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구병모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부러 피한 것은 아니었으나 한 작가의 책을 두 권 이상 리뷰로 쓴 적이 거의 없고,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세 번 모두 구어체 리뷰군요. 흐음, 어쩌면 이 작가가 쓰는 글에 어떤 마력 같은 게 있는 걸까요. 침착하고 멋들어진 척 문어체로 꾸려가기보단 수다스럽고 솔직하게 구어체로 조잘대게 하는 것 말이죠. 구병모 작가의 『파과』입니다. 

 

주인공은 60대 여성, 일명 조각이라 불리는 킬러이지만 이 책은 (이른바) 장르소설이 아닙니다. 사건의 과정과 추이를 다루는 쪽이 장르소설이고 사건이 지나간 후 폐허를 다루는 것이 순문학이라고 정의한다면 이 책은 확실히 순문학 쪽에 속한 소설입니다. 추측컨대, 킬러가 주인공인 까닭은 삶의 페이소스와 육체적 노쇠와 정신적 고갈 등을 한층 더 부각시킬 수 있는, 다만 그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꼼꼼히 따져보면 아쉬운 점이 있는 소설이긴 합니다. 인물에 밀착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후반부 공사장 장면에서 필요 이상으로 아드레날린이 날린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기왕지사 어쨌건 킬러가 주인공이니 피가 흩날리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그보다는 좀 더 조밀하게 축조된 싸움 장면이면 어땠을까 생각해봅니다. 작가가 특기 중 하나인 유려한 장문도 좋고 책의 전체적인 문제와는 다르게 -그 장면만- 빠르게 끊어서 치는 하드 보일드한 단문이어도 멋있을 것 같군요. 쿠엔틴 타란티노 <킬 빌1>의 눈이 내린 정원 장면이나 니콜라스 윈딩 레픈 <드라이브>의 엘리베이터 씬처럼, 지나칠 정도의 탐미주의로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

 

 

구병모 작가는 2008년 『위저드 베이커리』로 창비 청소년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습니다. 이제 불과 등단 5년 차죠. 헌데 문장력이 상당히 좋고(장문과 복문을 구사하는데 달인이시죠) 고르는 어휘 또한 매우 독특하면서도 적확합니다. 이건 작가로서 대단한 장점이며 『아가미』때 특히 이 점에 매우 흥분했었죠. 아름답고 섬세하고 과감한 강렬한 매력이 있는 이런 문장을 구사하는 작가는 국내에서 처음 봤으니까요. 한국어를 모국어로 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지, 구병모와 같은 작가들을 만날 때 저는 새삼 감탄합니다. 외국어로 이 말을 전한다면 그 어감과 색채가 한국말과 결코 같아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작가의 문장을 읽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이 책의 별점을 네 개는 거뜬히 줄 수 있습니다.

 

더불어 작가는 인물의 복잡한 감정의 침강과 융기를 그려내는데 탁월합니다. 캐릭터의 이름과 성격은 도식적인데 반해 캐릭터 사이에 빚어지는 감정은 복잡하거든요. 『아가미』의 강하와 곤도 그랬었죠. 저는 강하가 곤에게 강하게 끌렸다고 생각합니다. 동성애였다는 말이 아니라(아니 꼭 아니라고도 할 수 없겠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것을 부정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혐오와 환멸 같은 것 말이죠. 어떤 의미로든 강하는 곤을, 자신 스스로의 생각보다 사랑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각을 향한 투우의 마음도 강 선생과 그의 가족들을 바라보는 조각의 마음 또한 한 가지로만은 설명할 수 없겠죠. 작가는 투우의 입을 빌려 먼저 이렇게 선수를 칩니다.

