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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 교유서가 소설
박이강 지음 / 교유서가 / 2023년 9월
평점 :
"헛된 믿음에 대하여"
박이강의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 를 읽고

"내일을 위해 바치는 오늘은 기쁨일까 고통일까,"
-박이강 작가의 '믿음'을 주제로 한 9편의 단편집-
오늘도 당신은 오늘 하루를 무사히 견뎠다. 회사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 당신의 영혼을 갈아넣은지도 어언 10년 째이고 이제는 더이상 갈아넣을 영혼조차 남아있지도 않을 정도로 지치고 힘들어서 이미 몸과 마음은 너덜너덜해진지 오래이다. 이런 회사원의 애환과 고통을 회사원이 아니라면 그 누가 알까.
이 책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서 작가는 회사 생활에 영혼을 잠식당하며 발이 묶인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담았다. 오피스를 배경으로 오랜 시간 직장인으로 살았던 작가의 삶과 사유가 담겨 있기 때문에 많은 회사원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주고 있다. 작가 본인이 회사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직장인으로 느끼는 애환과 고통, 직장 생활에 대한 사유 등이 실제적이고 현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직장 생활에서 관행처럼 이야기하는 '믿음'이 얼마나 헛된 것인지, 그 믿음의 실체가 무엇인지 등에 대해 날카롭고 예리한 통찰력으로 파헤치고 있다.
9편의 단편들 중 특히 표제작인 <어느 날 은유가 찾아왔다>에서 작가는 화자인 '나'를 통해 하려다 말고, 하고 싶은데 못 하고, 못 하는 것도 아닌데 안 하는 인물을 보여준다. 그저 주어진 하루하루를 견디는 데 몰두하느라고 충동조차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나는 친구 경태의 권유로 충동적으로 제주도에 가게 된다. 이렇게 내가 '충동이 멋진 추동이 되는 순간'을 잊은 이유는 '회사에 돈값을 해야 하는', '죽어라고 안간힘을 써야 120퍼센트를 겨우 해내는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돈값. 맞는 말이다. 월급을 받는 사람은 돈값을 해야 한다. 돈값이 5천원 인 자와 1억인 자가 치러야 할 대가가 같을 수는 없다. 죄지은 자인 나는 시선을 떨구고 벌하는 자인 그의 심판을 담담히 기다린다.
(중략) 회사란 마조히스트로 훈련되는 새장이다. 그 새장 속에서는 영혼이 빠져나가 머리가 작아져야만 가볍게 훨훨 날 수 있다. 나는 언제쯤 그럴 수 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나는 너무 낮게 그리고 천천히 날고 있다.
-p. 254~255
그런 나에게 '은유'가 나타난다. 은유를 만나면서 나는 자신의 인생이 '발신인 불명 편지' 처럼 되돌려보낼 수 없이 살아왔음을 인식하게 된다. 사무실이 있는 9층 버튼을 깜박 잊고 놓친 나는 은유의 말대로 옥상까지 올라가기로 한다. 그 곳에서 자신이 추락하게 될지, 하늘로 날아가게 될지 더이상은 두려워하지 않고서 말이다.
"가보면 알겠지. 추락하게 될지, 하늘로 날아갈지, 그냥 내려올지, 아니면 한동안 별구경이라도 실컷 하다 와야겠다. 그렇게 생각해."
-p. 266
<흔들리는 것들>이나 <파라다이스 리조트>처럼 워커홀릭의 짧은 휴가를 다룬 작품들도 인상깊었다. 일만 하는 워커홀릭에게는 휴가란 어떤 의미일까.
<파라다이스 리조트>에서 작가는 2년 째 휴가도 반납하고 일에만 전념하는 전형적인 워커홀릭인 희수가 환상의 섬인 몰디브에서 보낸 휴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신혼여행지로 최고의 각광을 받은 환상적인 최애의 섬인 몰디브도 희수에겐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그녀가 몰디브로 간 것은 연말 휴가에 대해 사장이 한 말에 맞장구를 쳤기 때문이었다.
연말 휴가가 화제에 오르자 사장은, 그에게 최고의 휴가란 열대 리조트 풀장에서 마타니를 마시며 밀린 책을 읽는 것이라고 말했다.
-p. 97
신임 사장의 신임을 받고 직속 상사와 같은 휴가를 보내기 위해 희수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소설 <월든>까지 챙겨서 몰디브 섬으로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워커홀릭이었던 희수는 휴가지에서도 인터넷이 안 되어 확인하지 못한 이메일에 대해 걱정하면서 중요한 인사고과 시기에 이렇게 한가롭게 휴가를 떠나온 자신을 자책하기 시작한다. 더군다나 자신의 시종을 맡은 버틀러인 아니쉬에게 무례하게 대하고 무시한다. 그동안 희수에게 일을 제외한 나머지 삶이란 '설마 이렇게 끝나진 않겠지'하는 기대 때문에 참고 보노는 지루한 영화 같았다. (p. 106)
우여곡절 끝에 휴가를 마치고 돌아가는 희수는 자신이 전혀 최고의 휴가를 보내지 못했음에도 사장에게 '몰디브요? 최고의 휴가였어요.정말 100퍼센트 충전됝 기분이에요.(p. 122)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보며 기분좋아한다.
<오피스>나 <도시는 밤>처럼 회사원들의 인간관계를 다룬 작품들도 인상깊었다. 특히 <오피스>에서는 화자인 '나'를 통해 상사에게 비굴에 가까운 선의를 보이면서 비굴하지 않은 내일을 꿈꾸는 직장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도시는 밤>에서 작가는 3년째 계약직만 떠돌고 있는 지수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는 출근시간은 정확히 8시 55분으로 정하고, 점심 같이 먹자는 이야기가 나오면 자신은 회사를 떠날 때라고 생각해왔다. 전 직장에서의 상처 때문에, 지수는 '쓸데없는 말'을 너무 많이 하지 않고 끼여들지 않고 방임하는 것이 지금의 삶을 지탱하는 힘이라고 생각하며 계약직을 떠도는 생활을 계속한다.
그 외에 서울의 고급 빌라에 사는 부부과 그들에게 찾아온 외국인 손님과의 만난 이야기인 <방문객>이나, 금융업계의 거물이며 미술계의 큰 손인 디디를 기다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군상들을 보여주는 <디디를 기다리며>, 소식을 끊고 산 이복 자매인 혜린과 혜선의 이야기인 <2백만 원어치의 마음>도 인상깊었다.
9편의 이야기들 모두 오피스를 배경으로 회사 생활을 하는 직장인들을 주인공으로 하였다. 그래서 그 이야기들 중에는 이미 직장에서 비슷하게 겪어보거나 생각하고 느낀 내용도 많아서 더욱더 공감할 수 있었다.
'소설을 쓰는 일로 기업 세계에서의 삶을 견디는 시간을 지나왔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책 속의 9편의 단편들이 내일을 위해 오늘도 열심히 살아가는 당신에게도 공감과 위로을 주길 바라는 바이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