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대표적 사상가

그 자신이 아픔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

참혹했던 시간에서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절망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는 존재의 의미를

저술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빅터 프랭클‘
그가 창안한 ‘로고테라피‘ 실존적 분석

우리에게 고통을 주는 혼란스러움을
그는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의 좌절에 집중했다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을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시련 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상실된 강제수용소의 참혹한 상황에서도
별것 없는 것에서 자신의 시련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밖에서 오는 운명을 초월하는 힘을 발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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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 김시식지(김始殖池)

ㅡ우리나라 최초 김 양식의 시작
광양 김시식지

목적지 여수를 향해 자동차 바퀴는 열심히 굴러갔다.
올여름 휴가는 무조건 ‘당일치기‘
아직 끝나지 않은 코로나 여파도 있지만 아이들의 방학이 들쑥날쑥이다.
일정도 일정이고 여러가지 이유가 겹쳐 무리하지 않고 최선의 방법은 2시간 남짓 ‘당일치기‘가 가능한 곳을 찾아 조용히 다녀오는 것이었다.

여수 밤바다가 보고 싶었다.
충동적이지만 떠났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이제는 여행을 떠날 때 계획이란 걸 세우지 않는다.
뭐, 귀찮은건 기본이고 계획 잡으며 이래저래 검색하고 하는 것은 예전에 할만큼 했다고 말하고 싶다. 10년의 가족여행 장기 프로젝트가 끝난지 몇 년이 지났다. 이제 여행은 무작정 떠나고 가면서 알아보는 식이다. 지나가다 궁금하면 방향을 트는 과감한 여유는 이미 오래전 초월한지라 시간에 쫓기는 여행은 멀어진지 오래다.

광양을 거쳐 여수로 향하던 도중 우연히 ‘이정표‘에 적힌 ‘김시식지‘라는 표지를 보았다. 김서식지도 아니고 김시식지...
궁금해 핸들을 돌렸다.

광양 ‘김 시식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을 김을 양식한 김여익을 기리기 위해서 세운 자그마한 김에 대한 역사관이다.
지금은 낯설지만 과거 광양은 김을 양식하며 생계를 이었다고 한다. 그런 광양의 지금은 광양 제철소가 광양을 먹여 살리고 있다.

과거의 김이 먹여 살린 광양과 현재의 광양 제철소의 ‘쇠‘가 먹여 살리는 광양은 아이러니하게도 金으로 먹고 산다 .

아주 작은 역사관,
그냥 지나치면 모르고 넘어갈 수 있는 곳에서 ‘하루 인연‘을 만났다.
꼭꼭 숨어있는 공간에서 이야기를 들려주신 문화 해설자님, 호기심에 잠시 들리고자 내린 곳에서 만난 소중한 시간이었다.
책에서 읽을 수 없는 많은 이야기들은 너무나 흥미로웠고 많은 질문이 오가면서 ‘광양‘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말았다. 이미 ‘여수‘는 머리 속에서 사라졌다. 시간가는 줄 모르고 듣다보니 어느새 해설자님의 열정이 이것저것, 구석구석 모든 것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계셨다. 별 것 없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저 가볍게 들리고자 한 곳에서 너무나 많은 것을 접하고 깨닫게 되었다.

오늘 또 한번의 소중한 ‘하루 인연‘에서 시작된 이야기
‘각성‘은 계획에 따라 일어나는게 아니라고 하더니 정말 뜻하지 않는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났다.

오래전 구미 답사에서 웃으면서 들었던 이야기

넓은 바다에 사는 거북이
바같세상을 보러 나오려다
바다에 둥실 떠 다니던 구멍 뚫린 널판지에
목이 끼여 세상을 볼 확률로 만난다는
‘하루 인연‘

이 ‘하루 인연‘은 어찌보면 참으로 귀한 인연이다. 그리고 선택받은 인연이다.
드문 확률에서 만들 수 있는 최선의 인연이 하루 인연인 것이다. 그런 인연으로 시작된 동행은 매시간 꽉찬 열정으로 한 여름의 강렬한 태양보다 더 뜨거운 시간이었다.

