 사람들이 보는 군주의 뒷모습, 군주라도 인간이므로 인간의 본성을 항상 경계하라는 이야기, 레거시를 남긴 비스마르크와 키루스 대왕, 키루스 대왕이 생각한 제국의 핵심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옵니다.
p17
이런 상태를 '아포리아'라고 한다. 아포리아는 '어떻게 해볼 수 이는 것이 없는 상태', 즉 '길 없음의 상태'이자 '출구 없음의 상태'를 뜻한다. 이것은 위기보다 더 심각한 상태다. 위기 상황에서는 그래도 어떤 조치를 취해볼 수 있다. 그러나 아포리아는 더 이상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불가능한 상태다. 아포리아 상태에서 우리는 망연자실한 채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비로소 절감하게 된다.
그리스에서 생겨난 이 말의 원래 뜻은 '막다른 곳에 다다름' 이다.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치기하지 않으면 바보 취급을 하고, 친구를 경쟁상대로 여기고 ,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이만원에 노인분들이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고, 몇백명의 아이들이 죽어가는데 구경만 하고 ........
p21
군주의 거울 장르가 탄생하게 된 또 다른 역사적 배경이 있다. 기원후 800년을 전후해 중세 각국의 수도원에서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 문헌이 대대적으로 발굴된 것이다. 476년, 서로마제국의 함락이라는 역사의 격랑 속에서 유럽 지성인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던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헌의 가치가 새로운 성찰을 촉구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을 역사가들은 8세기 후반부터 시작된 '카롤링거 르네상스'라 부르기도 하고, 아헨에 있던 샤를마뉴의 궁정학교에서 이런 고전의 가치가 주목받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헨 르네상스'라 부르기도 한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으로라는 영화가 생각납니다. 그리스 시대 고전을 숨기기 위해 수도원에서 살인이 일어나는 이야기인데 책장 넘길 때 침 바르지 말아야지 생각하던 기억이 나네요.
p35
우리는 기원전 5세기 초반의 그리스 사람들처럼 외부의 적(일본)으로부터 침입을 받았다. 35년간 이어진 일제 식민 통치는 한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적 정체성의 위기를 안겨주었다. 해방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은 고대 그리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꼭 닮았다.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묘하게 닮았네요.
p35
아포리아 시대의 인문학은 당의정처럼 겉만 달콤한 힐링의 도구가 되어서도 안 되고, 진영 논리에 사로잡힌 이데올로기 비판의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된다.
- 종북이라는 말도 이젠 지겹습니다. 뭐만 나왔다 하면 다 종북이라니... 북한은 국가가 아닙니다. 김정은 정권체제가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요?
p53
왜 스스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불카누스의 가정에 이런 불행이 닥쳤을까? 그는 앞만 보고 달렸다. 그것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믿었다. 그러나 불카누스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일하느라 바빠서 가정과 아내를 돌보지 않은 불카누스는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존재였다.
-그리스의 첫 번째 아포리아인 페르시아 전쟁을 주제로 헤로도토스는 그의 저서 [역사]에서 리더의 자질이 없는 자는 척박한 땅에 만족하라는 교훈을 줍니다. 헤로도토스가 그의 저서[역사]에서 이를 설명해주기 위해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 이야기와 페르시아의 키루스왕 이야길 해주십니다.
김상근 저자는 헤로도토스 이야기를 하다가 베네치아의 16세기 르네상스 거장 틴토레스의 [불카누스에 의해 발각된 비너스와 마르스의 불륜]1551년. 그림을 곁들여서 설명을 보태줌으로써 독자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이야기에 몰입하도록 해주십니다. 그림 설명도 듣고 헤로도토스의 [역사]이야기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p90
이 야만의 시대를 직접 목격하고 역사 기록을 남긴 투키디데스는 실제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에 참전했던 아테네 장군 출신이다. 그는 기원전 422년, 암피폴리스라는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에 뒤늦게 참전했으나 패전의 책임을 지고 법정에서 굴욕적닌 재판을 받게 된다. 결국 그리스 북쪽의 트라키아 지방으로 망명을 떠난 투키디데스는 그곳에서 자신이 직접 경험한 전쟁의 역사를 집필하게 되는데, 그 책이 바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이어 두 번째로 소개하는 그리스의 군주의 거울은 이런 배경에서 탄생하게 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단순한 지역 간의 분쟁이 아니라고 보았던 투키디데스는 책의 서두를 이렇게 시작했다.
