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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 갈증 ㅣ 트리플 13
최미래 지음 / 자음과모음 / 2022년 6월
평점 :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증"
최미래의 <녹색 갈증>을 읽고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708/pimg_7526911563476793.jpg)
-오직 ‘나’에 의해서만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
그러나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대한 선명한 갈증-
오직 나에 의해서 만들어진 세계와 그 속에서 존재하는 나와 닮은 듯 하지만 나와 반대되는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 최미래 작가의 『녹색 갈증』을 만났다.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자신이 창조한 세계 속에서 주인공을 만나듯, 이 책의 화자인 '나'도 소설 속 세계를 통해 '윤조' 라는 소설의 주인공을 만난다. 분명 작가는 자신의 작품 속 주인공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기 마련인데, 이 책 『녹색 갈증』속에서 윤조는 화자인 '나'와 함께 존재한다. 마치 소설 속 주인공이 작가가 사는 현실 세계로 튀어나온 느낌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내내 지금 화자인 '나'와 '윤조'가 있는 공간이 소설 속 세계인지, 현실 세계인지 혼동이 되었다. 어떻게 소설 속에만 존재하는 존재가 현실 세계의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곁에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윤조'로 표상되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나'란 존재는 오직 소설 속에 존재하는 '윤조'를 통해서만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윤조가 없는 세상에서 나는 심한 갈증을 느낀다. 그런 갈증이 <빈뇨 감각>에서 잘 드러난다. 갈증을 느껴서 물을 마시지만 그 갈증은 쉽게 해소되지 않는다. 물을 많이 마시니 요의를 느끼고 그래서 요의를 해결하고 나면 끝나지 않는 잔뇨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될 뿐이다. 그리고 그 심한 갈증은 나와 엄마, 언니와의 관계 속에서 온다. 명과 헤어지고 찾은 집에서 '나'는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끼고 못하고 불안하고 짜증을 느낀다. 그런 답답함과 짜증이 밀려올 때마다 '나'는 물을 마신다. 마치 물을 마시면 목에 걸린 그럼 답답함이 내려가고 해소되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화장실로 들어가 변기에 앉았다. 마려웠던 느낌에 비해 소변 양은 터무니없이 적었다. 나는 다 눈 후에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분명히 남아 있을 잔뇨를 기다렸다. 그동안 엄마와 언니 그리고 내게 비어 있는 무언가를 생각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욕망하기 마련인데, 우리 세 사람이 욕망하는 건 다르게 보면 다르지만 또 비슷하게 보면 비슷한 것도 같았다.
-p.97 「빈뇨 감각」 중에서
이 책의 제목인 '녹색 갈증'은 사회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이 말한 '녹색 갈증'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인간에게는 자연과 생명체에 이끌리는 경향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은 자연스러운 증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 책 『녹색 갈증』에서 말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에드워드 윌슨의 주장대로라면 자연과 관련된 공간이며 이 책 속 주인공이 주로 찾는 공간인 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 속에서 '산'은 실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연필을 굴리지 않아야 그려지는 공간인 상상의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나'뿐만 아니라, 나와 관련된 인물들인 엄마, 명, 윤조 등도 가고 싶어하고 좋아하는 공간이다.
오직 나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세계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인 윤조, 윤조와 나는 어떤 관련이 있을까. '윤조'는 내가 쓴 소설 속에 존재하는 인물이며 <프롤로그>에서 나는 소설 속에 '윤조' 남겨두고 도망친다. 소설 속에서 어떤 결말도 짓지 않은 채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소설 속에 남겨두고 도망친 윤조가 다시 등장한다. 이제는 어린 모습의 윤조가 아닌 어른이 되어버린 윤조가 다시 등장한다. <뒷장으로부터>에는 어른이 되어 다시 나타난 윤조와 나의 엄마, 언니와의 만남이 잘 드러나 있다. 그들은 한 번도 '윤조'를 본 적이 없지만 나보다 더 좋은 관계를 맺으며 윤조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마치 윤조의 모습이 내가 닮고 싶은, 내가 바라는 나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하다.
“윤조가 나오는 나의 소설은 분명히 끝을 맺었지만 윤조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을 것이고, 지독하게 살아남아서 어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작품에 등장하는 '보석함'은 무슨 의미일까. <프롤로그>에서는 소설 속 세계 속에 윤조 할머니가 애지중지하는 보석함으로 등장하고, <뒷장으로부터>에서는 어른이 된 윤조가 내가 사는 세상으로 다시 올 수 있는 중간 매개체로 존재한다. 그 보석함으로부터 윤조가 다시 등장했으니깐 말이다.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은 텅빈 보석함, 오히려 비었기에 더 많은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일까. 왠지 보석함이 화자인 내가 바라는 꿈, 희망, 녹색 갈증같은 세계를 의미하는 것 같다.
어쩌면 재미없는 꿈을 꾸거나 아무런 꿈도 꾸지 못해도 나는 습관처럼 보석함을 여닫게 될지도 몰랐다. 이해되지 않는 것들은 왜 자꾸 나를 살고 싶게 하는지. 나비 모양으로 새겨진 자개는 볼 때마다 색과 빛이 달라졌고 보석함은 벽돌처럼 묵직해서 존재의 무게감이 확실했다. 온 힘을 실어 사람의 머리통을 가격한다면 강력한 무기로도 손색없을 것 같았다. 기분에 따라 열리지 않을 때도 있으니 소중한 걸 보관하거나 끔찍한 것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일 것이며 어느 날은 손을 대지 않아도 저절로 입을 벌린 채 새로운 욕이나 이상한 이야기를 지껄일 수도 있겠다.
-p. 148-
저자는 작가답게 글쓰기를 통해 윤조를 만나고 자신의 갈증 또한 해소하려고 한다. 정말 작가의 말처럼 글쓰기를 통해 그 갈증을 해소할 수 있을까. 끊임없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안으로 제시된 글쓰기에는 나도 공감한다. 나 또한 글쓰기를 통해 책읽기에 대한 목마름과 끊임없는 불안을 해소할 수 있으니깐 말이다.
분명 쉽지 않은 소설이었지만, 다시 한번 천천히 읽으면서 작가의 전하고자하는 메시지의 의미를 깊이 새겨보아야겠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2/0708/pimg_7526911563476794.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