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랫 패러의 비밀
조세핀 테이 지음, 권영주 옮김 / 검은숲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리뷰는 전적으로 M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비 내리는 토요일 한적한 동네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예전에 M의 회사에서 있었던 사건(정말 사건이다)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작년이었나, M이 다니는 회사가 도둑을 맞았는데 보안 카메라에 확인한 바로는 얼마전에 퇴사한 직원이었단다. 책상과 서랍이 온통 엉망이었고 모 팀장님은 책까지 난도질 되어있어서 다들 겁을 먹었는데 다같이 보안카메라를 확인하면서 알았단다. 그 사람, 이란 걸. 그 사람, 이라는 것을 모두가 알아차렸다는 걸. 누구도 함부로 말을 꺼내진 않았지만 암묵적 동의의 공기가 흘렀다고. 어떻게 알았냐고 서로 묻거든 어떤 대답을 할지도 알았다고. 걸음걸이 때문이다. 어쨌거나 같이 일했던 사이니까(길진 않았다고 들었다) 체격이나 분위기로 감지했을수도 있지만,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는 순간 확신했다고. 발을 끈다거나 한쪽에 균형이 치우친, 뭐 그런 특이하거나 특별한 걸음걸이도 아니고 별 특징 없는 평범한 걸음걸이였는데도. 눈치를 챘단다. 

 

(자, 우리는 이 에피소드로 많은 이야기, 예컨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르는' 같은 이야기들을 더 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뒷모습'에만 집중하도록 하자) 그래, 뒷모습이나 걸음걸이, 손동작이나 점의 위치 같은 게 더 큰 호소력을 가지지. 응, 지나고보면 전체적인 얼굴이나 몸보다는 말도 안 되게 사소한 것들이 기억나잖아. 라더니 M은 나, 그런 적이 있어, 라며 화제를 틀었다. 예전에 날씨가 엄청 좋은 날 C와 함께 길을 걷다가 C가 사진 찍게 거기 서봐, 라면서 카메라를 들이대더라구. 누가 보고 있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약간 긴장해서 걸었나봐. C가 막 웃으면서 너 왜 Y처럼 걷냐고 물었어. 그래서 나, 그러네, Y처럼 걸었구나 생각이 들었지. 내가 어떻게 걷는데? 저도 모르게 물었다(눈치 챘겠지만 Y는 나다). 나쁜 말은 아냐. 뭐라고 해야 하나. 선이 그어진 길을 걷는 것처럼 너, 일자로 걷거든. 난 약간 걸음이 팔자라서 걸음걸이에 은근 신경을 쓰거든. 너, 일자로 성큼성큼 걸으면서 이렇게 약간 팔을 흔들면서....그거 좋은 말 맞냐? 좋은 느낌인데 말로 하니까 이상하네. 대충 그런 이야기였다.

 

그 때  며칠 전부터 머릿속 한 구석에 제쳐둔 리뷰에 대해 쓸 말이 생각이 났다(고맙네, 친구여). 그 책에 이런 글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생김새가 다가 아니라네. 아우라라고 할지, 개성, 본질이 있지. 자네를 처음 만났을 때 이전에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이란 확신이 들더군. 패트릭이다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어. 외모 말고도 닮은 점이 많아도 말이지.”   

 

서론이 길었다.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때문이다. 이런 내용의 소설이다. 애시비 가문에 새로운 상속자가 탄생하기 불과 얼마 전 8년 전 죽은 -정확히는 자살로 추정한 실종- 상속자(사이먼)의 쌍둥이 형인 패트릭이 나타난다. 그는 이미 8년 전에 사라진데다 그 때는 소년이었고 이제는 막 성인이 되려던 찰나다. 사진도 없고 부모는 패트릭과 사이먼보다 먼저 돌아가셨으니 그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가족 몇 명과 가까운 이웃들. 

 

보통의 '진짜와 가짜' 소설들은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는 데 시간을 쏟는다. 그는 진짜인가, 가짜인가. 진짜인 척 하는 가짜인가, 가짜가 되버리는 진짜인가 등등. 조세핀 테이의 『브랫 패러의 비밀』은 뻔한 반전에 집착하지 않는다. 브랫이 패트릭이 아니라는 건 비밀조차 아니다. 보통의 작가라면 "그는 정말 패트릭인가 아닌가. 그가 패트릭이 아니라면 그가 나타난 이유는 역시 돈 때문일까. 어떻게 그는 이렇게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가." 라는 구성을 꾀하겠지만 조세핀 테이는 "브랫은 패트릭이 아니다. 그렇다면 가족들은 무엇으로 그를 시험하고 무엇으로 의심할 것인가. 패트릭이 된 브랫의 삶은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가."에 대해 쓴다. 즉 무게 중심은 그가 가짜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쪽이 아닌 무엇이 그를 진짜로 만드는지, 그는 어떻게 진짜가 되는지, 더 나아가 우리는 왜 그가 진짜이길 바라는지에 쏠려있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집의 구조나 유년 시절의 추억으로 은근하게 브랫을 시험하는데 이 허들을 통과해가는 브랫의 몸짓에 독자는 온통 긴장을 하게 된다(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서스펜스와 스릴이 꽤 재밌다).