아테나이인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인들과 아테나이인들 사이의 전쟁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그 역사를 기록했다. 전쟁이 터지자 마자그는 이 전쟁이 과거의 어떤 전쟁보다 기록해둘 가치가 있는 큰 전쟁이 되리라고 믿고 기록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것은 헬라스인들뿐만 아니라 일부 비헬라스인들에게도 , 아니 전 인류에게 일대 사변이었다.
-그리스의 두 번째 아포리아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살라미스 해전 후 약 20년이 지난뒤 발발했다고 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저자 투키디데스가 인류사의 중대한 일이라고 한것은 21세기에도 지구상에서 가장 큰 맹위를 떨치는 제국의 논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투키디데스의 말에 따르면 강대국의 제국의 경영 논리에 대한 이야기를 호메로스 처럼 문학적으로만 이야기하지도, 헤로도토스처럼 불필요한 이야기를 넣지 않고도 말입니다.
p102-103
여기서부터 그 유명한 '제국의 논리'가 등장한다. 페르시아 전쟁을 마치고 그리스의 맹주 자리에 오른 아테네는 "제국을 현재 상태로 확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현실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그것은 마치 아테네라는 특출한 나라의 역사적 숙명이었다는 것이 아테네인들의 논리였다. 한번 제국의 맹주 자리에 오르고 보니 계속해서 제국을 확장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는 것이다. 아테네의 지도자들이 이런 확장 정책으로 코린토스나 메가라를 압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첫째로 두려움이, 다음에는 체면이, 끝으로 우리 자신의 이익이 그렇게 하도록 강요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논리다. 인류 역사를 통해 간헐적으로 등장했던 모든 제국은 이 논리를 따라 확장을 계속하다가 결국 소멸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제국의 위치를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패권을 장악한 국가의 체면, 그리고 그 나라의 끊임없는 이익 추구로 한번 제국의 길로 들어선 국가는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런 제국의 논리를 제일 먼저 인정하고 받아들인 나라가 바로 아테네였다. "두려움과 체면과 이익"이 아테네를 제국의 길로 이끌었다는 것이다.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기원전460년에 일어났으니 그 옛날에 투키디데스는 벌써 지구상이 도대체 왜 이리 잔인하고 폭력적인지에 대해 그 답을 찾고 있었군요.
p132
아테네가 중심이 된 델로스 동맹이 결성된 이후 아테네는 제국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고 , 이 팽창의 논리는 피할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갑자기 막대한 부가 아테네로 집결되면서 사람들의 생활 방식과 사고 방식이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아테네인들은 델로스 동맹의 재물 창고를 아예 아테넬 옮겨버렸다. 경쟁 동맹이었던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군사적 위협이 가시화되자, 맹주 국가인 아테네는 전쟁 준비를 위해 동맹국들에 더 많은 동맹금을 부담시켰고, 인근 도시국가의 조공도 아테네로 몰려들었다. 아테네는 막대한 동맹 분담금과 조공을 모아 주위 국가들을 상대로 돈을 빌려주고 어마어마한 이윤을 갈취했다. 국가가 고리대금업에 나선 것이다.
- 사드랑 용산미군기지가 자꾸 떠오르니 제가 종북인가 봅니다.
p134
물질적 풍요가 가치 선택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함께 목격되는 것은 '몸의 숭배'현상이다. 황금이 우선하는 사회에서는 이른바 '몸짱'과 '얼짱'이 각광을 받는다. 황금에 눈이 먼 시대를 살아가던 당시 청년들은 아테네의 건국 왕인 테세우스를 열렬히 숭배하기 시작했다. 근육으로 단련된 테세우스의 아름다운 몸을 숭배하기 시작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외모를 지나치게 중시하여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 가장 인기있는 사람이 되는 지금 우리사회의 모습이 생각나서 걱정이 됩니다. 지금 인스타스램을 열어보세요. 온통 몸짱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있습니다. 심지어 성형수술을 거의 둔갑수준으로까지한 국회의원도 있습니다.
p136
가난한 자들이 부자들보다 더 고매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가난한 자들은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며 인가됨의 가치를 스스로 낮출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렇지 않았다. 비록 그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만큼 가난한 사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 그래서 이상적인 사람이라 불리지 못했지만 그의 고매한 영혼은 아테네의 정신으로 불렸다.
