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르노빌의 아이들 - 히로세 다카시 평화소설
히로세 다카시 지음, 육후연 옮김 / 프로메테우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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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연대
<체르노빌의 아이들>, 히로세 다카시 , 프로메테우스출판사, 2019 With
<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김은혜 옮김, 새잎, 2020 <체르노빌>, HBO,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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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황홀했다! 봄의 초원에 꽃이 폈고, 숲의 녹음은 부드러웠으며 봄 향기를 내뿜었다. 모든 것이 되살아나고, 자라며 노래하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바로 름아움과 두려움의 어울림이었다. 두려움으로부터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에서 두려움을 구별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반대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반대였다. 죽음의 낯선 얼굴이었다(203).<체르노빌의 목소리> 체르노빌의 봄과 일상은 우리의 일상과 다르지 않았다. 1986년 4월 26일 새벽 1시 26분 이후로 일상의 시계는 멈추었다. 이후 체르노빌 원자로 폭발로 피폭된 사람, 그들의 아이, 미래의 태어날 생명 모두 피폭 이전의 세상을 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은 ‘체르노빌레츠(원전 사고로 피폭된 사람)’로의 삶을 시작 하였다. 삶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었고, 그들에게 변하지 않은 것은 인간의 고통뿐이었다. 5월이면 장미꽃이 만발했던 프리프야트에서 장미꽃 향이 가득한 정원을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시간이 흘렀고, 그들은 삶과 자연의관객이 되었다. 르포소설 <체르노빌의 아이들>은 원전 피폭 이후 일상이 멈춰버린 체르노빌레츠의 이야기이고, 무기력하게 우리의 삶이 국가에 의해 짓밟힌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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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의 대가는 무엇일까요?” 미국 HBO의 5부작 <체르노빌>의 첫 대사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거짓의 대가를 ‘체르노빌레츠’라는 용어로 알 수 있다. 누가 거짓을 말하는가. 누가 거짓을 믿었는가.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국가주의와 국가를 너무 믿어 벌어진 하나의 전체주의적 사고의 인재이다. ”발전소는 (중략) 착실히 진화작업을 진행중이라는 연락이 왔으니 쓸데없는 걱정은 접어두길 바랍니다. 이곳에서 되돌아간 결사대원들은 모두 건강한 모습으로 열심히 임무에 충실하고 있습니다.(54) 국가는 온 힘을 다해 여러분을 도울 것이니, 앞일에 대한 불안일랑 떨쳐 버리고 당국의 지시대로 따라 줄 것을 거듭 당부하는 바입니다.(70) 사고 당시 소비에트 연방은 조지 오웰의 <1984>의 닮음꼴이었다. 소설은 전체주의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소설 속에서는 오브라이언을 통해 “당이 진실이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 진실이고, 당의 눈을 통해 보지 않고서는 실제를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소비에트 연방은 공산당에 의해 국가 통제가 이루어졌다. 그들이 선전하는 것이 사실이었고 당원들은 믿었다. ”텔레비전을 켜니 고르바초프가 국민을 안심시키는 중이었다. (중략) 나는 믿었다. (중략) 우리는 믿는 데 익숙했다. (중략) 그게 당의 기강이었고, 나는 공산당원이기 때문이었다.(중략) 이런 믿음이 깨지면 많은 이들이 뇌졸중에 걸리거나 자살을 한다. 학자 레가소프처럼 심장에 총알을 박는다.“(279) 시민들은 국가를 믿었다. 원전 사고로 소방관과 군인들이 동원되었고 그들이 이 사태를 해결하겠다고 믿었다. 평화적 핵이 죽음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몰랐다. ”시민들은 정부에서 반복하는 ‘안전하다’라는 말을 믿었다. 사고 후에 맞이하는 메이데이를 경축함으로써 지금의 공포를 잊고자 노력했다“(143) 그들은 정부의 지시에 따라 바이오로봇(인간)이 되어 제대로 된 보호장비 없이 ‘핵을 삽으로 퍼는’ 기이한 일을 하였고, 국가는 그들에게 영웅이라는 호칭을 썼다. 