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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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연대
<체르노빌의 아이들>, 히로세 다카시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9 With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20 <체르노빌>, HB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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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황홀했다! 봄의 초원에 꽃이 폈고, 숲의 녹음은 부드러웠으며 봄 향기를 내뿜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자라며 노래하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름아움과 두려움의 어울림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203).<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봄과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6분 이후로 일상의 시계는 멈추었다. 이후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피폭된 사람, 그들의 아이, 미래의 태어날 생명 모두 피폭 이전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체르노빌레츠(원전 사고로 피폭된 사람)’로의 삶을 시작 하였다. 삶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고통뿐이었다. 5월이면 장미꽃이 만발했던 프리프야트에서 장미꽃 향이 가득한 정원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삶과 자연의관객이 되었다.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원전 피폭 이후 일상이 멈춰버린 체르노빌레츠의 이야기이고, 무기력하게 우리의 삶이 국가에 의해 짓밟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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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미국 HBO의 5부작 <체르노빌>의 첫 대사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거짓의 대가를 ‘체르노빌레츠’라는 용어로 알 수 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누가 거짓을 믿었는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국가주의와 국가를 너무 믿어 벌어진 하나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인재이다. ”발전소는 (중략) 착실히 진화작업을 진행중이라는 연락이 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되돌아간 결사대원들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54) 국가는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앞일에 대한 불안일랑 떨쳐 버리고 당국의 지시대로 따라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70) 사고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조지 오웰의 <1984>의 닮음꼴이었다. 소설은 전체주의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소설 속에서는 오브라이언을 통해 “당이 진실이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고,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서는 실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당에 의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당원들은 믿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고르바초프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중략) 나는 믿었다. (중략) 우리는 믿는 데 익숙했다. (중략) 그게 당의 기강이었고,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중략) 이런 믿음이 깨지면 많은 이들이 뇌졸중에 걸리거나 자살을 한다. 학자 레가소프처럼 심장에 총알을 박는다.“(279) 시민들은 국가를 믿었다. 원전 사고로 소방관과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믿었다. 평화적 핵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시민들은 정부에서 반복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을 믿었다. 사고 후에 맞이하는 메이데이를 경축함으로써 지금의 공포를 잊고자 노력했다“(143) 그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이오로봇(인간)이 되어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핵을 삽으로 퍼는’ 기이한 일을 하였고, 국가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원전 사태가 해결되어 가고 있다며 거짓 선동을 하였다. ”푸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하라고 하니 해야 되는 것이었다. 조국이 부르고 조국이 명령했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270) 타냐가 말한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공개 정책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선전하면서도 뒤로는 진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독일 한 사회학자는 출판 계획을 앞당겼다. 그는 21세기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한 ‘울리히 벡’이다. 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위험사회란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다. 다가올 미래는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위험은 지역과 계층에 관계없이 평준화가 되고 있어 “부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에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위험사회의 인자와 배경으로서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과 금용자본, 무절제한 환경 파괴, 억압당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 정보사회의 위험성 등을 지적했다.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 재난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위험을 ‘생산된 위험’, 생산된 불확실성‘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별 위험이 아니지만 그 대처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이 개입해 재앙이 되고 마는, ’인위적 위험‘이라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무리한 원전 가동으로 인한 원자로 폭발로 일어난 ’인위적인 위험‘이다. 원전사고 당시의 당직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생산한 위험이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인간의 잘못이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성찰적 근대‘를 말한다. 성찰적 근대란 위험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국가와 전문가만 독점하지 말고 시민들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공론의 장을 만들어 해결에 동참하는 사회다. 지식과 과학기술 전 과정을 시민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정부와 시민과의 성실한 소통이다. 우리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에서 발표하는 정보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단, 정보제공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진실이어야 한다. 거짓의 대가는 참혹했다.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간에 어떤 위험을 참아낼 수 있는가, 어떤 위험을 우선 관리할 것인가’ 하는 합의를 도출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해야한다. 진실의 대가는 최소한의 피해와 안전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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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바로 저 폭발 때문에 생긴 거야. 그래, 난 절대 잊지 않겠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거야.(72) 이반 세로프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겠다고 한다. “원전 부근의 자연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체르노빌레츠은 고통을 받고 있다. 인재(人災)로 인한 사고는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기억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고 앞으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대형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후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자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회불안을 낳고, 개인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된다.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중략)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체르노빌의 목소리> 사건이 발생한 초기 국가권력에 의한 거짓 선동으로 체르노빌에서는 방사능 피폭이 있었다. 방사능 피폭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피폭된 주민, 현장에 투입된 인력, 과학자를 통해 이 사건의 참혹한 실상을 기록하고 보존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재검토와 피해가 발생된 지역과 주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기억과 기록 그리고 보존의 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사고의 기억과 기록이 보존되어야 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 부서져 버린 이루진 못한 꿈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대형 선박이 침몰한다. 이 사건으로 304명의 희생이 생겼고 그날 이후 그들의 꿈과 삶은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국가형 인재(人災)이다. 4월 16일 오전 10시 31분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된다. 최초 사고 신고는 오전 8시 52분. 9시 30분 해경 헬기가 도착하고 주변 어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선체가 침몰하기까지 1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배에 탑승해 있던 304명의 단원고 학생과 승객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학생들을 안에 남겨두고, 그들만 탈출했다. 해경은 하선 유도 방송조차 하지 않았다. 총력을 다해 주조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지휘체계도, 책임도 사라진 현장에서 모두 우왕좌왕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날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국가 시스템의 몰락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 가치의 붕괴였다. 우리는 세월호 현장의 장면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억을 누군가 지우려 했고, 지우려 할수록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세상을 휩쓸었다. 상처는 상처대로 곪아 가고, 기억은 더 생생해 졌다. 사회는 잊을려고 했고 회복과 치유과정은 없었다. 모두가 아팠고 세상은 진실을 외면해 갔다.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잊혀지는 순간 참사는 반복됩니다.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교실을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도 교육청 앞 피켓 中> 사건을 기억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사건은 되풀이된다. 생생하고 절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보존 되어야 한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13) “기억도 우리가 사는 만큼 살 것이오(318) <체르노빌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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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진실을 파헤쳤던 핵물리학자 레가소프.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건 거짓을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지어낸 이야기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체르노빌> HBO. 이 둘은 거짓의 위험성을 알린다. 거짓을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실(fact)과 진실(true)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럼, 언론이 보도하는 건 다 사실인가, 진실인가, 아니면 거기에 가까운 것인가?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69) <체르노빌의 목소리> “이곳에서 내 이름은 이반 세로프가 아니고 미콜라 네드바이로래. 명부에 가짜 이름으로 씌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날 만나려면 미콜라네드바이로를 찾아야 하는 거야.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130)
국어사전은 ‘사실’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정의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3호기 원자로 화재는 사실이다. 사고 당일 당직자 중 책임자 다를로프는 죽는 순간까지 본인의 잘못으로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이후 핵물리학자 레가소프는 원자로의 폭파된 원인을 분석한다. 원인은 사고 발생 당일, 당직자의 무리한 원자로 가동이었다. 사실 뒤의 진실이 레가소프에 의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진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거짓 없는 사실‘이다. 사실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해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사실과 진실은 동일하지 않다. 사고 난 후 고르바초프는 TV 연설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거 없습니다. 아직 거기서 사람이 살면서 일하고 있어요.”(251)<체르노빌의 목소리> 국가를 신뢰해 달라고 했다. 언론에 나온 고르바초프의 말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거짓이었다. 국가는 질병에 대한 모든 자료가 ‘기밀’ 또는 ‘고급 기밀’이라는 도장 아래 감추었다. 의학과 학문을 정치로 끌어들여 진실을 보는 눈을 잃도록 했다. 진실이 점점 피해 당사자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무수히 존재했지만 사실 아닌 거짓이 존재했다. ‘사실이 밝혀진다’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밝혀지는 건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체르노빌 사고는 진신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대적 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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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적 어려움을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이네사, 어깨를 꽉 잡아, 그래도 정 걷기 힘들면..아냐, 당장 내 등에 업혀. 이반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네사를 등에 업었다. 이반은 바람과 개울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네사는 등에 업힌 채 오빠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고, 타냐는 아들의 오른팔을 꼭 잡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96) 눈이 먼 이반이 다리가 불편한 이네사를 업고 가는 모습은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신체적 불편함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원전에 피폭된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앞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정이 험난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에서 아이들의 삶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힘을 합하여 이 고난을 개척해 나갈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아이들의 행복은 그 의미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된다. 국가가 앗아간 개인의 행복. 개인의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 국가의 구성은 사람이 함께하기에.


