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열린책들 세계문학 21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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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 출간 이후 세계적인 고전이 되어버린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1883~1957)은 이 작품으로 노벨문학상 후보가 되었지만 그 해 문학상은 알베르 카뮈에게 수여됐다. 사후 알베르 카뮈는 “카잔차키스야말로 나보다 백번은 더 노벨 문학상을 받았어야 했다. 그의 죽음으로 우리는 가장 위대한 예술가를 잃었다”며 그를 칭송했다. 실존주의자 카뮈가 그의 죽음을 애석해 했다는 것은 카잔차키스의 글쓰기는 실존의 글쓰기였다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의 ‘뫼르소’와 그의 <그리스인 조르바>의 ‘조르바’를 비교해보면서 읽어보면 실존에 대한 그의 개성 있는 주인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편으로 그는 니체의 사상을 만나것은 중요한 성장점이었다. <영혼의 자서전>에서 그는 “니체는 새로운 고뇌로 나를 살찌게 했고, 불운과 괴로움과 불확실성을 자부심으로 바꾸도록 가르쳤다”고 쓰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를 볼 수 있었다. 조르바는 영원한 자기창조와 영원한 자기파괴를 반복하는 디오니소스이며 선악의 저편에 있는 짜라투스트라다.

매력적인 이 소설은 실존 인물을 모티브로 탄생했다. 1917년 작가 카잔차키스는 고향인 크레타 섬에서 갈탄 사업을 벌였고, 당시 실제로 만나 함께 일했던 요르고스 조르바(1869~1941)가 바로 그 조르바다. 일종의 자전적인 소설인 셈이다. 소설 속 ‘나’, 조르바가 두목으로 부르는 젊은 청년이 카잔차키스다. 소설 속 나이마저 35세로 작가가 실제 조르바를 만난 때와 같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그의 고향인 크레타 섬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았고, 열정적이고 테스토스테론이 물씬 풍기는 두 남자 주인공의 우정, 사랑, 여행의 여정을 보았다.

자유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중략)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 (중략) 당신한테는 무식이 좀 필요해요. 무식, 아시겠어요? 모든 걸 걸고 도박을 해야 합니다. (P427) “인간은 자유롭게 태어났지만 어디서나 쇠사슬에 묶여 있다.” 쇠사슬은 무엇을 말하는가. 기존의 가치, 질서, 자본 등이 속한다. 조르바는 “두목은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기에 줄을 자르지 못한다.”고 말한다. 머리가 힘이 센 두목은 항상 그 머리가 먼저 작동해 아주 좀상스러운 소매상이다. 앞에서 말한 쇠사슬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쇠사슬은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진 길이다. 머리로 사고하면 쇠사슬에 익숙해 진다. 두목, 아니 현대의 인간은 머리가 힘이 세다. 쇠사슬, 줄을 잘라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기지 못하는 것이다. 현재를 즐길려면 머리의 힘이 약해야 한다. 조르바는 쇠사슬을 끊어낸 자유인이다. 그는 과거, 미래 따위에 머리가 먼저 가지 않는다. .“나는 어제 일어난 일은 생각 안 합니다. 내일 일어날 일을 자문하지도 않아요. 내게 중요한 것은 오늘, 이 순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p389) 조르바는 이 순간에 충실하다. ‘내일은 달라지겠지, 내일은 조금 나아질 거야.’라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지금을 살고 있지 않다. 머리가 중심이 되어 현재 아닌 미래를 살고 있는 것이다. 현재의 순간은 매번 건너띤다. 내일이 되어도 현재는 없다. 오늘이 없다. 내일은 다시 모래를 본다. “미래를 향한 길과 과거로부터 이어지는 길이 모순처럼 보이지만, 두 모순이 만나는 곳에 바로 우리 삶의 의미가 있다.”우리의 삶은 현재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자유롭다는 것이다. “만약 현재의 삶을 다시 태어나서 산다면, 다시 살 수 있을 것인가?”현재를 다시 살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을 해본다. 지금의 대답은 ‘No’ 그럼, 다시 태어나서 지금의 삶을 다시 살려면 지금 어떻게 해야 할까? 현재의 상황을 긍정하고 현재를 즐기는 것이다. 그러면 내 삶은 변할 것이다. 다시 태어나도 지금의 삶을 살아싶을 것이다.

또 다른 자유, 인문정신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조르바는 본인 그대로 날것을 그대로 드러낸다. 자기 이름에 걸맞은 스스로의 향기가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강물은 어제의 강물과 다르듯이 어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 조르바는 현재를 살며 자신을 창조해 나가고 있다.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는 것들을 안 하려고 한다.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당당한 열정이 있다. 자신의 삶은 하나 밖에 없다는 소중함을 인식하고 자본이든 권력이든 여자든 어떤 것에도 휘둘리지 않는다, 조르바는 인문정신이다. 인문정신은 자기 자신을 되찾는 것이다. 자유정신인 것이다. 누가 나를 죽인다 해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매순간 죽음을 생각해요. 죽음을 보는 거지, 무서워하는 건 아니예요.”(p387) 두려움보다 내가 당당하게 사는데 “내가 죽는다고 해서 무슨상관인가. 그는 국가, 종교, 윤리 등에 흔들리지 않았다. 흔들렸다면 여자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의 선택에 타인이 관여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자유의지로 선택한 삶을 살았다. 그의 자유는 조르바 그 자신의 고유명사인 인문정신이다.

