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 평전
송우혜 지음 / 서정시학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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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낮게 깔린 회색 구름 밑으로 밝아오는 푸른 새벽, 윤동주 평전을 읽습니다. 딸아이와 아내는 아직 거실에서 잠들어 있는 시간, 천둥번개 속에 무섭게 쏟아지던 비도 그친 새벽, 창문 열고 비릿 상큼한 봄비 내음을 깊게 들이 마시고 들어와 그의 마지막 시 앞에 앉았습니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 쓴 마지막 2편의 시를 읽습니다.

 


《쉽게 씌여진 시》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봄》

 


봄이 혈관 속에 시내처럼 흘러
돌, 돌, 시내 차가운 언덕에
개나리, 진달래, 노오란 배추꽃

 


삼동을 참아 온 나는
풀포기처럼 피어난다.

 


즐거운 종달새야
어느 이랑에서나 즐거웁게 솟쳐라.

 


푸르른 하늘은
아른아른 높기도 한데.....

 

4시간 동안 계속된 독서로 눈이 침침하고 흐려집니다. 책을 놓고 눈을 감습니다. 책은 격랑의 역사 속 윤동주와 송몽규를 이야기하지만, 내 감긴 눈앞엔 찬란한 봄을 노래하고 사랑의 향기에 피가 끊어야 마땅했을 한 청춘이 어두운 남의 나라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그 아름다움을 송두리 짓밟힌 채, 차가운 감옥에서 원한에 스러지는 모습만이 어른거립니다. 너무 감상적으로 민족 시인을 대한다고 나무라지는 마시길... 청춘에서 한참 멀어진 나이에 접어든 나에게 아름다워야 할 윤동주와 송몽규의 청춘은 그렇게 아프게 다가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잠깐 그의 마음에 들어왔던 어느 처녀로 인해 그의 마지막 시《봄》에는 그나마 흐ㅡ릿한 연둣빛이 배어있습니다. 오히려 그 엷디엷은 연두가 가슴에 사무칩니다. 아~ 윤동주! 이 땅에서 태어나지 않은 당신을, 그때 태어나지 않은 당신의 청춘을 상상합니다.

 

2.

일요 예배를 마치고 돌아와 책의 나머지 부분을 읽어내려 갔습니다. 제9장과 10장은 가슴이 메이고 눈물이 흘러내려 몇 번을 쉬었다 읽고, 책 표지 사진을 쓰다듬다 읽기를 반복했습니다.


감옥에 수감된 후, 한 달에 한 번씩 허락된 엽서로 주고받던 편지 속에서 동생 윤일주가 쓴 "붓 끝을 따라온 귀뚜라미 소리에도 벌써 가을을 느낍니다."라는 고향소식에 "너의 귀뚜라미는 홀로 있는 내 감방에서도 울어준다. 고마운 일이다."라고 답장하는 대목에서 평전의 필자처럼 목이 메어 읽어 내리질 못 했습니다.


평전의 저자인 '송우혜'는 말합니다. "아아! 고마운 일이라니! 읽어 내리기에 그저 목이 메인다. 그 간악한 일제 감옥의 인간 이하의 취급도 그의 관유하고 고결한 인품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못했음을 이 구절은 통렬히 증언한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려고 한 그 정신은, 그가 처한 처참한 상황을 그토록  맑고 지순한 모습으로 견디어내고 있었다..."


하지만 윤동주는 일제의 특고 경찰에 체포되어 19개월 2일이 지난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36분에 복강의 차가운 감옥에서 생체 실험으로 추정되는 약물을 지속적으로 주사 받다가 절명합니다. 그의 운명을 지켜보았던 젊은 일본 간수는 "윤동주가 외마디 소리를 높게 지르며 운명했다"라는 말을 전했다고 합니다.


평전의 저자는 이렇게 가슴을 칩니다. "운명의 순간 윤동주가 지른 외마디 높은 비명..., 그 소리에 담긴 것은 무엇일까! 그의 생애 전부, 그의 마음 전부, 그의 기쁨과 슬픔 전부, 그가 원한 것, 그가 괴로워한 것, 그가 사랑한 것, 그의 그리움과 애통함, 그의 모든 것, 모든 것..... 그것이 모두 하나로 합쳐져서 외마디 비명이 되어 세상을 향해 외쳐진 것이다. 그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지 않으면 운명조차 할 수 없도록 임종의 자리에 누운 그의 마음에 아프게 쌓여 있던 것!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에 소름이 돋는다. 그는 그렇게 비통하게 갔다."


