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약함이라는 단어에 묻혀 사라진 시간,
순응하며 살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킨》,옥타비아 버틀러


책을 읽는다는 행위, 특히 소설이나 문학책을 접하는 시간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내가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타인의 입장이 되어보는 순간에 느끼는 아찔함은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는 공감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200년 전과 200년 후 시간의 유연성은 무한의 자유를 선사한다.

옥타비아 버틀러의 책 <<킨>> 은 200년을 넘는 과거시간으로  타임슬립한다. 과거 미국의 노예제가 있던 1815년으로 말이다.

1976년을 살던 여성 다나는 어느날 갑자기 과거로 소환된다. 그것도 노예제 시대로 흑인이 노동력을 제공하는 단순한 재산을 의미했던 시대, 흑인의 인권은 감히 꺼낼 수도 없었던 시대로 말이다.
주인공 ‘다나‘는 흑인 여성이다. 그러니 이 과거 시간으로 타임 슬립이 그녀에게 얼마나 위험천만한 상태에 놓이게 될지는, 불 보듯 뻔한 것이 된다.

과거로의 소환, 그 중심은 ‘루퍼스‘다.

루퍼스가 감당하지 못할 일이 생기거나 곤경에 빠지면 ‘현재‘ 시점에 있는 ‘다나‘를 과거로 끌어 당긴다. 백인 루퍼스의 아버지 ‘톰 와일린‘의 농장으로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소환된다. 그곳에서 또 ‘다나‘는 죽을 만큼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면 과거에서 현재로 타임 슬립한다.

‘다나‘는 과거로 타임 슬립할 때 마다 ‘루퍼스‘를 보호하고 지켜냈다. 흑인의 ‘다나‘와 백인‘루퍼스‘의 연관성은 몇 번의 타임 슬립으로 밝혀진다.

과거 미국의 남부지역은 대농장의 노동자의 필요로 흑인들에게는 가혹하고 잔인한 시간이었다. 자유인 ‘다나‘가 그 시대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 시대에 적응해야만 가능한 것이다. 백인들의 채찍질 또한 견뎌내야 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이 책의 ‘다나‘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순응하며 그 시간을 버티며 견뎠다. 그리고 백인인 ‘루퍼스‘의 부당함에도 잘 적응했다.  비인간적인 루퍼스의 아버지처럼 루퍼스가 성장하지 않도록 최선의 방법으로 루퍼스를 인도하려 노력한다. 언제 과거로 소환 될지 모르는 ‘다나‘를 위한 보험이었다.  이것만이 자신을 위한 피난처를 만드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루퍼스의 마음을 움직이려 노력한다.

‘다나‘의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순응‘이었다. 오히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앨리스‘의 자유에 대한 갈망은 더 컸다. ‘다나‘는 그래도 돌아갈 수 있는 작은 희망이라도 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더 쉽게 숨죽이며 순응했고 적응해 나갔던 것일까.

˝우리는 얼마나 쉽게 환경에 순응하는가˝

가혹하고 부당한 현실 앞에서 너무 쉽게 적응하고 받아들이는 자신을 보면서 ‘다나‘ 또한 놀란다. 하지만 극적인 변화는 없다. 이 책을 읽으면서 노예제도에 대한 부당함과 그에 맞서는 저항 대신 채찍과 억압으로 얼마나 쉽게 부당한 현실을 받아들이게 훈련시키는지 알 것이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이런 부당한 조건과 폭압적인 시대를 겪었다. 아직도 세계 곳곳엔 이러한 부당함이 당연시 되는 시간을 겪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순응하거나 누군가는 살아남기 위해 저항할 것이다. 각각의 살아남기 위한 선택은 다른 방식으로 다른 삶을 만들어 놓는다.

순응한다는 것은 시대에 편승해서 누군가의 등을 치는 배반 행위는 아닌 것이다. 누군가의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분명, ‘어쩔 수 없었다‘라는 비겁하고 합리화식의 방법은 아니란 것이다.
단지, 억압의 부당하고 폭압적인 환경에서 살아남으면서 살았던 것이다. 그들의 각각의 방식으로 적응하면서..

영웅적 서사에 익숙한 우리에게 역사적 소시민의 견딤은 거의 무시된다. 하지만 과연, 그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지나칠 수 있을까.

책은 묻는다.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것들에 대한 ‘당연함‘은 이전부터 당연하게 존재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우리는 그 역사적 시간에서 항상 ‘영웅‘을 찾았고 ‘퍼스트 펭귄‘만을 말했다. 그들의 용기있는 모험과 강인한 정신력만을 말했던 것이다. 하지만 과연 강력한 힘만으로 이 세상이 만들어 진 것은 아니란 것이다. 우리에게 사라지고 잊혀졌던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만약에 나라면‘이라는 가정을 든다면 나는 분명 ‘순응‘하는 방식을 택할 것 같다. 줄곧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 용기있는 영웅적인 서사보다는 평범한 조용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를 비겁하다라는 말로 비하해서는 절대 안된다. 그 이유는 나도 그렇지만 ‘다나‘가 노예제에서 순응하며 기다렸던 시간이 절대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나‘의 시대와 ‘루퍼스‘의 시대는 다르다.

루퍼스의 시대는 ‘다나‘에게 한 번도 요구받아 본 적 없는 부당함이 존재하던 시간이었다. 그래서 살기 위해 순응하며 적응해 나갔다. 하지만 이런 ‘다나‘도 노예를 사고 파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서 자신의 적응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자괴감에 빠진다.

이 책을 쓴 작가 ‘옥타비아 버틀러‘는 흑인 여성으로  SF 문학계에서 문학적 성취와 상업적 성공을 거두며 당시 남성의 전유물이었던 장르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흑인여성이라는 선입견은 나에게도 편견을 가져다 줄 수 있던 책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조용했다. 인종 차별에 대한 강력한 힘은 오히려 나의 편견이었던 것이다. 오히려 작가는 조용히 당시를 살던 많은 흑인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프란츠 파농‘의 책에세 조용한 외침과 ‘옥타비아 버틀러‘의 평범한 이야기는 나에게 많은 선입견과 편견을 깨는 책이 되었다.



˝사람들은 나를 ‘SF작가‘라고,
내 소설은 당연히 SF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나는 소설을 쓰는 ‘작가‘일 뿐이다.
내가 좋은 이야기를 썼는지 아닌지만 판단받기를 원하는.˝


그녀의 책 <<블러드 차일드>>에서도 나의 편견은 또 무너진다. 흑인 여성이 작가라는 선입견은 당연 흑인 문제를 다룰 것이라는 편견

<<블러드 차일드>>를 읽으면서 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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