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게모노 9
야마다 요시히로 지음, 주원일 옮김 / 애니북스 / 201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효게모노>는 제대로 즐기기엔 장벽이 몇개쯤 있는 만화인 듯하다.

우선 일본 전국 시대 역사물에 대해서 좀 알아야 주인공 후루타 오리베가

걷는 길이 얼마나 역설적인지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독자가 전국시대 전쟁물을 좋아하기만

하면 되느냐면 또 그렇지가 않다. 

어딘가 모르게 스티븐 잡스의 독단적이고 퓨리턴스러운 

모노크롬 아우라가 겹쳐지는 센노 리큐의 다도 뉴웨이브를 비롯하여

당대의 무사 귀족 상인들의 미적인 것에 대한 관심이 발산하는 

암묵적인 메시지, 

취향의 배치와 정치 권력의 예민한 관계성을 짚어볼 줄 안다면 

더욱 재밌어질 것이다.

오다나 히데요시가 겉으로 드러나는 칼의 힘으로 전국을 제패하려고

드는 거였다면, 

난잡할 정도로 화려한 아즈치 모모야마 시대의 미의식에 항거하는

 '취미의 심판자 '리큐의 경우에는, 

문화의 고요한 힘으로 자기를 관철하려는 야망을 품은 거였다고 볼 수 있다. 

(리큐 관련 연구서는 국내번역본이 없고 

나오키 상 수상작인 와타나베 겐이치의 <리큐에게 물어라>는 참고가 될 만하다.)

물론 그것은 단순히 제 이름을 널리 알리는 명예욕을 넘어서는, 

생겨먹음 자체에 깃들어 있는 권력 의지처럼 보인다. 

이 만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실존 인물이고 

겉으로는 드러나는 인물들의 행각, 흥망성쇠는 역사적 사료와 일치하지만,

내막에 대한 해석은 어쩔 수 없이 야마다 요시히로 다운 

거칠고 시원시원한 명랑만화 코믹스이다. 



후루타 오리베는 노부나가의 휘하에서 시작했으니 무장으로서 줄을 잘탔다.

그런데 그의 관심은 다도의 미의식과 다기에 대한 물욕 쪽으로 돌아간다.

보스들의 눈 밖에 나지 않고 여러 귀인들의 도움을 받으니

그 방향으로 더 잘해볼 수도 있었을 텐데 

출세 및 가문의 번영쪽으로 의욕을 가져보려고 스스로 마음을 다잡아보지만 

잘 안된다.



반드시 스스로 뭔가를 창작해내는 것만이 예술가가 아니다. 

또는 반드시 예술가가 되는 것만이 예술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다.

볼 줄 아는 것, 향유할 줄 아는 것, 취미생활, 

취미로 연결된 관계들의 공동체, 물주로서의 독려, 프로듀싱, 

오리지널리티에 집착하지 않는 2차 창작,

일상 생활 속에서 장르의 일부로 기록되지 않고

물 속에 바람 속에 글씨를 새기듯이, 

하지만 자기안의 바람끼(풍류)를 이기지 못하고

상식적이고 관습적이고 대세적인 것에 어깃장을 놓는,

디스토션을 거는 일회적인 행위들,  

거창하게 퍼포먼스라고 칭하기도 뭐한 시도들이

굳이 예술 영역에서 또는 제도 속에서 안착하고

정규적인 가치를 부여받는 것이 반드시 필요한 일인가,

따위를 이 만화는 생각해 보게 만든다.



9권에서 후루타 오리베는 드디어 스승 센노 리큐와 작별하게 된다.

스승은 자신이 추구하던 간결함의 미를 넘어서는 후루타 자신만의

길을 걸으라고 떠미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제목 <효게모노(웃기는 것)>의 의미를 비로소 알 수 있었다.

후루타 자신이나 이 '만화책'(코믹스)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라고 일컫는

비시이(侘しい, 적적하다)한 것(物,모노), 사비시이(寂しい, 외롭 다)한 것, 

유우겐(구별되는 

후루타 오리베만의 취미의식을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웃기면 좌우맥락 잃어버리듯 터트리고, 

흥이 넘치면 엉덩이가 들썩거려 그냥 내버려둘 수가 없다.

넓은 의미에서 유머랄 수도 있겠고, 

유머를 진한 엑기스의 원본으로 삼지만

더이상 유머 자체의 영역으로 한정할 수 없는 감각 

앞으로 후루타가 추구하는 길은 그런 것 아닐까.

언제나 남의 시선이 아닌 자기 자신이 기쁜 길이 장수 비결이고

설령 장수 하지 못해도 후회가 없는 게 아닐까. 이 만화를 보면서

그런 따위의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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