운명을 사랑하면 춤을 춘다

갈탄광 사업의 핵심인 목재를 나르는 케이블이 실패한 후 조르바와 ‘나’는 해변에서 잘 익은 양고기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는 ‘조르바’에게 춤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 조르바가 펄쩍 뛰어 일어났다. 그의 얼굴이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춤이라고요, 두목? 정말 춤이라고 했소?”(P413) 조르바는 본인의 삶을 음악과 춤으로 표현하는 자이다. ‘나’는 ‘조르바’가 춤을 추는 모습만 보다가 갈탄광 사업의 실패 후 함께 춤을 추게 된 것이다. 그 때, 조르바의 춤에서 인간이 자신의 무게를 이기기 위해 펼치는 그 환상적인 몸부림이 처음으로 이해되었다. 니체는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게 된 짜라투스트라의 하산을 서술하면서 “그는 춤추는 자처럼 걷고 있지 않은가?”라고 말했다. 춤을 춰본 사람들은 춤을 잘 추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이 가벼워하는 것을 안다. 어떻게 몸을 가볍게 만들 수 있을까. 조르바는 중력의 힘을 거스르듯이 몸이 가벼웠다. 일에 있어서는 두목에게 구속되어 있지만 삶 자체를 무겁게 만들지 않았다.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무 무겁게 대하지 않았다. 자기 삶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삶의 움직임에 귀에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기 육체와 영혼이 교감하게 된다… 자기 몸과 영혼이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된다. 삶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보다 행하게 된다.“나는 전적으로 신체일 뿐, 그 밖의 아무것도 아니며, 영혼이란 신체 속에 있는 그 어떤 것에 불과하다.” 조르바는 몸과 함께 영혼에도 먹을 것을 주라고 한다. 짜라투스트라처럼 몸과 영혼을 동일시 했다.

조르바의 말하기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피로 쓴 것은 ‘자신의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사유하며 깨달은 바를 글로 쓰는, 자신의 경험을 고스란히 녹여 그 안에 자신의 넋을 담은 글을 말한다.”조르바의 말은 오롯이 그에게서 비롯된다. 그의 말은 그와 분리될 수 없다. 조르바의 말은 삶과 체험이다.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자기 입으로 말하고 있다. 온 세계를 그대로 겪어온 그의 말은 사람의 온기를 간직하고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왔다. 우리는 살아내지 못한 글들, 머리로 짜낸 글들을 읽고 공부했다. 그가 말하는 것과 우리가 말하는 것의 차이가 크다.
좋아하는 인문학자 중 고전 인용을 잘하는 한 인문학자가 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를 2할, 인용을 8할을 할 만큼 지식 소매상이다. 한창 인문학에 관심이 있을 때 그의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들을 때마다 나는 지적으로 한층 성숙해 지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인용문을 외우고 주변에 활용할 때의 쾌감은 정말 좋았다. 인문학을 배울 때의 초기 증상이 나타났다. 그는 변치 않고 인용문을 소개한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데 갑가지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왜, 자기 이야기는 하지 않고, 남의 이야기만 할까, 자신의 경험을 그럴싸한 문장으로 포장하는 지식 소매상이다.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왜, 남의 말만 할까, 이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줘‘ 하고 속으로 외쳤다. 결국 그는 자기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인용과 그간 읽어왔던 텍스트 중심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의미가 풍부하고 포근한 흙냄새가 나는 말, 조르바의 말하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는 이성의 방해를 받지 않고 땅이 되고 물이 되고 동물이 되고 신이 되어 살았다.(p198) 조르바는 자신의 심장의 목소리를 듣고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진인 대지에 의미를 부여하는 위대한 환상가이자 위대한 시인이다. 그는 살아가는 것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고, 순간에 의미를 부여한다. 우리는 사물이 낯설고, 주변이 아닌 그 사람만 보이는 경험을 해 본다. 그것을 우리는 사랑이라 한다.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가는 길, 직장에 가는 길이 너무 익숙하여 도중에 마주치는 사물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사랑을 하는 순간 우리에게 낯설고 새로운 빛으로 다가온다. 나는 출근길 지하철 플랫폼에 섰을 때 익숙함이 아닌 낯설음과 호기심. 늘 그 자리에 있지만 눈길도 주지 않던 그림도 응시한다. 지하철 플랫폼은 새로운 공간이 창조된다. 사물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내가 바뀌어 있다. 내가 변화함으로써 세계가 달라졌다. 이러한 경험을 지속하고 차츰 늘려가면 조르바의 말하기가 가능하지 않을까. 피의 말하기이자 창조의 말하기를.

