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크림 :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 띵 시리즈 20
하현 지음 / 세미콜론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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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여름에는 유독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었다. tvN '지구 오락실'을 보면서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었고, 띵 시리즈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를 한 챕터씩 읽으며 새로운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요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은 '아이스를 머금은 순수 밀크'와 초콜릿이 씹히는 커피 아이스크림 '와일드 바디'이다. 기분이 우울한 날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아이스크림 할인점에 가서 한가득 사 오는 게 일상인데, 다른 아이스크림은 한두 개씩 골라 담아도 '순수 밀크'와 '와일드 바디'는 넉넉하게 대여섯 개씩 담아와야 든든한 마음이 든다.

이 에세이에서 가장 좋았던 이야기는 첫 챕터의 「어쩌면 이건 어른의 맛: 체리쥬빌레」이다.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 한 손님이 술에 취해 막무가내로 욕을 하며 체리쥬빌레 펭귄 모양 케이크를 주문했다. 태어나 처음으로 성인 남성에게 씨발 소리를 들어 당황한 작가는 케이크를 상자에 넣다가 실수로 윗부분을 뭉개뜨렸다. 그 케이크는 시급 4천 원의 하루 일당을 훌쩍 넘는 가격이었다. 술에 취해 떡이 된 사람이 뭉개진 케이크를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겠지,라는 마음도 들었지만 결국 떨리는 목소리로 잘못을 고백하고 새 케이크를 꺼내 다시 포장했다. 그리고 죄인이 된 마음으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서있을 때 점장님은 '펭귄 케이크'를 건네며 "오늘 놀랐을 텐데 집에 가서 이거 먹고 푹 자, 그리고 살다 보면 좋은 사람 그렇게 될 때가 있어."라고 말한다. 그 케이크를 먹고 다음 날도 씩씩하게 출근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점장님, 저 사실 체리쥬빌레 싫어해요. 점장님도 그러셨잖아요. 도대체 이게 왜 체리 맛인지 모르겠다고. 저는 캐러멜 프랄린 치즈케이크가 제일 좋아요. 그런데요, 여전히 가끔 일부러 체리쥬빌레를 먹어요. 내 안에 미움이 너무 많을 때. 그게 나를 해치려고 할 때. 그런 날의 퇴근길에는 분홍색 간판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요. 잘 지내시죠? 저는 잘 지내요." ─ 「어쩌면 이건 어른의 맛: 체리쥬빌레」 중에서


바밤바, 메로나, 더위사냥, 수박바, 빠삐코, 모두 대한민국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골목 슈퍼마다 냉동실을 지키고 있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아이스크림들에 대한 이 이야기를 도무지 단숨에 읽을 수 없었다. 어느 날은 문득 마음이 설레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나가기도 하고, 어떤 이야기는 마음이 뭉클해져 엄마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아이스크림을 살 때는 아빠와 같이 가야 먹고 싶은 대로 많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꼬마였던 나, 하굣길 정문 앞 문구점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이며 친구들과 어울려 보냈던 시간들. 모의고사가 끝난 후 세상 절망을 다 짊어지고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늘어놓던 푸념이 얼마나 위로가 되었는지 떠올랐다. 그리고 이 책을 읽으며 아이스크림을 까먹는 지금도 언젠가 추억이 되겠지.


1990년대에 어린 자식을 키운 언니들에게도, 그 어린 자식이었던 나에게도 엑설런트는 그런 아이스크림이었다. 마음껏 사줄 수 없고, 실컷 먹을 수 없는. 그래서 어쩌다 한번 먹게 되면 그 맛이 두고두고 기억날 만큼 특별하게 느껴졌던 귀한 음식.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 더 먹고 싶어져서 냉동실 문을 열었다. ─ 「추억 필터 없이도 아름다운: 엑셀런트」 중에서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아이스크림은 '엑셀런스'이다. 키가 닿지 않는 냉동실 속 엑설런트는 늘 애가 닳게 했다. 하루에 꼭 하나만 먹어야 한다는 엄마의 규칙은 늘 억울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은색 포장지, 금색 포장지 각 한 개씩, 하루에 두 개를 먹고 싶었다. (내 기억엔 은색, 금색인데 정확하진 않다.) 어른이 되면 마음대로 열 개 다 먹을 거야, 이런 결심을 했던 기억도 난다.

『좋았던 것들이 하나씩 시시해져도』이 출간되고 후배들과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편의점에 갔다. 꽤 비싼 끌레도르를 사주겠다고 호기롭게 이끌었다. 언니가 나중에 돈 많이 벌면 하겐다즈 아이스크림도 사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그날도 추억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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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호 : 콘텐츠 인문 잡지 한편 8
민음사 편집부 엮음 / 민음사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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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사람을 스스로 규정할 때 '콘텐츠 생산자'라고 생각한다. 가령 직업인으로서는 출간된 책을 독자분들에게 알리기 위해 다양한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하는데, 예를 들면 흥미롭게 줄거리를 요약하거나 인상적인 문장들을 텍스트 또는 이미지(카드 뉴스)로 만들거나 많은 이들의 이목을 끌 수 있는 이벤트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콘텐츠를 만들어낸다. 어쩌면 '문학'이라는 작품을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도록 다양한 형태로 재가공하여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나의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사적으로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는 리뷰도 내가 생산하는 하나의 콘텐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콘텐츠'는 무엇일까? 사실 지금까지 이 의미에 대해 정확히 생각해 보지 않았다.


"오늘날의 콘텐츠를 특징짓는 것은 얼어붙은 결정 같은 불멸의 작품이 되고자 하는 오래된 열망이 아니다. 가치의 척도가 되는 것은 원형으로 자리매김할 만한 본질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도, 원형을 모범적으로 모방하고 있는가도 아니라 이와 같은 모방의 유희를 수행하고 있는가다."