“아이들이 체르노빌을 그렸어. 그림 속 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해있어. 강이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이야. 그렇게 그려 놓고 울었어 (298) <체르노빌의 목소리> “먼저 나온 아이들이 산다고 나간게 아니라 아이들 끌어올려주고 먼저 나온 아이들이 밀어주고 질서 지키면서 나와서 누구 한명 나올 때까지 계속 이름 부르고 그랬어요”<세월호 생존 아이의 증언> 4월은 봄을 여는 계절이자 T.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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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기억한다 -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베셀 반 데어 콜크 지음,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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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우마를 경험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원인이 가해자에게 있든 자신에게 있든 상관없이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잘 맺지 못한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의 머릿속에 트라우마 기억이 우세한 이유 중 하나는 현재를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있는 곳에 온전히 머무르지 못하면 자연스레 살아 있다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가게 된다. 그 장소가 공포와 고통으로 가득한 곳이라 해도 마찬가지다.”(139) 트라우마를 경험한 환자는 트라우마를 흘러가는 현재의 삶과 결합 시키지 못한다. 끔찍한 기억에 계속 머무른 채, 어떻게 해야 현재에 머무를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현실감을 잃은 그들은 이성적인 사고를 담당하는 뇌가 정서적 뇌와 대화를 나눌 수 없다. 트라우마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을 얼마나 어려워하는지 저자는 눈으로 보아왔다. 그들에게 현재를 온전하게,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 책은 저자가 40년간을 트라우마를 연구하면서 경험한 환자의 사례와 트라우마 치유 기억을 기록했다. 또한 환자를 치유하기 위한 현대 뇌과학 및 트라우마에서 회복하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있다.
그가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이 일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이 가진 즐거움과 창의성, 의미, 유대감 등 인생을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만들어 주는 여러 요소의 원천을 트라우마를 통해 탐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은 뇌, 몸, 마음에 남아 있다. 그 흔적들을 이 책을 통해 헤아려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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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아가면서 잊지 못할 사회적 사건과 기억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잊고 싶은 기억, 자세히 기억은 못하지만 되살려할 기억이 있다. 3년 전 제주 4·3사건 현장에서 오늘 되살려내야 할 기억과 치유해야 할 기억을 들었다.
해방 후 새로운 나라를 건국하고자 하는 제주도민의 열망은 한반도의 어느곳 보다 높았다. 그 열망이 제주 곳곳에서 피어나기 시작한다. 1947년 3·1절 행사가 관덕정에서 치러진다. 행사 직후 군인들에 의해 민간인이 총살되고 이로 인해 민중의 저항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주의 4월은 제주전역의 붉은 빛깔로 만들었고 제주도민에게 큰 트라우마를 만들었다.
4·3 사건은 이승만 대통령이 이끄는 서북청년단이 제주도에 들어와 ‘빨갱이’라는 주홍글씨를 새겨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이 사건 이후, 제주도민들은 제주도민 이외의 사람들은 지칭해 ‘육지것들’이라고 한다. ‘육지것들’은 과거 4·3 사건의 역사적 트라우마로 인해 만들어진 단어이다. ‘육지사람들’에게 대한 경계심과 기피증, 나아가 대한민국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난다. 4·3사건에 대한 역사적 진실도 시간이 지나면서 드러나고 있지만 완전한 진실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제주도에서 4·3관련 사료나 학살 장소, 위령비에 대한 왜곡이나 거짓은 아직도 버젓이 역사적 사실로 보여지고 있다. ‘육지것들’에 대한 불신은 현재진행형이다.
제주 4·3 생존희생자와 유가족은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잠을 설치고 약에 의존한 생활이 벌써 73년째다. 제주도는 2015년 제주 4·3 생존 희생자 101명과 와 유가족 1011명을 대상으로 정신건강실태조사를 진행했다. 4·3세대가 점차 줄어들면서 생존희생자들의 정신건강 조사가 서둘러 이뤄지고 희생자들의 트라우마가 도민들의 정신건강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점도 고려됐다.
외상후 스트레스(PTST) 장애증상검사 결과, 생존 희생자 중 39.1%는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증상을 호소하는 고위험군이었다. 일반 상태의 안정군은 2.7%에 불과했다. 유가족의 경우도 중등도 위험군 이상이 52%로 절반을 넘었다.
제주시는 생존자와 유가족을 위한 몸과 마음의 치료와 사회 회복력을 강화하기 위해 4·3 트라우마센터를 20년도에 설립했다. 트라우마센터는 그들을 치유하고 사회적응력을 높이기 위해 책에서 이야기하는 치유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치유의 가능성을 높이고 있었다. 마음챙김, 요가,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는 등 역사적이고 집단적 트라우마 치유를 위해서 여러 프로그램이 운영 중 이었다.
저자 베셀 반 데어 콜크는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역할을 주목했다. “나는 1996년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데즈먼드 투투신부가 개최한 ‘진실과 화해위원회’공청회에서 집단 리듬의 힘을 목격했다.”(576) “이들의 노력은 ‘우분투’라는 핵심 원칙을 바탕으로 삼는다.(중략) 즉 ‘내가 한 인간으로서 지닌 특성이 당신의 인간적인 특성과 불가피하게 결합된 상태’라는 의미다. 우리 인간이 지닌 공통의 인간성과 공통의 운명을 인지하지 않고는 진정한 치유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여기에 담겨 있다“(602)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과 화해 위원회’의 사례는 제주 4·3처럼 역사적이고 사회적 집단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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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법정에서 잘못했다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말하지만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은 바로 어른들입니다.” 호통판사로 알려진 천종호 판사의 말이다. 천 판사는 법정에서 비행청소년을 꾸짖고 청소년에게 참교육을 하는 판사이다. 법정에서 본 아이들을 보면 70%는 저소득층, 47% 결손가정이다. 경제적, 가족사적 이유로 유년기부터 부모님과의 애착 형성이 어려웠다. “혼란 애착이 형성된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공격적이거나, 멍하니 있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정신의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중략) 혼란 애착이 형성된 아이들은 유치원에 다니면서 공격적이거나, 멍하니 있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성장 과정에서 다양한 정신의학적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216)
“생후 18개월에 엄마와 나누는 정서적 의사소통이 심각하게 파괴된 양상을 보였던 아이들은 불안정한 자기의식과 스스로를 해치는 충동(과도한 소비, 난잡한 성생활, 물질 남용, 무모한 운전 습관, 폭식 등)과 부적절하고 강렬한 분노, 반복되는 자살 행동에 시달리는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220) 아이가 태어난 직후부터 부모와의 애착 관계 형성이 아이의 성장에 있어 중요하다. 천종호 판사의 말씀처럼 정작 미안해야 할 사람은 바로 어른이다.
소년범죄의 원인은 가정해체와 애착손상으로 인해 사랑받지 못한 아이가 대부분이다. “양육자는 먹이고, 입히고, 혼란스러워할 때 다독여 줄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성장하는 뇌가 현실을 인식하는 방법을 형성시켜 준다는 사실이 밝혔졌다. 양육자와의 상호관계는 무엇이 안전하고 무엇이 위험한지 알려 주고,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사람과 우리를 실망시킬 사람을 알아보게 하며, 필요한 것을 얻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준다, 이러한 정보는 뇌 회로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에 저장되어 있고 자기 자신과 주변 세상을 생각하는 방식의 틀을 형성한다.”(234,235)
애착 손상이 있는 청소년은 원초적 불안·불신감 때문에 성숙한 자아정체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애착손상은 부모의 이혼 등 가정해체로 인한 정서적 유대감 결핍으로 트라우마를 겪는다. 성장하는 뇌는 애착손상으로 인해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그릇되게 되어 아이는 피해의식이 커지고 주변을 증오의 대상으로 삼는다.