고종사촌이자 영혼의 친구로 일생을 함께 한 송몽규의 죽음은 또 어떤가. 1945년 3월 7일 윤동주의 장례식이 용정에서 치러진 다음날 송몽규도 복강 형무소에서 통한에 겨워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절명합니다. 독립운동가, 민족시인, 촉망받던 문사(文士)이기 이전에 그들은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으로 키워 낸 어느 부모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주검 앞에선 부모, 특히 두 어머니의 모습을 설명하는 부분에서는 비명처럼 울음이 터져 나옵니다.

3.​

그의 시 <참회록>을 다시 읽습니다. 예언시처럼 아프게 읽힙니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얼골이 남어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가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주리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순 깃븜을 바라 살아 왔든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든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어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거러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속에 나타나온다.

 

 

욕되다니요, 참회라니요, 부끄럽다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욕됨과 참회와 부끄러움은 남겨진 자들의 욕됨과 참회이고 우리의 부끄러움이어야 합니다. 민족의 혼을 살리고, 풍습을 보전하고, 언어를 지키고 삶의 터전을 지키려던 그 맑은 영혼의 청춘에게 참회라니요. 밤이면 밤마다 마음의 거울을 온몸으로 닦고 또 닦자던 그 순수하고 고결한 영혼에게 욕됨이라니요, 부끄럼이라니요.


지금까지 내가 읽은 모든 책 중에서 이 평전처럼 가슴을 메이게 한 책은 몇 안됩니다. 아니, 기억에 없습니다. 이 절절함은 오래갈 듯합니다. 이 평전의 저자 송우혜는 송몽규의 친족이라고 하니 남다른 감회를 안고 평전을 썼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평전과 관련된 에피소드 하나가 서문에 나옵니다. 윤동주의 어릴 적 친구이자 인척이기도 문익환 목사와 관련된 에피소드입니다.


그녀가 취재 차 자주 문익환 목사를 찾았는데, 문 목사는 그때마다 자신이 윤동주 시인의 평전을 직접 쓰겠다고 거듭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하지만 저자의 평전이 출판되자 곧 읽어 보고는 자신의 평전 집필 계획을 철회하셨다는군요. "윤동주 평전은 송우혜가 쓴 것으로 충분하다. 정말 잘 썼다. 나는 안 쓰겠다."라고 말씀하셨답니다. 그만큼 철저한 고증과 균형감을 가진 평전이기에 문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 책 두 권을 가지고 갔다고 합니다. 문 목사가 처음 북한 땅에 발을 딛고 한 일은 윤동주의 '서시'를 낭독하는 것이었는데, 이 낭송을 들은 북한 주민들이 윤동주 시인을 궁금해할 때 그를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가져가신 것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이 평전은 탁월합니다. 저에게도 최고 평전이 됐습니다. 일독을 권합니다.


오늘이 용정에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이 있던 71년 전 그날입니다. 내일은 송몽규 문사의 기일이고요. 

 


http://blog.naver.com/cjdtks9848/220647253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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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크릭 - 유전 부호의 발견자
매트 리들리 지음, 김명남 옮김 / 을유문화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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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른이 되었을 때 세상의 모든 비밀이 모두 밝혀져 자신이 해결할 문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면 어떻하나 걱정했다는 아이, 수학적 구조를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진 사람, 물리학을 전공했고 2차 대전 중에는 어뢰를 연구하여 이름을 날린 사람, 전쟁 후 30 세가 넘어 물리학의 따분한 실험에 싫증을 느껴 생물학으로 전향한 사람, 그리고 7년 후에 박사 학위도 없이 거의 독학으로 DNA의 구조를 밝혀내 노벨상을 받은 사람, 노벨상을 학문의 완성으로 보지 않고 시작으로 삼았던 과학자, 생명과학 책의 7개 단원 중에서 두 단원의 내용을 완전하게 알아내는 데 중심에 있었던 사람, 생명의 시작(DNA 암호와 유전 부호)을 밝혀 냈고 생명의 끝(의식의 구조)을 연구한 사람, 동료 학자들과 대화를 통해 자신을 자극하고 학문을 탐구한 소크라테스와 같은 유형의 과학자, 학문적 명성보다는 철저한 과학자의 길을 고집한 실무형 과학자, 죽기 전날까지 메모하고 논문을 수정한 성실한 사람, 다윈 이래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 놓은 사람.

 


그가 바로 프랜시스 크릭이다. 많은 사람들은 DNA의 구조를 밝혀낸 과학자를 이야기하면 우선 제임스 왓슨을 떠올린다. 프랜시스 크릭은 제임스 왓슨이라는 이름에 살짝 가려져 있다. 약 900 단어로 이루어진 두 쪽 짜리의 그 유명한 논문에 누구 이름을 먼저 쓸 건지 동전 던지기로 결정한 영향 때문이다. 그리고 왓슨이 쓴 '이중나선'이라는 대중과학서도 왓슨의 명성이 크릭 보다 널리 알려지는 데 한 몫을 했다. DNA구조를 밝히는 과정을 다룬 '이중나선'은 일반인들에게 DNA하면 왓슨이라는 이름이 기억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과학자로서는 왓슨보다 크릭이 훨씬 더 흥미로운 인물이다.