- 세월호 유족들에게 막말을 하시는 것을 보고 도대체 왜 저렇게까지 가혹하게 하나 싶어 마음이 몹시 좋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럴 주제도 안되지만, 2만원에 일일 영혼 탈곡 아르바이트를 하셨다는 자칭 어버이 분들을 용서하렵니다.
p148-149
한편 아테네의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다. 제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알키바아데스의 배신과 원정군 전원 몰살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종결됐다. 속죄양이 필요했던 아테네인들은 패전의 원인을 엉뚱한 데로 돌렸다. 기원전 413년 시칠리아 원정군들이 전원 전사하고, 기원전 404년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항복해 패전국이 된 이유를 소크라테스의 탓으로 돌린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와 같은 젊은이들을 선동했고, 무엇보다 그가 알키비아데스를 직접 가르친 스승이었기 때문에 아테네가 봉착된 위기의 원인으로 소크라테스를 지목한 것이다.
-극심한 혼란의 시대. 속죄양이 되었던 소크라테스. 그것도 30인 참주정을 몰아낸 민주파들에 의해서 말입니다.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정말 아포리아 맞습니다.
p152-153
가장 이상적인 문명사회의 모델로 자타가 친송하던 아테네에서 현자 소크라테스가 뜻밖의 죽음을 맞이하자 플라톤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과연 이상적인 국가란 어떤 나라일까?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런 집단적인 아포리아 상태에서 벗어나 이상적인 문명국가를 만들 수 있을까? 이상 국가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통치자를 가져야 하고, 또 그런 이상적인 통치자를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그들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할까?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바로 그 이상 국가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 담겨 있는 책이 [국가]다.
그러므로 플라톤의 주저로 알려져 있는 [국가]는 관념론적인 철학책이 아니라 아포리아 시대에 직면한 한 철학자의 고뇌가 담긴 책인 동시에 후대 사람들이게 군주의 거울을 보여주기 위한 실천적인 시도이기도 하다. 기원전4세기 , 아테네 인근 아카데미아의 그늘진 산책길에서 플라톤이 제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던 주제들은 지금 우리 사회의 심각한 현안 문제와 다르지 않다. 어쩌다가 나라 꼴이 이렇게 되었을까.
-기원전 4세기면 우리나라는 고조선의 철기 시대였을텐데 고조선의 기록들도 이렇게 많이 남아서 후대에 전해졌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전에 천병희 역의 [국가]를 읽어봤는데 플라톤의 국가는 원문 그대로 해석시 정치 체제. 즉 정체.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제제를 의미하는데 국가라고 계속 사용해 왔기 때문에 국가로 계속 불리고 있습니다. 천병희 역 [국가]는 천병희씨가 원래 문학을 하시는 분이기에 읽기 쉽게 되어있다고 하는데 그래도 어렵습니다.
[국가]의 대주제는 정치철학. 부제는 정의를 위하여 라고 합니다. 플라톤의 [국가]라는 저서는 처음 시작은 정의에 대한 물음을 국가차원이 아니라 개인적 윤리에서 출발합니다. [국가]에서 국가에 대하여 논의한 분량이 많기는 하지만 개인의 윤리 또한 주요한 주제입니다.