“아이에게 안전한 안식처가 제공되면 독립성이 증대되고 공감할 줄 알고 고통에 빠진 사람들을 도울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명확히 증명되었다.”(205)
천종호 판사는 소년범의 재비행을 막기 위해 직접 나서 활동한다. 그는 보호 소년 축구단, 사법형 그룹홈, 통통 캠프 운영 등 청소년들을 위해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그 중 사법형 그룹홈은 2010년 11월 창원에서 시작된 제도로 사법부의 일부 지원으로 운영되는 대안 가정이다. 갈 곳 없는 청소년들에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어 주자라는 취지에서 만든 ‘청소년 회복지원시설’로 청소년들을 가정과 같은 환경에서 개별적으로 보살펴 재비행을 막는다. 시설에서 자신의 생명력과 살아가려는 의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소유하겠다는 의지와 만약 트라우마가 있다면 완전히 없애려는 힘을 가질 수 있으면 한다. 그리고 비행청소년들이 비행에서 벗어나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 사회적 차원에서 지원을 아낌없이 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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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시립미술관에서 2012년 퓰리쳐상을 받은 사진을 한 장을 우두커니 서서 본 적이 있다. 크레이그 F.워커의 ‘WELCOME HOME’으로 한 남성이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어두운 배경으로 있는 모습이었다. 사진의 남성 이름은 스캇 오스트롬으로 이라크전에 참전한 용사이다. 그는 전후 외상스트레스성 질환(PTSD)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오스트롬은 PTSD로 인해 공황장애, 사회적 관계의 단절, 자살 충동을 겪으며 힘들어했다. 이라크에서 겪은 악몽 같은 일들이 머릿속에 남아 그에게 강한 영향을 미치는 중이었다. 그는 이라크에서 했던 일들과 하지 않았던 일들에 대해 죄의식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는 더는 전쟁의 정당성을 믿지 않고 있었다. 그는 가진기자 크레이그 워커에게 말했다. “저는 잔인한 살인자였습니다. 이를 즐기기까지 했어요. 지금 저는 다시 인간답게 생각하고 느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퓰리처상 수상자 워커는 “전쟁의 영향은 참전 용사와 그 가족을 넘어 지역 사회와 세대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고통받는 참전용사의 현실은 반드시 전해져야만 하는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다.
저자 또한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현재를 살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고 이를 언어로 표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누군가 내 말을 들어 주고 이해해 주는 기분을 느끼면 몸의 생리 상태가 변화하고, 복잡한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자신의 감정을 누군가 알아주는 기분을 느끼면 뇌 변연계가 활성화되어 ”아아“하고 상황을 이해하는 능력도 생긴다. (403) 전쟁 트라우마를 극복한 사례를 보여주며 ”자신이 느낀 공포를 인식하고 그 감정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자신이 인류 집단의 한 일원임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다. 내가 집단 치료를 실시하면서 만난 베트남 참전 군인들은 전장에서 목격하고 자행한 잔혹한 일들을 서로 공유한 후에야 여자친구에게 마음을 열 수 있게 되었다고 애기했다(406)
스캇 오스트롬과 베트남 참전 군인 사례에서 고통스러운 감정을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회복으로 가는 길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4

“만약 기적이 일어난다면, 신이 내 손에 지우개를 쥐여 준다면, 그래서 과거의 어느 한 부분을 지울 수 있다면, 지우고 새로 쓸 수 있다면, 그런 말도 안 되는 기적이 혹시라도 일어난다면, 나는 어디를 지울까. (중략) 그 순간을 증오한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날, 아버지의 뾰족한 고드름 같은 눈빛과 쩌렁쩌렁한 목소리를 들어야 했던 그 시점을 지우고 싶다. 구멍이 나도록 세게 문질러 지우고 싶다.”P233 <파란방>, 구소은
소설가 구소은의 <파란방>의 주오의 ‘잔인한 사랑’을 시작하는 부분이다. 주오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성형외과 의사가 된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그가 선택한 아내와 결혼했으나 아이가 없다. 트라우마로 생긴 임포텐스 때문이다. 그는 트라우마가 생기지 않았으면 남들처럼 달콤한 연애를 했을 것이고 아이도 가졌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신적 외상을 입으면 그 트라우마가 바뀌지 않고 바꿀 수도 없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삶의 구조가 형성되며, 새로운 만남이나 경험들은 모두 과거의 기억에 오염되고 만다.”(106) 주오는 트라우마가 생긴 이후 가족에 대한 증오로 부모님이 반대한 결혼을 하고 본인 집안을 증오하기 시작한다. 그의 임포텐스는 그릇된 성적 욕구로 표출된다. 아내에게는 자위를, 접대부에게도 본인의 성적 대리만족을 요구한다. 트라우마가 증오와 분노로 변질되어 자신과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한 것이다.
주오가 과거의 어느 한 부분을 지운다면 중학생 때 생긴 트라우마이다.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후에는 이전과 다른 신경계로 세상을 경험한다. 트라우마 치료에 반드시 대상의 모든 부분, 즉 몸, 마음, 뇌가 모두 고려되어야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106) 트라우마는 주오의 몸, 마음, 뇌를 지배하고 증오와 분노심을 불태웠다. 만약 주오가 증오와 분노의 에너지를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한 소유권을 되찾는 회복에너지로 전환했으면 어땠을까.
현재를 충실히 살고 자기 중심의 사고에서 주변 사람들의 일에 관심 갖는 법을 배우고, 트라우마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아 치료했으면 가족과 아내에 대한 증오와 분노는 없었을 것이다.