아주 작은 역사관에서 만난 ‘하루 인연‘의 소중한 시간은 살면서 또 한 번의 깨달음을 던져준다. 나와 관계 지어진 세상 모든 것들의 인연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항상 뜻하지 않는 곳에서 찾아오는 뜻밖의 즐거움은 더 행복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배움의 기쁨은 그 여운이 길기도 하다.

깊이깊이 새겨진 기억은 나를 문득문득 행복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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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9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연진희 옮김 / 민음사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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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요구되는 법이다


톨스토이, 러시아가 낳은 대문호, 위대한 사상과 , 혁명의 거울, 휴머니스트, 사회 비평가 하나의 수식어로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 할 정도로 많은 수식어가 그의 위대함을 말해주고 있다.

<안나까레니나>는 그의 재능이 한창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집필 된 작품이라고 한다. 그리고 책은 많은 이에게 읽힌 고전 중의 고전이기도 하다.
안나와 레빈의 이야기가 두 축을 이루면서 겹겹히 전개 된다. 이렇게 이야기들은 적잖은 페이지를 자랑하는 벽돌 책이 되었다.
고위 공직자의 아내인 안나, 다른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 비극적 운명을 맞는 이야기
연모하던 귀족 영애에게 청혼하여 이상적인 가정을 이뤄가는 농촌 귀족 지주 레빈의 이야기들

결혼, 가정의 불행과 행복의 문제, 당시 러시아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 그 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내적인 방황을 생생하게 표현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책은 ‘톨스토이‘의 모든 사회적, 윤리적, 종교적 고민들이 집약된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이라 불린다.

이야기의 결말을 알고 있는 고전 소설을 다시 읽는 다는 것은 끈기가 필요하다. 어떤 계기가 있지 않음 개인적으로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안나까레니나> 역시 너무나 유명한 고전이며 영화나 뮤지컬 등 다수의 작품으로 소개되어 내용면에선 익숙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 책은 분량 또한 만만치 않다. 하지만 읽는 내내 안나와 레빈의 삶에 빠져들었다. 전자책이라는 매체의 아쉬움은 책의 초반 몰입을 떨어뜨리는 걸림돌이 되었지만, 점점 인물에 집중할수록 몰입의 장애는 사라졌다.

이 책을 편애하는 동안, 틈틈히 읽던 다른 책들의 집중도는 떨어지고 주변부로 잠시 밀려나기도 했다.
대부분의 고전, 학창시절 의무감에 의해 읽었던 책들은 거의 감흥이 없는 형식적인 맥락만 파악한 책들이다. 그래서 나에게 고전들이란 몇 개를 제외한 책 말고는 거의가 사전같은 존재로 남았던 것 같다. 없으면 안되고 꼭 있어야 하는 책, 그래서 나의 머리 한 켠에 묵직하게 자리는 잡고 있지만 쉽게 건드리지 않는 책이 되버린 것이다.
<안나까레니나> 또한 그런 책이었다. 그저 가정을 버린 한 여자의 불행과 결혼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가는 레빈의 시간만을 기억하며 톨스토이의 두꺼운 고민들을 몇 줄로 요약하며 지내왔었다. 하지만 다시 읽는 지금, 놀라움이다.
안나의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곤 하고 레빈의 결혼생활에서 나의 시간들이 보인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각각의 인물들의 이야기가 그대로 가슴으로 들어왔다.