대화편 [국가]의 작중 상황설정은 소크라테스가 팰로포네소스 전쟁 종전전 7년,기원전481년, 그러니까 404년 펠로포네소스 전쟁의 종전 전보다 7년 전에 아테네에서 7키로 떨어진 21세기인 지금도 아테네에서 가장 큰 항구인 피레오스 항구 지역의 성공한 사업가 노인 케팔로스라는 이방인을 만나 대화를 하는 것이 [국가]의 이야기 형식입니다. 케팔로스는 아테네의 영주권자이지 시민권자 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는 이방인으로써 아테네의 정치에는 그다지 적극적으로 견해를 피력하지 않았고 중립적 입장을 고수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전후 과격파 30인 정치체제에서 케팔로스의 장남인 폴레마르코스는 처형 당하고 재산을 몰수 당합니다. 그 후 30인 공포정치가 물러나고 들어선 민주정에서는 소크라테스가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정의롭지 않게 처형당한 두사람이 정의에 대해 열심히 논쟁한다는 아이러니한 설정이 플라톤의 [국가]에는 기본적으로 깔려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된 사업가 케팔로스는 부를 축적한 덕에 남의 빚을 다 갚을 수 있어서 좋다고 하자 소크라테스는 캐팔로스에게 그럼 남의 빚을 다 갚는게 정의냐고 묻습니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토론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를 먹은 캐팔로스는 아들 폴레마르코스에게 소크라테스와 대화를 계속하라고 하고 자리를 피합니다. 그렇게 해서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긴 대화가 시작됩니다.
p158-159
그러나 당시 9.11사태를 수습했던 조지 부시 대통령의 결정에 의해 어떤 개인이나 단체도 처벌받지 않았다.
불미스러운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책임 공무원들의 옷을 벗기는 것으로 문제를 대응하는 우리나라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어떤 누구에게도 직접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지만 그동안 일어났던 일에 대해 조금이라도 거짓 보고나 축소 보고를 하면 가차 없는 처벌을 가하겠다는 지침이 내려졌다. 사람을 처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이런 사고를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최우선 과제임을 천명한 것이다. 문제점을 도출하고 이런 사고의 재발을 막기 위한 철처한 안전 메뉴얼을 작성하겠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방침이었다.
아무에게도 일차적인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발표했을 때, 각 정보기관과 국방부, 항공사, 공항, 경찰, 소방서 등은 그동안 발생했던 문제점에 대해 솔직하게 진술했고, 그 결과 추가 테러에 대한 종합적인 대책이 마련될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킨의장이 각종 청문회와 조사과정에을 걸쳐 발표한 약 600페이지에 달하는 [The 9/11 Commission Report]이다.
- 수백명이 죽었는데 개인적 일탈이라고 하고 여러 책임 부서중 한 부서를 속죄양 삼아 해체하고 나서는 돈 줄테니 그만 하자고 하는 것을 보다 보니 이런 방식이 상당히 합리적인 해결 방법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공개장소에서 유가족 들에게 "당신 누구야? 유가족이면 좀 가만히 있어라" 버럭 호통치는 국회의원,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봉기가 바로 북한의 코앞에서 벌어질 모양이다. 시체장사에 한두 번 당해봤는가? 세월호 참사는 이를 위한 거대한 불쏘시개다."라고 개인 홈페이지에 올리는 무슨 클럽 대표, "이번 세월호 사고에서 죽은 학생 부모 중에 종북 좌파들이 있다면 이런 종자들은애도할 필요가 없어요.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좌파들이 섞여 있어선전 선동을 하고 있답니다."라고 자신의 페이스북에 적은 뉴스 편집국장, 이외에도 국가의 중요한 위치에 계시다는 분들의 말을 들으며 참 참담하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p170-171
아테네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난 크세노폰은 우연히 아테네 도심의 아고라에서 소크라테스를 만난다. 크세노폰은 "매우 신중한 사람이었고, 또 매우 잘생긴 용모의 소유자"였다고 한다. 당시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에게 특유의 산파술로 철학적 대화를 이끌며 숙고하는 삶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었다. 아테네의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던 크세노폰에게 소크라테스는 지팡이로 길을 막고 대뜸 식료품 가게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크세노폰이 길을 안내해주자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소크라테스와 크세노폰에게 "탁월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물었다. 크세노폰이 이에 대해 즉답하지 못라고 머뭇거리자 소크라테스는 "나를 따라오게 . 내게서 그 답을 찾게나."라고 말했고, 이때부터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가 됐다. 그 이후로 크세노폰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직접 받아 적었고, 직접 목격한 소크라테스의 행적을 기록한 현장의 역사가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헤르도토스는 [역사], 투키디데스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플라톤은[국가]로 군주의 거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 마지막군주의 거울인 [키루스의 교육]이라는 책은 크세노폰의 저서라고 합니다. 크세노폰은 페르시아 용병 만인대의 대장이기도 했으며 철학자요, 전사 였습니다. 저는 아테네 근교에 플라톤 아카데미를 개교하고 제자들과 심로한 토론과 깊은 사색을 한 플라톤의 방식도 좋지만 시대의 격동과 혼란에 직접 자신의 온 몸을 던진 크세노폰의 방식이 더 존경스럽습니다.