 

의지나 선택이라는 말은 왠지 거창한 계획의 일부라도 되는 것 같은데 정확하게는 어쩌다 보니, 였다. 그가 한 모든 일 가운데 필연적인 것은 많지 않았다. 짊어진 업을 또 다른 업으로 해소하듯이 꼭 이 일을 해야만 내가 살겠다는, 신열을 앓는 새끼무당 같은 절박한 마음이 든 것도 아니었고 불특정 다수의 인간들을 제거하는 일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것도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 아비를 죽인 여자와 같은 짓을 할 수는 없다는 보편적인 도덕심이 강하지도 않았던 까닭에 그야말로 어쩌다 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일어나는 대부분의 일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의 조형과 부착으로 이루어진 콜라주였고 지금의 삶은 모든 어쩌다 보니의 총합이었다.

 

투우가 조각에게 바랐던 것. 그것은 어쩌면 그 자신도 모르는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딱 잘라 이것은 그것이다, 라고 동인動因을 밝히거나 마음을 분류하는 것이 반드시 가능한 것은 아니니까요. 또 하나, 저는 조각이 강 선생을 사랑한 것 같습니다. 그 사랑은 섹슈얼 러브일지도 모르고 버리기로 택한 자식을 느끼는 듯한 감춰진 모성일수도 있고 평생을 고독하고 과묵하게 살아온 이가 느낀 이타적 감정에 대한 보답일수도 있죠. 그 모든 것이 사랑이라고 불릴 수 있으니까요.

 

 

몇 년 전 버스를 탔는데 어떤 중학생, 고등학생쯤 되는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 오랫동안 사로잡혀있던 누군가의 어떤 모습과 매우 흡사했거든요. 저 혼자만 시간을 거스르거나 그 친구에게 제가 몰랐던 혈육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죠. 얼굴, 보다도 체구와 자세, 특유의 청결하면서도 고집스러운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시절의' 그 친구와 거의 판박이더군요. 저는 그 아이가 사라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그 아이에게 한 눈에 반했다거나 했던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건 향수로 인한 통증 같은 게 아닐까요. 돌아갈 수 없는 기억의 공간, 어떤 방식으로도 재현 불가능한, 심지어 당사자 그 자신도 잃어버린 모습. 타임머신이란 얼마나 절박하고 위험한 희망일까요.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조각이 강 선생에게 애착했던 것은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했습니다. 향수나 회한, 추억은 그 자리에 남아 있어야 마땅합니다. 통렬하게 탄식하고 애끓듯 그리워해도 그 쪽이 낫죠. 돌아갈 수 없는 회한을 느끼는 사람 앞에 그 회한이 현재형으로 살아가는 것을 보았을 때의 분노, 변질된 회한에 대한 배신감, 그러나 회한에게 인정받고 싶은 뜨거운 절망. 저는 투우가 조각에게 품은 마음이 그것과 비슷했다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조각에게선, 가질 수 없었던 한 시절에 대한 연민과 그리움, 혹은 오랫동안 마음 속에 품어있던 삶의 방식을 실제로 조우했을 때의 애틋함 같은 걸 강 선생에게 느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제 방식 나름의 해석이지만 단순한 애호나 애증으로 정의하기엔 두 사람의 호오가 상당히 깊어서 결코 한 가지로 해독 가능한 감정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나 펜로즈의 계단처럼 말이죠. 

 

 

인간은 참으로 이기적이고 이중적인데다 자못 뻔뻔한 생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어떤 것들은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객관성의 잣대를 들이대며 평가하더니, 입을 싹 닫고 주관성의 편을 들어 좋은 혹은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말하죠. 비판하는 데는 비교적 이론적 근거를 갖추길 선호하는데 반해 호의는 주관적인 요인을 끼워 맞추는 건 또 어떻습니까. 아니, 저만 그런 걸까요. 어쨌든 저는 종종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 멋쩍고 부끄러워질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 전 페이퍼 댓글에서 그런 말을 썼습니다. 걸작은 의외로 쉽게 빠져나간다, 고요. 어떤 작품들은 그 자체로 완벽해서 때론 고결한 예술품을 감상하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압도적인 외경심. 그런데 이상하게 지나고 나면 잘 생각이 나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아, 그 영화 진짜 후덜덜해. 그 소설 인크레더블하게 멋져. 라고 말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의 '기억'을 말하는 것일 뿐 작품에 대해 말하는 건 아닌거죠. 때문에 그들은 명예의 전당에 자리할 뿐 마음의 전당에는 착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지나고 보면 기억이 나는 것들은 의외로 허술하거나 조악하거나 때론 우스꽝스러운 것들일 경우가 많더군요. 그릇에 실금이 생긴 것과 비슷하겠네요. 얇고 별 것 아닌 실금 사이. 음식이 담겼다 사라지면 실금 사이로 핏물이 들죠. 그리고 그 음식의 색은 빠지지 않아요, 그릇을 아무리 깨끗이 씻어도 말이죠. 완벽하게 조응된 그릇 세트 중에서, 제 눈을 가장 사로잡는 건 바로 그 그릇이라는 점이 이상하고도 당연하죠. 