만약 내가 조르바가 된다면

매달 중순이 회사에서 계획한 사업계획 진척도를 보여준다. 회사에서 추구하는 목표는 한결같다. 회사가 바라는 것은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다. 화폐가 모든 가치의 척도이므로 더 많은 화폐를 얻는 것이 곧 더 많은 가치를 얻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열정적으로 화폐가치를 올리고 더 획득하기 위해 나와 주변을 채근하며 신나게 목표달성을 부르짖는다. 시장(고객이 있는 곳)은 가치가 규정되는 장소이다. 시장에서 회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화폐와 교환될 수 있으냐가 중요하다. 이곳에서 사업계획을 달성해야 한다. 사업계획은 직장인의 모든 가치척도의 기준이다. 그리고 그것을 기준으로 행동한다.“행동의 가치는 어떤 보편적인 잣대(기업은 화폐)에 의해 정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행동이란 능력이나 지식, 욕망의 복합체로서, 그것이 구성되는 방식과 양상에 다라 가치가 전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떤 효용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만,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얼마나 많은 화폐를 획들할 수 있느냐에 따라서만 가치를 정한다. 자본주의에서 지배적인 유형의 행동이 된 노동은 바로‘화폐로 표현된 활동’, 다시 말해서 ‘상품화된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직장생활 10년 이상이 되면 아래와 같은 고민을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일까, 부속품이 되어가는 나의 모습에 자괴감, 권력에의 의지 때문에 무참히 밟아 버리는 인간성 등. 회사의 기준이 나의 가치척도가 되어 삶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조르바를 보며 생각해 본다. 회사의 굴레 벗어나고 싶은 강한 충동이 생긴다. 자본의 굴레에서 벗어나 살기 쉽지 않은 세상이라 충동적인 선택은 할 수 없다. 조르바도 두목의 갈탄광에서 임금을 받으며 일하지 않았는가. 먹고사는 문제에 있어서 조르바나 ‘나’는 비슷한 상황이다. 조르바의 일과 삶을 대하는 태도는 달랐지만.
우선, 나는 스스로 삶의 목표를 정하지도 못했다. 진정한 행복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다. 회사가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을 믿고, 회사가 원하는 방식으로 화폐를 벌어들이기만 했다. 나는 점점 몸과 마음이 소진되어 가고 있다. 자본의 용어로 말하면 나의 노동력이 화폐의 가치로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의 절반 가까이 직장생활에 쓰고 있는데 자본의 가치가 떨어지니 이후의 상황은 예상할 수 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기가치’를 만들지 못하고 ‘회사의 가치’만을 생산효율에 따라 재생산하고 있다. 조르바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당신, 만약 당신이 조르바가 된다면 직장생활 아니, 삶을 어떻게 사시겠소?”기존의 틀과 사고방식을 깨며 생산효율을 높여 봤지만, 틀에 벗어난 삶의 양식에 대한 진지한 고민은 해보지 않았다. ‘정말, 조르바처럼 살 수 있을까’ 하는 주저함이 먼저 일어난다. 소설 속의 조르바의 일대기를 보면 , 조르바는 카사노바다. 나는 수줍음이 많다. 조르바는 몸의 반응속도가 빠르다. 나는 자본 사회의 교육을 받아와 머리와 먼저 간다. 조르바는 현재를 산다. 나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도 있다. 조르바는 날 것 그대를 보여준다. 잃을게 없다. 나는 날 것 그대로 보여 주다가 된통 당한적이 수회 있다. 그리고 잃을게 많다. 잃을게 많다는 것은 책임질 일이 많아 선택을 즉각적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기술하다보니 난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시 읽으며 조르바의 삶을 분석했다. 짜라투스트라와 조르바는 닮은 사람이었고, 짜라투스트라가 말한 ‘위버멘쉬’가 현실에 나타나 있는 것이었다. 이 글의 마지막 문장으로 ‘짜라투스트라’의 잠언으로 마무리하고자 했다. “나는 너희에게 위버멘쉬(조르바)를 가르치노라. 사람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 너희는 너희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아니었다.(니체 전문가는 동일한 인물로도 볼 수 있다) 조르바는 ‘자기 자신을 극복하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보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산투르 연주만 봐도 알 수 있다.“산투르는 짐승이오. 짐승에겐 자유가 있어야 해요”(p24)“두목, 내가 이미 이야기하지 않았소? 산투르를 치려면 행복한 마음이 필요합니다.”(p426) 오르탕스 부인이 행복한 마음이 들 수 있도록 달콤한 거짓말도 한다.
내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자유가 필요하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그것을 행복한 마음으로 했을 때의 자유.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미래에 대한 생각이 하지 않아 두렵지가 않다. 현재를 즐기기 때문이다. 좋아는 것을 하고 있을 때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 상태가 충만하기에 더욱 바라는 것이 없다.
작가의 묘비명“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행복한 마음으로 현재를 즐기면 무엇을 바라지도, 두렵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진정 자유로운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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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방통행로 / 사유이미지 발터 벤야민 선집 1
발터 벤야민 지음, 최성만 외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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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글쓰기는 낯설다’
<일방통행로, 사유 이미지> 발터 벤야민, 길, 2007


‘일방통행로’에서 역주행한 경험은 운전자 중에는 누구나 경험하는 한 사건이다. 낯선길에서 시간에 쫓기면 우리는 목적지와 가까운 일방통행로로 접근한다. 교통질서 위반, 이와같이 글쓰기와 사유의 위반을 <<일방통행로>>에서 읽고 배울 수 있다. 도로 위 일방통행로를 역주행 하는 마음가짐으로 읽어 보기를 권한다. 그의 사유는 우리의 질서, 사유의 프레임을 걷어낸 지적 사유의 글쓰기, 일방통행로였다. 일방통행로에서의 생명의 아찔함이 아닌 사유의 아찔함. 낮설음과 글쓰기. 의심의 눈길, 예민함의 눈길, 옳고 그름의 판단이 아닌 걷고, 사유하고 먹고, 마시고, 대화하고, 때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글쓰기. 일방통행로에는 사유의 발자국, 아사 라치스를 그리워하는 마음, 글쓰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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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과 사유의 쓰기가 생략된 우리

