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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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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한자가 생각보다 잔인한 글자라는 사실을 알 것이다. 가령, ‘民(백성 민)’은 사람의 눈을 찌르는 모습을, ‘卯(토끼 묘)’는 사람을 반으로 쪼개어 걸어 놓은 모습을 본뜬 글자이다. 언어가 사회를 반영한다는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러한 문자 또한 그 문화를 고스란히 반영한 흔적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한다. 오랜 시간 숨겨졌던 비밀은 훗날 은허(殷墟) 유적에서 갑골문이 발굴되며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이 발굴은 흔히 우리가 ‘은(殷)’으로 알고 있는 오랜 왕조의 존재를 증명함과 동시에, 그들의 잔인한 인신공양 문화가 세상에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은(殷)’은 ‘반경(盤庚)’이 천도한 최후의 수도 이름이며, 본래의 이름은 ‘상(商)’이다. 지금은 주로 ‘장사’의 의미로 쓰이는 글자인데, 이는 마차와 같은 발달된 운송 수단을 기반으로 멸망 후 이곳저곳을 떠돌며 무역업에 종사한 그들의 이력에서 유래한다. 중국 대륙에서 발흥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수많은 초기 국가들 사이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왕조를 구축한 그들에게는 어떠한 비결이 존재했을까? 그것은 바로 ‘종교’였다. 거북이 등껍질을 불태워 점을 쳤다는(‘점 복(卜)’ 자는 여기에서 유래했다. 귀갑의 균열에서 글자의 모양을, 쪼개지는 소리에서 음을 취했다고 추정된다) 풍습은 알려져 있지만, 더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그들만의 풍습은 ‘인신공양’이었다.


인신공양이라는 야만적인 문화가 상나라의 것만은 아니다. 대표적으로 적을 사로잡아 제사에 희생물로 바치고,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는 아즈텍 문명이 존재한다. 하지만 상나라의 인신공양은 지나치게 잔인하다. 이 책에는 차마 옮겨 적지 못할 만큼 잔인한 여러 가지 살육 행위가 적나라하게 적혀 있으며, 그 횟수 또한 무수히 많다. 가령 상나라의 전성기로 꼽히는 ‘무정(武丁)’ 시기의 희생자 수는 9021명에 달하는데, 이는 갑골에 기록된 횟수만을 담은 것이다. 심지어 인신공양을 기록하기 위한 글자도 만들어 썼는데, ‘戈(창 과)’를 부수로 하는 많은 글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가령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은 ‘伐(칠 벌)’, 두 사람을 죽이는 것은 ‘殲(다 죽일 섬)’으로 썼으며, 사람을 죽이기 위해 기다리는 상태를 의미하는 글자는 훗날 ‘職(벼슬 직)’으로 남았다.


이 잔인한 왕조를 몰락시킨 것이 바로 후대의 ‘주(周)’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그 이면의 이야기는 우리가 아는 바와는 달리 그닥 아름답지 못하다. 주색에 탐닉한 ‘주(紂)’의 폭정으로 상나라가 멸망했다고 역사는 기술하고 있지만, 이는 인신공양에 따른 상나라의 일상적인 문화와 주나라의 의도적인 폄하가 섞인 내용일 뿐이다.


사실 주나라를 건국한 ‘주족(周族)’은 고공단보(古公亶父)가 주원(周原)으로 이주한 이래 이민족을 사냥해서 상나라에 제물로 바치는 일을 맡아 왔다. 주나라 ‘문왕(文王)’은 상나라에서 오랜 감금 생활을 했고, 자신의 아들 ‘백읍고(伯邑考)’를 인신공양의 제물로 잃는 비극적인 일을 당하기도 했다. 문왕은 절치부심하며 상나라를 정벌하겠다는 야망을 품고, 상나라의 점술을 오랜 시간 연구한 끝에 하늘의 뜻을 깨우쳐 〈역경(易經)〉을 저술한다. 다만 당시에 이런 책을 쓴다는 것은 실로 대역무도한 것이었으므로, 문왕은 이를 모호한 말로 에둘러 표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껏 〈역경(易經)〉의 해석에 대해 논쟁이 분분한 데는 이러한 사정이 있었다.


문왕은 상나라에 공납하기 위해 종종 사냥했던 강족(羌族)과 손을 잡는다. ‘강태공(姜太公)’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주나라의 개국공신으로도 유명한 ‘여상(呂尙)’ 역시 강족 출신으로, 주나라의 사냥감이 될 뻔했던 인물이다. 은허의 어느 도살장에서 천민으로 살던 그는 ‘상나라 정벌’이라는 웅대한 목표를 가진 문왕을 지지했고, 자신의 원수였을지도 모를 주나라에 협력한다. 이후 문왕의 아들 ‘무왕(武王)’이 강태공과 동생 ‘주공(周公)’의 도움을 받아 상나라 정벌에 성공한다. 이때 주공은 ‘덕(德)’이라는 개념을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의 개념으로 정립하며 무왕을 도왔다고 한다.