 

제 그릇 세트 중 실금이 간, 색을 머금은 그릇들은 제법 있지만 아마도 그들을 거기에 두는 것은 서정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저는, 정서가 강한 책에 무척 약하더군요. 뇌과학, 천문학, 숲과 나무, 고래와 와인, 그림과 소설. 그 어떤 이야기이든 그 속에 강렬한 정서가 있는 책에 마음이 흔들려요. 그 서정은 환희나 절망, 체념과 환멸, 회환과 두려움, 등등 갖가지 것들이지만 어쨌든 그들이 비브라토를 만들어내니까요.

 

 

『파과』에서 느껴지는 강직한 애환, 들끓는 체념, 차가운 비애 같은 것이 저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범인犯人조차 범인凡人으로 느끼게 하는 보편적인 쓸쓸함과 상처 같은 것 말이죠. 육체의 퇴화와 정신의 퇴색, 무뎌지는 감각과 느려지는 반응속도에 대한 본능적 공포,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 이대로 죽을 수는 있어도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라는 식의 자조. 그러나 그 모든 추를 누르는 삶에 대한 애착. 이 모든 뜨거운 파토스를 설명하는 것이 차갑고 서늘한 칼과 같은 문장이라뇨.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쩌면 돌아오지 않는 것보단 이편이 더 알기 쉬울지도 모르겠는데, 어느 날 아침 네가 눈을 떴을 때 내가 누워서 움직이지 않고 있다면, 네가 발로 치고 짖어대도 내가 영영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때도 너는 저리로 나가야 해. 누군가 도와줄 사람을 구해 오라는 게 아니야. 그떄 나는 이미 살아 있지 않을 테니까. 그래도 너는 살아야 해. 만일 저 문이 열려 있지 않다면 너는 배고픔에 지쳐가다 결국 내 시체를 뜯어 먹기 시작할 거다. 그래도 나는 별로 상관없다. 그걸로 너한테 잠깐이나마 도움이 된다면. 하지만 언젠가는 시취가 밖으로 새어 나갈 테고, 배수관을 타고 벌레들이 기어 내려가 사람들이 뒤늦게 문을 따겠지. 그들이 너를 보면 안락사를 시킬 거란다.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주인의 시체를 먹은 개는 온전한 정신으로 여생을 살 수 없을 거라는 판단도 그렇고, 변질된 고기를 먹었으니 사람들에게 세균이나 질병을 옮길 수 있다는 염려...... 하지만 무엇보다...... 아무도 거기까지는 말 안 할테지만...... 네가 너무 늙어서 누구도 너를 맡으려 하지 않을 게 뻔해서 그렇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이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달콤하고 상쾌하며 부드러운 시절을 잊은 그 갈색 덩어리를 버리기 위해 그녀는 음식물쓰레기 봉지를 펼친다. 최고의 시절에 누군가의 입속을 가득 채웠어야 할, 그러지 못한, 지금은 시큼한 시취를 풍기는 덩어리에 손을 뻗는다. 집어 올리자마자 그것은 그녀의 손안에서 그대로 부서져 흘러내린다. 채소 칸 벽에 붙어 있던 걸 떼어내느라 살짝 악력을 높였더니 그렇다.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부서진 조각들을 하나하나 건져 봉지에 담고, 그러고도 벽에 단단히 들러붙은 살점들을 떼어내기 위해 손톱으로 긁는다. 그것들은 냉장고 안에 핀 성에꽃에 미련이라도 남은 듯 붙어서 잘 떨어지지 않는다. 그녀는 문득 콧속을 파고드는 시지근한 냄새를 맡으며 눈물을 흘린다. 얼마쯤 지나 그녀 어깨가 흔들리고 신음이 새어 나오자 무용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짖기 시작한다.