소화물 운송 및 포장 “나는 아침 일찍 마르세유를 지나 역으로 간다. 가는 도중에 내가 잘 알고 있는 장소들, 그리고 내가 잘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들 혹은 흐릿하게만 기억나는 장소들을 마주치면서 그 도시는 손에 들려 있는 한권의 책이 된다. 나는 재빨리 몇 번인가 더 그 책을 들여다본다. 보관소에서 박스에 포장되어 언제 다시 이 책을 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일방통행로>> P140

벤야민은 파리의 거리인 마르세유를 지난다. 이른 아침, 그가 가는 목적지와 내가 가는 목적지는 목적성을 가진 장소일 것이다. 벤야민은 도시를 거닐며, 관찰하고, 사유하고 쓴다. 이른 아침, 나는 평일이면 가야 할 목적지에 가기 위해 도시를 걷는다. 목적지를 다다르기 전 수많은 직장인, 상점, 사물, 교통수단, 주변의 대화를 보고 듣는다. 새로운 것이나 특이한 것, 필요한 것을 보면 구글링으로 가격, 위치, 간단한 글을 읽는다. 기능적이고 단편적인 사고와 쓰기를 하고 있다. 관찰하고 사유하는 쓰기는 생략 되어 있다.
우리와 달리 벤야민의 지나간 흔적들은 기억되고 쓰기를 통해 이미지적 사유로 재창조 되었다. 도시의 풍경, 사물들이 익숙함을 떠나 낯설음으로 되살려지고 있다.
‘중국산 진품들’에서 읽기와 베껴 쓰기의 차이점을 설명한다. “텍스트를 읽은 사람은 새로운 풍경들을 알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냥 텍스트를 읽는 사람은 몽상의 자유로운 공기 속에서 자아의 움직임을 따라갈 뿐이지만, 텍스트를 베껴 쓰는 사람은 텍스트의 풍경들이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기를 기다리기 때문이다. <<일방통행로>> P77
도시와 책 속에서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는 행위는 쓰기이다. 쓰기를 통해 나의 사유는 이전의 나와 달라진다.”말은 생각을 정복하지만 글은 그 생각을 지배한다.“<<일방통행로>> P100. 독창적인 사유를 갖기 위해서는 관찰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쓰기를 통해 사유는 다듬어지고 근육으로 길러지는 것이다. 이미지와 영상, 읽기에 길들여진 눈. 눈은 뇌가 보는 것이다. 뇌를 자극하기 위해서는 펜을 들고 써야 한다. 쓰면 뇌를 지배하는 것이다. 쓰는 것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사유를 지배한다. 내 생각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익숙함으로서의 거부, 낯설어지게 하는 힘

<<상대성 이론>>은 이번 생에서 이해가 어려워 읽지 못할 것이다. 문학의 상대성 이론에 비유되는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시작은 마르쉘이 마들렌과자를 먹다 과거를 떠올린다. 과거를 반추하는 것이 아니다. 그 순간에 과거가 ‘이미지’로 펼쳐진다. 과거와 현재가 섬광처럼 만나는 ‘순간’이다. 익숙한 것이 낯설어 지는 순간, 벤야민은 ”내가 개입할 수 없는 온전한 역사는 이미지로 보여질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벤야민의 과거를 다루는 새로운 방법은 역사의 파편들을 주워 담아 거기서 새로운 가치들을 발견하는 넝마주이를 하는 것이다. <<일방 통행로>> 역시 도시의 파편적인 사물, 길거리의 모습, 다양한 공간을 벤야민의 이미지적 사유로 풀어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 대상은 우리 눈에 ‘있는 그대로’ 인식되기 보다는, 머릿속의 프레임(어떤 가치나 지식)에 의해 재해석된 모습으로 인식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건, 사고를 실제와는 다르게, 프레임에 갇혀 사물, 사건 등을 본다. 그의 책 속 글감인 ‘유실물 보관소’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낯설음이다. ”어떤 마을이나 도시를 처음 볼 때 그 모습이 형언할 수 없고 재현 불가능하게 보이는 까닭은, 그 풍경 속에 멂이 가까움과 아주 희한하게 결합하여 공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P120. 공명을 다른 용어로 지칭하면 울림이다. 멂이 가까움과 부딪쳐 되울려 나오는 현상으로 새로운 풍경(이미지)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순간의 낯설은 풍경(파편)을 벤야민은 글로 표현했다. 그의 글은 몽타주기법으로 작성되기도 했었다. 낯설음에서 ‘다르게 보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기존의 생각을 비틀고 분석도 해 보고 새로운 이미지로 변형도 해 보아야 한다. 나만의 독창적 사고를 한다는 것은 일상의 파편 속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사람과 사물의 매력은 낯설음에서 온다. 익숙함의 거부, 매력 포인트를 발견하는 것은 기존 프레임에 의해 재해석하는 모습을 거부하는 것이다.