과학적인 재능을 측정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복잡한 사실들에서 일정한 패턴을 인식하고 구조화 시키는 능력과 핵심 문제에 대해 통찰력 있는 해석의 틀을 구축하는 능력에 있다. 수학적인 관찰의 자료를 읽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능력, 수 많은 논문을 읽고 그 논문들에서 새로운 이론적 틀을 만들어내는 통합 능력, 대화를 통해 생물학자들을 자극하고 그들의 연구를 조율하며 소통 시키는 통섭 능력, 현상에 대한 해석의 틀을 마련하는 상상력과 직관력, 프랜시스 크릭은 이 부분에서 탁월했다.


자신들의 위대한 발견이 행운과 우연만 있으면 누구나 이룰 수 있다는 인상을 줄 가능성 때문에 크릭은 왓슨이 쓴 '이중나선'의 출판을 반대했다. 크릭은 DNA 구조 발견이 우연과 행운의 결과가 아니라 엄격한 과학적 탐구 과정을 통해 이룬 성과임을 알리고 싶었다. 하지만 왓슨은 과학자도 사람임을 보여주고 싶었다. 왓슨의 의도는 과학이 과학자들만의 리그여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크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책을 출판했다. '이중나선'은 왓슨이 의도했던 목적을 충분히 성취해 냈다. 그 책은 과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을 이끌어 냈으며 과학 탐구에 필요한 돈을 주머니에서 끌어 냈다. 하지만 크릭은 철저한 과학자의 입장에 있었다. 노벨상 수상 이후 두 사람의 행보는 이렇게 판이하게 다른 두 사람의 차이를 뚜렷하게 보여 준다. 왓슨은 과학 행정가로 진출했고 크릭은 영원한 실무 과학자로 남았다.


이 책은 영원한 현역이었던 크릭의 탐구 정신에 초점을 맞춘다. 크릭은 노벨상을 수상한 이후 DNA의 암호가 해독 되어 단백질 합성으로 이어지는지 전과정을 완전하게 밝혀냈다. 유전부호의 해독은 DNA 이중나선의 발견과 비견되는 중대한 발견이다. 크릭은 실험 과학자들을 자극하고 독려하며 이 위대한 일을 중심에서 이끌고 나갔다. 실험에는 재능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실험 결과를 해석하는 직관력과 연구방향의 설정은 크릭의 몫이었다. 그는 엄청난 양의 논문을 경이적인 능력으로 소화해 냈고, 그것으로부터 위대한 원리를 걸러냈다. 메트 리들리는 그가 어떻게 그 일을 해냈는지 모르지만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에서 분자생물학의 완전한 정의와 원리를 끌어냈다고 말한다. 이 원리의 선언은 모두 옳고 완전한 추측이었다. 이러한 통찰은 그의 직관 능력에서 나왔지만 이 직관의 실체는 설명하기 어렵다. 자크 모노의 말처럼 크릭은 분자생물학 전 분야를 장악한 사람이고 가장 많이 알고, 가장 많이 이해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DNA의 위대한 단순성을 직감으로 이해한 첫 번째 사람이고 그것을 눈에 보이는 영상으로 만들어 우리 앞에 보여준 사람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암호가 해독되는 전 과정을 밝혀 낸 사람이다. 그는 세상을 보는 우리의 눈을 바꿔 놓았다. 다윈은 세상을 멀리 볼 수 있는 망원경을 주었고 크릭은 정밀하게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우리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굉장히 사교적이고 수다스러운 사람이었다고 한다. 과학자로서는 독특한 캐릭터였던 모양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보통의 과학자 이미지는 자기 세계에 들어 앉아 있는 과묵함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그는 상대가 견디기 어려워 할 만큼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의 많은 수다를 견뎌낸 사람은 몇 명밖에 없다. 크릭의 대화 상대는 모두 훌륭한 업적을 이룬 과학자가 되었다. 그 첫 번째 파트너는 왓슨이었다. 아마도 그는 토론을 통해 자신의 논리가 정리되는 사람이었고, 말을 하는 과정에서 위대한 영감을 얻었던 사람인 것 같다. 우리들도 말을 하다 보면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생겨나고 혼란스럽던 생각이 정리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크릭은 아마도 이런 능력을 충분히 이용한 과학자가 아니었을까?

