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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강하다
김청귤 지음 / 래빗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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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이맘때, 어느 유력 정치인이 노년층의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구설수에 오른 일이 있다. 그밖에도 노인들을 비하하거나 애물단지 취급하는 일을 우리는 종종 볼 수 있다. 초고령 사회로 진입함에 따라 노인 문제는 이제 우리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안이 되었지만, 우리 사회가 이에 대한 현명한 대처를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아니, 오히려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65세 이상의 노인들이 좀비로 변하는 극단적인 세상을 이야기한다. ‘태전’이라는 도시에서 갑자기 노인들이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정부는 태전시를 봉쇄하고 만다. 주인공 ‘강하다’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할머니와 지낸 시간이 많았기에, 차마 할머니를 두고 갈 수가 없었다. 하다는 태전에 남아 할머니를 돌보고, 미처 대피하지 못하고 태전에 남은 사람들을 보살피는 역할을 맡는다.


소설 속 사회는 무척이나 냉혹하다. 좀비가 되어버린 노인들을 무참히 차로 들이받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남의 위험을 아랑곳 않고 생필품을 독차지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 속에서 주인공 하다는 남다른 달리기 실력을 발휘하여, 위험을 무릅쓰고 좀비들을 피해 생필품을 구해 온다. 오지랖이 넓은 할머니를 못 미덥게 여기던 하다는, 어느새 할머니와 닮은 오지랖으로 남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구원’을 안겨 준다.


다리가 불편한 친구 ‘은우’나, 생후 50일 된 아기와 아기 엄마, 빈집에 남아 부모를 애타게 기다리는 초등학생 ‘지민’은 어찌 보면 모두 ‘사회적 약자’이다. 좀비 노인이 무섭지만 차마 대피할 수 없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하다는 그들을 한 집에 모아 보살펴 주고, 봉쇄가 풀릴 날만을 기다리며 서로를 의지한다. 그들은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지만,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하며, 진정한 의미의 ‘식구’가 된다.


사전을 찾아보면, ‘젊다’는 형용사인 반면에 ‘늙다’는 동사라는 흥미로운 사실을 알 수 있다. 왜일까?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늙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언젠가는 늙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노인들을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노인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이 소설이 내놓는 해답은 ‘사랑’이다. 아낌없는 관심과 사랑이 만들어내는 ‘연대’가, 이 칙칙한 사회를 다시금 활력 있게 만들어 주리라.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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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뉴어리의 푸른 문
앨릭스 E. 해로우 지음, 노진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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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의 시대이자 합리성의 시대, 평화의 시대이자 번영의 시대였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차별이 잔존하는 시대였다. 이 소설의 주인공, ‘재뉴어리’가 정체불명의 푸른 문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그녀는 문 너머로 은빛 바다가 펼쳐진 신비한 세계를 보았지만, 그녀의 후견인인 ‘로크 씨’는 그녀의 말을 허무맹랑한 소리로 여긴다.


재뉴어리는 어릴 적 엄마를 잃고, 아버지가 로크 씨에게 고용되며 로크 씨의 대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을 목적으로 하는 고고학 협회의 회장인 로크 씨는, 진귀한 보물들을 수집하기 위해 전 세계에 직원들을 파견했다. 재뉴어리의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아버지가 전 세계를 떠돌며 유물을 발굴하러 다닐 동안, 재뉴어리는 로크 씨의 대저택에 맡겨져 그의 보살핌을 받게 된다.


재뉴어리는 유복한 생활을 누리지만, 그 속에는 엄격한 훈육과 통제가 존재한다. 유색인종인 재뉴어리 또한 수많은 진귀한 보물들 사이에 존재하는 하나의 보물처럼 여겨진다. 재뉴어리는 우연히 발견한 푸른 문 너머의 세계를 열망하게 되었고, 아버지가 남긴 〈일만 개의 문〉이라는 책을 통해 비밀을 알게 된다.


몇 년 후,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지만 재뉴어리는 문 너머의 세계 어딘가에 아버지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험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로크 씨 일당은 그녀의 모험에 시시각각 훼방을 놓는다. 그들은 재뉴어리가 어떠한 비밀을 알게 되기를 두려워한다. 재뉴어리의 모험은 우여곡절의 연속이지만, 조력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문 너머의 세계를 향한 모험을 멈추지 않는다.