이야기의 스토리는 너무나 유명해서 말한다는 것 자체가 사족일 것 같다.
내게 다가온 <안나까레니나>는 불륜을 저지른 불경스런 인물도 아니고 자신이 중요했던 이기적인 인물도 아니다. 그저 살려고 발버둥 치는 물 속에 빠진 위태로운 한 인물이었다. 당시 사회에서 남자와 여자는 사랑에서도 높낮이가 달랐다. 자신이 누구를 사랑하는지 언제나 분명한 남자들은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진다. 하지만 당시 여성으로서는 오로지 수동적으로 상대를 기다려야 되는 것이 처녀들의 미덕이었다. 그래서 여성의 눈에 비친 남성들이란 눈에 보이는 액면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이는 것보다 더 많은 게 요구되는 법이다. 그 진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지만 당시에는 사회적으로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대적 배경을 안고 결혼한 안나에게 결혼생활은 ‘현상유지‘를 위한 그림자 부부로서의 시간이었다. 그녀의 남편인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는 일은 절대 허용할 수 없는 사람이다. 고위 공직자의 이상적인 결혼의 목적은 이상적인 가정과 자신의 명예에 누가 되지 않는 역할만 강조한 채 평온한 현상유지를 위한 것이다. 하지만 그도 안나의 불륜으로 인해 원치않게 많은 고민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해하는 시간이 찾아온다. 그리고 ‘측은지심‘을 경험하는 감정은 아내를 ‘용서‘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임박한 상황에서 그는 그녀의 고통을 가엾이 여기게 되고 그 옆의 ‘브론스끼‘ 마저 연민의 감정에서 용서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안나가 눈에 들어온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에게 ‘용서‘는 안나에 대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요즘 느끼는 것이지만 관계에 있어서 ‘타이밍‘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관계에서 어긋남이란 서로를 이해하는 타이밍이 빗나간 것이다. 그래서 사람과의 관계가 쉽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사랑‘이라는 감정은 모든 에너지를 한 곳으로 집중적으로 쏟아 붓는다. 그래서 주변을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사랑의 감정에도 각자가 지향하는 목적이 있을 것이다. 그 목적이 다르면 이 타이밍은 더 만날 수 없다. 안나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롤비치의 관계가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책을 읽는 줄곧 이 부부에게 안타까운 미련이 남았다.

몇 년 전에 봤던 영화 <<커피메이트>>가 떠오른 건 안나의 심정을 내가 조금이나마 이해한 뒤였다.
인영과 희수의 관계에서 브론스끼와의 관계가 인영과 남편의 관계에서 안나와 알렉세이 알렉산드롤비치의 모습이 보였다.

˝경건하고 도덕적이고 정직하고 영리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내가 본 것을 보지 않잖아. 지난 8년 동안 그가 얼마나 내 삶을 질식시켜 왔는지, 내 안에서 살아 숨 쉬던 모든 것들을 얼마나 짓눌러 왔는지를 그들은 모르잖아. 내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살아 있는 여자라는 점을 단 한 번도 그는 생각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 그가 매사에 나를 모욕하고 자기만족을 맛보았다는 걸 아무도 모른다고. 나도 내 삶을 정당화할 길을 찾고자 온 힘을 다해서 애써 오지 않았겠어? 그를 사랑하려고, 이미 남편을 사랑할 수가 없게 되었을 때는 아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하지 않았겠느냐고! 하지만 때가 되었고, 이제 깨달았어. 더 이상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는 걸, 나는 살아 있다는 걸, 내 탓이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이런 여자로,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여자로 만들었다는 걸.˝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과 ‘사랑이 필요했던 사람‘
이 불완전한 관계는 이미 ‘사랑‘의 타이밍이 어긋났다.
서로가 이해받길 원하는 여느 부부의 관계처럼 대놓고 싸우지도 못하는 감정은 결국 묵살되었다. 그리고 뜻하지않게도 안나의 사랑은 다른 곳에서 찾아 왔다. 그 사랑은 가시적인 사랑도 아니고 솔직하다. 그동안 몰랐던 설레임과 벅찬 마음을 감줄 수 없는 것은 안나에게는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관계에서 안나의 사랑은 불경스런 프레임에 갇힌다. 시대적 배경이 안나를 비도적인 여성으로 비추지만, 이런 안나의 사랑을 이해하는 이가 과연 지금도 얼마나 될까. 세상이 변했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이 그리고 지위가 예전에 비해 훨씬 올랐다고 한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도 여성성과 희생을 강요한다.