 


우리는 수다스러움을 좋게 생각하지 않는 문화에서 살고 있다. 특히 남자들의 수다스러움은 치명적인 약점으로까지 생각한다. 하지만 수다는 관계 지향적인 행위로 치환 될 수 있다. 과학자의 수다는 끝없이 나의 생각을 표현하고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무형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낸다. 이 공간에는 말의 공허한 파동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 공간 안에서는 무수한 말들이 서로 부딪쳐 영감이라는 빛이 만들어지고, 그 빛으로 통찰과 직관이 싹을 틔운다. 우리가 과학 분야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하는 원인 중에 하나에는 수다스러움을 경멸하는 문화적 특성도 한 몫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한국의 과학자들이여, 우리의 과학 발전을 위해 조금 더 수다스러워지길!! 우리는 당신들의 요란한 수다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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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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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파장의 빛을 거부한 순결한 하얀 꽃, 5월의 흰꽃은 신록을 배경으로 피어나기 때문에 그 순결함이 더욱 도드라진다. 초록의 대지 위를 토끼풀꽃 화관에 순백의 드래스를 입은 처녀가 흰 꽃다발을 들고 초원을 건너 오는 계절이 5월이다. 그렇게 테스는 순결한 흰색 옷으로 갈아 입은 여자들과 춤추며 5월의 초원에 나타난다. 부녀자들이 초원에 모여 춤을 추는 전통의 행렬이 있던 5월 하순 어느 날 소설은 시작된다.

​5월의 행렬에 참가한 테스는 탄력 있고 균형 잡힌 성숙한 몸매였지만 뺨에는 열두 살의 모습이, 반짝이는 눈에는 아홉 살의 모습이, 뺨과 턱의 곡선 따라 다섯 살의 젖살이 아직 남아 있는 그림같이 아름다운 시골 처녀... 그녀는 어린 아이의 티를 갓 벗어난 순백의 처녀로 블랙모어 골짜기에 살고 있었다.

​​자신의 가문이 몰락한 명문 귀족 더버빌가의 혈통을 이어 받았다는 어느 신부님의 말을 듣고 헛바람이 든 도붓장사꾼 아버지, 아이들보다 철이 들었다고 할 수 없지만 테스에게 아름다운 외모를 물려 준 어머니, 그리고 돌봐야 할 여섯 동생을 둔 가난한 집의 첫째 딸이다.

​우연히 알게 된 귀족 가문의 후손이라는 사실에 고무된 부모는 테스를 더버빌 이란 성씨를 도용하고 살아 가는 부자집 가정부로 보낸다. 그곳에서 하녀로 일하는 테스는 알렉 데버빌이라는 그 집 아들에게 겁간을 당하게 되고 그곳에서 돌아와 아이를 낳게 된다. 미혼모가 된 테스는 고통 속에서 아이를 기르지만 아이는 태어난지 얼마않되 죽고, 미혼모라는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다른 지방으로 거처를 옮긴다.

​​그곳에서 소젖을 짜는 일자리를 얻어 살아가던 그녀는 운명의 남자 에인젤 클레어를 만난다. 그는 농장 경영을 배우기 위해 그곳에서 일하고 있던 젊은이다. 그를 보는 순간 몇년 전에 그 봄날의 행렬이 있었던 5월, 블랙모어 골짜기의 초원에서 스치듯 만난 사이라는 걸 그녀는 기억해 낸다. 이미 그 봄날 그녀의 가슴 한가운데에 그가 들어와 있었지만 잊고 지내다가 다시 만나는 순간 그녀는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온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지만 자신의 과거 때문에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절한다. 하지만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운명적인 끌림과 에인젤 클레어의 끈질긴 구애로 인해 마음이 열리고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인생의 새로운 출발을 하는 첫날 밤, 테스는 갈등 끝에 자신의 과거를 남편에게 고백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속이며 살수 없다는 생각, 그리고 남편이 용서해주리란 믿음 때문에 자신의 과거를 털어 놓는다. 하지만 에인젤은 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집안과 어울리지 않는 소젖짜는 처녀와 결혼한 열린 남자였지만 과거가 있는 여자에 대한 생각은 사회적 관습의 틀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기독교 사회의 도덕적 편협함을 경멸해 온 그였지만 여자의 사소한 실수도 용납하지 못하는 편협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강제로 당한 여자의 과거도 이해하지 못하는 빅토리아 시대의 경직된 윤리와 편협한 도덕 속에 테스는 버림을 받는다.

그는 테스를 남겨두고 기약없이 브라질로 떠난다. 농장 경영을 조사하기 위해 떠났지만 사회적인 시선을 피하기 위한 도피였다. 무책임하게 떠난 남편을 기다리며 가난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그녀는 고된 노동 속으로 자신을 던진다. 남편이 다시 자신을 찾아 오리란 한가닥의 희망을 가지고 노동의 고통을 견디며 그를 기다리지만 운명은 잔인하게 어린 그녀를 희롱한다.

