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에 갇힌 남자》,데이비드 발다치
모처럼 시간이 남아 한 시간 가량의 산책 시간이 생겼다. 정말 움직이지 않는 나로서는 부끄럽지만, 두 다리 보다는 네 개의 타이어와 핸들을 잡은 두 손의 움직임에 의지를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운동의 필요성을 알지만, 개인적으로 제일 힘든게 운동이라 누군가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면 의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던 내가 슬슬 자발적 운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에 절친은 역시, 현대 문명의 최고의 발명품 스마트 폰이다.
산책을 하면서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오디오북을 듣는 재미는 귓가의 음악 소리보다 더 솔솔하게 들려온다. 대 자연을 앞에 두고 이 무슨 무례한 짓인지 생각도 든다. 가을빛으로 물든 자연의 아름다움을 눈 앞에 두고, 자연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차단한 무례함을 말이다. 하지만 변명을 하자면, 찻길 옆에 조성한 인위적인 숲길이라 자연적인 소리보다 지나가는 차량의 소리가 더 크다. 그래서 그 어색함의 부조화에서 나의 선택은 내가 듣고 싶은 것을 듣는 것, 즉 오디오 북을 듣는 것이었다. (참고로 나는 운전할 때만 음악을 트는 경향이 있다. 나름 운전에 집중해야 되는 것도 있지만, 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라)
나의 독서 습관은 한꺼번에 여러 종류의 책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책상 위는 늘 책탑이 쌓여있다. 다른 책에 점점 밀려 가장 밑에 있던 책을 오디오 북에서 골랐다. ‘ㅁㄹ의 서재‘ 구독은 이럴 때는 정말 유용하다. 전 국회의원이자 범죄 심리학자인 표창원이 들려주는 ‘데이비드 발다치‘의 범죄 소설, 뭔가 확 와닿는다. 그리고 왠지 걸어가는 발걸음에 힘이 실려 더 씩씩하게 걸을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진실에 갇힌 남자》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과거 학창시절 ‘애거사 크리스티‘에 빠져 야자 시간에 몰래 도둑책을 읽던 기억까지 소환하는 재미를 주었다. 추리소설의 묘미는 범죄 사건을 밝혀 나간다는 사실과 그 과정을 보는 순간 심하게 빠져드는 마력이 있다. 실제로 퍼즐 같은 복잡한 문제가 때때로 머리를 쥐어 뜯게 하지만, 하나씩 풀어가는 재미와 유추해가는 시간은 자신도 모르게 범죄를 밝혀가는 탐정이 되는 시간이다. 그리고 주인공의 명석한 두뇌와 문제 해결력으로 하나씩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은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다. 최강의 몰입과 귓가에 들려오는 긴장감은 점점 두 발의 속도를 바꿔놓았다. 얼마전 넷플릭스의 셜록 홈즈를 정주행 했던 시간과 함께 겹쳐서 머릿속은 온통 사건의 이미지로 꽉 들어찼다.
결국, 빨라지는 발걸음은 한 시간만의 산책을 급히 끝내고 집으로 들어와 책을 찾아 손에 쥐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의 불만은 이 즐거움을 만끽하지 못한다는 것에 기분이 상했다. 일을 해야 된다는 것, 원없이... 내가 원할때 이 기분을 망치지 않고 몰입 가능한 시간을 언제쯤이면 맘껏 누릴까라는 조바심이 생겼다.
책의 주인공 ‘데커‘는 한때 미식 축구 선수였다. 당시 그는 큰 부상을 입고 뇌에 외상을 입게 된다. 그리고 부상당한 뇌부위의 구조가 바뀌어 ‘과잉 기억 증후군‘과 ‘공감각증‘이라는 두 가지 증상이 생겼다.
그에게 다시, 가족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하게 되는 불운이 닥친다. 그의 사랑하는 딸과 부인 그리고 삼촌인 세 사람의 죽음은 가장 행복한 날인 딸의 생일날에 일어난다. 끔찍한 눈 앞의 믿지 못할 장면을 목격한 그는 늘 잊혀지지 않는 기억으로 힘들어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과잉기억증후군‘이라는 자신의 증상을 저주하게 된다.
모든 걸 기억하는 데커의 능력은 그를 힘들게도 하지만 그 능력은 범죄 수사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도움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그는 자신의 삶에서 생긴 구멍들을 범죄자를 쫓고 잡는데 이용했다.
이야기는 데커가 딸의 생일날을 기념하기 위해 묘지를 찾으면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곳에서 과거 그가 맡았던 사건의 범인인 ‘메릴 호킨스‘를 만나게 된다. 메릴 호킨스는 병에 걸려 죽음을 코앞에 두고 가석방되었다. 인간적 석방인 것이다. 그는 또 자신을 검거한 데커에게 ‘자신은 죄가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며칠 뒤 호킨스는 살해된다.