결혼이 목적하는 바가 무엇일까라는 의구심이 든다.
톨스토이 그 조차도 결혼의 권태기를 겪었고 힘든 시기를 넘겼다고 한다. 그런 그의 고뇌가 수없이 쌓여 이 책에 고스란히녹아 있다. 그리고 나는 격한 공감과 몰입에 흥분하고 있다.
마흔 중반 필독서, 지금 시점에서 와닿는 이야기는 내가 어느정도 세상을 살아오면서 이해한 것이 바탕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젊은 날의 나에게 의미 없었던 것은 당연한게 아닐까

레빈과 키티의 결혼 생활
키티 또한 남성을 바라보는 시대적 관점은 멀리서 자신의 눈에 비친 것에만 의지해야 했다. 그녀의 처음 선택은 ‘브론스끼‘의 매력에 빠져 ‘레빈‘를 거절했다. 하지만 이내 그녀의 선택이 진정 그녀의 마음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서투른 감정에 대한 이해는 시간이 지나야 알 수 있듯이 키티도 레빈에 대한 감정을 뒤에 알게 된다. 서로의 감정을 이해하고 키티와 레빈은 결혼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레빈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현실은 그에게 혼란스런 시간이었다. 그 속에서 무던히 자신의 일을 찾고 척척 해 나가는 키티에 대해서도 레빈은 낯설었다.
결혼에 대한 로망을 누구나가 꿈꾸지만 결혼은 현실이다. 그래서 결혼 생활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이제야 안다. 결혼 후 여자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위해 애쓴다. 둥지를 틀고 살림을 살면서 삶을 터득하면 배워나간다. 키티 또한 마찬가지다. 반면에 레빈은 자신이 생각한 이상에서 점점 멀어지는 현실을 직면해야 했다.

결혼 후에도 여성성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이다.
내심 남성의 이런 관점은 여우같은 아내를 바라는 심리랑 그 맥락이 같을 것이다. 현실적으로 삶을 살아가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 그 위대함과 애인처럼 애교섞인 활발함의 여성을 버리지 못하는 심리는 레빈에게도 비춰졌다. 레빈의 혼란스런 감정에서 엿볼 수 있었다.
형의 죽음과 키티의 출산을 지켜 본 레빈은 슬픔과 기쁨이라는 감정도 비슷한 감정이라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그 슬픔도 이 기쁨도 똑같이 삶의 평범한 조건을 초월하여 존재하며, 일상 속에서 고차원적인 무언가를 엿볼 수 있는 틈새라는 점에서는 동일했다. 벌어지는 상황이 힘들고 고통을 수반한다는 점에서도 결코 이해할 수 없었고 이성으로는 따라잡을 수도 없는 높은 경지로 영혼이 오묘하게 고양된다는 점에서도 동일했다.˝
(2권,p894)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무시무시한 시간을 보낸 뒤 찾아온 아이.
레빈에게 다가온 ‘아이‘의 존재는 당혹스럽고 낯선 존재였다.
레빈의 사유는 점점 깊어진다. 그리고 일 년 내내 철학책을 읽는다.
무신론자인 레빈은 무언가에 집착하는 삶, ˝그곳에 집착하는 순간 답은 더 멀리 간다는 사실과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 채 삶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확실하게 알고 있으며, 그 일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또 어떤 일이 더 중요한지도 알게 된다. 삶에서 오는 고민에서 레빈은 답을 찾지는 못했지만 점점 안정을 찾게 된다.
결국, 삶 자체가 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무엇이 나쁘고 좋은지에 대한 지식들을 통해서, 이러한 지식은 자신이 획득한 것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주어진 것이란 것을 레빈은 깨닫는다.

