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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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유명한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됩니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묘한 문장입니다. 선뜻 이해가 되는 문장 같지만 그렇지도 않습니다. 왜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서로 닮아 있을까요? 행복해하는 모습이 닮은 걸까요 아니면 행복에 이르는 과정이 닮은 걸까요? 불행한 가정은 왜 닮지 않고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한 걸까요? 불행의 원인이 다양해서 일까요 아니면 행복을 느끼는 마음의 결핍 때문일까요? 행복의 기준은 좁고 불행의 기준은 넓기 때문에 행복한 가정은 적고 불행한 가정은 많은 걸까요? 행복과 불행의 기준은 어떻게 측정될 수 있을까요? 다른 가정과 비교를 통해서 측정해야 하나요 아니면 자신의 만족으로 측정해야 하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불행한 가정은 서로 닮아 있지만 행복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다."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겠지요. 아무튼 의미심장한 문장입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결혼생활을 한 것은 아니지만 8살 된 아들을 가진 상류층의 아름다운 여인으로 모든 것을 가진 여인입니다. 하지만 우연히 만난 브론스키와 한순간에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이성이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누가 먼저라고 말할 수 없이, 두 사람이 동시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사랑에 빠집니다. 결혼 후에 찾아온, 그래서 불행이 예정된 사랑이었습니다. 안나 카레니나는 자신에게 찾아온 사랑의 감정에 따를 경우 맞게 될 불행한 일들에 대해 고민합니다. 하지만 이성은 사랑에 자리를 내주고 그들은 서로에게 빠져듭니다. 그리고 브론스키의 아이를 임신하고 남편 앞에서 브론스키의 아이를 출산합니다. 안나가 출산으로 사경을 헤맬 때 남편에게 속죄합니다. 하지만 그녀의 속죄는 사경 속에 있을 때 열에 들뜬 무의식이 작용한 속죄였을 뿐, 몸이 회복되자 다시 그녀의 사랑은 남편이 아닌 브론스키로 향합니다. 현실의 사랑은 안나의 의지에 의해 제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나 봅니다. 미모와 지성, 교양, 부와 명예를 모두 가진 여자이지만 결국, 모든 것을 버리고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따라 아들과 남편 카레닌을 떠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는 자신들에게 향한 상류 사회의 냉담한 시선을 피해 살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영원히 그 사회를 벗어나서는 살 수 없음을 절감합니다. 유부녀가 총각과 눈이 맞아 가정을 버린 상류 사회의 불륜 스켄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상류 사회의 싸늘한 시선에 안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하고 고립됩니다. 그 고립으로 그녀는 브론스키에게 더욱 집착하게 되고, 브론스키는 안나와는 달리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만 안나의 집착에 곤혹스러워합니다. 집착은 믿음의 결여에서 오는 불안의 그림자입니다. 브론스키에 대한 안나의 집착은 자신이 선택한 사랑의 불안에서 비롯된 거지요. 안나는 사랑에 모든 걸 걸지만 남자인 브론스키에게는 사랑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만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랑으로부터 독립된 어떤 것을 갖길 원했습니다. 남자로서의 독립...
 

브론스키는 자신의 사회적 역할, 일 (선거 )을 수행하기 위해 집을 며칠 떠나면서 생각합니다. “... 여하튼 그녀에게 뭐든 다 줄 수 있지만 남자로서의 독립은 내줄 수 없지 ”라고. 하지만 안나는 며칠간 집을 비운 브론스키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이는 언제든, 어디로든 원하는 대로 떠날 권리가 있다.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버리는 거지. 그는 모든 권리를 다 가지고 있는데 나는 아무 권리도 없어. 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그러면 안 되지. 그런데 그이는 어떻게 했지? 나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어...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그 시선은 많은 뜻을 담고 있어. 그 시선은 마음이 식기 시작한다는 뜻이야.” 남자와 여자가 바라보는 시선은 본질적으로 같을 수 없나 봅니다. 브론스키의 사랑은 그녀가 생각한 만큼 그녀에게서 멀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안나는 남자에게 있어 사회적인 일이 갖는 의미를 머리로만 생각하고 이해했을 뿐,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 바라보며 그가 자신의 곁에만 있어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녀는 그를 완전히 소유하길 원했고, 그는 그것에서 벗어나길 원했습니다.
 

안나는 다시 가정으로 돌아가는 것도 생각해 보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임을 느낍니다. 남편인 카레닌과 안나는 20살의 나이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깊이 사랑을 느껴 결혼한 케이스가 아닙니다. 서로의 고만고만한 이유로 결혼한 경우지요. 안나는 카레닌과의 결혼 생활에서 만족을 찾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카레닌은 고위직에 있었기 때문에 아마도 자신의 명예와 지위와 야망에 어울리는 행동을 했겠지요. 이런 남편 카레닌의 행동을 그녀는 가식과 위선에 찬 행위로 이해했습니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위선과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고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 거지요. 20년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이겠지요. 아마도 브론스키를 만나기 전에는 이런 남편의 행위가 심각한 문제로 나타나지 않았으리라 생각됩니다.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난 후, 남편의 이런 행위가 가식과 위선으로 모습을 바뀝니다.


