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양 창비세계문학 44
다자이 오사무 지음, 신현선 옮김 / 창비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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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남자가 무대 위로 등장한다. 건장한 체격이고 눈썹이 짙고 턱에서부터 거의 광대뼈까지 수염이 푸르스름하게 나있다. 잘못 건드렸다간 뼈도 못추릴 것 같다. 그런 남자가 무대 위에 서서 잔뜩 비음을 내며 '빨간 구두 사줘'하고 징징거리며 어줍짢은 연기를 하는 느낌. 여성의 목소리라기엔 둔탁한, 여성에 관한 고정관념만을 똘똘 뭉쳐 서술한 느낌. 특히 '거의 울지경이 되었다'는 표현이 반복적으로 등장할때는 이만 책장을 덮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던 중 풀숲에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는 남자를 다시 보게된 것이다. 뭔가를 주시하고 있는 남자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가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는 한 여자. 누가 봐도 사랑에 빠진 남자가 그의 눈에 담아내는 여자의 모든 것. 그 순간 주삿바늘로 세포의 핵을 뽑아내듯 남자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여자'에 대한 마음을 뽑아내 소설로 풀어낸다면. 그리고 어쩔 수 없이 함께 딸려나오고 만 그의 철학, 아름다움의 기준, 탐미적 욕구가 그것에 더해진다면 「사양」이 완성될 것이다.


 책을 읽기 전 당대의 보기드문 일본의 페미니즘 문학 이라는 정보를 접하고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거나 어떤 철학으로 여성의 어떤것을 사수해야한다는 이야기가 담겼을 거라고 예측했다면, 「사양」은 그것에서 보기좋게 빠져나가 나를 풀숲으로 데려가고 차라리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를 보여준다. 「사양」은 다자이 오사무의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그녀의 삶을 둘러싼 불가해한 여러 일들, 그녀의 불행과 못된 습관,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를 향한 사랑까지도 가만히 지켜보고 이내 남녀의 틀을 초월한 하나의 존재를 사랑으로 품어내는 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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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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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주 전 나는 눈내리는 산을 등반했다. 등산을 싫어하는 내가 눈이 쌓인 것도 아닌 심지어 눈이 내리고 있는 산에 다녀왔다. 내 인생에 몹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같은 문장을 SNS에 올려두었다. 지인들은 왜 그런 문장을 그렇게 툭 적었느냐 묻거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고 또 어떤 지인은 '상승과 하강'이라는 오르고 내리는 과정에 줄곧 생각해오던 단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같은 산을 어릴적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어려서는 등산하는 것이 늘 싫었고 혹시 나이가들어 다시 등산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산이 좋아질까 싶었지만 싫었고 이번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릴때, 그리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자랐을 때는 과부하에 걸린 몸으로 일정시간을 버텨야만 하는 행위, 곧 물리적 지구력의 행사가 싫었다면 이번에 등산이 싫었던 이유는 대단히 관념적인 작용이었다. 


 애써 노력해 뭔가를 성취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 내려둔 뒤에 죽음을 맞는다. 성취를 위해 숨이 곧 멎을것 같은 고통을 감수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둔다. 문학적 용어로는 '죽은 비유'로 산은 줄곧 삶과 비교되곤 하는데, 그 지긋지긋한 비유를 실제 등산하면서 체감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어릴 때에도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같이 등산하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나에게 '이게 삶의 과정과 닮았다'는 말을 역시 죽은 비유로 '귀에 딱지 앉도록' 하곤 했었는데 그때는 무슨 헛소린가 싶었던 생각이 몸에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드는 일이라는 것이 이토록 신비로 가득차있다. 


 명예와 돈 같은 성공의 지표로써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생활이라거나 일도 취미도 지적인 성과도 노력하고 성과를 얻고 점차 그 의미가 퇴색해간다는 과정만은 등산과 닮았다. 또 등산하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를 생각했는데, 그 친구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어떤 곳의 광경을 보고싶어하고 먹어보지 못한 이국의 음식을 먹어보고싶어하는 마음이 등산과 닮았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에 놓인 끝없는 도전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라도 반드시 하나쯤의 정상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어느 선의 경지를 위해서 하기싫은 노력을 꼭 해야만 하나? 내가 지금까지 봐오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굳이 꼭 내가 봐야만 하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삶의, 그것이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오르고 내려오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 지상위의 아직 못본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 새로운 것을 보고싶다는 생각도 무엇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누구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단지 좀 편안하고 싶다. 몸과 마음 모두. 