˝이성의 오만, 이성의 사기˝

유한함과 무한함의 차이에서 오는 삶의 괴리감에서 고민하는 레빈은 삶을 절대로 시시하게 바라보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도덕적 가치관은 공공의 안녕에 대해서도 고민한다.
결코 전쟁을 용납할 수 없는 자세

˝공공의 안녕이 무엇으로 이루어지는지는 몰라도 그것의 달성이 오로지 개개인에게 계시되는 선의 법칙을 엄격하게 이행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이제 분명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그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전쟁을 바라거나 주장할 수 없었다.˝

리얼리즘 소설, 너무나 실감나는 묘사에 감정이입 제대로 하게 된다.
마흔 중반에 다시 읽게 된 <안나 까레니나>는 지금 시기에 읽으면 누구나가 감흥이 남다른 책이 될 것이다. 내 나이(마흔 이후) 필독서로 적극 강추하고픈 책이다.

이 책의 첫 문장

˝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고, 모든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 불행하다.˝

이 문장이 이제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행복은 지극히 추상적이고 불행은 지극히 구체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살면서 겪는 일들이 나에게 ‘고통‘으로 구체화 되어 행복보다 불행으로 더 다가오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도 하게 된다. 그리고 나의 인생 중 어느 시점, 지금 이 책을 다시 읽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는 심오한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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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의 책을 넘기다가...

기호3번안석봉/ 진형민


초등학교 회장 선거
보이지 않는 계층관 다툼

작은 사회 속에서 시작한 파벌이
심상치 않다.
그들의 배경이 만들어 준 힘의 관계
그리고 눈높이

초등학생 6학년의 눈에도
이미 ‘누구나‘는 비주류

그들이 바라 보는 세상
이미 끼리끼리 나뉘고
결과 중심주의를 낳고 있다.

작은 세상과 어른들의 세상
하늘 아래에 찍힌 데칼코마니
처럼 닮아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기호3번 안석뽕 연설문 p130

ㅡ옛날 옛날에 개하고 사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이 개하고 사자를 잡으려고 막 돌을 던졌대요. 그랬더니 개는 괜히 날아오는 돌한테만 화를 내면서 와작와작 돌을 물어뜯더래요. 하지만 사자는 좀 달랐대요. 사자는 돌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고 곧장 돌 던진 사람을 쫓아가서 물더래요. 그래서 사람들이 사자한테는 ‘역시 사자‘라고 했고, 개를 보고는‘멍청한 개자식‘이라고 비웃었대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른다고요.
그런데 요즘에도 그런 개자식이 있대요.
저런 문제아!
골치 아픈 놈!
나쁜 녀석은 혼나야 돼!
이렇게 욕부터 하는 사람들이 바로 돌한테만 으르렁대는 멍청한 개자식들이래요.
사자는 안 그러거든요. 현명한 사자는 뭣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먼저 생각하고, 뭘 물어뜯어야 같은 일이 다시 안 벌어질지 잘 판단한 다음 행동하니까요.
재는 왜 저렇게 공부를 못하는지, 애는 뭣 때문에 자꾸 말썽을 피우는지...
그리고 사건은 도대채 왜 일어났는지, 그 이유른 모르고서는 절대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까요.
마지막으로 제가 만약 전교 회장이 된다면, 저는 언제나 개자식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우리 학교를 위해 꼭 사자처럼 일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
투표 기회가 주어진다면 ㅎㅎ
당연 나는 ,
기호3번 안석뽕을 힘주어 찍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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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이고 과학적인 음주탐구생활 - 술에 관한 깊고 넓은 인문학 강의
허원 지음 / 더숲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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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은 못 마시지만,
술에 대한 호기심마저 없지는 않다