그리고 원전 사태가 해결되어 가고 있다며 거짓 선동을 하였다. ”푸념하는 사람은 없었다. 일하라고 하니 해야 되는 것이었다. 조국이 부르고 조국이 명령했다. 우리는 그런 민족이다“(270) 타냐가 말한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공개 정책이라는 말을 전 세계에 선전하면서도 뒤로는 진실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로 인해 독일 한 사회학자는 출판 계획을 앞당겼다. 그는 21세기 사회를 ‘위험사회’라고 명명한 ‘울리히 벡’이다. 그가 책의 제목으로 삼은 위험사회란 위험이 중심으로 작용하는 사회이며 위험을 결정하기 위해 늘 점검해야 하는 사회다. 다가올 미래는 ‘안전’의 가치가 ‘평등’의 가치보다 중요해질 것으로 그는 내다봤다. 위험은 지역과 계층에 관계없이 평준화가 되고 있어 “부에는 차별이 있지만 스모그에는 차별이 없다”고 했다. 그는 위험사회의 인자와 배경으로서 윤리성을 상실한 과학기술과 금용자본, 무절제한 환경 파괴, 억압당한 개인과 집단의 반발, 정보사회의 위험성 등을 지적했다. 21세기의 위험은 ‘danger’가 아니라 ‘risk’다. 자연재해나 전쟁 같은 불가항력 재난이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적인 환경과 결합되어 나타난다고 했다. 그래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위험을 ‘생산된 위험’, 생산된 불확실성‘이라고 불렀다. 과학과 기술발전, 환경훼손, 경제사회 발전에 따른 의도되지 않은 부작용이거나, 별 위험이 아니지만 그 대처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이나 행동이 개입해 재앙이 되고 마는, ’인위적 위험‘이라는 것이다. 체르노빌 원전사고는 무리한 원전 가동으로 인한 원자로 폭발로 일어난 ’인위적인 위험‘이다. 원전사고 당시의 당직자의 잘못된 판단과 행동으로 생산한 위험이다. 그토록 많은 희생자가 나온 것은 인간의 잘못이었다. 울리히 벡은 위험사회에 대한 대책으로 ’성찰적 근대‘를 말한다. 성찰적 근대란 위험을 포함한 모든 준비를 국가와 전문가만 독점하지 말고 시민들이 소통하고 대화하면서 공론의 장을 만들어 해결에 동참하는 사회다. 지식과 과학기술 전 과정을 시민이 비판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결국 위험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정부와 시민과의 성실한 소통이다. 우리는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국가에서 발표하는 정보를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시스템에 따라 행동하여야 한다. 단, 정보제공은 거짓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진실이어야 한다. 거짓의 대가는 참혹했다. 정부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고 ‘서로 간에 어떤 위험을 참아낼 수 있는가, 어떤 위험을 우선 관리할 것인가’ 하는 합의를 도출하고 시민의 안전을 최우선 해야한다. 진실의 대가는 최소한의 피해와 안전한 사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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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은 바로 저 폭발 때문에 생긴 거야. 그래, 난 절대 잊지 않겠어. 모든 것을 다 기억할 거야.(72) 이반 세로프는 체르노빌 원전사고로 인해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잊지 않겠다고 한다. “원전 부근의 자연은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되었고 체르노빌레츠은 고통을 받고 있다. 인재(人災)로 인한 사고는 당시의 현장에 있었던 사람을 통해 기억하고 보존되어야 한다.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고 누구에 의해 일어났는지에 대한 책임소재를 밝히고 앞으로 사고가 재발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특히, 대형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것은 정확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사후대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건의 진상조사와 책임자 처벌, 피해자 실태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면 사회불안을 낳고, 개인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된다. “증언하고 싶다.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중략) 적어두었으면 한다. 