“회복의 핵심은 자각이다. 트라우마 치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문구는 ”그 점을 인식하라“와 다음엔 무슨 일이 일어날까?”이다.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은 견디기 힘든 감각 속에서 살아간다. 심장이 부서지고 배 속 저 깊은 곳에서 밀려오는 참을 수 없는 느낌과 가슴을 조여 오는 감각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이러한 감각을 느끼지 않으려고 피하기만 하면 그 감각에 쉽게 제압되는 확률만 높아진다.“ (361) 자신의 감각을 피하지 않고 자신의 몸과 친해진다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음을 인정한다면, 현재를 극복하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주오는 트라우마를 자각하고 회복의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5

저자는 정신적 외상을 발생시키는 스트레스에 관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중, 당시 새로운 분야로 여겨지던 신경과학이라면 내 의문을 어느 정도 해고해 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1984년 당시 ACNP(미국신경정신약리학회)에서 가장 깊이 감명받는 강연을 들었다. 그 강연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의 마틴 셀리버그먼과 공동 연구를 진행 중이던 마이어 박사의 발표이다. ”주제는 동물에게 나타나는 무기력감이었다. 그와 셀리그먼 박사는 우리에 갇혀 있는 개들에게 고통스러운 전기 충격을 반복해서 가하고 그 환경을 ‘피할 수 없는 충격’으로 명명했다.”(71)
우리에 갇힌 상태에서 몇 차례 전기 충격을 가한 후, 연구진은 우리 문을 열고 다시 충격을 가했다. 앞서 전기 충격을 당한 적 없는 대조근 개들은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얼른 달아났지만, 피할 수 없는 충격을 당했던 개들은 충격이 가해지자마자 얼른 달아났지만, 피할 수 없는 충격을 당했던 개들은 문이 활짝 열려 있는데도 달아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냥 자리에 그대로 누워서 낑낑대고 배변을 했다. 단순히 도망갈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서 트라우마에 사로잡히 동물이나 사람이 자유를 찾아가지 않는다.”(71) 이 실험에서 개들처럼,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 역시 기회가 주어져도 그냥 포기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위험이 따를지도 모르는 새로운 방법을 택하는 대신 익숙한 두려움에 갇혀 있으려 하는 것이다.”(71)
책에서 인용한 펜실베니아 마틴 셀리그먼 교수와 콜로라도대학교의 스티븐 마이어 교수의 발표 중 ‘피할 수 없는 충격’으로 명명하여 트라우마의 부정적 측면을 보여준다. 심리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트라우마를 경험했다고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대학교 4학년 취업 준비를 하며 어느 한 기업에서 모의 면접을 본적이 있다. 면접관은 기업 인사팀장이었는데 지원자인 나의 이력서를 보고 압박 면접을 진행했다. “당신의 학점으로 우리 회사에 들어올 생각을 어찌 했나요?”,“당신의 학벌로 우리 기업이 만만해 보입니까?” 하며 압박을 해 왔다. 나는 2가지 질문에 답변하지 않고 그 자리를 나왔다. 면접 이후, 위 2가지 질문은 지금까지 뇌리를 떠나지 않고 있다. 면접을 준비할 때 꼭 2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준비했다. 그리고 나의 학점과 학벌은 자격지심으로 변했다. 회사나 사적 모임에서 ‘나’보다 학벌이 좋은 사람들을 보면 주눅이 들기 시작했다. 학벌이 높은 상대와의 대화를 기피하게 되고 만남 자체를 꺼려했다. 점점 컴플렉스로 변해갔다. 책 속의 환자처럼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사람과의 만남을 의도적으로 피했다. 컴플렉스를 극복하기 위해 성장 중심의 학습과 업무 역량을 쌓아갔다. 직장에서 성과를 내는 직원으로 인정받는 것은 덤이었다. 나는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긍정심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외상을 경험한 많은 사람들이 회복과정을 거치면서 오히려 긍정적인 변화와 성장을 경험한다는 견해를 제기한다. 긍정심리학 창시자 마틴 셀리그만 교수는 “트라우마는 외상 후 장애가 아니라 외상 후 성장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한다.” 셀리그만 교수는 오랫동안 ‘학습된 무력감’에 관해 연구했다. ‘학습된 무력감’이란 어떤 충격을 받은 후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섰다고 생각하면 어느 순간 벗어나려는 의지를 상실하는 것을 말한다. 트라우마의 ‘피할 수 없는 충격’의 성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연구를 진행하면서 그가 느낀 것은 대부분 사람은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문제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극복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셀리그만 교수는 과거의 충격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될 수도 있지만, 외상 후 성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초점을 앞에 놓인 우울이나 불안에 맞추는 게 아니라 이후 다가올 회복의 순간에 둬야 한다”고 했다. 트라우마는 미래를 방해하는 감정이 아니다. 과거의 사실을 명확하게 인지해야 하고 성장의 요체로 발판 삼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언어로 과거의 트라우마를 규정하고 이해해 미래로 나아가는 존재이다. 트라우마는 자신들만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스스로 만들어낸 이야기는 새로운 삶의 원칙을 만들어 준다. 회복탄력성, 즉 회복력이 큰 사람들은 이를 이용해 더 발전적인 원칙을 만들어낸다. 긍정적 삶을 만들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보다는 자신의 의지가 훨씬 중요하다.
사람들이 정신적 외상을 남긴 과거의 잔재에 대한 통제력을 쥐고 자기 자신이라는 배의 선장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현재를 즐기고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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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국내 출간 30주년 기념 특별판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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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회귀는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9)“네가 너의 삶을 살고자 원하느냐? 그런데 너의 삶은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처럼 무거운 인식이 없다. 니체의 철학이 정말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삶을 가볍게 받아들이라고 한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는 말라는 의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니체의 철학적 사상으로 시작해서 역사의 시간과 개인의 시간, 철학적 명제 등이 서술되어 읽는 이에게 당혹감과 호기심을 선사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밀란 쿤데라의 조국 체코의 68년 ‘프라하의 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치, 혁명, 이데올로기 등 무거운 것들에 비해 인간 개개인의 삶이란 얼마나 가볍고 보잘 것 없는 것들인가. 그는 소설에서 지식인들이 겪는 수난과 좌절, 그리고 남녀간의 사랑을 가벼움과 무거움을 빗대어 역사 그 자체보다는 역사의 수면 밑에서 움직이는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육체와 영혼, 집단과 개체, 삶의 의미와 무의미, 존재의 가벼움과 무거움, 우연과 운명 등에 대한 작가의 통찰이 곳곳에서 번뜩인다.
토마시 ‘ 가벼움속의 무거움’, 테레자 ‘무거움 속의 욕망’, 사비나 ‘배반된 세계를 갈망하는’, 프란츠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 소설 속의 4명의 등장인물의 삶을 보고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해 본다. 개인의 삶 속에 내재 된 가벼움과 무거움을 철학적이고 문학적으로 표현한 생존 작가의 작품은 이 소설일 것이다,

1

“아빠, 연산이 너무 싫어, 단순 반복 계산만 하잖아?” 딸이 나에게 초등 수학 연산을 매일 하면서 한숨을 쉬며 불평을 늘어 놓는다. 딸은 4년째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을 무한 반복하고 있다. 단순하게 계산기처럼 계산만 무한 반복한다. 동일한 것의 반복, 반복된 연산이 딸에게 무거움으로 작용했다. 익히고 배워야 할 학습에는 무언가의 새로움은 전혀 없었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9) 소설 속에서도 현재 겪고 있는 생이 동일하게 무한히 반복되는 것에 의문을 품는다.
연산을 무한히 반복하면서 엄마에게 못한 말을 용기 내어 말한다. “연산, 그만하고 싶어.” 순간 정적이 흐른 후 나는 말했다. “그만하자.”
우리는 ’왜 이것을 해야 하는가‘라는 물음을 떠올릴 때가 있다. 놀이나 일의 의미를 스스로에게 묻게 될 때가 있다. 그것은 바로 놀이나 일이 재미가 사라졌는데도 계속해서 그 놀이나 일을 해야 할 때이다. 인생이 하나의 재미있는 놀이로 여겨지는 사람은 ‘이 놀이나 일을 계속해야 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저 삶이라는 놀이에 빠져서 그것을 즐길 뿐이다. 의미를 묻게 되는 것은 삶이 더 이상 재미있는 놀이가 아니라 무거움으로 느껴질 때이다. 딸은 연산을 무거운 짐으로 느껴지면서 ‘왜 이 짐을 짊어져야 하지?“라고 묻게 된 것이다. 동일한 것의 재미없는 반복, 딸에게는 연산이 무거움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는 연산을 그만 시켰지만 연산을 다른 방식으로 변화 시켜 놀이로서 만들어 보도록 했다. 곱셈, 나눗셈을 이야기 형식으로 풀어 낸 문제집을 채택해 연산의 무거움을 보완해 나갔다. 니체는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말하며, “영원히 고정 불변하는 것은 없으며, 생성과 소멸의 운동만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다.” 이것이 영원회귀의 세계상이라고 설파했다. 수학 문제를 풀어내는 형식을 변경해 수학이 무겁지 않도록 생성했고, 이전 형식을 소멸 시켰다. 수학 공부 방식의 생성과 소멸을 통해 동일한 것의 영원회귀를 변용했다. 또한 딸은 긍정하며 수학문제를 풀어 나가고 있다. 그만하고 싶다며 용기를 내어 준 딸에게도 고맙다.

2

만약, 토마시가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와 베토벤의 4중주를 몰랐다면 그의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토마시에게 <오이디푸스>는 그의 삶에 결정적 무거움을 선사한다. 폴리보스가 아기 오이디푸스를 줍지 않았다면, 소포클레스는 그의 가장 아름다은 비극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토마시가 <오이디푸스>를 읽지 않았으면 사랑은 단 하나의 은유에서도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그는 테레자를 송진으로 방수된 바구니에 담겨 강물에 버려진 아기로 생각했다.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달리 말하자면, 한 여자가 언어를 통해 우리의 시적 기억에 아로새겨지는 순간, 사랑은 시작되는 것이다.”(336)
“토마시는 영혼의 순수함을 변호하는 공산주의자의들이 악쓰는 소리를 들으며 이렇게 생각했다. 당신의 무지 탓에 이 나라는 향후 몇세기 동안 자유를 상실했는데 자신이 결백하다고 소리칠 수 있나요? 자, 당신 주위를 돌아보셨나요? 참담함을 느끼지 않나요? 당신에겐 그것을 돌아볼 논이 없는지도 모르죠! 아직도 눈이 남았있다면 그것을 뽑아 버리고 테베를 떠나시오.”(289) 토마시는 체코 작자 동맹이 발간하는 주간지에 글을 투고한다. 오이디푸스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이고 동침을 나누었던 여자가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 눈을 찌르고 테베를 떠낫듯이 체코의 공산주의자들을 위와 같이 표현하며 지식인의 변절을 적나라게 표현했다. 자신이 투고했던 글 때문에 그는 결국 의사의 그만두고 프라하를 떠나게 된다. <오이디푸스>는 토마시에게 무거움의 은유로 표현될 수 있다.