유색인종과 여성에게 관대하지 않던 시기, ‘문’이란 그들이 뛰어넘어야 할 차별의 벽이기도 한다. 억압과 통제 속에서 성장한 재뉴어리가 그 문을 뛰어넘고자 하는 결심은 가히 용기가 필요한 행위였고, 문 너머의 세계에 도달한 재뉴어리가 마주한 것은 그저 새로운 세계만이 아닌 한 단계 성장한 자신이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에는 어떤 ‘문’이 존재할까? 그 문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얼마만큼의 용기가 필요할까? 그저 한 소녀의 모험담에 그치지 않고, 우리가 마주할 수많은 문들을 넘어설 용기를 전달하는 흥미로운 소설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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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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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자가 생각보다 잔인한 글자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가령, ‘民(백성 민)’은 사람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卯(토끼 묘)’는 사람을 반으로 쪼개어 걸어 놓은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언어가 사회를 반영한다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문자 또한 그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랜 시간 숨겨졌던 비밀은 훗날 은허(殷墟) 유적에서 갑골문이 발굴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 발굴은 흔히 우리가 ‘은(殷)’으로 알고 있는 오랜 왕조의 존재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잔인한 인신공양 문화가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은(殷)’은 ‘반경(盤庚)’이 천도한 최후의 수도 이름이며, 본래의 이름은 ‘상(商)’이다. 지금은 주로 ‘장사’의 의미로 쓰이는 글자인데, 이는 마차와 같은 발달된 운송 수단을 기반으로 멸망 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무역업에 종사한 그들의 이력에서 유래한다. 중국 대륙에서 발흥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초기 국가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왕조를 구축한 그들에게는 어떠한 비결이 존재했을까? 그것은 바로 ‘종교’였다. 거북이 등껍질을 불태워 점을 쳤다는(‘점 복(卜)’ 자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귀갑의 균열에서 글자의 모양을, 쪼개지는 소리에서 음을 취했다고 추정된다) 풍습은 알려져 있지만, 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그들만의 풍습은 ‘인신공양’이었다.


인신공양이라는 야만적인 문화가 상나라의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적을 사로잡아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는 아즈텍 문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상나라의 인신공양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이 책에는 차마 옮겨 적지 못할 만큼 잔인한 여러 가지 살육 행위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으며, 그 횟수 또한 무수히 많다. 가령 상나라의 전성기로 꼽히는 ‘무정(武丁)’ 시기의 희생자 수는 9021명에 달하는데, 이는 갑골에 기록된 횟수만을 담은 것이다. 심지어 인신공양을 기록하기 위한 글자도 만들어 썼는데, ‘戈(창 과)’를 부수로 하는 많은 글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가령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伐(칠 벌)’, 두 사람을 죽이는 것은 ‘殲(다 죽일 섬)’으로 썼으며, 사람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글자는 훗날 ‘職(벼슬 직)’으로 남았다.


이 잔인한 왕조를 몰락시킨 것이 바로 후대의 ‘주(周)’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이면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달리 그닥 아름답지 못하다. 주색에 탐닉한 ‘주(紂)’의 폭정으로 상나라가 멸망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인신공양에 따른 상나라의 일상적인 문화와 주나라의 의도적인 폄하가 섞인 내용일 뿐이다.


사실 주나라를 건국한 ‘주족(周族)’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주원(周原)으로 이주한 이래 이민족을 사냥해서 상나라에 제물로 바치는 일을 맡아 왔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상나라에서 오랜 감금 생활을 했고, 자신의 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인신공양의 제물로 잃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문왕은 절치부심하며 상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상나라의 점술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하늘의 뜻을 깨우쳐 〈역경(易經)〉을 저술한다. 다만 당시에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실로 대역무도한 것이었으므로, 문왕은 이를 모호한 말로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역경(易經)〉의 해석에 대해 논쟁이 분분한 데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문왕은 상나라에 공납하기 위해 종종 사냥했던 강족(羌族)과 손을 잡는다. ‘강태공(姜太公)’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도 유명한 ‘여상(呂尙)’ 역시 강족 출신으로, 주나라의 사냥감이 될 뻔했던 인물이다. 은허의 어느 도살장에서 천민으로 살던 그는 ‘상나라 정벌’이라는 웅대한 목표를 가진 문왕을 지지했고, 자신의 원수였을지도 모를 주나라에 협력한다. 이후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과 동생 ‘주공(周公)’의 도움을 받아 상나라 정벌에 성공한다. 이때 주공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의 개념으로 정립하며 무왕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무왕 역시 상나라 정벌 후 인신공양 의식을 치렀는데, 이는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아마 상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무왕이 자연스럽게 ‘상화(商化)’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상나라는 망했지만 이미 강성했던 상나라 문화는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무왕이 죽은 후 사실상 왕권을 잡은 주공의 업적이다. 그는 상나라의 기록을 없애고 유민 집단을 해체했으며, 자신들의 참혹한 과거마저 말살해버리는 것으로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고공단보 이래 상나라와 주나라 간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껏 발견된 수많은 갑골에서 ‘주(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를 남겼을 정도로 〈역경〉에 집착했던 공자가 끝끝내 그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역사를 깨닫고 말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하지만 공자는 상나라 왕족의 후예인 자신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고, 후세에게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기억을 없애 준 주공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에서 이를 심연 속으로 깊이 묻고자 했을 것이며, 결국 상나라의 기억을 상실한 채로 ‘육경(六經)’이 현재까지 전해졌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공자의 노력은 장장 삼천여 년 간 유지되었고, 상나라 유적이 발굴되고서야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 것이다.