당신들이라도 적어두었으면” <체르노빌의 목소리> 사건이 발생한 초기 국가권력에 의한 거짓 선동으로 체르노빌에서는 방사능 피폭이 있었다. 방사능 피폭에 대한 진실을 알리기 위해 피폭된 주민, 현장에 투입된 인력, 과학자를 통해 이 사건의 참혹한 실상을 기록하고 보존했다. 원자력 에너지에 대한 재검토와 피해가 발생된 지역과 주민을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고 있다. 기억과 기록 그리고 보존의 힘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사고의 기억과 기록이 보존되어야 하는 사건이 하나 있다. 국가권력에 의해 부서져 버린 이루진 못한 꿈을 기억하게 하는 사건이다. 2014년 4월 16일 진도 앞 바다에서 대형 선박이 침몰한다. 이 사건으로 304명의 희생이 생겼고 그날 이후 그들의 꿈과 삶은 이어나가지 못했다. 이 사건은 체르노빌 원전 사고와 비슷한 맥락이 있다. 국가형 인재(人災)이다. 4월 16일 오전 10시 31분 세월호는 완전히 전복된다. 최초 사고 신고는 오전 8시 52분. 9시 30분 해경 헬기가 도착하고 주변 어선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선체가 침몰하기까지 1시간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배에 탑승해 있던 304명의 단원고 학생과 승객들은 구조되지 못했다. 세월호의 선장과 승무원들은 학생들을 안에 남겨두고, 그들만 탈출했다. 해경은 하선 유도 방송조차 하지 않았다. 총력을 다해 주조가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도되었지만, 지휘체계도, 책임도 사라진 현장에서 모두 우왕좌왕하며 손을 놓고 있었다. 그날 국민들이 목격한 것은 국가 시스템의 몰락이자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하는 국가 가치의 붕괴였다. 우리는 세월호 현장의 장면들을 똑똑히 기억한다. 하지만 그 기억을 누군가 지우려 했고, 지우려 할수록 음모론과 유언비어가 세상을 휩쓸었다. 상처는 상처대로 곪아 가고, 기억은 더 생생해 졌다. 사회는 잊을려고 했고 회복과 치유과정은 없었다. 모두가 아팠고 세상은 진실을 외면해 갔다.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 잊혀지는 순간 참사는 반복됩니다. 역사의 가르침입니다. 교실을 보존해야 합니다." <경기도 교육청 앞 피켓 中> 사건을 기억하고 보존하지 않으면 사건은 되풀이된다. 생생하고 절실하게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기록하고 보존 되어야 한다. “적어 두세요. 우리는 우리가 본 것을 이해 못했지만 그렇게라도 남겨두세요. 누군가 읽고 이해하겠죠. 나중에, 우리가 죽은 후에.”(13) “기억도 우리가 사는 만큼 살 것이오(318) <체르노빌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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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 원전 사고의 진실을 파헤쳤던 핵물리학자 레가소프.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거짓을 진실로 착각하는게 문제가 아니다. 정말로 위험한 건 거짓을 계속 듣다 보면 진실을 보는 눈을 완전히 잃는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에 대한 일말의 희망마저 버리고 지어낸 이야기에 만족하는 수밖에 없다.”<체르노빌> HBO. 이 둘은 거짓의 위험성을 알린다. 거짓을 알기 위해서는 사실과 진실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실(fact)과 진실(true)은 같은 것인가? 다르다면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일까? 그럼, 언론이 보도하는 건 다 사실인가, 진실인가, 아니면 거기에 가까운 것인가? “내 딸은 체르노빌 때문에 죽었다. 그런데 우리가 침묵하기를 원한다. 아직 과학적으로 증명이 안 됐다고, 정보가 충분히 수집되지 않았다고 한다.”(69) <체르노빌의 목소리> “이곳에서 내 이름은 이반 세로프가 아니고 미콜라 네드바이로래. 명부에 가짜 이름으로 씌어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날 만나려면 미콜라네드바이로를 찾아야 하는 거야. 정말 지독한 놈들이야” (130)
국어사전은 ‘사실’에 대해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 정의한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3호기 원자로 화재는 사실이다. 사고 당일 당직자 중 책임자 다를로프는 죽는 순간까지 본인의 잘못으로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사고가 난 이후 핵물리학자 레가소프는 원자로의 폭파된 원인을 분석한다. 원인은 사고 발생 당일, 당직자의 무리한 원자로 가동이었다. 사실 뒤의 진실이 레가소프에 의해 고개를 내미는 순간이다.