 올라가도, 내려와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또한 허무에 대한 고정관념은 아닌지. 허무라는 이념 또한 정상이라는 어떤 지표가 있는 상태에서 생긴 비교개념으로 정상의 가치를 제고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처럼 사실은 허무라는 것은 없다. 정상과 노력 같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이고 발전지향적인 관념만이 존재하고 그에 배타되는 모든 성질들을 허무라는 프레임에 가둬둔 것일 뿐. 


 아마도 이것이 커트 보니것이 고양이 요람을 적었을 때 열광했던 젊은이들의 사고와 같을 것이다. 나는 어쨋거나 눈 내리는 산을 등반했고, 다시는 산에 가지 않을 생각과 함께 가만히 앉아 메케이브 산의 정상과 보코논을 생각한다. 




성숙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있어, 프랭크는 보코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코논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숙이란 어떠한 치료제도 없는 쓸쓸한 실망이다. 혹시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면 모를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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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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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아와 세계와의 대결에서 승리한 자아를 영웅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뭐였던가 그런 기억이 난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패배한 자아가 영웅일지도. 자세한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음에도 자아와 세계를 대치시키는 그 구도가 오랫동안 기억을 따라다녔다. 심지어 영웅이 아니라 이야기들을 전설 신화 설화 민담 같은 것으로 구분하는 척도였을 수도 있다. 어쨋든 자아와 세계가 대결을 하고 그 결과에 따라 무언가는 탄생한다는 개념이 마음에 들었다. 


 윈스턴은 영웅일까 아닐까. 늘 떠들고 다니는 것처럼 나는 인생에서의 장인정신을 세상 가장 귀중한 가치라고 여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굴복하지 않고 신념을 끝까지 밀어붙여 마침내 어떤 인생이다 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되는 경지에 오르는 인생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 같은 기준으로 나는 윈스턴이 승리했다고 적을 것이다. 윈스턴의 자아와 세계의 대결은 너무 치열했고 대결과정 중 어떤 부분에서도 마지막 완전한 굴복에서 조차 윈스턴은 세계 앞에서 자아를 놓아버리지 않았다. 윈스턴은 옳고 그름의 두갈래길에서 늘 옳은 길을 좇았다. 무의식이 조종되어 마침내 세대의 모든 부조리에 대해 완전히 수용하게 되었을 때에도 자아는 자신이 믿는 것을 믿었다. (조작된, 잘못된 믿음이었음에도) 책장을 덮고나서도 오랫동안 생각의 여지를 주었던 점은 이런 부분들이다. 


 작가는 결국 자신과 닮은 주인공을 내놓을 수밖에는 없다. 그리고 주인공을 세심히 살펴보면 결국 작가를 유추할 수 있게 된다. 전체주의라는 시대적 비극을 향한 분노가 마치 종교에 심취한 사람이 그렇게 하듯 작품으로 폭발할 만큼의 비대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 윈스턴의 모진 고난 속에서도 결국 손가락 네개를 '다섯'이라고 말하지 않았던 심지와 몹시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에는 미래였던 과거를, 과거의 사람이 상상한 과거 또는 미래를 엿본다는 기분도 좋았다. 사상적인 측면을 제외한 기술이나 환경같은 부분은 어린시절 그렸던 상상그림을 어른이 되어서 펼쳐본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런 한편으로 사상적인 측면은 좀 슬픈 지점이다. 


