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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요람
커트 보니것 지음, 김송현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몇주 전 나는 눈내리는 산을 등반했다. 등산을 싫어하는 내가 눈이 쌓인 것도 아닌 심지어 눈이 내리고 있는 산에 다녀왔다. 내 인생에 몹시 기념비적인 사건이었기 때문에 같은 문장을 SNS에 올려두었다. 지인들은 왜 그런 문장을 그렇게 툭 적었느냐 묻거나, 사진은 없느냐고 물었고 또 어떤 지인은 '상승과 하강'이라는 오르고 내리는 과정에 줄곧 생각해오던 단어를 언급하기도 했다.
같은 산을 어릴적에도 자주 오르내렸다. 어려서는 등산하는 것이 늘 싫었고 혹시 나이가들어 다시 등산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들처럼 산이 좋아질까 싶었지만 싫었고 이번에 다녀오는 동안에도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어릴때, 그리고 그때보다는 조금 더 자랐을 때는 과부하에 걸린 몸으로 일정시간을 버텨야만 하는 행위, 곧 물리적 지구력의 행사가 싫었다면 이번에 등산이 싫었던 이유는 대단히 관념적인 작용이었다.
애써 노력해 뭔가를 성취하고 그리고 그것을 다 내려둔 뒤에 죽음을 맞는다. 성취를 위해 숨이 곧 멎을것 같은 고통을 감수한다. 그리고 모든 것을 제자리로 되돌려둔다. 문학적 용어로는 '죽은 비유'로 산은 줄곧 삶과 비교되곤 하는데, 그 지긋지긋한 비유를 실제 등산하면서 체감하기는 또 처음이었다. 어릴 때에도 그리고 불과 얼마 전까지도 같이 등산하는 나보다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힘들어하는 나에게 '이게 삶의 과정과 닮았다'는 말을 역시 죽은 비유로 '귀에 딱지 앉도록' 하곤 했었는데 그때는 무슨 헛소린가 싶었던 생각이 몸에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나이드는 일이라는 것이 이토록 신비로 가득차있다.
명예와 돈 같은 성공의 지표로써가 아니라 가정에서의 생활이라거나 일도 취미도 지적인 성과도 노력하고 성과를 얻고 점차 그 의미가 퇴색해간다는 과정만은 등산과 닮았다. 또 등산하면서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를 생각했는데, 그 친구가 지금까지 가보지 못한 어떤 곳의 광경을 보고싶어하고 먹어보지 못한 이국의 음식을 먹어보고싶어하는 마음이 등산과 닮았다. 한마디로 인간의 삶에 놓인 끝없는 도전 말이다.
그러나 사람은 어느 분야에서라도 반드시 하나쯤의 정상을 봐야만 하는 것일까? 어느 선의 경지를 위해서 하기싫은 노력을 꼭 해야만 하나? 내가 지금까지 봐오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굳이 꼭 내가 봐야만 하나?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삶의, 그것이 과정이라고 할지라도 나는 오르고 내려오는 것보다는 가만히 앉아 지상위의 아직 못본 것들을 좀 더 자세히 보며 살고 싶다는 생각. 새로운 것을 보고싶다는 생각도 무엇을 잘하고 싶다는 생각도 누구보다 우위에 서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나는 단지 좀 편안하고 싶다. 몸과 마음 모두.
올라가도, 내려와도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사고방식 또한 허무에 대한 고정관념은 아닌지. 허무라는 이념 또한 정상이라는 어떤 지표가 있는 상태에서 생긴 비교개념으로 정상의 가치를 제고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랑시에르의 민주주의에 관한 이론처럼 사실은 허무라는 것은 없다. 정상과 노력 같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이고 발전지향적인 관념만이 존재하고 그에 배타되는 모든 성질들을 허무라는 프레임에 가둬둔 것일 뿐.
아마도 이것이 커트 보니것이 고양이 요람을 적었을 때 열광했던 젊은이들의 사고와 같을 것이다. 나는 어쨋거나 눈 내리는 산을 등반했고, 다시는 산에 가지 않을 생각과 함께 가만히 앉아 메케이브 산의 정상과 보코논을 생각한다.
성숙의 의미를 정의하는 데 있어, 프랭크는 보코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보코논은 우리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성숙이란 어떠한 치료제도 없는 쓸쓸한 실망이다. 혹시 웃음이 만병통치약이라면 모를까"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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