진실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거짓 없는 사실‘이다. 사실은 참이 아닐 수도 있는 것이다. 아서 코난 도일의 소설 셜록 홈즈는 “명확한 사실만큼 기만적인 것은 없다” 어떤 사건이나 사안이 개별적으로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판단해선 오류를 범할 수 있다는 경고이다. 사실과 진실은 동일하지 않다. 사고 난 후 고르바초프는 TV 연설에서 “걱정하지 마십시오. 동무들, 다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냥 불이에요, 불. 걱정할거 없습니다. 아직 거기서 사람이 살면서 일하고 있어요.”(251)<체르노빌의 목소리> 국가를 신뢰해 달라고 했다. 언론에 나온 고르바초프의 말은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거짓이었다. 국가는 질병에 대한 모든 자료가 ‘기밀’ 또는 ‘고급 기밀’이라는 도장 아래 감추었다. 의학과 학문을 정치로 끌어들여 진실을 보는 눈을 잃도록 했다. 진실이 점점 피해 당사자의 곁을 떠나고 있었다. 사실은 이미 무수히 존재했지만 사실 아닌 거짓이 존재했다. ‘사실이 밝혀진다’란 말은 쓰이지 않는다. 밝혀지는 건 사실이 아닌 진실이다. 시간이 지나 갈수록 체르노빌 사고는 진신의 곁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우리가 대적 해야 할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위해 우리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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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수난이나 비극을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다. 신체적 어려움을 딛고 살아갈 의욕을 다지게 된다. “이네사, 어깨를 꽉 잡아, 그래도 정 걷기 힘들면..아냐, 당장 내 등에 업혀. 이반은 말을 끝내기가 무섭게 이네사를 등에 업었다. 이반은 바람과 개울의 소곤거림을 들으며 한 걸음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뎠다. 이네사는 등에 업힌 채 오빠의 귀에 입을 가까이 대고서 방향을 가르쳐 주었고, 타냐는 아들의 오른팔을 꼭 잡은 채 따라가고 있었다.”(96) 눈이 먼 이반이 다리가 불편한 이네사를 업고 가는 모습은 체르노빌의 아이들의 미래를 예견할 수 있다. 특히, 이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서로의 신체적 불편함을 채워가며 힘들지만 원전에 피폭된 위태로운 현실을 조심스럽게 건너가는 것이다. 앞으로 체르노빌의 아이들이 살아가게 될 삶의 모습을 예견하는 것이다. 앞으로의 과정이 험난하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사실에서 아이들의 삶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힘을 합하여 이 고난을 개척해 나갈지도 모른다. 체르노빌 아이들의 행복은 그 의미가 국가의 힘에 의해 규제된다. 국가가 앗아간 개인의 행복. 개인의 행복을 돌려줘야 한다, 국가의 구성은 사람이 함께하기에.


“아이들이 체르노빌을 그렸어. 그림 속 나무는 뿌리가 하늘을 향해있어. 강이 빨간색 아니면 노란색이야. 그렇게 그려 놓고 울었어 (298) <체르노빌의 목소리> “먼저 나온 아이들이 산다고 나간게 아니라 아이들 끌어올려주고 먼저 나온 아이들이 밀어주고 질서 지키면서 나와서 누구 한명 나올 때까지 계속 이름 부르고 그랬어요”<세월호 생존 아이의 증언> 4월은 봄을 여는 계절이자 T.S. 엘리엇이 노래한 잔인한 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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