벤야민적 글쓰기

지금 수집하고 정리하고 있는 단편적인 글들과 자료들이 언제 작품으로 모아질지 알 수 없고 언제 죽음이 비수처럼 자신에게 찾아올지 모르지만, 작가는 그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미완의 원고를 늘 지니고 있는 사람,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죽음이 자신을 멈추게 할 때까지 쓰기를 포기하지 않는 사람, 벤야민은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작가라고 보는 듯하다. <<철학자의 글쓰기>> 황산, 북바북,P142~143
벤야민은 편집광적인 모습이 보였다고 한다. 이 책을 보면 주유소, 우표, 세계 지도 등 일상생활을 하면서 접하는 소재거리로 다양하다. 지나가는 풍경을 파편의 이미지로 환원하여 본인만의 글쓰기로 만들어버린다. 작가의 창작 정신이 돋보인다. 그 창작의 시발점이 사소한 글 재료들과 콘텐츠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 많은 글 재료들이 sns로 뱉어지고 있다. 글 재료는 몽환적, 지적, 편안함, 선동적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사람들의 글 재료는 파편적인 한 장면을 설명한다. 사진과 그림처럼 눈에 선명하게 사유하고 쓰기로 전환된다.
계단주의,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에는 세 단계가 있다. 산문을 작곡하는 음악의 단계, 그것을 짓는 건축의 단계, 마지막으로 그것을 엮는 직조의 단계가 그것이다. <<일방통행로>> P93
좋은 산문을 쓰는 작업 세 단계가 소개되어 있다. 철학자의 시선으로 쓴 글이라 의미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음악 – 건축 –직조, 글 재료를 모으기 위해 듣고, 감상하고, 배열, 배치를 한다. 씨줄과 날줄이 엮어져 옷감이 되듯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계단을 오르면서 가지는 목적인식을 가지고, 오르고 난 후 내려오면서 전체를 조망하며 하나 하나의 문장를 퇴고하고 새로운 창작물로 만드는 작업이다. 음악이 흘러 나오는 카페에 앉아 사유하면서 쓰면 좋다. 단, 음악은 “피아노 연습곡 소리나 사람들이 일하면서 지르는 소리들은 유난히 고요한 밤의 정적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다.” P99
글을 쓰기 위한 공간과 시간 확보, 필기구와 노트. 깊은 사유와 노트의 관리 그리고 매일 써라. 글을 써 보고 싶고 글을 쓰는 작가는 벤야민의 13가지 명제를 주의 깊게 볼 이유가 있다. 13가지를 하나씩 보면 그의 작가다운 프로의식을 알 수 있다. 이 중 나에게 해당되는 항목은 전혀없다. 글을 쓰지를 못하는 이유를 13가지 명제(P98~100)에서 알 수가 있었다. 명제 중 “글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말라.”는 글을 쓰는 사람에 있어 매우 중요한 항목이다. 3일전 페이스북에서 2명의 글쓰기를 보았다. 그들의 특징은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1인은 전문 작가였고 다른 1인은 에세이스트가 되고 싶은 젊은 주부였다. 두 분 모두 페이스북에 매일 글을 게재하고 있었다. 전문작가 한 분은 수 년째 매일 글쓰기를 하고 있었다. 그의 글은 점점 깊이를 더해 가고 있었고 일상 소재의 글들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얻고 있었다. 그에 대해 알아보니 첫 출간한 책이 고전을 읽고 서평한 것이다. 이후 사회비평과 일상적인 글쓰기로 옮겨진 것이다. 깊이있는 글이 써 진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한분은 에세이스트를 꿈꾸는 젊은 주부였다. 일상 소재를 쉬운 단문으로 구성하여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글쓰기의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읽기 쉬운 글을 쓰기가 어렵다. 그녀의 내공은 매일 글쓰기로 보였다. 그녀의 페이북 글쓰기는 ‘매일 글을 쓰라’는 메세지를 주었다. 쓰다 보면 글쓰기가 늘 것이다. 단, 벤야민의 이말은 새겨야 한다. “어떠한 생각도 자기도 모른 채 흘려보내지 말 것이며, 외국인 등록 일을 담당하는 관청처럼 자신의 노트를 엄격히 관리 할 것.