토마시는 ‘에로틱한 우정’을 나누기를 선호했고 구속되는 삶을 싫어했다. 하지만“여섯 우연의 소산인 그녀, 외과 과장의 좌골신경통에서 태어난 꽃 한 송이, 모든 ‘es muss sein!‘의 피안(彼岸)에 있던 그녀, 유일하게 그가 진정으로 애착을 갖는 그녀“가 되었다. (353) “그를 필연으로 내몬 것은 우연도, 외과 과정의 관절염도 아니며 외부에서 유래한 그 어떤 것도 아니었다.”(314) 또한, 토마시가 의학에 이끌린 것은 가슴속 깊이 뿌리내린 이 ‘es muss sein!’이었다. 토마시와 테레자의 끌어당김은 6번의 하찮은 우연의 연속 때문이고, 그 우연은 더 이상 빠져 나갈수 없는 필연으로 변했다. 의사라는 직업도 그러했다. 삶은 우연의 우연을 통해 이어지고 동일한 우연이 같은 시간 동안 일어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우연의 마주침에서 토마시는 하필이면 2번의 필연이 그를 무거움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했다.
“인간의 삶이란 오직 한 번뿐이며, 모든 상황에서 우리는 딱 한 번만 결정을 내릴 수 있기 때문에 과연 어떤 것이 좋은 결정이고 어떤 것이 나쁜 결정인지 결코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357) 결국 선택 이후의 결과에 따라 좋은 선택인지 알 수 있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행위의 과정에서 의미를 부여를 통해 결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한다. “우리 인생의 진정한 감독은 우연이다. 잔임함과 자비심과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으로 가득한 감독<리스본행 야간열차> (116) 인간은 우연의 사건에 ‘es muss sein!’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필연으로 우연의 사건을 필연으로 만든다. 필연을 우리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하며 후회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우연은 우리를 삶을 매력적으로 만든다.
토마시는 테레자와의 6번의 우연이 그의 삶을 가벼움에서 무거움으로 옮겼다. 생의 마지막에는 농촌 전원생활을 하면서 테레자를 만나기전의 가벼움과 다른 가벼움으로 삶을 마무리하고 있다. 생의 마지막 가벼움을 단순한 가벼움으로 말하고 싶다.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행복한지 당신은 모르겠어? (중략)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506) 이곳은 테레자와 카레닌이 그와 함께한 행복이고, 자신이 어떤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는 내면적 ”es muss sein!“에 의해 인도되지 않은 직업에 종사하였기 때문이다.

3

전통적으로 서구의 철학자들은 인간을 영혼(정신)과 신체(육체)로 나누어서 이해해왔다. 그들은 영혼에는 불명성과 완전성의 지위를, 신체에는 유한성과 불완전성의 지위를 부여했다. 영혼과 신체에 대한 그들의 비유를 보고 있으면, 영혼은 마치 하늘에서 죄를 짓고 지상에 내려왔다 깨달음을 얻어 다시 천국으로 돌아갈 고뒤한 운명의 존재이고, 신체는 영혼으로부터 생명력을 잠시 얻었지만 영혼이 떠나자마자 다시 대지로 돌아가야 하는 천한 운명의 존재인 것처럼 보인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 그리그 현대 의학에 이르기까지 영혼과 신체는 철학자와 과학자의 오랜 관심사였다. 물론 아직까지 합의된 결론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가 키스를 했을 때, 그녀의 입술은 호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의 성기가 젖어 있는 것을 느끼고 그녀는 당황했다. 그녀는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흥분했고 그 때문에 흥분이 더욱 고조된 것을 느꼈다. 254
“그녀는 처음으로 그녀 눈에 비친 육체에 매료되었다. 그녀 육체의 개성, 흉내 낼 수 없는 단일성이 전면에 부각되었다. 모든 육체들 중에서 가장 범상한 것(지금까지 그녀는 그렇게 보아 왔다)이 아니라 가장 비범한 육체였다.” (254)
“두뇌 속 시계 장치에는 반대 방향으로 도는 톱니바퀴가 두 개 있다. 하나에는 눈이 있고, 다른 쪽에는 육체 반응이 있다. 나체 여자를 보는 시작이 새겨진 톱니는 발기 명령이 새겨진 반대편 톱니와 맞물려 있다.” (379) 남성들의 내 의지와 관계없이 스스로 움직이는 신체,
영혼과 육체를 둘러싼 논란은 앞서 말했듯이 오랜 관심사이다.
테레자가 신체에서 느꼈던 것은 영혼과 신체의 별개의 것이라는 이원론(Dualism)과 하나라는 일원론(Monism) 중 무엇일까? 화자는 또 하나의 예화를 제시한다. 니체의 토리노의 말이다.
“토리노의 한 호텔에서 나오는 니체. 그는 말과 그 말을 채찍으로 때리는 마부를 보았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마부가 보는 앞에서 말의 목을 껴안더니 울음을 터뜨렸다. 그 일은 1889년에 있었고, 니체도 이미 인간들로부터 멀어졌다. (중략) 그런데 내 생각에는 바로 그 점이 그의 행동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한다. 니체는 말에게 다가가 데카르트를 용서해 달라고 빌었던 것이다.”(471) 데카르트에 의하면 존재하는 것은 ‘사유하는 것’과 ‘공간을 차지하는 것’, 즉 정신과 신체라는 두 실체로 나누어진다. 정신은 주체적, 능동적으로 활동하지만 물질은 기계적 인과 법칙에 따른다. “그는 인간을 ’자연의 주인이자 소유자‘로 만들었다. 그리고 다름 아닌 그가 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는 사실에는 필경 심오한 물리적 일관성이 있다. 인간은 소유자이자 주인인 반면, 동물은 자동인형, 움직이는 기계, 즉 Machina Animata에 불과하다고 데카르트는 말한다.”(468) 데카르트는 정신과 신체의 이원론에 따라 인간 역시 ’생각하는 주관으로서의 정신과 물질적 대상으로서의 몸‘을 가진 이원적 존재로 파악했다. 신체가 기계와 같이 같은 작용을 한다고 보면서 동시에 정신이 중요한 기능을 한다고 했다. 그리고 송과선이라는 작은 부위를 통해 정신과 신체가 상호작용한다고 여겼다. 영혼이 신체를 지배한다는 생각이었다.
테레자는 기술자와의 정사를 보내면서 영혼의 문제를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의 영혼이 아니라 오로지 그녀의 신체임을 깨달았다. 신체는 그녀를 배신했다. 근대까지 지배했던 영혼과 신체의 세계관을 테레자와 니체는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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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또 다른 남성 주인공, 프란츠는 부재하는 사람들의 상상적 시선에서 사는 몽상가이다. 그는 사비나의 시선이 그에게 고정되어 소련의 제국주의가 침략한 캄보디아까지 이끌려왔다. 그에게 비친 사비나는 하나의 ’키치‘이자 무거움이었다. “키치의 원천은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다. 하지만 존재의 근거는 어떤 것일까? 신? 인류? 투쟁? 사랑? 남자? 여자? 여기에 대해선 각양각색의 의견이 있으며 또한 각양각색의 키치도 있게 마련이다.” (417) 프란츠에게 ’키치‘는 대장정을 위한 신념이었다. “프란츠가 미치도록 좋아했던 대장정이라는 개념은 모든 시대와 모든 성향의 좌익 인사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정치적 키치였다. 대장정이란 멋진 전진, 장정이 대장정이기 위해서 필요했던 모든 장애물을 뛰어넘어 우정, 평동,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이었다.”(417) 키치는 사회 집단에 있어서 사상, 행동, 생활 방법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있는 관념이나 신조의 체계를 말한다. 키치는 근본적으로 생각을 제약하는 체계이기에 오히려 더 맹목적이고 위험히며 무거움으로 대변될 수 있다.