비오는 날이면 누군가는 술맛이 더 좋다고 했다.
요즘같이 주구장창 내리는 빗속에서 마시는 술은 진짜 독주처럼 쓰디쓴 맛일 것 같다. 아무 맛도 없는 단지 쓴맛만 주는 알코올 맛

개인적으로 술을 좋아하거나 잘 마시지 않지만 술에 대한 호기심마저 없지는 않다.
나에겐 술은 맛으로 평가하는 단지 음식이다. 정말 맛 없는 음식이어서 아주 가끔 찾게 되는 음식이다. 그것도 누군가의 권유에 의해서다. 혹여나 인생 쓴맛과 함께 스트레스 왕창 받는 날 나는 커피를 찾았다.

술을 마시지는 않지만 술에 흠뻑 취하고 싶었던 날 눈에 들어온 책이다. 너란 녀석을 알게 되면 카페인의 힘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를 맛보지 않을까하는 아주 단순한 호기심에서 집었다.

<지적이고 과학적인 음주탐구생활>

술과 함께한 인간사
지금 이순간에도 음주는 일상에서 빠질 수 없는 문화다. 아마도 술과 인간의 관계는 앞으로도 영원할지 모른다.

이 책은 그러한 술에 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줄 것 같다.
인류와 같이한 술의 역사는 야생을 헤매며 술 열매를 찾아다녔을 이전부터 이미 술이 있었던 것 같다고 한다.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은 물리적 증거나 유전자 수준의 분석이 없지만, 우리는 왜 술을 마시는가에 대한 가장 과학적인 답변이 될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알코올 중독이난 숙취의문제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야생의 술은 도수가 낮아 하루 종일 술 열매를 먹어도 맥주 몇 병을 마시는 정도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술 취한 원숭이 가설이 맞다면 음주도 진화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과거 자연 발효된 술 열매의 알코올을 소화할 수 있을 만큼만 진화했다.˝

˝술이 먼저고 사람이 나중이다.˝

여기서 음주 유전자에서 만들어지는 알코올 분해 효소를 가진 유인원이 살아남아서 진화의 중심에 섰을 때, 이는 현생 인류 탄생의 분기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알코올 의존성은 유인원을 적극적인 활동으로 이끌었고 인간으로 진화하게 하는 여정으로 이끌었다는 점은 지능화된 인간이 술 만드는 법을 발명하고 마시게 된 것은 어찌보면 필연적일지도 그래서 ˝우리가 술을 마시는 이유는 유전자 때문이고, 음주는 진화의 유산이다.˝
알코올 분해 효소는 인류 조상의 유전자를 물려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알코올이라는 약한 독성을 해독하는 기능을 지니게 되었다.

혀끝을 은은하게 하는 와인의 과학

1977년 우리나라 최초의 와인인 ‘마주앙‘이 생산되기 시작하고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우리나라는 와인 문화가 정착했다고 한다. 와인 문화가 정착하는 것에 1도 지분이 없는 개인인지라 나에겐 솔직히 와인 문화도 낯설고 와인도 낯설다.
와인바, 소믈리에 등 와인 마니아층을 겨냥한 와인 전문점과 마트 한쪽에도 어느새 와인 매장은 빠지지 않는다.
˝와인은 아는 만큼 맛있다.˝ 것에 괜한 시비를 거는 것은 아니지만, 갠적으로 나에게 와인은 시큼한 맛으로 기억하는 술맛이다. 그렇지만 술에 관한 호기심은 멈추지 않는다.
술 맛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더한 것 같다.

와인 생태계도 경쟁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와인 시장에서 비즈니스는 포도 재배자와 업체를 통칭하는 네고시앙, 와인 제조사, 소믈리에, 와인 작가, 평론가들이 모인 자생적 마케팅 조직이 활동하는 거대 생태계다. 그리고 이들이 와인 산업을 이끌어 간다. 완벽한 공급 사슬 관리 시스템인 것이다.