소설에서 여자의 이런 마음의 변화를 극적으로 표현한 부분이 있습니다. 안나와 브론스키가 모스크바에서 처음 마주친 이후, 서로에게 강하게 이끌림을 느끼고 안나는 다시 가정이 있는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오는 기차를 탑니다. 이 기차가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을 때 그녀의 남편이 마중 나와 있었지요. 브론스키도 자신의 어머니를 마중 나와 있었지만 실은 안나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고 플랫폼에 나와 있었지요. 안나와 브론스키는 스치듯 다시 마주쳤습니다. 이 순간의 스침에서 두 사람은 강렬한 어떤 것에 서로가 끌림을 확인합니다. 그리고는 안나는 기차에서 내립니다. 톨스토이는 기차에서 내리며 그녀가 남편을 보았을 때, 안나의 마음을 기가 막히게 포착합니다. 남편을 보는 순간, 전에는 멀쩡하던 남편의 귀가 이상하게 못생겨 보였습니다. 어제까지 멀쩡하던 귀가 왜 오늘따라 괴상하고 못생겨 보였을까요? 새로운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여자의 마음을 순식간에 바꿔 버립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있던 남편 카레닌의 모습이 갑작스럽게 침입한 브론스키의 이미지로 인해 추함으로 변했습니다. 극적인 변덕이지요. 사랑이 부리는 변덕입니다.
 

"기차가 페테르부르크에서 멈추었다. 그녀가 내리자마자 발견한 것은 남편의 얼굴이었다. '아, 맙소사! 저이의 귀는 왜 저렇게 생겼을까? 그의 차갑고 당당한 풍채, 그리고 특히 지금 그녀를 놀라게 한 귀 연골을 보며 그녀는 생각했다.... 남편의 고집이 세고 지친 시선에 부딪치자 불쾌한 감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그의 다른 모습을 기대한 걸까? 그를 만났을 때 특히 자신의 불만족스러운 감정에 그녀는 놀랐다.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에서 오래전부터 느꼈고 이제는 익숙해진 위선에 가까운 감정을 경험하곤 했었다. 전에는 그 감정을 눈치채지 못했으나 이제 그녀는 분명하고 아프게 자각하는 것이었다."
 

안나의 마음속에는 두 가지의 감정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을 잃은 여인의 마음과 사랑을 얻은 여인의 마음. 사랑을 잃은 여인의 마음속에는 악하면 악하다는 이유로, 선하면 선하다는 이유로 그 (남편 )를 증오하게 되는 마음과 악하면 악하다는 이유로, 선하면 선하다는 이유로 그 (브론스키 )를 사랑하게 되는 마음이 함께 들끓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둘 사이의 갈등은 깊어 갑니다. 안나는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어간다고 생각했으며 브론스키는 자신으로 인해 안나의 고통이 더 깊어 간다는 생각에 괴로워합니다. 안나는 자신에게 향하는 브론스키의 사랑이 작아질수록 그의 사랑은 다른 사람들, 또는 다른 여인에게 돌아간다는 생각에 질투심에 사로잡힙니다. 그들의 갈등은 점점 깊어갑니다. 톨스토이는 남자인 브론스키의 심리보다는 안나의 심리를 아주 예리하게 잡아냅니다. 남자이면서 여자의 심리를 이렇게 잘 포착한다는 건 아마도 톨스토이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듯싶습니다. 불행한 결혼 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남자가 사랑에 집착하고 질투에 사로잡힌 여자의 심리적 변화를 이렇게 디테일하게 표현하기란 어려우니까요. 실제로 톨스토이는 불행한 결혼생활로 유명합니다.
 