“강한 신념이야말로 거짓말보다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신념은 나를 가두는 감옥이다.”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신념은 말 그대로 ’굳게 믿는 마음‘으로 굳게 믿기에 쉽게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 신념은 무엇인가를 향하게 한다. 하지만 그로 인해 무엇인가를 놓치게도 만드는 양날의 검이다. 사람이 키치를 갖지 않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이다.” (415) 생각의 체계가 키치이기 때문이다. 소설에서는 스탈린 아들의 똥에 관련한 예화는 ’똥‘을 가벼움의 상징으로 나타낸다. “키치란 본질적으로 똥에 대한 절대적 부정이다.”(399) 키치는 무겁고 폐쇄적이다. 원래 목적을 훼손한다는 의미에서 자기 파괴적이기도 하다. 키치가 전체주의나 군중심리와 결합하면 최악의 결과를 낳게 된다. 인간은 이런 과정을 통해 초래된 비극을 드물지 않게 목격했다. 키치를 갖지 않을 수는 없다. 하지만 키치는 절대적 신념이 아니다. 역사적, 사회적 입장을 반영한 사상과 의식체계일 뿐이다. 따라서 절대적이지도 않고 영원하지도 않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프란츠는 대장정으로 일컫어 지는 키치의 무거움에 던져진 실존이다.니체의 주장처럼 때로는 신념이 거짓말보다 더한 진리의 적이 되어 죽음으로 이르게 된다. 소설 속의 프란츠를 보며 삶에서 나의 키치는 무엇이고 그것으로 인한 삶의 무거움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결국은 이렇게 마무리 된다. 단 하나의 믿음은 경계해야 한다.

5
소설 속에 가벼움의 상징으로 표현되는 여자 주인공 사비나. 그녀는 자신의 세계관으로 삶을 펼치고 삶을 예술로 만드는 사람이다. “배신한다는 것은 줄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다. 배신이란 줄 바깥으로 나가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것이다. 사비나에게 미지로 떠나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었다.” (156) 그녀는 배신을 즐기고 배신을 삶의 자양분으로 살아가는 실존이다. 1968년 ’프하라의 봄‘의 시기의 여성의 삶이 순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경제적 자립과 예술적 독립 공간을 가진 주체적 여성이다. 그녀는 키치를 경멸했다. “키치를 훼손하는 모든 것은 삶으로부터 추방당하기 때문이다.”(407)
그녀의 예술세계는 기존 관념이나 전통을 부정하는 다다이즘과 닮았다. '다다이즘(dadaism)'은 제 1차 세계대전(1914~1918) 말부터 프랑스, 독일, 스위스, 미국의 미술가와 작가들이 본능ㆍ자발성ㆍ불합리성을 강조하면서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에 반발한 종합예술운동이다. 사비나는 자기 그림의 의미를 앞은 이해 가능한 거짓말이고 그 뒤로 가야 이해 불가능한 진실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라 명명했다. 다다이즘의 작품 중 하나인 '게오르게 그로스'의 사진를 보면, 게오르게 그로스를 표현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미술 비평가를 뜻한다. 작품에서 비평가의 눈과 입은 대충 그린 종이로 덮여 있는데, 이는 제대로 보지 못하고 말을 함부로 한다는 것이다. 비평가 목 뒤의 지폐조각은 작품의 비평가가 돈을 밝힌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비평가가 들고 있는 창의 모습을 한 연필은 그가 쓰는 글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사비나의 세계와 유사한 작품이다. 다다이즘의 '다다'란 원래 프랑스어로 어린이들이 타고 노는 목마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다다이즘에서는 다다이즘의 본질인 무의미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무의미함과 가벼움은 일맥상통 하지 않는가. 사비나의 배반된 세계는 무의미이자 가벼움, 아름다움이다.
“지금까지는 배반의 순간들이 그녀를 들뜨게 했고, 그녀 앞에 새로운 길을 열어 주고, 그 끝에는 여전히 또 다른 배반의 모험이 펼쳐지는 즐거움을 그녀의 가슴에 가득 채워 주곤 했다.사비나는 그녀를 둘러싼 공허를 느꼈다. 그리고 바로 이 공허가 그녀가 벌인 모든 배신의 목표였다면?”(202) 배반은 그녀에게 새로움과 즐거움을 주었다. 하지만 배반된 세계에 남아 있는 것은 공허의 상태이다. 그녀가 말한 ‘공허의 상태‘는 무엇일까? ’가벼움‘이다. 사비나는 키치를 부정하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벗어나는 것을 즐겼다. 만약 그녀가 키치를 수용하고 사람들과 지속적 관계를 가졌으면 그녀의 성향상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무거움‘이기 때문이다.
니체는 기존의 가치와 의미가 무너지고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결여된 상태를 두고 니힐리즘(허무주의)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니힐리즘의 상태야말로 인간이 견딜 수 없는 가장 큰 고통이라고 했다. 나는 사비나의 공허의 상태를 아무런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 채 인생을 살아가면서 결국은 죽는 ’니힐리즘‘으로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는 공동묘지를 거닐며 죽음이라는 필연 앞에서 사색하는 예술가이다. 인상에 남는 등장인물이 있다. 활자를 읽으면서는 토마시였다. 하지만 활자를 쓰면서 인상에 남는 인물은 사비나였다. 소설 마지막까지 살아 남은 인물은 사비나 뿐이다. 테레자와 토마시는 무거움의 분위기 속에서 죽었다. 프찬츠 또한 무거움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에 이르렀다. 사비나는 배반의 즐거움으로 살아가고 있다. 어찌보면 가벼움이 삶의 생성과 변화, 소멸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본다. 니체의 춤추추는 자는 가벼운 자이고 어린아이처럼 노는 아무런 목표나 의미 없이 기쁨 속에서 파괴와 창조를 거듭하는 ’디오니소스‘가 아닐까.