 사실 조지 오웰이 상상했던 것처럼 극단적으로 사상이 제한되어 '사상경찰'같은 것이 늘 나를 감시하고 있는 것이 공인된 상황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 중 통신기능을 가지고 있는 그어떤 물건들도 '사상검열'에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는 환경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카드나 휴대폰, TV, 컴퓨터 등등 정보통신 기술이 발달할수록 누군가 나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상황이 나날이 펼쳐지고 있다. 또 당에 대한 충성같은 것을 요구하지는 않더라도 사회가 어떤 획일화된 가치를 쫓고 있다는 생각또한 지울 수 없다. 전체주의라는 것이 너무 과거의 사람인 조지오웰이 상상한대로 폭력적이기까지 한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마치 안개같이 삶에 스며들어있는 사회의 획일화된 기조가 깃들어있다. 바로 '우리'라는 생각이다. 


 말도 안되는 울타리를 만들어두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부조리한 질서를 만들어낸다. 그 질서를 어기는 사람은 도태된다. '우리'는 한가지 가치를 추구한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에서 벗어난 언행을 하는 사람들은 도태된다. 이것이 작은 분야에서의 '우리'병이다. 그러나 조직의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역치가 올라가 지각하지 못한 새 더 만연해질 뿐 더 심각한 잣대들로 개인의 사상을 검열하고 행동을 규제한다. 이 성별의 사람들은 이렇게 행동해야한다는 편견이나 이 나이대에는 이런 행동을 해야한다는 편견, 이 나라 사람들은 이렇다, 이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다 하는 우리를 만들어 그 밖에 있는 사람들을 '이상한 사람'이라고 규정짓는 정신병같기도 한 전체주의적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조지 오웰이 윈스턴을 그토록 처절하게 전면에 내걸고 자아를 세계와 대립시킨 이유는 한 시대의 절망일 뿐만 아니라 어떤 인류애적 박애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한다. 소설의 말미, 개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내세워 빼앗았다는 부분을 다시 상기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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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싫어서 오늘의 젊은 작가 7
장강명 지음 / 민음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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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래간만에 국내 소설을 읽었다. 해외작품들과 비교하면 국내소설은 대단히 지엽적인 감정의 한 가닥만을 긴긴 이야기로 풀어가는 느낌이다. 반면 해외작품들은 좀 더 거시적이고 시대, 삶 같은 어떤 전체적인 것을 작은 일화들을 통해 해명하는 느낌이다. 지엽적으로 감정을 풀어나가는 소설들의 장점은 읽는 내내 공감을 하며 한문장 한문장이 마음속 깊이 파고든다는 점. 그러나 다 읽고나면 남는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 단점이다. 


 한국이 싫어서는 읽는 내내 구구절절 공감해가며 재미있고 빠르게 읽을 수 있었으나 책장을 덮고난 후에도 좀 오래 따라다녔다. 생각해볼 여러 가닥들을 많이 남겨주는 소설이었다. 아무래도 내 또래의 주인공이 내가 겪었던 일들과 비슷한 고충을 겪었던 일화들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상황을 탈피하기 위해 어떤 선택을 했는지는 다르지만 말이다. 


