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 문서정 소설집
문서정 지음 / 강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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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문서정, 강,2020

소설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는 화자인 ‘나’와 친구들이 ‘S의 눈물’을 매개체로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나’ 그리고 친구들. 대학 졸업 이후 친구 ‘K’의 장례식에서 ‘S’를 다시 만나게 된다. 장례식장에서 ‘나’와 남자 친구들은 ‘S’의 눈물과 관련 이야기를 쏟아낸다. ‘S의 눈물’은 소설의 매개체이다. ‘S’의 눈물 의미는 무엇일까. 작가가 ‘S’의 눈물을 소설의 제목으로 설정한 것처럼 ‘S’의 눈물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존재(sein,be)와 존재자(존재하는 것,seiendes,is-ness)를 구별했다. 철학은 존재자만을 사유할 뿐 존재 자체에 대해서는 망각하고 있다며 존재는 존재에 입각해서 사유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보기에 존재(sein)란 어떤 것의 존재, ‘있음’을 의미했고, 존재자(seiendes)란 존재하는 ‘그 무엇’, ‘있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존재라고 부르는 것은 실은 존재가 아니라 존재하는 어떤 것, 존재자였고, 존재자는 단지 주어져 있을 뿐, 무엇을 설명하든지 결국은 우연한 것 이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소설은 ‘S’의 눈물에 대한 의미보다는 ‘S’가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주로 묘사한다. 동아리에서 아무말 못하고 눈물을 보이는 일, 술값을 못내 모두가 안절부절 했지만 ‘S’의 눈물로 인해 외상으로 처리한 일 등이다. ‘S’의 눈물에 대해 화자 ‘나’는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제야 나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다. 물론 전부를 다 안다는 건 아니었다. 그녀가 예전에 수시로 흘렸던 모호한 눈물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는 말이다.” (P101) 눈물은 그 무엇의 존재자이다. 화자 ‘나’는 눈물의 ’존재‘(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눈물이라는 물질이 아닌 ‘눈물’이라는 물질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한다. 눈물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하이데거는 고흐의 작품 <구두>에서 ‘존재자’와 ‘존재’는 다르다고 했다. 고흐의 구두가 바로 구두 주인의 삶의 궤적을 잘 묘사하고 있다고 본다. 구두의 ‘존재’는 그 자체로서 그저 하나의 사물에 불과할 뿐 ‘존재’한다고 할 수 없다. 구두의 존재란 어느 누군가가 실제로 신고 다닐 때 발생하는 사건과도 같은 것이다. 고흐의 <구두>는 고단하지만 소박한 농촌의 삶을 묘사한 것으로 설명했다. S가 근무하는 병원 장례식장에서 흘린 눈물은 그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이었다, 하이데거가 말한 ‘있음’에 대한 물음이었다.
소설을 읽으며 불편했던 점이 있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만난 ‘S’와 친구들. 대학교 졸업 후 장례식장에서 S를 마주치고 서로가 S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두들 S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다 아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들이 고작 아는 건 그녀가 시시때때로 잘 우는 여자라는 것뿐이었다.”(P88) ‘누군가를 안다는 것’에 관한 물음이 생긴다. 류시화 시인은 ‘누군가를 아는 것’에 대한 물음에 관하여 알한 노인의 이야기를 통해 들려준다. 북인도 바라나시를 여행하며 즐겨 마시는 짜이(인도식 밀크티)를 끊여 파는 노인이 있다. 노인의 차는 따뜻하고 평화로운 차이다.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노인이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내려가 재빨리 갠지스 강물을 떠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너무 놀라고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동안 마신 짜이가 더러운 강물로 끓인 것이었다. 이후 노인이 권하는 짜이를 거절할 수 없어서 차라리 그곳에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그냥 재빨리 지나치거나 외면하면서 다른 가트로 걸어가곤 했으며, 노인은 갑자기 멀어진 나를 서운하게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좋아한 장소를 잃은 아쉬움이 컸다. 어느 해 겨울 다시 바라나시에 갔다. 이른아침 그곳을 지나가게 되었고, 노인과 마주쳤다. 노인은 반갑게 포옹까지 하면서 "언제 왔느냐? 얼마나 있을 거냐?" 물으며 짜이를 권했다. 나는 잠시 주저하다가, 갠지스 강물 짜이 한 잔에 죽진 않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달래며 계단에 앉았다. 역시 그의 생강 짜이는 맛이 있었다. 혹시 내가 갠지스 강물 체질이 아닌가 생각하며 남은 짜이를 마시는 순간, 노인이 또다시 주전자를 들고 계단을 달려내려가 강물을 길어오는 것이 아닌가.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어서 노인에게 진지하게 말했다. 당신의 짜이를 좋아하고 이 장소가 좋긴 하지만 더러운 강물로 끓인 짜이까지 좋아할 순 없다고. 