​자신을 겁탈한 알렉 데버빌과 우연하게 마주친다. 알렉은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으로 변해 있었지만 그것은 진정한 변화가 아니었다. 테스를 다시 만난 알렉은 자신의 본성으로 돌아와 테스에게 음흉한 속내를 드러낸다. 그녀는 힘겨운 노동과 기다림에 지쳐 있었고, 길거리에 나앉을 처지로 몰린 친정 가족 부양해야 했던 그녀는 끈질기게 유혹하는 알랙을 받아들인다.

​한편 그녀의 남편 에인젤 클레어는 브라질에서 어려움을 겪으면서 자신의 편협함과 무책임을 깨닫는다. 그는 서둘러 귀국하고 테스를 수소문하여 찾지만 이미 알렉의 정부가 된 테스를 발견한다. 너무 늦었다는 회한에 찬 테스의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서고, 테스는 운명의 냉혹한 놀림에 절망하며 울부짖는다. 에인젤 클레어을 다시 떠나 보내고, 그들의 사랑을 경멸하는 알렉과 말다툼을 하던 중 우발적으로 그를 살해하고 만다. 자신을 비극 속에 몰아 넣은 장본인인 알렉을 죽인 테스는 아직도 자신의 우주이고 진리인 남편을 뒤따라 간다. 극단의 혼란 중에서도 그와 그녀는 결혼 후 한 번도 갖지 못한 꿈같은 며칠을 보낸다. 하지만 그들을 뒤쫓던 경찰에 결국 체포되고... 그녀는 에인젤 클레어에게 자신의 가족을 돌봐 줄 것과 자신의 여동생과 결혼해 줄 것을 부탁하고는 그해 7월 어느날 교수형에 처해진다.

​소설의 줄거리는 주말 드라마에서 자주 보는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인 사랑이야기다. 이런 통속성을 가진 소설이 고전으로 살아남아 우리에게 아직도 읽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에 따라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소설 테스의 힘은 몇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이 소설의 모든 힘은 토마스 하디의 눈부신 문장에서 나온다. 특히 자연에 대한 아름다운 문장들은 압권이다. 아름다운 계절 속에 그려진 비극은 찬란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두번째의 힘은 테스의 사랑에 있다. 그녀의 사랑은 어떤 계산이나 의도가 없는 순정한 그녀를 그대로 닮았다. 사회적인 통념에 사로잡힌 찌질한 에인젤의 사랑이나 육체에 탐닉하는 알렉의 사랑과는 다른, 순수하고 정직한 테스의 사랑은 읽는 사람에게 감동으로 다가 온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존을 지키고 자신에게 솔직한 테스의 지고한 사랑은 오래도록 가슴을 울린다.

​셋째는 독선적이고 경직된 종교와 편협한 도덕적 가치관이 한 인간에게 가하는 폭력성에 대한 비판이다. 격동하는 빅토리아시대의 한계와 그것을 넘어서려는 모습을 소설에서 읽을 수 있다.

​​이 소설이 영화로 나온 해가 1981년이니까 내가 영화를 본 때는 아마도 테스와 나이가 비슷한 20대 초반이었을 게다. 영화를 보고 난 느낌은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아름다운 나타샤 킨스키의 얼굴만 기억에 남아 있다. 소설을 읽으며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한다. 젊어서는 의지를 믿지만 나이가 들수록 운명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된다. 인생을 지배하는 것은 의지가 아닌 운명이라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진다. 기구한 테스의 운명, 그 속에서 몸부림치는 한 어린 처녀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은신처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자는 에인젤의 제안에 남편과의 행복한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보려는 마음과 가혹한 운명에 대한 체념이 뒤섞인 그녀의 대답이 가슴에 남는다. "이 모든 것이 달콤하고 즐거운데 왜 끝내려고 하나요... 일어날 일은 일어나고 말아요... 저 바깥은 모두 근심뿐이에요. 이 안은 행복인데..." 그리고 체포되며 그녀는 이렇게 에인젤에게 말한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요... 에인젤, 난 기쁘기까지 한걸요. 그래요, 기뻐요! 이 행복이 지속될 수는 없어요... 너무 큰 행복이라.... 이걸로 충분해요. 이제 당신이 날 멸시할 때까지 살지 않아도 되겠네요... 준비 됐어요..."