‘아사 라치스의 거리’, 사유의 발자국

벤야민의 연인, 아사 라치스. 벤야민은 라치스를 바로크 비극에 대한 논문을 쓰기 위해 갔던 이탈리아 카프리 섬에서 알게 된다. 여기서 만난 라치스를 통해 파시즘의 ‘배경음악 속에서 ”급진적 공산주의의 현재성“에 대한 통찰들을 그녀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한다. 그가 야치스를 만날 때, 그는 자신을 찾아내고, 자신을 발견하고, 새로운 세계를 탐구하는 호기심이 가득찬 작가였다. 서로가 바라보는 세계와 지식, 생각을 교류하면서 사유의 폭과 깊이는 나날이 달라지고 있었다. 라치도 또한 그를 통해 <<혁명가의 직업>>을 펴내기도 했다. 지식과 경험에 대한 존중, 나아가 서로에 대한 존경이 두 눈 속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은 지식에 이르는 단 하나의 길이며, 사랑은 합일의 행위를 통해 나의 물음에 대답한다. 사랑하는, 곧 나 자신을 주는 행위에서, 다른 사람에게 침투하는 행위에서 나는 나 자신을 찾아내고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우리 두 사람을 발견하고 인간을 발견한다. 사랑의 행위는 대담하게 합일의 경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사랑의 기술>> 문예출판사 두 사람 모두 에리히 프롬이 말한 사랑의 행위, 합일의 경험을 하고 있다. 아쉽게도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는 못했다. 최고의 관심이 유지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와의 교류에서 얻은 경험이 곳곳에 녹아 있는 <<일방통행로>>의 거리를, ”작자 속에서 이 거리를 뚫은“ 그녀의 이름을 따 ’아샤 라치스 거리‘라고 불렀다. 파리의 지명이 아닌 아사 야치스로 명명했다 그의 ’사유의 발자국‘은 책이 되었다. 지명, 사물, 상점, 관공서, 풍경, 어린아이, 도로 등 아사 라치스의 거리는 글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이 거리를 걸으며 그녀를 회상하고 그녀의 사유를 복기하며 자신만의 사유의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읽기와 듣기 중심의 생활에서 글쓰기가 하고 싶어졌다. 쓰기란 작가의 영역이라 생각했다. 독자는 쓰여진 글을 열심히 잘 읽고 많은 책을 섭렵하면 되는 줄 알았다. 페이스북에 쓰여진 글을 보며 자극을 받았다. 주변(지인, 패북 친구)에 몇 분은 작가로 등단도 하셨다. 자신의 이야기를 읽어주는 사람이 생긴 것이다. 쓰고 싶다. 독자는 언젠가는 작가가 된다. 어느 거리를 걸으며 벤야민처럼 사유도 해 보고 싶다. 페북 친구들처럼 일상 속의 이야기도 써 볼려고 한다. 벤야민의 아사 라치스 거리처럼 나만의 공간에서 사유의 흔적을 남기고 싶다. 필기구(PC,노트,펜), 음악, 나만의 글쓰기 장소, 사유를 흘러 보내지 않도록 글을 써야 한다. 벤야민이 말했듯이 매일. 써 놓고 보니 다 미래형이다. 하지만 지금 쓰는 글은 현재형이다. 현재형으로 계속 남겨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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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방
구소은 지음 / ㈜소미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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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욕망을 써 내려간다”
<<파란방>> 구소은, 소미미디어, 2021