안나의 집착과 질투, 터무니없는 상상으로부터 생기는 미움은 병적인 상태로 빠져들고 사랑이 식은 브론스키에 복수하기 위해 죽음을 생각합니다. 자신이 죽은 후에 브론스키가 겪을 후회와 아픔을 상상하면서 말입니다. 자신 때문에 자살을 시도했던 남자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강요하는 집요한 집착과 여자의 복잡한 심리 변화를 톨스토이는 절묘하게 잡아냅니다. 안나는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선택한 브론스키의 사랑이 식어가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다면 사랑에 모든 것을 건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죽음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그녀는 착란과도 같은 심리 상태에서 달리는 기차에 몸을 던지고 맙니다. 안나는 자신에게 정직했기 때문에 죽음을 택했습니다. 사랑이 떠나거나 식는다면 그녀에게 있어 삶은 가식이고 위선에 불과한 것이죠. 불행하게도 안나는 자신들의 사랑에 대해 확신하지 못했고, 그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에서 벗어 날 수 없음에 절망했습니다. 그녀에게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 안나와 브론스키 주위에서는 죽음의 그림자가 복선과도 같이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들이 처음 만나 강렬한 끌림을 교환했던 그날, 열차 풀랫폼에서 한 역무원이 실수로 기차에 치여 죽고, 안나가 지켜보는 경마 경주에 브론스키가 출전하지만 마지막에 낙마하여 그가 탔던 말이 척추가 부러져 죽는 사고가 납니다. 또한 브론스키가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공간도 그가 안나를 처음 만났던 공간, 죽음이 있었던 공간인 열차역입니다. 브론스키는 안나의 죽음에 극심한 충격을 받고 그 절망과 허무함으로 세르비아 전쟁에 참전합니다. 안나에 대한 속죄, 의미를 상실한 자신의 삶 때문에 브론스키는 그렇게 자신을 전쟁 속으로 던집니다. 브론스키의 이후의 행적에 대해 소설에서는 아무말 없지만 이런 공간의 설정은 그의 죽음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주변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따라다닙니다. 죽음은 종말을 의미하지만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탄생을 의미하는 죽음은 레닌과 키티의 경우이고 안나와 브론스키 경우에는 죽음의 본질적인 의미인 종말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열차 역이란 공간의 의미 또한 어떤 이에게는 출발을 의미하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종착을 의미합니다. 안나와 브론스키의 마지막이 열차역으로 설정된 것 또한 의미 있는 설정이지요. 이 소설은 톨스토이가 직접 경험한 어떤 여인의 열차 자살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합니다. 이 여인도 치정에 얼킨 사연으로 열차에서 몸을 던져 죽음 맞습니다. 이 여인은 소설 속에서  안나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소설에는 안나와 카레닌의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두 가족의 삶이 대비되고 있습니다. 시골의 영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자연과 인생을 관조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레빈과 키티의 가정이 있습니다. 레닌과 키티의 가정은 안나와 브론스키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행복한 삶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레빈은 무신론자였으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깊은 자기 성찰을 통해 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발견해 갑니다.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레닌의 삶에 투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다른 가족인 오브론스키와 돌리의 가족이 있습니다. 가장 통속적인 삶을 살아가는 가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우고 아내와 가정엔 무관심한 남편 오브론스키, 가족의 해체를 원하지 않아 남편을 미워하지만 참고 용서하며 5명의 자녀를 키우며 살아가는 돌리는 힘든 가정을 꾸려갑니다. 오브론스키와 돌리가 보여주는 삶은 우리네 삶과 많이 닮아 있습니다. 그들은 불행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 사이의 중간지점에서 균형을 찾아갑니다.


우리의 삶은 행복과 불행, 욕망과 절제, 사랑과 증오, 남과 여, 사회와 개인, 책임과 의무라는 타협하기 힘든 평행선들이 무수히 교차하는 여정입니다.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는 사건들이 연속됩니다. 안나는 행복을 위해 사랑을 선택하지만 사회와 현실은 그녀의 사랑을 지켜주지 못 합니다. 그녀의 마지막 선택은 비극적입니다. 그녀가 지옥과도 같은 출구 없는 미로에서 방황하고 헤매는 마지막의 모습은 애처롭고 가련한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여인은 어디에서 구원을 찾아야 했을까요?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구원을 찾았지만 그는 그녀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 합니다.
 

안나가 죽은 이후 소설의 마지막은 종교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의 의미를 찾는 레빈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작가는 종교에서 구원을  찾으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종교심을 갖는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과 행동이 한순간에 달라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은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고뇌와 함께 찾아 들어 마음속에 굳게 자리 잡는다고 말합니다. " 내 삶은 이제,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와 상관없이, 매 순간이 예전처럼 무의미하지 않은 뿐만 아니라 선(善)이라는 확실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삶에 그것을 불어 넣을 힘이 있다." 종교란 다름 아닌 자신의 삶에 선이라는 것을 불어 넣을 수 있는 힘이라고 이야기입니다. 생활이 내 마음속의 선을 빼앗아 갈 때 다시 선을 마음에 불어 넣을 수 있는 것이 종교가 갖는 힘이지요.
 

인생이란 살아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야 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지만 한 개인의 의지만으로 인생을 살아낸다는 건 참으로 어렵습니다. 가족이, 친구가, 사회가 함께 살아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일은 혼자 살아가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항상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지요. 설령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안나와 같은 불행은 언제든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이런 상황에 대비한 행동 강령을 준비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단지 이런 불행이 나에게 오지 않기만 바라며 살아가지요.


가정의 행복과 불행은 사소한 것에 의해 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달리는 말을 넘어뜨리는 것은 큰 바위나 나무가 아니라 길 위의 작은 자갈이거나 하찮은 나뭇가지인 경우가 많습니다. 부부의 문제도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큰 어려움은 부부를 결속시키지만 사소한 감정의 문제가 부부 사이의 갈라놓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의 일상은 사소한 것들이 모여 만들어집니다. 사소한 것들은 자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우리를 방심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혼자 사는 것보다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려운 건지도 모릅니다.

 

생명의 바람이기도 하지만 위험하기도 한 봄바람이 붑니다.

 

http://blog.naver.com/cjdtks9848/1016332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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