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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 ㅣ 특서 청소년문학 19
지혜진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4월
평점 :
_ 툭.
조심한다고 했는데 내 어깨에 무언가 부딪혔고, 할아버지는 그 작은 힘도 버티지 못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지게 위에 멍석으로 둘둘 말은 시신 한 구가 얹혀 있었다._p16
시신이 드나드는 문, ‘시구문’.
한 소녀가 이 문 주위를 서성이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무당딸년 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험한 운명을 겪어내고 있는 원망 많은 아이다.
_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무엇이 더 좋은 건지, 많은 것이 애매했고 복잡했다._
10대의 시선에서 보는 시대물은 처음이다. 보통 역사물 속에서 아이들은 금방 성장해서 어른이 되어 서사를 이어간다. 이 책은 조선 인조때,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의 황폐한 시대를 살고있는, 10대 두 소녀가 주인공이다. 기련은 아버지를 일찍 잃고 무당의 딸이라는 것을 무척 부끄럽게 여기고 있다. 기련이 이름까지 살뜰하게 챙겨주던 아씨, 소애는 역적으로 몰려 하루아침에 집안이 몰락하게 되어 원수의 집에 노비로 가게 된 인물이다.
_아씨가 주저앉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내 손에 얼굴을 묻었다. 기억은 어떤 물건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물건이나 징표가 없어도 죽은 사람의 모든 것은 산 사람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다. 하지만 사람의 기억이라는 것도 계절 따라 조금씩 변해갔다.
분명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아버지인데, 그림을 그리면 조금씩 달라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떤 것은 애매하게 남아, 다시 볼 수 없는 사람을 더욱 그리워하게 만들었다._p71
시구문에서 얼굴도 모르는, 효수된 소애 아씨의 아버지를 찾는 공포스런 장면은 '시구문' 이란 장소 분위기를 가감 없이 느낄 수 있게 하여 준다. 누구 것이지 모를 수염을 용기 내어 끊어 와서 소애에게 아버지 유품이라고 전해주려고 하는 주인공의 마음씀이 존경스럽다.
하지만 결국 차마 가져온 수염을 전하지 못하고, 깃털로 대신 전하는 그 마음, 역시나 아름답다.
녹록치 않은 시간 속에서도 백주와의 티격거림, 백희와의 즐거운 시간들도 있다. 우연히 백희와 가게 된 대감집 초상에서 의도치 않은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위기에 빠진다. 결국 한 사람의 죽음으로 기련과 소애는 백희를 데리고 도망치기로 한다. 마지못해 살고 있었던 삶을 벗어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결단으로 이들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는 와중에, 기련은 무당 어머니의 깊은 뜻과 사랑을 알게 되어 한 걸음 성장하여 나아간다.
어른들도 힘든 시절에, 10대로 견뎌야 하는 소녀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였다.
죽음으로서 새로 시작한다는 의미로 해석이 될 수 있는 ‘시구문’을 통해, 그녀들은 자유로워지기를 원한다.
_죽음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이었다. 문 안쪽에 살았던 나는 이 문을 나감으로써 죽지만, 새로운 나의 삶이 문밖에서 다시 시작될 수 있음을 믿어버릴 작정이었다._p173
한 걸음 나아가는 법에 대한 두 소녀의 성장 이야기, <죽은 자를 내어가는 문, 시구문>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