의문의 사건은 꼬리를 물고 일어난다. 그럴수록 13년 전 자신의 수사가 틀렸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 죄책감과 함께 다시 바로잡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0... 노력한다.
13년 전과 똑같은 단서, 흩어진 단서들을 다시 주워서 조립하는 데커에게 예전에 그냥 지나쳤던 단서 하나하나가 다시 쌓였다. 하지만 그럴수록 조금씩 들어나는 구멍들은 점점 더 커져만 갔다. 구멍을 아는 순간 자신의 미흡하고 초보적인 실수에 자책하는 데커는 ‘진실‘에 대한 더 강한 이끌림을 받는다.
과거 강렬하게 진범을 밝혀내고 싶은 욕망은 억울하게 ‘호킨스‘를 범인으로 지명했던 것이다. 단순하고 확실했던 단서인 ‘지문‘ 앞에서 다른 단서들을 묻어 버리는 결과를 낳았던 것. 범인들의 흔적들은 그렇게 단정짓는 과정에서 대부분이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무엇인가를 단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섭고 어리석은지 알게 되는 순간이다. 단정짓는 순간, 많은 가능성을 포기하는 일이 돼버린다는 사실이다.
아주 오랜만에 CSI영화 한 편을 보는 듯 일하기 싫을 만큼의 흥미있는 책을 읽었다. 가끔씩 이렇게 감초같이 달작지근한 맛의 책은 책상 위의 탑에서 찾는 자극제가 된다. 여러 종류의 책을 보는 나의 독서 습관에서 몇몇의 장르는 시간의 틈을 줄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이 책 또한 마찬가지 그날 끝을 내야 속이 후련해지는 책이다. 그래서 이런 중독을 피하기 위해 지루하거나 시간이 부족할 때 넘긴다. 그렇지만 가끔 그게 오히려 더 독이 될 때가 있다. 이 책을 든 순간이었다.
13년이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잊혀졌던 사건의 재수사가 어려운지 이 책을 보면서 조금 느끼게 된다.
지난 시간에서 지워진 기억들을 다시 떠 올리게 한다는 것이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추억이라는 감성을 자극하는 시간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누군가에게는 영원히 꺼내고 싶지 않은 기억들로 살면서 꾹꾹 눌러 아주 구석진 곳으로 억지로 눌러 박았던 기억들이다. 가끔씩 스멀스멀 올라오기라도 한다면 더 잊어버리기 위해 숨길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꺼내고 싶지 않은 잔인한 기억들은 외부적인 자극으로 인해 건드리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래야만 이들은 살아갈 수 있다. 책 속의 인물들도 그랬다.
13년 전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서 재조사를 한다는 것이 다들 반가운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가끔 범죄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인물의 등장, 돌발적인 인물의 등장은 우연한 기회로 휘말리게 되어 억세게 재수없는 상황이 벌어지는 경우다. 반면에 사건과 치밀하게 관련되어 이야기의 맥락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로 이야기 내내 재미를 주는 인물일 수도 있다. 이 책 속의 ‘마스‘처럼 말이다.
셜록홈즈와 왓슨의 브로맨스를 여기서 볼 수 있다.
‘호킨스‘는 억울하게 범인으로 지명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10년 이상의 징역을 살았다. 그리고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된 병든 몸이 되어 그는 살해를 당했다.
범죄 소설과 추리 소설의 묘미는 반전이다. 역시 이 책도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흥미로운 장면이 꽤 많다. ‘범죄 스릴러‘ 그 긴장감의 절정을 느낄 수 있다.
호킨스의 운명은 이 사건에서 ‘장기판‘의 말에 불과한 존재일 뿐이다. 점점 드러나는 엄청난 사건의 전말과 숨어있는 진실의 남다른 스케일이 깔려 있다.
사건을 수사하면서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범죄의 동기, 하지만 드러난 것은 결코 중요하지 않았다.
‘진실‘은 들춰내야 한다. 그리고 찾아야 한다.
잘못된 과오를 다시 바로 잡으려는 데커
그에게 주어진 제 2의 기회, 그는 다시 진실을 밝혀 낸다. 그의 죄책감과 그의 변화와 성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을 재미나고 유쾌한 영화를 보고 나온 듯한 기분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진실이 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건 아니에요.
때론 우리를 가두는 감옥이 될 수도 있죠.˝
물론이다.
하지만 ‘진실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드러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실‘ 앞에서 우리의 태도는 절대 단정짓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실은 우리가 들여다보지 않으면 절대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대하는 태도는 좀 더 적극적이어야 한다.
범죄 스릴러라는 장르가 나에게 쾌감을 주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적극성이다.
‘아주 적극적인 진실 파헤치기‘
답답한 시국에서 조금이라도 ‘시원한 뚫림‘을 원한다면 적극 권해보고 싶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