하지만 무왕 역시 상나라 정벌 후 인신공양 의식을 치렀는데, 이는 어떤 의미일까? 저자는 아마 상나라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무왕이 자연스럽게 ‘상화(商化)’되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상나라는 망했지만 이미 강성했던 상나라 문화는 남아 있으므로 그것을 답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상나라의 인신공양 문화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무왕이 죽은 후 사실상 왕권을 잡은 주공의 업적이다. 그는 상나라의 기록을 없애고 유민 집단을 해체했으며, 자신들의 참혹한 과거마저 말살해버리는 것으로 그 목표를 성공적으로 달성했다. 고공단보 이래 상나라와 주나라 간 많은 교류가 있었지만, 지금껏 발견된 수많은 갑골에서 ‘주(周)’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위편삼절(韋編三絶)’이라는 고사를 남겼을 정도로 〈역경〉에 집착했던 공자가 끝끝내 그 이면에 숨겨진 잔혹한 역사를 깨닫고 말았을 것이라는 가정을 한다. 하지만 공자는 상나라 왕족의 후예인 자신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고, 후세에게 잔인하고 치욕스러운 기억을 없애 준 주공에게 경의를 표하는 마음에서 이를 심연 속으로 깊이 묻고자 했을 것이며, 결국 상나라의 기억을 상실한 채로 ‘육경(六經)’이 현재까지 전해졌을 것이라고 저자는 추측한다. 공자의 노력은 장장 삼천여 년 간 유지되었고, 상나라 유적이 발굴되고서야 진실이 드러나고야 만 것이다.


각주를 제하고도 891페이지나 되는 어마어마한 두께의 벽돌 책이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도 생생하고 흡인력 있게 읽힌다. 그리고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상나라의 문화가 그토록 잔인했을지라도, 이를 모두 은폐하고 주왕(紂王)에게 모든 책임을 넘긴 주나라의 선택은 과연 옳았을까? 본문 어딘가에 등장하는 저자의 말은 더욱 오묘하다. “야만적이고 황량한 상고시대에 대해 우리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주 적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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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전, 대중 혐오, 법치 - 신자유주의는 어떻게 지배하는가
피에르 다르도.크리스티앙 라발.피에르 소베트르 지음, 정기헌 옮김, 장석준 해제 / 원더박스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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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 아닙니까?”


‘내전’이라 하면 왠지 이런 그림을 떠올릴 것 같지만, 여기서 말하는 내전은 좀 더 포괄적이다. ‘서로 다른 사회적 이해 당사자들 간의 경쟁, 특히 계급 투쟁’이라고, 저자들은 내전을 이렇게 정의한다. ‘시장’이라는 하나의 정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신자유주의는 ‘내전’이라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것은 경찰력을 동원하여 유혈 사태로 번지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내전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사회 내부의 두 세력 간의 충돌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자유’의 이름으로 ‘평등’과 맞서는, 신자유주의의 주요 전략에 따른 결과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그리고 최근의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며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지만, 저자들은 여러 장을 할애하며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의 지배 전략을 ‘내전’과 ‘대중 혐오’, ‘법치’라는 키워드로 이야기하며, 이를 타개할 새로운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1973년, 칠레의 장군 ‘아우구스토 피노체트’는 쿠데타를 일으켜 살바도르 아옌데의 좌파 정부를 전복시키고 최초의 신자유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피노체트는 ‘법으로부터도 자유로운 권력’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권력 찬탈을 정당화했고, 노조의 권리를 엄격히 제한하고 전면적인 민영화를 추진하는 등 파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도입했으며, 이윽고 1980년 개헌을 통해 국민주권마저 빼앗고 만다. 흔히 시장에 모든 것을 맡긴다는 개념으로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독재와 어울리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신자유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을 밑바탕에 깔고 있기에 가능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여론의 지배, 혹은 우매한 대중을 위험 요소로 여겨 민주주의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어떻게 대중의 권력을 제한할 것인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 해답으로 ‘강한 국가’의 필요성이 등장한다. 여기서 강한 국가는 대중의 요구를 차단할 수 있는 초월적 국가를 의미한다. 따라서 독재나 국가 폭력과 같은 수단도 때로는 정당화될 수 있으며, 시장 질서를 수호하기 위해 사법(私法, droit)을 헌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서슴지 않는다.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인식대로 자유시장경제를 신봉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내부의 적(敵)을 규정하여 사회 내부의 계층 간 전쟁을 종용한다. 가령 2019년 프랑스에서는 ‘노란 조끼 운동’이라는 임금 인상과 간접세 인하 등 평등에 대한 요구를 무자비한 탄압으로 응했고, 언론과 정치권은은 이들에 대한 비방과 낙인 찍기를 통해 대중에게 공포심을 조장했다. 이는 비단 프랑스뿐만이 아닌 전 세계에서 관찰되고 있는 현상이다.