 

브랫 패러가 패트릭이 아니란걸 알지만 글을 읽다보면 이상하게 브랫의 편에 서서 응원하게 된다. 그건 아마 브랫 패러라는 인물이 갖고 있는 매력 때문일 것이다. 그는 외모나 이미지도 그러하지만 특히 덤덤하지만 신랄한 말투, 신중하면서도 세심한 성격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물이다. 더군다나 그는 애초 일확천금을 노리고 혹은 나쁜 마음으로 애시비 가에 들어온 것이 아니다(물론 누군가를 사칭한다는 것은 분명 범죄행위임이 분명하나). 말에 대한 애정과 사이먼의 이기적이고 유아적인 그러나 악한 면모들로 인해 브랫의 호감도는 상승한다. 그 중 소설을 가를만한 핵심 문장도 아닌데 묘하게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테이블 반대편에서 브랫도 사이먼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연민은 느끼지 않았다. 연민은 브랫이 자주 탐닉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자기 연민을 경멸하는 사람들이 으레 그러하듯 그도 쉽게 남들을 가엾게 여기지 않았다. 브랫은 연민을 자주 느끼지 않았다, 도 아니고 브랫은 사람들에게 연민을 품어본 적이 거의 없다, 도 아니고 연민은 브랫이 자주 탐닉하는 감정이 아니었다 라니. 즉 어떤 상황에서든 스스로를 혹은 누군가를 함부로 가여이 여기지 않는다는 것. 헛된 동정이나 자기연민은 위선이나 이기심보다 훨씬 나쁜 감정이라 여기는 바, 나로선 브랫의 강인함과 배려심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이 문장은 브랫의 성격도 나타내지만 작가의 문장력도 드러낸다. 좀 더 예전엔, 복잡하게 어렵게 말하는 방식이나 아포리즘식 글쓰기에 끌린 적이 있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이해한다고 믿을 때 발상해나는 맹종의 황홀경 같은 식. 지금은 점점 더 단순한 구조와 명확한 뜻을 가진 문장에 끌린다. 누구든 알 만한 단어로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게 그러나 누구도 쉽게 쓰지 못하는 방식으로. 예를 들면 이런 식. 은근한 유머까지. 마음에 쏙 드는 문장들이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이런 붙임성 있고 솔직한 태도에 속아 넘어갔겠지만, 비어트리스 애시비만은 아니었다. 그녀는 공 두 개를 동시에 던져 정작 중요한 세 개째를 감추는 조카의 평소 버릇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식사 예절 때문에 긴장할 필요도 없었다. 앨릭 로딩이 그 때문에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대단히 엄격한 일급 유모를 제외하면 일급 고아원만큼 예의 바르게 음식을 먹도록 교육시키는 데가 없다. “맙소사. 언제 술 사고 잔돈이 생길 일이 있으면 자네가 자란 그 여인숙으로 보내야겠어. 자네가 웬 고상한 척하는 교외에서 자라지 않은 걸 감사하는 뜻에서. 고상한 척하는 버릇이란 게, 이게 영 없어지지 않거든. 다른 건 몰라도 팻 애시비가 잔을 들 때 새끼손가락을 드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야.”

   

이제 서론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긴 서론이 살아남은데는 물론 이유가 있다.『리플리』류의 콘텐츠를 접할 때마다(물론 리플리는 시대나 상황을 고려했을 때 가능할 수 있었겠지만 그와 같은 인물을 모두 '리플리류'라고 명명할 때) 약간 의아했다. 우리가 다른 누군가를 '안다'고 느낄때는 A와 B 중 어떤 것을 고를 지 맞출 수 있는 것처럼 취향과 기호와 성격이 담긴, 매우 소소하고 미묘한 것인데. 어떤 만화에선가 그런 에피소드가 있었지. 아마도 미래의 어딘가. 몸을 바꿔 짝사랑하던 사람 앞에 나타났지만 상대방은 처음부터 그를 알아보고 있었다. 생각에 잠길 때 탁자를 두드리는 버릇, 더 정확히는 그 오묘한 리듬의 기시감 덕택에. 이렇게 누군가로 분한다는 것은 보이는 부분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부분을 연기하는 것이다. 얼굴이나 몸이 아니라 성격에 접근하는 것, 스스로가 타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면이 아니라 숨기고자 하는 모습을 짐작하는 것, 다리를 떨거나 늘 시계를 오른쪽에 차거나 젓가락질을 독특하게 하는 것처럼 아주 사소한 것을 모방하는 것.