각주를 제하고도 891페이지나 되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벽돌 책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생생하고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상나라의 문화가 그토록 잔인했을지라도, 이를 모두 은폐하고 주왕(紂王)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주나라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본문 어딘가에 등장하는 저자의 말은 더욱 오묘하다. “야만적이고 황량한 상고시대에 대해 우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주 적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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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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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내전’이라 하면 왠지 이런 그림을 떠올릴 것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전은 좀 더 포괄적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 당사자들 간의 경쟁, 특히 계급 투쟁’이라고, 저자들은 내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장’이라는 하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는 ‘내전’이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것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유혈 사태로 번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회 내부의 두 세력 간의 충돌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과 맞서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전략에 따른 결과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저자들은 여러 장을 할애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을 ‘내전’과 ‘대중 혐오’, ‘법치’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하며, 이를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1973년, 칠레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고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피노체트는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권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권력 찬탈을 정당화했고, 노조의 권리를 엄격히 제한하고 전면적인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파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이윽고 1980년 개헌을 통해 국민주권마저 빼앗고 만다. 흔히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독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가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여론의 지배, 혹은 우매한 대중을 위험 요소로 여겨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대중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강한 국가’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한 국가는 대중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는 초월적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재나 국가 폭력과 같은 수단도 때로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사법(私法, droit)을 헌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인식대로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적(敵)을 규정하여 사회 내부의 계층 간 전쟁을 종용한다. 가령 2019년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임금 인상과 간접세 인하 등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했고, 언론과 정치권은은 이들에 대한 비방과 낙인 찍기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이는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이다.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일부 엘리트 계층이 적과 싸우는 데서 나아가 대중의 일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갈등의 장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쉽게 관찰되고 있다. 가령 세대 갈등이라던가 성별 간의 혐오, 좌우 진영의 대립, 능력주의의 맹신 등이 있다. 이러한 갈등의 주체들이 서로의 이해 관계를 수용하고 조정함으로써 내전은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갈등을 조장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다면 매우매우 어려운 책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은 와 닿았다.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인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종해 왔고, 그 과정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대항,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혁명’이다.


22대 총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뉴스를 통해 다양한 편 가르기를 목도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의료 서비스에 차질이 생긴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표를 모으기 위해 서로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게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권리 행사로, 크게는 지배층의 엉큼한 속내를 깨닫고 휘둘리지 않는 것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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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에밀 졸라와 폴 세잔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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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우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백아와 종자기가 그러하고 관중과 포숙아가 그러하다. 그리고 여기, 에밀 졸라와 폴 세잔이 있다. 두 사람이 죽마고우였지만 말년에 절연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가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에 세잔의 모습을 투영한 ‘실패한 화가’를 등장시킨 일이라고 세간에는 널리 알려져 있던 모양이다(나는 몰랐다).


하지만 세잔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까닭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투서로도 널리 알려진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극명히 대립되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포용하기보다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 활동에 매진했고,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도시의 지식인의 이미지를 가진 에밀 졸라와, 보수적이고 촌스러운 이방인의 이미지를 가진 폴 세잔,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면이 많지만 닮은 점도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충만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각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버텼던 까닭에는 그러한 반항심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반항심은 창조를 낳았고, 그 근저에는 뜨거운 우정이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겨우 정치적 입장차로 깨졌다는 사실이 의아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다. 당시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이했고, 민족주의 사상이 고조되어 반유대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때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운 이 사건으로 프랑스 내에는 극심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단순히 ‘정치 성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복잡하다.


결국 두 사람이 만년에 이룩한 예술 세계는 고독으로 완성되었지만, ‘안정과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일치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이자 ‘브로맨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금은 생소한 두 사람의 일생과 당대 프랑스의 정치 상황, 예술 경향도 소상히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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