현대의 신자유주의는 일부 엘리트 계층이 적과 싸우는 데서 나아가 대중의 일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갈등의 장으로 뻗어나갔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현상이 쉽게 관찰되고 있다. 가령 세대 갈등이라던가 성별 간의 혐오, 좌우 진영의 대립, 능력주의의 맹신 등이 있다. 이러한 갈등의 주체들이 서로의 이해 관계를 수용하고 조정함으로써 내전은 평화롭게 마무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러한 갈등을 조장하는 주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신자유주의라는 개념에 익숙지 않다면 매우매우 어려운 책이다.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이 책을 제대로 이해했다고는 생각지도 않고, 아마도 잘못 이해하고 서술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조금은 와 닿았다.


“낡은 것은 갔는데 왜 새것은 오지 않는가?”


의미심장한 말이다. 신자유주의는 종식된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인류를 일정한 방향으로 조종해 왔고, 그 과정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과연 이 시대의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저자들이 이 두꺼운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로막는 장애물에 대한 대항, 좀 더 그럴싸하게 말하자면 ‘혁명’이다.


22대 총선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우리는 뉴스를 통해 다양한 편 가르기를 목도하고 있다. 의대 정원 확대에 대한 반발로 의료 서비스에 차질이 생긴 지금도,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권은 표를 모으기 위해 서로를 헐뜯는 데 혈안이 되어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작게는 우리가 가진 소중한 권리 행사로, 크게는 지배층의 엉큼한 속내를 깨닫고 휘둘리지 않는 것으로 대항할 수 있을 것이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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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과 창조의 브로맨스 에밀 졸라와 폴 세잔
박홍규 지음 / 틈새의시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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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터운 우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을 우리는 여럿 알고 있다. 백아와 종자기가 그러하고 관중과 포숙아가 그러하다. 그리고 여기, 에밀 졸라와 폴 세잔이 있다. 두 사람이 죽마고우였지만 말년에 절연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이유가 에밀 졸라가 소설 〈작품〉에 세잔의 모습을 투영한 ‘실패한 화가’를 등장시킨 일이라고 세간에는 널리 알려져 있던 모양이다(나는 몰랐다).


하지만 세잔은 그렇게 옹졸한 사람이 아니었다. 사실 두 사람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 까닭은,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투서로도 널리 알려진 ‘드레퓌스 사건’이었다. 두 사람의 정치적 입장이 극명히 대립되었기 때문에 둘은 서로를 포용하기보다는 각자의 길을 걷기로 한 것이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각자의 자리에서 예술 활동에 매진했고, 서로를 그리워하기도 했지만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진보적이고 세련된 도시의 지식인의 이미지를 가진 에밀 졸라와, 보수적이고 촌스러운 이방인의 이미지를 가진 폴 세잔, 두 사람은 확연히 다른 면이 많지만 닮은 점도 많았다. 어린 시절에는 사회적으로 소외된 처지였지만, 그럼에도 세상에 대한 반항심으로 충만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하는 아픔도 겪었지만 각기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하며 버텼던 까닭에는 그러한 반항심이 자리 잡고 있었으리라. 반항심은 창조를 낳았고, 그 근저에는 뜨거운 우정이 있었다.


두 사람의 우정이 겨우 정치적 입장차로 깨졌다는 사실이 의아하지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을 들여다보면 그렇게 가볍게 치부할 수는 없다. 당시 보불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는 혼란스러운 정국을 맞이했고, 민족주의 사상이 고조되어 반유대주의를 탄생시켰다. 그때 유대인 장교 드레퓌스에게 스파이 혐의를 씌운 이 사건으로 프랑스 내에는 극심한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인 대립 관계가 형성되었다. 단순히 ‘정치 성향’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깊고 복잡하다.