6
밀란 쿤데라가 <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4인의 주요 등장인물과 카레닌 그리고 국가, 전쟁, 똥 등 가벼움과 무거움일 것이다. 이 소설을 덮으며 이 책을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어떤 문장으로 표현할지를 생각해 본다. 한 문장은 “einmal ist keinmal, 한번이면 그것으로 영원히 끝이다.” (358)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사형선고를 받는다. 삶은 단 한번 쁜 유일회성을 갖는다. 이 순간은 아름답다. 이 순간은 우연의 시작이다. 하지만 죽음은 필연이다. 우리는 가벼움으로 태어나서 무거움으로 일생을 마친다. 이 소설은 니체의 철학적 식견으로 쓰인 작품이다. 그만큼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의 삶을 니체적으로 표현해 주었다. 주요 등장인물 4명 중 3명은 무거움 속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테레자의 반려견 카레닌도 죽음을 맞이했다. 니체는 죽음의 고통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이라고 한다면 기꺼이 맞서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렷하게 깨어 있는 정신으로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삶을 긍정하는 동시에 자신의 죽음을 의연하게 맞이하자고 했다. 그는 또한 그가 보기에 남들에게 민폐를 끼치면서 죽음이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가장 경멸할 만한 조건들 아래에서의 죽음이며, 자유롭지 않은 죽음, 제때에 죽지 않는 죽음, 비겁한 자의 죽음”이라 했다. 니체는 삶을 사랑하는 자라면 자유로우면서도 의식적으로 죽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한다. 죽음에 대해 당당해지려면 삶 앞에서도 당당해야 한다. ’einmal ist keinmal‘ 내 삶은 단 한 번뿐이다. 매일 이어지는 우연 속에서 당당히 순간을 긍정하고 삶을 사랑하자. 아모르 파티(Amor Fat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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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문서정 소설집
문서정 지음 / 강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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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문서정, 강,2020

소설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화자인 ‘나’와 친구들이 ‘S의 눈물’을 매개체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나’ 그리고 친구들. 대학 졸업 이후 친구 ‘K’의 장례식에서 ‘S’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나’와 남자 친구들은 ‘S’의 눈물과 관련 이야기를 쏟아낸다. ‘S의 눈물’은 소설의 매개체이다. ‘S’의 눈물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가 ‘S’의 눈물을 소설의 제목으로 설정한 것처럼 ‘S’의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sein,be)와 존재자(존재하는 것,seiendes,is-ness)를 구별했다. 철학은 존재자만을 사유할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며 존재는 존재에 입각해서 사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존재(sein)란 어떤 것의 존재, ‘있음’을 의미했고, 존재자(seiendes)란 존재하는 ‘그 무엇’,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였고, 존재자는 단지 주어져 있을 뿐, 무엇을 설명하든지 결국은 우연한 것 이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소설은 ‘S’의 눈물에 대한 의미보다는 ‘S’가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주로 묘사한다. 동아리에서 아무말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일, 술값을 못내 모두가 안절부절 했지만 ‘S’의 눈물로 인해 외상으로 처리한 일 등이다. ‘S’의 눈물에 대해 화자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야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전부를 다 안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예전에 수시로 흘렸던 모호한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는 말이다.” (P101) 눈물은 그 무엇의 존재자이다. 화자 ‘나’는 눈물의 ’존재‘(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눈물이라는 물질이 아닌 ‘눈물’이라는 물질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한다. 눈물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 <구두>에서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고 했다. 고흐의 구두가 바로 구두 주인의 삶의 궤적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구두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그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구두의 존재란 어느 누군가가 실제로 신고 다닐 때 발생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고흐의 <구두>는 고단하지만 소박한 농촌의 삶을 묘사한 것으로 설명했다. S가 근무하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흘린 눈물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있음’에 대한 물음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이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친구들. 대학교 졸업 후 장례식장에서 S를 마주치고 서로가 S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들 S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아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이 고작 아는 건 그녀가 시시때때로 잘 우는 여자라는 것뿐이었다.”(P88) ‘누군가를 안다는 것’에 관한 물음이 생긴다. 류시화 시인은 ‘누군가를 아는 것’에 대한 물음에 관하여 알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북인도 바라나시를 여행하며 즐겨 마시는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끊여 파는 노인이 있다. 노인의 차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차이다.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노인이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 재빨리 갠지스 강물을 떠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마신 짜이가 더러운 강물로 끓인 것이었다. 이후 노인이 권하는 짜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곳에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냥 재빨리 지나치거나 외면하면서 다른 가트로 걸어가곤 했으며, 노인은 갑자기 멀어진 나를 서운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좋아한 장소를 잃은 아쉬움이 컸다. 어느 해 겨울 다시 바라나시에 갔다. 이른아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반갑게 포옹까지 하면서 "언제 왔느냐? 얼마나 있을 거냐?" 물으며 짜이를 권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갠지스 강물 짜이 한 잔에 죽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계단에 앉았다. 역시 그의 생강 짜이는 맛이 있었다. 혹시 내가 갠지스 강물 체질이 아닌가 생각하며 남은 짜이를 마시는 순간, 노인이 또다시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강물을 길어오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서 노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의 짜이를 좋아하고 이 장소가 좋긴 하지만 더러운 강물로 끓인 짜이까지 좋아할 순 없다고. 매우 비위생적이며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지 않느냐고. 그러자 노인은 강물로 짜이를 끓인 적이 없다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는데도 부인을 하니 인격이 의심스러웠다.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내게 노인은 계단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계단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강 바로 위쪽에 파이프가 있고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십 미터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지하수였다. 그런 지하수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지역 사람들이 믿고 마시는 청정수였다. 수돗물은 낡고 부식된 수도관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노인은 말했다. 나쁜 물은 짜이 맛을 떨어뜨린다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짜이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했다. 그들 모두 지하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물로 짜이를 끓이진 않았다. 강 쪽에서 물을 떠오는 것을 보면 나처럼 외국인이나 외지인들이 강물로 짜이를 끓인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행 안내 책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안다 것’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을 향한 기대와 감정을 믿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관계 속에서 나만의 판단과 편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한 일화에서 깨달았다. 상대방의 평판, 말, 행동으로 그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대화를 했다. 상대는 굉장히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지위의 우월함으로 ‘나’를 비난했다. 내가 알고 있던 인식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을까’ 하고 주변 동료에도 물어보았다. 동료의 답은 기존의 나의 방식과 태도로 상대를 대했지만, 상대는 ‘우리가 알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상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람으로 내 편견과 판단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의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내 인식의 문제이다. 자기가 인식한 내용만 가지고 ‘ 이 사람은 분명 이런 사람이다’ 생각하며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의 편견과 판단으로 상대를 지레 짐작하고 상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안에 각인된 상대를 지워야 하고 또한, 내안에 정형화된 나도 지워야 한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소설 속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고작 그녀를 잘 우는 여자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모습과 얕은 인식으로 상대를 판단할 뿐이다. 이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담고 있는 S. S도 눈물을 거두거나 참는 경우가 있다. “울고 싶은데 말이야 마음 놓고 울 데가 있어야지. 집에서 아픈 딸애 앞에서 울까? 병원 사무실에서 울까?”(P100) 학부생 때, 동아리 모임이나 식당에서 잘도 울던 S. 그녀가 변했다. 눈물에도 상대방을 가려가며 나오는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딸과 사회적 관계가 있는 직장에서는 눈물을 삼키거나 참는 것이다. S는 왜 변했는가. 여성의 눈물은 있다. 모성(엄마역할)의 눈물과 사회적 역할의 눈물은 없다. 눈물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에게는 눈물을 삼킨다. 누가 S의 눈물을 가져갔는가? 엄마와 직장인 S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고 ‘함께’라는 관계로 맺어지고 있다. 또한, 관계에서 제도 속 존재로 나아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관계와 제도에서 역할이 생긴다. S는 역할갈등으로 그들 앞에서 눈물을 삼킨다. 본인의 감정은 절제된다. 절제된 감정은 결국 쌓이고 앃인다. 소설에서는 S의 이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S를 보며 생각이 잠긴다. 역할갈등으로 무수히 삼킨 눈물들을. 앞으로도 숱한 사연으로 눈물을 삼키지 않을까. 그리고 역할에 따른 S의 눈물의 성격도 변했다. 화자가 본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흘린 S의 눈물은 자본이었다. 그 동안 S가 보인 눈물과 결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무수한 역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역할에 따라 눈물의 성격도 변한다.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이다. 지금의 눈물들이 감정이 아닌 가치척도로 여겨지는게 씁씁하다. S님, 마지막 장면의 장례식의 눈물은 자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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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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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연대