‘파란방’은 파란색과 흰색의 조화를 통해 ‘윤’의 작품세계가 펼쳐지는 공간이다. 형형색색 펼쳐지는 빛의 향연과 달리, ‘윤’의 화실은 파란색과 하얀색의 빛깔로 미술작품의 자태를 뽐내고 있다. ‘윤’과 3인의 아름다움과 욕망, 결핍과 트라우마를 이야기한다.‘色’의 향연이다. 주인공‘윤’과 3인의 이야기는 ‘性’을 자유 분방하고 개방적인 몸에 대한 관심과 남녀간의 사랑에 대한 우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사랑이란 질문으로 4인의 이야기는 각각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 질문에 대한 자기만의 대답의 방식으로 이야기는 전개된다. 사랑, 그놈 참 단어로 한정하기엔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만큼 나 또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게 고민해 보지 않았다. 그래서 주변 동료들에게 물었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려 달라고. 모두가 뭘까요 하며 나에게 되 묻기만 한다. 도대체 사랑은 무엇일까? <<파란방>>을 읽으면서, 읽고 난 후도, 오늘도 고민한다.
소설을 보면 여성의 몸, 섹스에 대한 고민, 육체와 정신, 남녀의 오해, 섹스에 대한 단상, 외설과 예술의 사이, 주인공들이 경험한 사랑의 프레임, 고정관념 등이 서술되고 있다. 특히, 여성의 사랑, 욕망, 섹슈얼리티를 어떻게 생각하고 또 책 속에서 어떻게 표현할까? ‘파란방’은 거침없이 우리의 욕망을 그리고 사랑을 써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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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 감각적 욕망이 일어나고 반응하는 하나의 불꽃이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 중에 하나가 성적 욕망이다. <<파란방>>에서는 여성의 몸을 이야기한다. ‘여성의 몸은 인간을 만들어내는 물질에 불과하고, 남성 위주의 사회구조 속에서 여성의 주제적 성적 욕망은 지탄의 대상이었다.“인간의 성이 생식만을 위한 것이라면 신은 애초부터 쾌락이니 환락이니 열락을 얼버무려 인간에게 오르가슴을 선사하지 말았어야 했다”거침없이 아리스토텔레스 말을 비판한다. 여성이 몸과 욕망을 알아가기도 전에 사회는 여성의 몸을 특정한 의미로 결정 짓거나 원치 않는 섹슈얼리티를 부여했다. 아름답고 거침없이 묘사한 여성의 몸을, 몸의 욕구를 채우는 주인공의 방식을 이 소설에서 볼 수 있다.
여성의 몸은 남성이 욕망하고 성적 대상화로 소비하는 여성의 몸이 아닌 여성의 몸을 둘러싼 금기, 강요, 무지를 거부하고 여성의 주체적인 성적 욕망이 드러난다.”아내는 내가 마련해 준 밑트임 팬티만 입은 채 자신의 빈약한 젖가슴을 주무르더니 다리를 벌리고 손으로 자위를 시작했다.(중략)이후 아내는 내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교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주오의 아내는 남편의 강요와 억압으로 인한 가성적인 성적 반응으로 남편의 욕망을 채워주었다. 주오는 아내의 그러한 모습이 ’아내의 성적 만족감이 높다‘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집에 설치 해둔 CCTV에 비친 아내의 모습을 보고 놀라게 된다. 그녀는 주오와의 성관계에서 나오는 몸짓이 아닌 아내 스스로 만족하는 몸짓과 교성이었다.“나는 회벽 같은 윤의 등을 노려보며 오르가슴 놀이를 시작했다. 그는 나의 손이 되어 젖가슴을 짓누르고 비틀었으며 젖꼭지를 꼬집었다. (중략) 위태로운 오르가슴 놀이는 전율이 온몸을 간질이며 지나갔다.”윤과의 섹스를 갈망 하지만, 윤의 거부로 인해 성적 욕망을 스스로 채우는 은채, 은채와 친구들의 해외여행에서 20대의 섹스와 딜도로 이야기하는 자위에 대해 거침없이 작가는 뱉어낸다. 소설에서 여성은 자신의 방식으로 섹스를 탐닉하고 욕망을 드러내고 채우고 있다. “여자들의 욕망은 이렇게 반짝이고 있었다. 다만 욕망을 내보이지 않을 것을 강요당하며 살아왔을 뿐이다. 손에 딜도와 바이브레이터를 쥔 여자들은 남자에게서 조금 자유로워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여자들도 달라지고 있다.”. 여성의 몸은 욕망의 대상이 아니라 욕망의 주체이다. 금기시되었던 여성의 욕망을 이 작품 속에서 되살아나 당당하게 여성의 새로운 시선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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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의 사랑과 몸에 태도, 그녀의 메이트 주희를 보며 현대 사회의 성관념과 사랑에 대한 모습을 다양하게 볼 수 있었다. 평범하게 살고 싶었으나 평범하지 못했던 희경. 소설속의 4인의 사랑 중 희경에게 끌렸다. 희경의 사랑은 매혹적이면서 감각적이고, 사랑에 대한 기존의 생각을 낡은 구닥다리로 만들어 버렸다. 20살 상경해 첫 회사에서 송과장의 거짓에 속아, 소위 몸 주고 마음까지 주었지만, 되돌아온 건 남자의 배신이었다. 결국엔 헤어지고 낙태까지 하게 된다. 그날 이후 희경의 사랑은 가벼워지기 시작한다. 퇴사 후 희경은 생계를 전전하던 중 양작가(사진작가)를 만나게 된다. 양작가를 통해 희경은 예술가의 오브제가 되는 누드모델을 생활을 시작했다. 시간이 갈수록 그녀는 예술가들이 찾는 인기 모델이 되었다. 그녀의 몸에서 나오는 에너지는 자신감으로, 모델의 경험이 쌓여갈 수록 창작 영감을 예술가에게 불러 일으켰다.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들과 가볍게 몸을 섞는 사이가 되었다. 같은 누드모델인 주희와도 가까워지고 같이 살게 된다. 주희는 자유연애자이며, 마지막 사랑은 동성연애이다. 그녀는 예술가와 주희를 만나면서 감각적이고 때론 대담하게 몸을 섞는다. 사랑도 가벼워졌다.“사랑은 지나가는 감정이고 상대를 제대로 알려면 섹스까지 해 봐야 된다고 누누이 말해준다 (중략)이런 충고에도 등신처럼 또 사랑을 믿는다. 사랑이라는 달콤한 솜사탕을, 한 줌도 안 되는 설탕을 구름처럼 부풀렸을 뿐인데, 그러니 알지 말고 깨달아야 한다.“ 희경은 주희를 따라 극락게임(난교)도 서슴없이 한다. 극락게임을 묘사한 장면 원초적이고 감각적이다.“작가는 경험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글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으로, 독자 또한 작가의 글을 통해 경험하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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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경은 극락게임(난교)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다.“거울방에서 행해지는 극락게임은 평범하고 건강한 육체들이 일상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잠깐의 일탈이다.“ 희경은 극락게임에 초대를 받았다. 극락게임을 하는 거울방에서 이루어지는 목적은 오로지 섹스 그 자체에 만족할 뿐이다. 그 곳에서 눈을 감으면 실체는 사라지고 나를 휘감는 것은 오로지 감각뿐이었다. 그녀는 ’사랑과 섹스의 공통점을 목마름‘이라고 생각했다. 거울방에서 목마름은 가셨지만, 게임 뒤에 찾아든 허무가 낯설었다. 애초에 목적도 없는 섹스였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e est. 포스트 코이툼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에스트.“ 모든 동물은 성교(결합) 후에 우울하다.”