 요즘 시대가 변해가고 있다는 생각이 가장 크게 드는 순간은 언젠가 하면, 개인이 겪는 고통에 대해서 사회 전반적으로 반성을 하는 모습을 발견했을 때다. 고백하자면 나는 늘 내가 느끼는 미래가 없다는 암담한 기분이나 사회에서 쓸모가 없어 버려졌다는 참담한 기분들을 내 잘못으로 돌렸었다. 내가 좀더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시키는 대로 너무 열심히 공부만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이 소설을 읽고 얼마 뒤 '나태한 내가 살아가기에 이 나라가 너무 빡센 나라는 아니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다른 어떤곳에 내가 살기에 탁월한 어떤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이 모든 불행들이 내가 잘못된 인간이어서 생긴 게 아니라, 내가 밟고있는 이 땅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고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한국이 싫어서가 던져주는 위로는 이 지점에 있다. 같이 질질 짜주는 것도 아니고 힘내라고 손목을 끌고 문 밖으로 무작정 밀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심드렁하게 '그게 왜 네잘못인데?'하고 툭 말해주는 느낌. 그러면서 또 심드렁하게 '너로하여금 그런 기분이 들게한 이 나라가 잘못됐어'라고 말해준다. 이 지점은 또 사회의 '그런' 면모를 더 악화시키기 않기 위해 성인으로써 어떻게 살아나가야 하는지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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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주의자 선언 - 판사 문유석의 일상유감
문유석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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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선이라는 낱말을 처음 알았던 사춘기시절, 당연히 긍정적인 성격의 어휘라고 생각했던 나는 그것이 '위선자'라는 날카로운 표식이 되어 다른 사람을 찌르는 용도로 쓰이는 모습을 보고 당황했던적이 있다. 거짓이든, '척'이든 선 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도 선인데, 왜 나쁜 어휘로 사용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뒤로 나는 얼마나 자랐을까. 몇몇 단계의 교육을 더 받았고 이제는 사회인이 되었음에도 그 말이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단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고, 오히려 좀 더 공고해졌다.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 겉으로는 착한 척하는 사람에게 '위선자'라는 말이 사용된다. 어쩌면 더 중요한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 앞부분의 '사실은 그렇지 않지만'일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어쩐지 '겉으로는 착한 척을 한다'는 일말의 양심적 행동이 더 고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착한 척을 한다, 선한척을 한다, 선을 거짓으로 꾸며낸다는 행위를 위해서는 개인에게 근본적으로 '선'에 대한 어떤 기준이 확고히 성립되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도 있다. 더불어 '사실은 그렇지 않은' 행동을 할 때에도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어야 하겠다. 그런 의미에서 '위선'이라는 용어는 좀 발전적으로 확장될 희망을 가진 단어라고 할까. 또 그저 선한 사람보다 위선자가 좀 더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입체적 인물일 수 있다는 생각도 있다. 


 내가 생각하는 방향으로의 '위선'을 문유석판사는 이 책에서 서슴없이 써내려간 글을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일전에 읽은 피천득의 '인연'이 동심 그 자체였다면, 개인주의자 선언은 그러한 개인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동심 그 자체의, 어떤 원초적인 상태의 선하거나 악한 인간을 바라보면서 마치 내 배 아파 낳은 자식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용인하고, 정당성을 공감해주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판사로써 무수한 악인들을 법정에서 만나고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봤다고 선언하는 문유석 판사가 (속마음은 그렇지 않더라도)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일 수 있으며, 그 제도에 스스로 속해있으므로 나는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겠다고 자기반성하고 다짐한다. 또 제도의 어떤 점들을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슬며시 내놓기도 한다. 


 그렇다고 책에서 어떤 착한척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굉장히 선한 사람이고 마치 예수같은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어투로 '전근대적인' 민족주의를 여전히 품고 살아가는 현시대 우리 사회의 문제점들을 꼬집는다. 그러나 그것이 마냥 눈쌀을 찌푸리고 있는 형상이 아니라 풍자와 해학을 가진 시니컬이라서 읽기에는 편안했다. 또 가끔은 자신이 이전에 썼던 글에 대해서도 '내 생각이 짧았다'고 반성하며 덧붙여 이러이러한 점이 잘못됐던것 같다, 이런 부분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고 반성하는 글을 뒷부분에 이어붙이기도 했는데, 질타를 받은 글을 수록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끼워넣은 뒤 내가 이런점이 잘못됐더라 라고 시인하는 부분에서 내가 생각하는 '위선자'의 발전 '가능성'이 가능성을 뛰어넘어 현실화된 듯한 모습을 읽게 됐다. 위선에서 더 나아간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위선의 성장? 성숙? 혹은 어른의 어른스런 모습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자신이 자유를 갈망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타인의 자유와 행복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제각기 다른 모두의 자유와 행복을 충족시키는 나라와 세계를 위해 문유석 판사는 끊임없이 유토피아에 대한 기준을 새롭게 세우고 그 과정에서 사회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있는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기준이 확고히 성립되고,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잘못됐다는 것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개인들이 많아진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어른스런 모습이 되어 서로가 서로의 자유와 평화(?)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의 자유와 평화를 찾을 수 있는 근대적 사회로의 도약이 가능해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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