와인의 맛을 좌우하는 포도, 역설적으로 척박한 땅에서 자란 포도가 좋은 포도다. 그래서 와인의 맛과 향은 양조장보다 포도밭이 좌우한다. 최고 품질의 와인은 포도밭의 입지가 중요하다. 이는 모든 과일과 땅 위의 농작물에도 해당한다. 단단히 여물기 위해서 적당한 시련은 우리에게도 필수다.

인정사정없는 맥주의 비즈니스

수메르인의 맥주는 지금의 맥주 제조법과 유사하다.
그리고 이집트 피라미드를 건설하는 데 맥주가 대량으로 소비되었다. 이집트 노동자들에게 매우 중요한 음료였던 것이다. 더운 날씨에 거대한 건축물을 만드는 엄청난 노동과 체력을 위해 보수로 지급했다는 기록도 있다. 농번기의 새참에서 막걸리를 뺄 수 없듯이 노동의 피로를 푸는 시원한 음료였던 것이다.
맥주가 없었다면, 피라미드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은 괜한 주장이 아니다. 맥주의 효모가 자라면서 각종 비타민과 맥아에서 분해된 탄수화물은 노동자의 체력 유지를 위한 영양제와 같은 식품이었다. 당시도 차가운 맥주의 맛을 선호했다고 한다.

맥주의 세계 정복은 버드와이저로 유명한 미국 기업 앤호이저 부시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배경에는 1920~1933년까지 계속된 미국의 금주령이 있다. 이 기간 동안 대부분의 맥주공장이 문을 닫았지만 앤호이저 부시는 무알콜 맥주를 개발하고, 아이스크림을 제조해서 기존에 투자했던 맥주용 냉장차와 철도망을 통해 판매하면서 생존했다. 이후 금주령이 해제되자 맥주 시장을 평정하고 최고의 맥주 기업으로 성장하게 된다. 이때부터 맥주는 미국 전역을 대상으로 사업을 확장했고 대공황 이후 1940년 부터 경제 부흥과 냉장고의 보급, 고속도로망의 확충으로 맥주 시장의 패러다임은 바뀐다. 거대 기업과 대량 생산을 기반으로 한 규모의 경제는 맥주 시장에서도 마찬가지로 군소 양조장의 자리를 내어주지 않았으며 자본주의 원리에 철저히 세계 맥주 시장은 강자로 남은 앤호이저 부시 인베브로 최대 맥주 기업이었다.
이 거대 맥주 회사는 우리나라 오비맥주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버드와이저, 코로나, 스테라 아르투와를 포함하여 세계 유명 브랜드의 3분의 1을 소유하는 거대 기업이다. 거의 맥주 세계를 평정하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체코를 대표하는 필스너 우르켈은 일본 아사이 맥주 그룹의 소유다. 맥주의 섹계 정복은 끝나지 않는다.

좀처럼 변화지 않는 와인잔과는 달리 맥주잔의 다양한 변화는 맥주의 개방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말한다.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변화하는 맥주의 변신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황금색 맥주의 색과 거품이 주는 환상
모든 음식은 눈으로 먼저 먹고 느낀다는 것은 맥주에서도 마찬가지다.
맥주의 투명성과 맑음은 맛보다는 눈으로 보는 광고의 힘이다.
투명한 유리잔에 맑은 황금색의 맥주, 부글부글 솟아오르는 거품의 시원함은 맥주광고에서 빠지지 않는 장면이다. 그리고 이제는 소리까지 자극한다. 파블로프의 조건 반사 실험과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광고 심리학의 기본이라고 한다. 술 광고에 등장하는 음주 후 감탄사와 유명한 연애인의 즐거운 장면들은 조건 반응을 유도하는 조건 자극이다. 인간의 감성과 본능을 자극하는 광고의 힘은 맥주에게도 적용된다.

