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 : 붓다의 진의를 추적하다
이승명 지음 / 한솜미디어(띠앗)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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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령의 아버지에게 쉽게 읽히기 위해 썼다는 헌사에서부터 물음표가 몇 개씩 떠오르는 책이다. 저자의 바램과는 달리 일단 읽기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도 이책은 한문번역본 다섯개, 영어 번역본 3개를 토대로 주로 번역 논평을 중심으로 전진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요 공격 타겟은 - 구 번역이 간결하고 운율이 아름답다며 칭찬도 가끔 하긴 하지만...-  구마라지바의 번역본이고 상대적으로 현장 번역을 높게 평가한다. 그리고 현장 역을 편들어주기 위해 콘체(콘즈)나 뮐러의 영역을 간간히 참고하고, 금강경이 포함되어있는 다른 반야부 경전 특히 8000송 반야경 참조를 많이 한다. 그런데 한글 번역을 위한 소스가 되는 원본 문장을 책에다 안 실어놓고 필요할 때마다 일부 구절만을, 그것도 저자 나름의 한글 번역으로 다시 투과해서 곁에 붙여놓고 비교를 했다. 그렇게할 거 거면 독자가 어떻게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 판단을 하나? 

게다가 이 점이 가장 중요한데 저자의 문장이 상당히 좋지 않다. 문단 단위로 보면 체계적이지가 않고 때론 횡설수설처럼 난삽하다. 문장으로 쪼개서보면 비문이 많다는 말은 아니지만 문장에서 쓰이는 지시어, 대명사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지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는 데가 허다해서 이 책을 완독하는데 1달이나 걸리게 하는 데 주요 원인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을 끝까지 읽어내기 위해 아이러니 하게도 함께 펼쳐놓은 각묵 스님의 금강경 강해를 많이 참조했다.

*

저자는 본인만의 금강경 번역을 고집하기 위해 산스크리스트어 원전을 자주 끌어오는데 몇몇 군데는 본인 해석을 고집하기 위해 원문의 다른 곁가지 의미들을 생략한 데도 있다. 그걸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각묵 스님의 금강경 역본에 산스크리트어 문장이 알파벳 음차로 전문이 실려 있어서 구글 산스-잉글리쉬 사전에 넣어보고 미심쩍은 대목에서 대조해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소명태자 분류법으로 32절 중, 4절의 첫 구절, 구마라지바 한역에 따르면 復次 須菩提 菩薩 於法 應無所住 行於布施 (다시 수보리여, 보살은 법에 머무르지 않고 보시를 해야 한다)

저자는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한 부분임에도 구마라지바가 붓다의 원뜻에서 벗어난 해석을 했다고 지적하면서  "또다시, 수보리여, 보살이 대상에 의존하여 보시를 해서는 안된다"고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근거로 든 것은 물론, 산스크리트어 역본인데, (물론 현재 리뷰하고 있는 이 책에는 원문이 빠져있음)

api tu (그런데) khalu (진실로) punah (다시) Subutte (수부티여) na bodhisattva (보살이) vastu-pratisthitena (경계에 머물러) danam (베풂이) datavyam (주어져서는)

산스 원문 vastu의 어근이 vas= to dwell니까 vastu는 그 어근의 명사형인 residence 즉, 장소의 의미로 해석하는 한 가지 가능성이 있고, 다른 한편  thing이나 substance 로 옮길 수도 있는데, 구마라지바는 이 단어를 法으로 옮겼고 현장은 事로 옮겼다. 각묵 스님 번역은 이 vastu를 장소의 의미와 '법'의 의미를 함께 살리면서 문장 전체로 나아가서는 '보살은 특정한 경계 (의미의 장소)에 고착되서 머무르지 않는다' 는 식으로 해석하는데 이 또한 산스크리트 원문의 골격에서 벗어나지 않고 이치가 통한다. 
 
저자는 현장 역 편애를 드러내면서 해석의 다양한 가능성을 허용하지 않고 구마라지바가 틀렸음이 분명하다고 단정짓는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아마도 영역자 세 사람 중 두 사람인 콘체와 레드파인이 vastu를 a thing으로 옮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한쪽에서는 장소를 나타내는 vastu의 의미가 사물 또는 대상이라는 의미로 바뀌게 되니까, 그것을 핸들링하는 동사 pratisthitena 또한 '머무르다'에서 '의존하다'로 바뀌는 것이 순리일 것이고, 이 동사의 원어는 물론 그 두가지 해석 가능성을 다 허용한다. 저자는 구마라지바 역에서 應無所住의 '住' ='머무르다'라는 해석이 본인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그걸 '의존한다'로 고쳐야 한다고 거듭 주장하는데 저자의 대안 번역을 허용한다고 해도 취향의 고집 이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일독만으로도 발견된 이런 석연치 않은 해법이 몇 군데 더 있었다. 구마라지바 한역이 신성불가침이라는 건 아니지만, 공격을 하려면 관련 근거들을 보강하거나 텍스트 자체만 가지고 후벼판다고 하면 좀더 논리적으로 치밀한 변명을 갖추었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

결론적으로 이 책은 저자의 학습노트를 묶어놓은 정도로 보인다. 이 물건을 원문에 구애받지 않도록 일반 독자를 읽으라고 깔끔하게 정리한 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법조인이신 듯한데, 보통 법조인들 사이에 오고가는 외계어같은 법률용어는 그들 사이에서만 통용될 때 권위를 얻겠지만 아버지에게 읽히기를 바라면서 썼다는 이 책에서는 경우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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