매우 비위생적이며 법으로도 금지되어 있지 않느냐고. 그러자 노인은 강물로 짜이를 끓인 적이 없다며 펄쩍 뛰는 것이었다. 내 눈으로 분명히 목격했는데도 부인을 하니 인격이 의심스러웠다. 몹시 실망한 표정을 짓는 내게 노인은 계단 아래를 가리키며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영문을 몰라 하며 계단을 내려가서 살펴보니 강 바로 위쪽에 파이프가 있고 물이 콸콸 흘러나오고 있었다. 수십 미터 땅속에서 솟아나오는 지하수였다. 그런 지하수가 몇 군데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지역 사람들이 믿고 마시는 청정수였다. 수돗물은 낡고 부식된 수도관 때문에 신뢰하지 않는다고 노인은 말했다. 나쁜 물은 짜이 맛을 떨어뜨린다고. 미안해서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갠지스 강변에서 짜이 장사를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확인했다. 그들 모두 지하수가 좋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그 물로 짜이를 끓이진 않았다. 강 쪽에서 물을 떠오는 것을 보면 나처럼 외국인이나 외지인들이 강물로 짜이를 끓인다고 비난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실제로 여행 안내 책자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고 했다. 이야기에서 ‘누군가를 안다 것’에 대한 소회를 밝힌다. “누군가를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을 잘 모른다는 것과 동의어일 때가 많다. 누군가를 안다고 믿지만, 그 사람을 향한 기대와 감정을 믿는 것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지만, 그 사람에 대한 자신의 판단과 편견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는 많은 관계 속에서 나만의 판단과 편견으로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최근 한 일화에서 깨달았다. 상대방의 평판, 말, 행동으로 그 사람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대화를 했다. 상대는 굉장히 불편하다는 기색으로 지위의 우월함으로 ‘나’를 비난했다. 내가 알고 있던 인식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의 태도가 ‘잘못되었을까’ 하고 주변 동료에도 물어보았다. 동료의 답은 기존의 나의 방식과 태도로 상대를 대했지만, 상대는 ‘우리가 알던 그’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상대를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는 ‘그’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사람으로 내 편견과 판단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었다. 상대방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의 문제는 상대방에 대한 내 인식의 문제이다. 자기가 인식한 내용만 가지고 ‘ 이 사람은 분명 이런 사람이다’ 생각하며 잘 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상대방을 모르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해보자. 자신의 편견과 판단으로 상대를 지레 짐작하고 상상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안에 각인된 상대를 지워야 하고 또한, 내안에 정형화된 나도 지워야 한다.”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소설 속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고작 그녀를 잘 우는 여자일 뿐이다.” 우리는 과거의 모습과 얕은 인식으로 상대를 판단할 뿐이다. 이것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세상의 모든 눈물을 담고 있는 S. S도 눈물을 거두거나 참는 경우가 있다. “울고 싶은데 말이야 마음 놓고 울 데가 있어야지. 집에서 아픈 딸애 앞에서 울까? 병원 사무실에서 울까?”(P100) 학부생 때, 동아리 모임이나 식당에서 잘도 울던 S. 그녀가 변했다. 눈물에도 상대방을 가려가며 나오는 것이다. 본인이 아끼는 딸과 사회적 관계가 있는 직장에서는 눈물을 삼키거나 참는 것이다. S는 왜 변했는가. 여성의 눈물은 있다. 모성(엄마역할)의 눈물과 사회적 역할의 눈물은 없다. 눈물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지만 이들에게는 눈물을 삼킨다. 누가 S의 눈물을 가져갔는가? 엄마와 직장인 S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불완전한 존재이고 ‘함께’라는 관계로 맺어지고 있다. 또한, 관계에서 제도 속 존재로 나아간다.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관계와 제도에서 역할이 생긴다. S는 역할갈등으로 그들 앞에서 눈물을 삼킨다. 본인의 감정은 절제된다. 절제된 감정은 결국 쌓이고 앃인다. 소설에서는 S의 이후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S를 보며 생각이 잠긴다. 역할갈등으로 무수히 삼킨 눈물들을. 앞으로도 숱한 사연으로 눈물을 삼키지 않을까. 그리고 역할에 따른 S의 눈물의 성격도 변했다. 화자가 본 마지막 장례식장에서 흘린 S의 눈물은 자본이었다. 그 동안 S가 보인 눈물과 결이 다른 것이다. 우리는 무수한 역할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역할에 따라 눈물의 성격도 변한다. 눈물을 삼키기도 한다. 눈물은 감정의 표현이다. 지금의 눈물들이 감정이 아닌 가치척도로 여겨지는게 씁씁하다. S님, 마지막 장면의 장례식의 눈물은 자본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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