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자기 능력 밖에 있는 더 큰 무엇을 놓치고 말았다는 허무함을 느낀다. 그녀는 극락게임 이후에 밀려오는 고독함과 허무, 외롭고 소외된 실존을 고민했다. 희경에게 마음이 간다. 배신감, 감각적 자극, 성교 후의 우울감, 외면, 남녀의 정서적 공감 등 사랑과 성에 대한 태도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고 있었다. 또한, 그녀의 동생을 위해 영혼까지 파는(은채와의 거래)현실적 모습도 보인다. 소설 속의 다른 이야기보다 희경의 이야기는 젊은이들이 고민하는 사랑과 성의 현실적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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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정서 중 하나는 상대와 무관하게 일어나는 주체적인 나의 마음이다. 주체적인 마음이라 자신의 격렬한 감정에 이끌려 그 사람을 소유하고 싶은 욕구가 커지기도 한다. 그러나 사랑은 소유와 무관하다. 은채는 사랑의 감정을 상품처럼 소유하려고 한다. 윤을 사랑한다고 무조건 윤이 나를 좋아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다. 그녀의 말과 행동은 그를 위해서다. 사랑하기에 나의 호의를 받아들려야 한다. 종국에는 그를 종속 시키는 질투심도 가지게 된다.
질투, 내가 아는 사람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 남으로 인해 행복해지는 것을 부정하는 감정이다. 어찌, 나로 인해서만 상대가 행복해 해야 하는가? 소유하려는 마음으로 인해 결코 소유할 수 없는 것이 사랑이다. 역설적으로 사랑은 소유하려 하지 않기에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사랑하는 연인은 서로를 위한 시간과 자리를 양보하고 있기에 이미 서로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큰 욕심을 일으켜 통제를 하는 것은 마치 바둑을 둘 때 나의 집에 바둑돌을 두어서 스스로 자신의 집을 허물어 뜨리는 것과 같다. 가지고 싶으면 내 마음껏 가지고, 아니라면 내버려 둘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소유이다. 내버려 둘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내버려 둘 줄 모른다면 소유한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소유 당한 것이다. 그를 관리하면서 그녀의 생활을 잃어버릴 것이 아니라, 상대로 하여금 그의 삶을 맘껏 살게 해주고, 내 삶에 충실한 것이 나의 매력을 증강시킨다. 이러한 자세를 가질 때 나 스스로가 자유롭게 되고, 상대에게 편안함을 선물한다. 상대가 편안하면 나에게 좋은 일이니, 어찌 즐겁지 아니하겠는가. 은채의 쓸쓸한 사랑은 내 인생의 윤이 아니라, 윤 안에 있는 내 인생이었다.
사랑은 지금 이 순간에 상대와 함께하는 것이다. 마음을 나누는 것이다. 같이 밥을 먹고, 바라보고 웃고, 손을 잡고 길을 걷는다면 나는 상대를 소유하는 것이며, 그 이상을 소유할 수 없다. 만약, 윤과 은채가 다시 만나게 된다면, 둘의 무대가 각종 시련에도 둘만의 경험이 지속성을 유지하며 영원을 획득해가는 과정이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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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날 때부터 남들과 똑같이 세상을 볼 수 없고 느낌을 공유할 수 없다면, 그것은 운명과 숙명 중 어디에 해당하는 걸까.”윤은 녹색과 적색 계열의 색을 구분할 수 없는 색맹이다. 그는 색맹이라는 결핍을 숙명으로 안고 태어났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는 모든 것을 잊는다. 그림이 좋아 화가로서 치명적인 약점이 있지만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모든 색을 볼 수 없는 결핍, 결핍을 극복하려는 그의 이야기는 아련하다. 등장 인물들의 결핍과 트라우마가 섹스로 묘사된다. 이들의 성행위가 과감할수록 더욱 슬퍼지는 건 채워지지 않는 결핍이다. 그의 결핍된 마음에서 드러난 섹스, 마음 장애, 은채에 대한 모멸감이 윤의 차가운 사랑에서 이야기된다. 윤은 결핍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는 똑같은 밑그림을 2장 그린다. 하나는 은채가 선물한 안경을 쓰고 색을 입힌다. 그런 뒤 안경을 벗고 하나 더 그린다. 사람들은 두 그림을 다르게 보이지만 그에겐 하나이다. 자신의 숙명을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니체는 고통을 당하면 그것을 너무 제거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한다. 인간의 실존은 사실 고통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니체의 몸철학은 자기 몸을 철저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몸의 움직임에 귀를 기울여보라고 한다. 자기 몸과 소통하면서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되고, 어떤 욕망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되며, 욕망을 다스리고 질서를 세울 수 있게 된다. 파란방에서 있었던 사건, 그 후 2년이 지나 윤은 다시 작업실에 나타난다. 주오와 마주친 윤은 달라져 있다. 그는 자신 그대로를 인정했고, 긍정함으로써 삶이 가벼워져 있었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내 정식은 아모르 파티, 운명애다. 앞으로도, 뒤로도, 영원토록 다른 것은 갖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자신의 삶 그 자체를 갖고자 원한 것이 아모르 파티, 운명애라고 이야기 한다. 윤은 마지막에 이 대답으로 ’아모르 파티‘을 갈음한다.“다시 개인전을 할 겁니까?, 네, 그래야지요. 제가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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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방
구소은 지음 / ㈜소미미디어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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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년 화제의 책. 희경의 생각, 행동, 심리. 나의 희경앓이는 시작되었다. 단연코 추천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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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글쓰기의 최전선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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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편안하게 읽었습니다. 글쓰기 책을 이렇게 편안하게 쓰다니. 좋은 책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결국 무엇이든 쓰라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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