p212
군주는 세월의 변화를 직시해야 하며, 시간의 흐름을 읽어야 하고, 계절의 변화를 예측해야 한다. 지금이 머물 때인지, 아니면 떠나야 할 순간인지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프라하의 궁정화가 아르침볼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루돌프 2세에게 부디 세월의 신 베르툼누스가 되라는 뜻에서 어찌 보면 기괴한 그림을 그려주었다.세월의 변화를 직시하고 시간의 흐름을 읽으라고! 변화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라고! 그러나 루돌프2세는 골방에 틀어박혀 세상의 흐름을 읽지 못했고, 그의 제국은 분열됐다. 결국 동생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긴 후 그는 감방에서 비운의 삶을 마감한다. 세월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읽지 못한 자는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이치다. 얼마나 많은 조직들이, 회사들이, 나라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세월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을 읽지 못해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고 있는가.
- 궁정화가 아르침볼도가 황제 루돌프 2세에게 그려주었다는 기괴한 초상화를 보며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했는데 이런 뜻이 있었군요. 저자분이 간간이 섞어서 보여주시는 그림 이야기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한 집안의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는 가장으로써 참고할만한 이야기였습니다.
P217
그리고 이것을 명심해라. 네가 남들에게 호의도 피해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줄 때 네가 하는 말이 더 힘을 갖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 키루스 대왕의 아버지가 출전하는 아들 키루스에게 불확실성에 의지하지 말라고 해준 말이라는 이 글귀는 잊지 않고 명심해 둘만한 말이네요.
P247-248
"나는 오직 강요에 의해 나를 섬기는 신하를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를 향한 선의와 우정을 의무로 여겨 나를 도우려는 신하가 있다면,그가 잘못을했을지라도 나를 싫어하면서 오직 강요에 의해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신하보다 더 흡족해할 것이다."
탁월한 군주의 거울을 보여준 키루스는 신하의 선택에 있어서도 신중을 기했다. 군주 옆에서 함께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할 사람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 선택해야 한다. 단순하게 금전적인 보상을 바라며 의무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군주 곁에 있다면, 그 군주는 절대로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 강요에 의해 업무를 수행한즌 자는 무능력할 뿐만 아니라 열심히 해보려는 다른 동료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게 마련이다.
- 이 말도 인상적인 말입니다. 평소 조직운영에 있어 제가 갖고 있는 신념과도 일치합니다.
p324
결국 키루스가 꿈꾸던 페르시아 제국은 건물의 총합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람이었고 인재였으며 , 그런 인재를 모으는 방식은 본인 스스로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키루스가 암긴 마지막 '군주의 거울'은 그의 삶, 그 자체였다.
-두 아들의 아버지로써 아들들이 현명한 남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책의 마지막 글귀를 마음 속에 새겨 제가 더 열심히 살도록 하겠습니다.
감상:
저는 이 책을 한 가정의 가장으로써 아들들에게 금수저를 입에 물려주진 못했지만 그리고 기적이 일어나 그럴 기회가 생겨도 그럴 생각이 없지만 이 책을 두 아들 생각하는 마음을 갖는 아버지로써 읽었습니다. 이 각자도생의 시대, 헬조선의 시대에 사랑하는 우리 보물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면 될까 하고 말입니다.
결론은 " 본인 스스로 그런 모범적인 삶을 사는 것이었다." 입니다. 많이 모자라지만 포기하지 않고 성실히 살아봐야 겠습니다.
그리고 읽었던 책도 있지만 , 이책에서 등장했던 헤르토토스의 [역사],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플라톤의 [국가],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한번씩 찾아서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