 

진짜와 가짜를 다루는 대부분의 소설들은 '진짜 혹은 가짜'에만 집착해 사소하지만 중요한 것들을 간과한다. 다른 누군가를 완벽하게 복제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누구나 저마다의 본질과 개성을 갖고 있고 그 본질과 개성은 시간과 기억과 경험이 축적된 결과인데. 때문에 소설 속 가짜(라고 불리는 이)가 다른 인물들을 천연덕스럽게 속여 넘기는 이야기들은 영 시시하다. 너무 깜빡 속아넘어가는 거, 쉽게 믿는 거, 캐릭터와 독자를 모두 합쳐 바보 취급하다니. 『브랫 패러의 비밀』속 가장 생생한 목소리는 작가의 것이다. 맙소사. 또 속아? 애초에 누군가가 완벽하게 다른 사람이 된다는 건 불가능해. 나라면 처음부터 패를 내놓겠어. 진짜와 가짜 여부는 맥거핀이 되겠지. 진짜냐 가짜냐 화살표를 가르키며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당신이 내 소설을 내 캐릭터를 사랑하게 만들어주지. 공상이 취미인 탓에 이런 식의 작가의 말이 들리는 것 같다.

 

사라진 시체, 밀실 살인, 철벽의 알리바이, 12명의 공범 등이 없어도 조세핀 테이의 소설은 충분히 특별하다. 인간에 대한 통찰력, 뛰어난 캐릭터 조형, 든든한 문장력. 오직 그녀만이 쓸 수 있는 그녀만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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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4-17 0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4-18 11: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크아이즈 2013-04-17 08: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샤이닝님 이 리뷰가 좋은 건 당연한 거고.
저는 님 리뷰에서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글 잘 쓰려면 제대로 된 책과 잘 쓰는 리뷰를 읽어라.
빛나는 문장들로 가득한 이 책과,
그걸 갈무리해내는 님의 잘 쓴 리뷰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지 뭡니까.

마음에 드는 문장들을 작가들은 어떻게 제 안에서 자유자제로 발현시키는 걸까요?
님도 마찬가지. 흐흐~~

Shining 2013-04-18 11:17   좋아요 0 | URL
팜님, 저 지금 막막 어지러운데요ㅇ_ㅇ 팜님이 비행기를 과하게 태워주신 것 같아요ㅎㅎ
저야 조세핀 테이의 글에 숟가락, 젓가락, 물잔까지 몽땅 올린 것 뿐인걸요 :^

2013-04-18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3-04-26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hining님, 바빠요? (암요, 바쁜게 좋죠!)
조세핀 테이, <프랜차이즈 저택 사건>이 심심해서 이 작가 별로 재미없네, 했었는데,
<진리는 시간의 딸>보니까 역사와 뒤섞인 게 괜찮다고 생각했고,
<브랫 패러의 비밀> 좋다고들 하니까,
이것도 기억해뒀다가 읽어야겠어요.

되게 드라마네요, 저 첫문단 사연 말이에요.
웬만한 빌딩 사무실에는 cctv가 있잖아요, 그런데 으흥, 간도 크다..
걸음걸이만 보면 누구나 안다니!

질문1. 혈액형이 뭐예요?
질문2. 하이스미스, <리플리> 읽어봤어요?
질문3. 생각 안납니다..

Shining 2013-04-27 16:20   좋아요 0 | URL
프랜차이즈 저택사건은 사실 기발한 발상에 비해 완벽히 재밌거나 잘 쓴 책이란 생각은 안했는데 이 책은 재밌고 좋고 흥미로웠어요! 하하, 사심 가득이긴 하지만요ㅎㅎ

좀 무섭죠 많이. 세상살이란게 정말 예측할 수 있는 게 없어요. 하물며 내가 누군가를 잘 안다는 그 익숙한 착각이란..

1. 저요? A형이요(그래서 소심한가보다!라는 말 안 하시기!!ㅋㅋ)
2. 네, 좀 전에. 근데 기억하는 건 사실 소설보다 두 편의 영화죠. 태양은 가득히와 리플리. 리플리를 먼저 봤지만요.
3. 뭡니꽈? 어서 3번 질문을 주세요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