 

곰곰이 돌이켜보니 작가의 글에는 늘 이상한 서늘함이 있었습니다. 현실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이나 풍자나 더 높이 있는 자가 느끼는 냉소나 환멸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구태여 설명하자면 애초에 그런 판에서 태어난 자란 어른아이로 자란 아이가 가진 본능적인 거부감, 더 멀리 다녀온 자가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온 자가 보여주는 냉랭한 무감함 같은 것.

 

'파과'라는 제목에서 처음 떠오른 것은 파과破果가 아니라 과瓜를 파자破字한 파과破瓜였습니다. 8과 8을 더한 여자 나이 16세, 8과 8을 곱한 남자 나이 64세. 64세는 벼슬에서 물러날 때를 가르키는 말. 생각해보면 어느 쪽이든 곧 조각의 인생 같군요. 열 여섯에 입문한 조각은 예순 넷 즈음이 되어 그 곳에서 내려오죠. 과일이 물러지는 시기, 비로소 손톱이 더해지는 시기. 처음과 끝을 잇는, 스스로 문을 열고 닫는, 좋은 제목이라는 감상을 첨하며 리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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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3-08-24 1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장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자신이 연 문은 자신이 닫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군더더기 없고 적당히 감상적인 마무리. 그리고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라는 문장. 그 문장이 나타난 곳이 투우가 눈을 감고 난 후라는 것, 알약 다음에 쉼표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라는 배열. 의례적인 단문을 대할 때도 작가가 문장을 대하는 태도가 신중하다는 것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좋구요. 무엇보다, 슬프네요.

dreamout 2013-08-25 0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병모에게 처음으로 관심이 생기네요.

Shining 2013-08-28 00:06   좋아요 0 | URL
전 이 작가가 쓰는 문장이나 어감, 복잡한 냉소가 왜 이리 좋은지 모르겠어요(웃음).

2013-09-07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서점에서 이 책 샀어요~. 다 읽고 이거 읽으려구요. 별 5개 주셨으니 실망은 없을 것 같습니다~.^^

Shining 2013-09-09 10:44   좋아요 0 | URL
히히. 저의 의견일 뿐인걸요 :^ <방주로 오세요> 읽고 꽤 실망했는데 이 작품은 <아가미>만큼 좋아요. 날씨가 좋아요 섬님. 어디론가 툭 산책을 가야할, 가을 날이군요 :)

아이리시스 2013-09-11 15: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신간평가단에서 받은 책 읽고 Shining님 리뷰도 읽었을 때 이게 왜 좋지, 저는 그 작위성이 주는 날카로움에 베일 것 같았거든요. 그래서 이 작가 별로야, 했는데 이 책도 작가도 Shining님이 좋아하니까 다시 관심? 읽을까? 말까? 뭐가 있나? 이런 생각이 전에 맥거핀님 리뷰 먼저 읽을 때는 안 들었었어요. ^^

Shining 2013-09-11 23:44   좋아요 0 | URL
그렇군요, 우린 은근히 좋아하는게 달라요, 그쵸? :) 저는 그래서 더 좋지만요. 전 이 작가가 구사하는, 혹은 앞으로도 하려고 노력하는 문장이 좋더라구요. 냉소나 자조 같은 정서도 끌리고. 다만 <방주로 오세요>가 워낙 별로였어서, 아직 베스트 작가군에는 좀.. 맥거핀님의 글은 차분하고 이지적인데 저는 무작정 막 좋아좋아좋아요, 하기 때문... 아닐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