​행복한 순간이 너무도 짧았던 가혹한 운명 속의 어린 처녀, 운명을 피해 가기엔 너무도 순정(純正)했던 테스... 자연의 운명 속에 살았다면 행복한 생을 보냈을 한 아름다운 여인이 인습의 운명 속에서 스러지는 이야기...

http://blog.naver.com/cjdtks9848/200000454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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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 출간기념50주년 제4판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 까치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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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쿤 『과학혁명의 구조』, 박은진,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 2004"를 중심으로 요약

 

토머스 새뮤얼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라는 책을 손에 들었으나 번역된 문장의 어려움으로 읽기를 중단하고, 이 책을 요약한 서울대학교 철학사상 연구소에서 나온 해제를 구해 읽었다. 이 글은 그 내용을 다시 요약 정리한 것이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는 기존 과학철학의 논리적이고 방법론적인 논의를 역사적 논의로 전환한 책으로여러 대학이나 기관에서 청소년들의 필독서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번역기에 넣어 돌린 듯한 까치글방의 책을 청소년들이 과연 완독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역자는 서문에서 원전의 의미를 살리기 위해 원문 그대로를 번역했다고 말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원전의 의미가 직역을 통해서만 가능한 것인지 의심스럽다. 많은 청소년들의 의욕을 가지고 이 책을 손에 잡았다 하더라도 몇 페이지 못 가서 중도 포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않을까? 책을 집어 던지고 다시는 이 책을 안읽을지도 모른다. 이 책 뿐만아니라 과학분야 독서에 흥미를 잃게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보다 좋은 번역서나 해제를 고대한다.

 

이 책은 과학의 변화 또는 과학변화의 메커니즘을 논의한다. 여기서 가장 핵심 용어는 페러다임이라는 개념이다. 과학은 점진적이거나 지식의 축적에 따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페러다임에 따라 혁명적인 발전을 한다는 것이다. 즉, 과학의 발전은 【정상과학1 --> 위기 --> 과학혁명 --> 정상과학2】의 과정으로 나아 간다는 것이다. 정상과학1은 과거의 과학적 성취에 확고한 기반을 둔 연구활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정상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상 현상이 오래도록 깊이 지속되는 위기의 상황이 도래하고, 이러한 위기 상황을 해소할 수 있고, 드러난 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이론이 등장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혁명이다. 이 새로운 이론은 기존의 사회 구성원들이 공유했던 신념, 가치, 기술 등에 변화를 요구하고, 이렇게 등장한 새로운 페러다임은 다시 정상과학으로 자리를 잡는다. 이러한 혁명의 반복이 과학혁명의 구조다. 페러다임과 페러다임 사이에는 혁명에 의한 단절이 존재한다. 과학의 발전은 점진적인 지식의 축적과정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이렇게 혁명적 전환으로 발전한다.

 

무엇보다도 과학혁명을 통해 새로운 페러다임에 따라 이론이 바뀌면, 동일한 자연현상이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보인다. 이것은 과학발전의 불연속성을 의미하며 특히, 이론과 이론사이의 단절에 대한 강조가 쿤 논의의 중심내용이다. 이런 단절은 정상과학1과 정상과학2를 양립 불가능하게 할 뿐 아니라 공약 불가능하게 만든다. 쿤은 페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과학의 발전을 종교적 개종에 비유하며, 과학자들이 새로운 세계관을 가지는 것으로 해석한다. 따라서 쿤은 과학이 혁명의 진행방식과 같은 모습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한다.

 

진리란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기 때문에 혁명적인 변화 구조를 갖는 과학은 결코 자연에 대한 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따라서 과학혁명의 구조』 영향으로 이후 과학의 논의에 있어서 진리는 더 이상 중요한 개념으로 취급되지 않았으며, 과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발전의 의미를 재고하게 되었다. 진리는 모든 분야의 과학적 논의에서 끊임없이 추구해 왔던 것이지만 쿤이 보여준 새로운 이해는 더 이상 진리를 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 결과, 쿤의 논리는 상대주의로 해석되었고, 더 나아가 모든 분야에서 진리를 더 이상 주장할 수 없게 만들었다.

 