<체르노빌의 아이들>, 히로세 다카시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9 With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20 <체르노빌>, HB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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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황홀했다! 봄의 초원에 꽃이 폈고, 숲의 녹음은 부드러웠으며 봄 향기를 내뿜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자라며 노래하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름아움과 두려움의 어울림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203).<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봄과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6분 이후로 일상의 시계는 멈추었다. 이후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피폭된 사람, 그들의 아이, 미래의 태어날 생명 모두 피폭 이전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체르노빌레츠(원전 사고로 피폭된 사람)’로의 삶을 시작 하였다. 삶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고통뿐이었다. 5월이면 장미꽃이 만발했던 프리프야트에서 장미꽃 향이 가득한 정원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삶과 자연의관객이 되었다.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원전 피폭 이후 일상이 멈춰버린 체르노빌레츠의 이야기이고, 무기력하게 우리의 삶이 국가에 의해 짓밟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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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미국 HBO의 5부작 <체르노빌>의 첫 대사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거짓의 대가를 ‘체르노빌레츠’라는 용어로 알 수 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누가 거짓을 믿었는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국가주의와 국가를 너무 믿어 벌어진 하나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인재이다. ”발전소는 (중략) 착실히 진화작업을 진행중이라는 연락이 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되돌아간 결사대원들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54) 국가는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앞일에 대한 불안일랑 떨쳐 버리고 당국의 지시대로 따라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70) 사고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조지 오웰의 <1984>의 닮음꼴이었다. 소설은 전체주의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소설 속에서는 오브라이언을 통해 “당이 진실이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고,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서는 실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당에 의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당원들은 믿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고르바초프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중략) 나는 믿었다. (중략) 우리는 믿는 데 익숙했다. (중략) 그게 당의 기강이었고,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중략) 이런 믿음이 깨지면 많은 이들이 뇌졸중에 걸리거나 자살을 한다. 학자 레가소프처럼 심장에 총알을 박는다.“(279) 시민들은 국가를 믿었다. 원전 사고로 소방관과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믿었다. 평화적 핵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시민들은 정부에서 반복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을 믿었다. 사고 후에 맞이하는 메이데이를 경축함으로써 지금의 공포를 잊고자 노력했다“(143) 그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이오로봇(인간)이 되어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핵을 삽으로 퍼는’ 기이한 일을 하였고, 국가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원전 사태가 해결되어 가고 있다며 거짓 선동을 하였다. ”푸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하라고 하니 해야 되는 것이었다. 조국이 부르고 조국이 명령했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270) 타냐가 말한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공개 정책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선전하면서도 뒤로는 진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독일 한 사회학자는 출판 계획을 앞당겼다. 그는 21세기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한 ‘울리히 벡’이다. 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위험사회란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다. 다가올 미래는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위험은 지역과 계층에 관계없이 평준화가 되고 있어 “부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에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위험사회의 인자와 배경으로서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과 금용자본, 무절제한 환경 파괴, 억압당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 정보사회의 위험성 등을 지적했다.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 재난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위험을 ‘생산된 위험’, 생산된 불확실성‘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별 위험이 아니지만 그 대처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이 개입해 재앙이 되고 마는, ’인위적 위험‘이라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무리한 원전 가동으로 인한 원자로 폭발로 일어난 ’인위적인 위험‘이다. 원전사고 당시의 당직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생산한 위험이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인간의 잘못이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성찰적 근대‘를 말한다. 성찰적 근대란 위험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국가와 전문가만 독점하지 말고 시민들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공론의 장을 만들어 해결에 동참하는 사회다. 지식과 과학기술 전 과정을 시민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정부와 시민과의 성실한 소통이다. 우리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에서 발표하는 정보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단, 정보제공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진실이어야 한다. 거짓의 대가는 참혹했다.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간에 어떤 위험을 참아낼 수 있는가, 어떤 위험을 우선 관리할 것인가’ 하는 합의를 도출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해야한다. 진실의 대가는 최소한의 피해와 안전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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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바로 저 폭발 때문에 생긴 거야. 그래, 난 절대 잊지 않겠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거야.(72) 이반 세로프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겠다고 한다. “원전 부근의 자연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체르노빌레츠은 고통을 받고 있다. 인재(人災)로 인한 사고는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기억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고 앞으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대형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후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자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회불안을 낳고, 개인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된다.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중략)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체르노빌의 목소리> 사건이 발생한 초기 국가권력에 의한 거짓 선동으로 체르노빌에서는 방사능 피폭이 있었다. 방사능 피폭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피폭된 주민, 현장에 투입된 인력, 과학자를 통해 이 사건의 참혹한 실상을 기록하고 보존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재검토와 피해가 발생된 지역과 주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기억과 기록 그리고 보존의 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사고의 기억과 기록이 보존되어야 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 부서져 버린 이루진 못한 꿈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대형 선박이 침몰한다. 이 사건으로 304명의 희생이 생겼고 그날 이후 그들의 꿈과 삶은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국가형 인재(人災)이다. 4월 16일 오전 10시 31분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된다. 최초 사고 신고는 오전 8시 52분. 9시 30분 해경 헬기가 도착하고 주변 어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선체가 침몰하기까지 1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배에 탑승해 있던 304명의 단원고 학생과 승객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학생들을 안에 남겨두고, 그들만 탈출했다. 해경은 하선 유도 방송조차 하지 않았다. 총력을 다해 주조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지휘체계도, 책임도 사라진 현장에서 모두 우왕좌왕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날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국가 시스템의 몰락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 가치의 붕괴였다. 우리는 세월호 현장의 장면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억을 누군가 지우려 했고, 지우려 할수록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세상을 휩쓸었다. 상처는 상처대로 곪아 가고, 기억은 더 생생해 졌다. 사회는 잊을려고 했고 회복과 치유과정은 없었다. 모두가 아팠고 세상은 진실을 외면해 갔다.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잊혀지는 순간 참사는 반복됩니다.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교실을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도 교육청 앞 피켓 中> 사건을 기억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사건은 되풀이된다. 생생하고 절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보존 되어야 한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13) “기억도 우리가 사는 만큼 살 것이오(318) <체르노빌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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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진실을 파헤쳤던 핵물리학자 레가소프.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건 거짓을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지어낸 이야기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체르노빌> HBO. 이 둘은 거짓의 위험성을 알린다. 거짓을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실(fact)과 진실(true)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럼, 언론이 보도하는 건 다 사실인가, 진실인가, 아니면 거기에 가까운 것인가?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69) <체르노빌의 목소리> “이곳에서 내 이름은 이반 세로프가 아니고 미콜라 네드바이로래. 명부에 가짜 이름으로 씌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날 만나려면 미콜라네드바이로를 찾아야 하는 거야.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130)
국어사전은 ‘사실’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정의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3호기 원자로 화재는 사실이다. 사고 당일 당직자 중 책임자 다를로프는 죽는 순간까지 본인의 잘못으로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이후 핵물리학자 레가소프는 원자로의 폭파된 원인을 분석한다. 원인은 사고 발생 당일, 당직자의 무리한 원자로 가동이었다. 사실 뒤의 진실이 레가소프에 의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진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거짓 없는 사실‘이다. 사실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해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사실과 진실은 동일하지 않다. 사고 난 후 고르바초프는 TV 연설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거 없습니다. 아직 거기서 사람이 살면서 일하고 있어요.”(251)<체르노빌의 목소리> 국가를 신뢰해 달라고 했다. 언론에 나온 고르바초프의 말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거짓이었다. 국가는 질병에 대한 모든 자료가 ‘기밀’ 또는 ‘고급 기밀’이라는 도장 아래 감추었다. 의학과 학문을 정치로 끌어들여 진실을 보는 눈을 잃도록 했다. 진실이 점점 피해 당사자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무수히 존재했지만 사실 아닌 거짓이 존재했다. ‘사실이 밝혀진다’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밝혀지는 건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체르노빌 사고는 진신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대적 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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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적 어려움을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이네사, 어깨를 꽉 잡아, 그래도 정 걷기 힘들면..아냐, 당장 내 등에 업혀. 이반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네사를 등에 업었다. 이반은 바람과 개울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네사는 등에 업힌 채 오빠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고, 타냐는 아들의 오른팔을 꼭 잡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96) 눈이 먼 이반이 다리가 불편한 이네사를 업고 가는 모습은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신체적 불편함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원전에 피폭된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앞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정이 험난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에서 아이들의 삶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힘을 합하여 이 고난을 개척해 나갈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아이들의 행복은 그 의미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된다. 국가가 앗아간 개인의 행복. 개인의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 국가의 구성은 사람이 함께하기에.


“아이들이 체르노빌을 그렸어. 그림 속 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해있어. 강이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이야. 그렇게 그려 놓고 울었어 (298) <체르노빌의 목소리> “먼저 나온 아이들이 산다고 나간게 아니라 아이들 끌어올려주고 먼저 나온 아이들이 밀어주고 질서 지키면서 나와서 누구 한명 나올 때까지 계속 이름 부르고 그랬어요”<세월호 생존 아이의 증언> 4월은 봄을 여는 계절이자 T.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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