결국 두 사람이 만년에 이룩한 예술 세계는 고독으로 완성되었지만, ‘안정과 조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묘하게 일치한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우정이자 ‘브로맨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널리 알려져 있지만 조금은 생소한 두 사람의 일생과 당대 프랑스의 정치 상황, 예술 경향도 소상히 담고 있어 흥미로웠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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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태도 - 기억은 사라져도 기록은 남는다
이수현 지음 / 지식인하우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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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에는 글쓰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일기 쓰기는 하루 일과 중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아마도 ‘강요당한’ 글쓰기여서 그랬으리라. 내가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된 것은 좀 더 크고 나서의 일이다.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감정들을 오래오래 간직하고 싶어서, 혹은 그 감정을 남들과 공유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자발적인’ 글쓰기는 지금껏 나의 ‘취미’가 되어 있다. 물론 아직도 일기는 쓰지 않지만, 책을 읽고 그때그때의 감상을 남기는 서평 쓰기가 일종의 꾸준한 글쓰기 습관이 되어, 지금은 하나의 낙으로 자리 잡았다.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또래(라고 하고 싶다😂)인 이수현 작가님의 일상은 여러모로 나와 닮았다. 지금은 직장인이자 작가, 대학원생으로 분주하게 살고 있는 작가님은, 고달팠던 취업 준비 기간에 홀로 고뇌하다가, 가장 행복했던 ‘나’는 역시 ‘글을 쓰는 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역시 지난했던 취업 준비 기간에 밤마다 짧은 글을 쓰며 복잡한 심경을 달래곤 했고, 오랜 직장 생활에서 원인 모를 무력감과 자괴감을 느껴 대학원에 진학했기 때문에 많은 동질감을 느꼈다.


그렇게 바쁜 일상 속에서 꾸준히 집필 활동을 한다는 것은 더욱이 힘든 일이다. 작가님은 오히려 다양한 자아로서의 경험이 다양한 글감을 낳았다고, 하나의 자아가 무너질지라도 다른 자아로서 힘을 되찾아 다시 일어설 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마도 그러한 경험들이 차곡차곡 쌓여 전작 《유리 젠가》가 탄생했을 것이라고 나는 짐작했다. 순간, 일상이 무료하다는 핑계로, 또는 바쁘다거나 피곤하다는 핑계로 글쓰기를 접어 두고 있었던 내가 부끄러워졌다.


작가님이 말하는 ‘기록하는 태도’는 거창하지 않다. 자유롭게, 천천히 사유하며, 자신의 마음을 담는 것이다.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타인의 강제에 의한 기록은 자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을 수 없다. 내가 어릴 적부터 지금껏 ‘일기 쓰기’를 싫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진심에서 우러나온 글은 자기 자신을 더욱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고, 남들에게 진실한 마음을 전달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아직은 작고 미약하지만, 나도 나만의 ‘추억의 책장’을 열심히 채워 갈 힘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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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밖의 사람 - 어느 소설가의 택배일지
정혁용 지음 / 마이디어북스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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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때문에 대부분의 작가들은 본업을 따로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설 〈침입자들〉과 〈파괴자들〉의 정혁용 작가 역시 그러하다. 소설 〈침입자들〉을 읽으며, 주인공의 직업인 택배기사의 삶이 정말 현실적으로 그려져서 놀랐는데, 작가님의 본업 역시 택배기사라는 말에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낮에는 택배기사로, 밤에는 소설가로 살아가는 삶이 궁금했기에, 작가님이 에세이를 출간하셨다는 소식은 내게 큰 기쁨으로 다가왔다.


사실 ‘잘 안다’고 하기에는 부족하지만, 짧게나마 택배 일에 몸을 담았던 적이 있다. 택배 일은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굉장히 고된데, 일단 꼭두새벽에 집을 나서서 밤 늦게 들어오는 일이 허다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만큼 진상을 만날 확률도 높다. 언젠가는 ‘걸어 왔다고’ 면박을 주는 인간을 만난 적도 있다. 아무리 감정적으로 엮이지 않으려 해도 사람인지라, 화에 휩쓸리기 십상이다. 작가님은 그 진상들에게 화를 내기도 지쳐서, 그리고 똥에 시간을 투자하기 아까워서 화를 내지 않게 됐다고 말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가히 인생을 통달한 현자를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작가님의 전작을 읽어봤더라면, 주인공의 시니컬한 말투가 인상 깊게 다가왔을 것이다. 에세이를 읽으며, 작가님이 살아온 시간들이 그 시니컬함을 만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힘든 시간들 속에서도 ‘소설’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점이 멋지게 느껴졌다. “포기하고 싶지만 좋아서 참는다”는 것, “그저 퇴근해서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러 가듯” 글을 썼다는 대목에서, 고된 현실도 사그라뜨리지 못한 작가님의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작가님은 스스로를 “고만고만한 인생을 고만고만하게 살아온 사람”이라 말하지만, 나는 가히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멋진 사람’이라 말하고 싶다. 오디오북으로 책을 들으며, 틈틈이 휴대폰으로 글을 쓰는 열정은 아무나 가질 수 없다. (아마도 작가님은 낯간지러워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그 열정 끝에 자리한 인생의 의미에 진정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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