http://blog.naver.com/cjdtks9848/10168424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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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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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묘한 문장입니다. 선뜻 이해가 되는 문장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을까요? 행복해하는 모습이 닮은 걸까요 아니면 행복에 이르는 과정이 닮은 걸까요? 불행한 가정은 왜 닮지 않고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걸까요? 불행의 원인이 다양해서 일까요 아니면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결핍 때문일까요? 행복의 기준은 좁고 불행의 기준은 넓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은 적고 불행한 가정은 많은 걸까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까요? 다른 가정과 비교를 통해서 측정해야 하나요 아니면 자신의 만족으로 측정해야 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다."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의미심장한 문장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8살 된 아들을 가진 상류층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모든 것을 가진 여인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브론스키와 한순간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이성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사랑에 빠집니다. 결혼 후에 찾아온, 그래서 불행이 예정된 사랑이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따를 경우 맞게 될 불행한 일들에 대해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사랑에 자리를 내주고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그리고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하고 남편 앞에서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합니다. 안나가 출산으로 사경을 헤맬 때 남편에게 속죄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속죄는 사경 속에 있을 때 열에 들뜬 무의식이 작용한 속죄였을 뿐, 몸이 회복되자 다시 그녀의 사랑은 남편이 아닌 브론스키로 향합니다. 현실의 사랑은 안나의 의지에 의해 제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미모와 지성, 교양,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여자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따라 아들과 남편 카레닌을 떠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자신들에게 향한 상류 사회의 냉담한 시선을 피해 살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그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유부녀가 총각과 눈이 맞아 가정을 버린 상류 사회의 불륜 스켄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상류 사회의 싸늘한 시선에 안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고립됩니다. 그 고립으로 그녀는 브론스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고, 브론스키는 안나와는 달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만 안나의 집착에 곤혹스러워합니다. 집착은 믿음의 결여에서 오는 불안의 그림자입니다.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집착은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불안에서 비롯된 거지요. 안나는 사랑에 모든 걸 걸지만 남자인 브론스키에게는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을 갖길 원했습니다. 남자로서의 독립...
 

브론스키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 일 (선거 )을 수행하기 위해 집을 며칠 떠나면서 생각합니다. “... 여하튼 그녀에게 뭐든 다 줄 수 있지만 남자로서의 독립은 내줄 수 없지 ”라고. 하지만 안나는 며칠간 집을 비운 브론스키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이는 언제든, 어디로든 원하는 대로 떠날 권리가 있다.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거지. 그는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 권리도 없어.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그이는 어떻게 했지? 나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어...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 시선은 많은 뜻을 담고 있어. 그 시선은 마음이 식기 시작한다는 뜻이야.” 남자와 여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나 봅니다. 브론스키의 사랑은 그녀가 생각한 만큼 그녀에게서 멀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나는 남자에게 있어 사회적인 일이 갖는 의미를 머리로만 생각하고 이해했을 뿐,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곁에만 있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소유하길 원했고, 그는 그것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안나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느낍니다. 남편인 카레닌과 안나는 20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을 느껴 결혼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서로의 고만고만한 이유로 결혼한 경우지요. 안나는 카레닌과의 결혼 생활에서 만족을 찾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카레닌은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명예와 지위와 야망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겠지요. 이런 남편 카레닌의 행동을 그녀는 가식과 위선에 찬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위선과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거지요. 20년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겠지요. 아마도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남편의 행위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난 후, 남편의 이런 행위가 가식과 위선으로 모습을 바뀝니다.


소설에서 여자의 이런 마음의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모스크바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림을 느끼고 안나는 다시 가정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기차를 탑니다. 이 기차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지요. 브론스키도 자신의 어머니를 마중 나와 있었지만 실은 안나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플랫폼에 나와 있었지요. 안나와 브론스키는 스치듯 다시 마주쳤습니다. 이 순간의 스침에서 두 사람은 강렬한 어떤 것에 서로가 끌림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안나는 기차에서 내립니다. 톨스토이는 기차에서 내리며 그녀가 남편을 보았을 때, 안나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포착합니다. 남편을 보는 순간, 전에는 멀쩡하던 남편의 귀가 이상하게 못생겨 보였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귀가 왜 오늘따라 괴상하고 못생겨 보였을까요? 새로운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자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 버립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남편 카레닌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침입한 브론스키의 이미지로 인해 추함으로 변했습니다. 극적인 변덕이지요. 사랑이 부리는 변덕입니다.
 

"기차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발견한 것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아, 맙소사! 저이의 귀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 그의 차갑고 당당한 풍채, 그리고 특히 지금 그녀를 놀라게 한 귀 연골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의 고집이 세고 지친 시선에 부딪치자 불쾌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다른 모습을 기대한 걸까? 그를 만났을 때 특히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감정에 그녀는 놀랐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래전부터 느꼈고 이제는 익숙해진 위선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하곤 했었다. 전에는 그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제 그녀는 분명하고 아프게 자각하는 것이었다."
 

안나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감정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여인의 마음과 사랑을 얻은 여인의 마음. 사랑을 잃은 여인의 마음속에는 악하면 악하다는 이유로, 선하면 선하다는 이유로 그 (남편 )를 증오하게 되는 마음과 악하면 악하다는 이유로, 선하면 선하다는 이유로 그 (브론스키 )를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 함께 들끓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 갑니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어간다고 생각했으며 브론스키는 자신으로 인해 안나의 고통이 더 깊어 간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안나는 자신에게 향하는 브론스키의 사랑이 작아질수록 그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 또는 다른 여인에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의 갈등은 점점 깊어갑니다. 톨스토이는 남자인 브론스키의 심리보다는 안나의 심리를 아주 예리하게 잡아냅니다. 남자이면서 여자의 심리를 이렇게 잘 포착한다는 건 아마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듯싶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남자가 사랑에 집착하고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의 심리적 변화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실제로 톨스토이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유명합니다.
 