스키너의 조작적 조건 형성 이론
옅은 색과 황금 빛깔의 맥주, 비즈니스적 보상은 결정적이었다. 이는 대중 매체를 통해 맥주의 맑고 투명한 이미지가 학습되었고 상업 광고를 통한 판매 촉진은 긍정적 강화로 작용했다는 것이다. 이제 맥주는 눈으로 먼저 마시는 술이 되었다. 현대 맥주는 더 맑고 더 투명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공장에서 헤이즈(뿌옇게 변하는)를 제거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 맛있어 보이게 만드는 과정은 필요 이상이다.
톡 쏘는 탄산을 위한 발효
맥주의 주원료 몰트, 몰트 향은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된 것과 관련이 깊다고 한다.
그래서 굽거나 태울 때 나오는 냄새를 좋은 것이라 인지하게 되는 쪽으로 진화되어 유전자에 기록된 이러한 흔적 때문에 몰트의 진한 향에 끌리는 것이 우리가 맥주에 끌리는 과학적 이유가 아닐까라고 책은 말한다.
몰트는 우리말로 맥아 또는 엿기름이다.


동양과 유럽의 기후 차이가 누룩과 몰트를 만들어 낸 것이다.
동양의 술은 누룩, 서양의 술은 몰트가 기본이다.
술은 맛보다 향에 따라 취향이 갈린다고 한다. 맛은 사람마다 느낀는 바가 비슷하지만 냄새는 다르다. 향은 인종이나 문화에 따라 선호도의 격차가 크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도입된 주류 면허 때문에 가양주 제조는 금지되었고 가양주는 밀주라는 오명을 쓰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 술은 쇠락하고 그 자리를 청주가 차지했다. 가양주는 약주라는 이름으로 주세법상 술의 한 종류로 남게 되는 식민지 역사 속의 우리나라 전통주의 역사 또한 안타까웠다.

쌉싸름하지만 끌리는 요사스러운 독주

아주 오래된 증류주의 기원
우리나라에 소주가 도입된 계기는 몽골의 침입때로 알려져 있다. 아랍의 연금술사들이 증류 기술이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으로 전파되고 몽골의 유럽 침략을 통해 몽골로 전파되면서 몽골인들이 증류주를 널리 즐기게 되었다고 한다.
증류주는 상하지 않는 술로 오래 보관할 수 있고 먼 곳까지 운반할 수 있다. 발효의 한계인 농도15%가 되면 부패균은 자라지 못한다.
한국 소주의 이름과 원형
소주의 ‘소‘는 한자로 불사를 소( 燒)자다. 증류주를 태우면 불꽃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묘사한 탁월한 작명이다.

쓴맛은 기본적으로 독의 맛이다
우리 유전자는 쓴맛을 거부하도록 진화했다고 한다. 그러나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쓴맛 커피나 차 그리고 다크 초콜릿의 쓴맛 등도 진화의 유산이라고 한다.
초식 동물은 다양한 종류의 쓴맛을 감지하는 능력이 있는데 인간이 오랫동안 초식 동물에서 진화해 먹어도 되는 쓴맛과 아닌 것을 구분한다고 한다. 그러면 독이 아닌 쓴맛은 안전한 먹거리로 기억한다. 이것이 원시 인류가 생존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안전 먹거리를 확인하는 수단으로 이미 우리의 유전자는 인지하지 않아도 무의식적으로 끌리는 맛을 기억하고 각인되었다.
우리의 기호 식품의 쓴맛은 생존 수단으로 쓴맛을 기억하고 버텨낸 흔적이다.

우리 인생의 쓴맛도 생존 수단

˝소주의 단맛과 쓴맛은 알코올 스스로는 맛이 없지만, 안주와 주변 음식과 어울려 단맛과 쓴맛의 조화다. ˝
그래서 인생도 소주처럼 달고 쓰기를 반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술에 관한 깊고 넓은 지식,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는 의문과 무언가가 남았다.
지금 술은 나에게 그냥 숙제같은 존재가 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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