안나의 집착과 질투, 터무니없는 상상으로부터 생기는 미움은 병적인 상태로 빠져들고 사랑이 식은 브론스키에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브론스키가 겪을 후회와 아픔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자신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던 남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강요하는 집요한 집착과 여자의 복잡한 심리 변화를 톨스토이는 절묘하게 잡아냅니다. 안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선택한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녀는 착란과도 같은 심리 상태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 맙니다. 안나는 자신에게 정직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습니다. 사랑이 떠나거나 식는다면 그녀에게 있어 삶은 가식이고 위선에 불과한 것이죠. 불행하게도 안나는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고,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 날 수 없음에 절망했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안나와 브론스키 주위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복선과도 같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나 강렬한 끌림을 교환했던 그날, 열차 풀랫폼에서 한 역무원이 실수로 기차에 치여 죽고, 안나가 지켜보는 경마 경주에 브론스키가 출전하지만 마지막에 낙마하여 그가 탔던 말이 척추가 부러져 죽는 사고가 납니다. 또한 브론스키가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공간도 그가 안나를 처음 만났던 공간, 죽음이 있었던 공간인 열차역입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죽음에 극심한 충격을 받고 그 절망과 허무함으로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합니다. 안나에 대한 속죄, 의미를 상실한 자신의 삶 때문에 브론스키는 그렇게 자신을 전쟁 속으로 던집니다. 브론스키의 이후의 행적에 대해 소설에서는 아무말 없지만 이런 공간의 설정은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주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죽음은 레닌과 키티의 경우이고 안나와 브론스키 경우에는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인 종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열차 역이란 공간의 의미 또한 어떤 이에게는 출발을 의미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종착을 의미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마지막이 열차역으로 설정된 것 또한 의미 있는 설정이지요.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직접 경험한 어떤 여인의 열차 자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도 치정에 얼킨 사연으로 열차에서 몸을 던져 죽음 맞습니다. 이 여인은 소설 속에서  안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소설에는 안나와 카레닌의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가족의 삶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시골의 영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레빈과 키티의 가정이 있습니다. 레닌과 키티의 가정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레빈은 무신론자였으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 갑니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레닌의 삶에 투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인 오브론스키와 돌리의 가족이 있습니다. 가장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아내와 가정엔 무관심한 남편 오브론스키, 가족의 해체를 원하지 않아 남편을 미워하지만 참고 용서하며 5명의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돌리는 힘든 가정을 꾸려갑니다. 오브론스키와 돌리가 보여주는 삶은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균형을 찾아갑니다.


우리의 삶은 행복과 불행, 욕망과 절제, 사랑과 증오, 남과 여, 사회와 개인, 책임과 의무라는 타협하기 힘든 평행선들이 무수히 교차하는 여정입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속됩니다. 안나는 행복을 위해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회와 현실은 그녀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 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적입니다. 그녀가 지옥과도 같은 출구 없는 미로에서 방황하고 헤매는 마지막의 모습은 애처롭고 가련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여인은 어디에서 구원을 찾아야 했을까요?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았지만 그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합니다.
 

안나가 죽은 이후 소설의 마지막은 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찾는 레빈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작가는 종교에서 구원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종교심을 갖는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한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고뇌와 함께 찾아 들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는다고 말합니다. " 내 삶은 이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와 상관없이, 매 순간이 예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은 뿐만 아니라 선(善)이라는 확실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삶에 그것을 불어 넣을 힘이 있다." 종교란 다름 아닌 자신의 삶에 선이라는 것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입니다. 생활이 내 마음속의 선을 빼앗아 갈 때 다시 선을 마음에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이 종교가 갖는 힘이지요.
 

인생이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만 한 개인의 의지만으로 인생을 살아낸다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족이, 친구가, 사회가 함께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은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항상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설령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안나와 같은 불행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에 대비한 행동 강령을 준비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불행이 나에게 오지 않기만 바라며 살아가지요.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사소한 것에 의해 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달리는 말을 넘어뜨리는 것은 큰 바위나 나무가 아니라 길 위의 작은 자갈이거나 하찮은 나뭇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의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큰 어려움은 부부를 결속시키지만 사소한 감정의 문제가 부부 사이의 갈라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의 일상은 사소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사소한 것들은 자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방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보다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운 건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봄바람이 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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