《한편 8호 콘텐츠》를 읽으면서 평소에 자주 소비하는 콘텐츠들을 떠올렸다. 출퇴근길에는 「김복준의 사건 의뢰」, 「프로파일러 배상훈의 CRIME」같은 범죄 수사 콘텐츠를 듣고, 업무 시간에는 다른 출판사를 비롯하여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는 마케팅 콘텐츠들을 살펴보기도 한다.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서는 「달려라 방탄」을 반복해서 보거나 알고리즘으로 유도된 유튜브 세상에서 귀여운 아기 영상이나 동물들 영상을 보며 잠든다. 내가 왜 이 콘텐츠들을 좋아할까? 나는 이 콘텐츠들을 통해 어떤 의미를 소비하고 있을까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


"사실 우리는 더 이상 ‘새로운 것’을 원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여가와 오락을 위해서 필요한 건 위험천만한 모험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를 더없이 만족스럽게 하는 것은 적당한 참신함을 가진 ‘판에 박힌 것들’이다."



《한편 8호 콘텐츠》에서 인상적이었던 글은, 짧디짧은 생명력을 가지는 이 모방과 복제의 흐름 속에 콘텐츠를 소비하는 행태에 대해 우리는 매 순간 염증을 느끼고 있으며 욕망하는 것들을 끊임없이 찾아다니는 방식이라는 해석의 「산만한 나날의 염증에 관하여」와 문화 예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성을 유지시키는데, 범죄물을 소비하면서 우리 자신이 윤리적 존재임을 재확인한다고 설명한 「범죄물을 대하는 자세」였다. 연구자처럼 나 또한 '범죄 수사'와 관련된 콘텐츠를 좋아하면서도 내가 왜 이러한 콘텐츠에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는지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나 스스로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지는 글이기도 했다.


나는 왜 '범죄물'을 좋아할까? 철학자 애덤 모턴은 '악의 기본 특징을 분석하면서 ‘이해 불가능하다는 관점’을 든다. 악의 이해 불가능성은 잔인한 행위를 한 타인을 이해하려 할 때 인간이 빠지는 혼란에 주목하는 개념'이라고 말한다. 어쩌면 나는 나와 같은 '인간'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행위를 한 것에 대해 이해해보고자 하는 노력이자, 불행을 당해야 할 어떠한 이유가 없는 평범한 누군가가 겪게되는 불행을 안타깝게 여기고 도와주고 싶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나도 극단의 상황에서는 악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계이자 억울하게 불행을 당하게 되었을 때 무엇을 도울 수 있을까 고민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러한 콘텐츠는 결국 흥밋거리만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도덕성을 유지시키고, 이 과정에서 우리 자신이 윤리적 존재임을 재확인하며 나아가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변화를 촉구하도록 움직이게 하기도 한다.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이고,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그것들을 고민하게 해서 좋았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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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V 빌런 고태경 - 2020 한경신춘문예 당선작
정대건 지음 / 은행나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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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오랫동안 무언가를 추구하면서도 이루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비웃습니다. 자기 자신도 자신을 비웃거나 미워하죠. 여러분이 자기 자신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냉소와 조롱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값싼 것이니까요. 저는 아직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꿈과 열망이 있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제 영화를 상영하는 겁니다.”


『GV 빌런 고태경』은 첫 독립 장편 영화 '원 찬스'의 흥행 실패 이후 대표작을 내지 못한 서른 세 살의 영화감독 조혜가나 관객과의 대화(Guest Visit)에서 'GV빌런' 고태경을 만나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혜나는 GV에서 이상하고 무례한 질문으로 분위기를 흐리는 고태경의 행동을 지식을 드러내고 뽐내는 행위나 감독을 향한 조롱이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영화 [초록 사과]의 조감독 출신에 20년째 입봉을 준비하는 50대의 감독지망생인 그의 진짜 모습을 알아가게 된다.


​이 소설에는 대조적이면서도 동일한 두 인물이 등장한다. 


영화감독을 꿈꿔온 조혜나는 갑작스러운 기회로 자신의 첫 독립 영화 '원 찬스'를 촬영했다. 제작 기간도 예산도 턱없이 부족했지만, 그 열악한 조건에서도 작품을 찍겠다고 선택했다. 그러나 새벽까지 촬영한 테이크에서 오케이를 못 내고 스텝과 배우의 압박에 노굿(NG)인데도 오케이를 해야 했다. 그 후 자신에게 남은 것은 형편없는 자신의 첫 작품과 빚뿐. 그때 '원 찬스'를 찍지 않았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잘하고 싶었지만 잘 해내지 못한 것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나 내가 확신하던 것들은 다 무너졌다. 그때 열악한 조건에서 작품을 찍은 건 내 선택이었다. “정말 좋은 기회였죠……. 제가 다 망쳤어요. 그땐 사람들 원망도 많이 했는데 누굴 원망하겠어요. 다 제 잘못이에요.”


1990년대 한국 영화의 르네상스 시기에 영화감독을 꿈꾸며 최강호 감독 사단에서 조감독을 지냈던 고태경은 흥행하리라 믿었던 영화가 엎어지고,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며 꿈에 그리던 입봉의 기회에 가까이 다가갔다 실패했다. 그 후 다른 작품의 감독이 하차하며 갑작스럽게 입봉의 기회가 찾아왔으나 자신의 영화를 만들겠다고 거절한 후 20년째 영화감독 지망생으로서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공부하고 있다. 때때로 그는 '만약 그때 데뷔를 했더라면'이라는 후회와 자신의 선택으로 사라진 '만약'의 이야기로 괴로웠다.


삶은 엉터리고 대부분 실망스러운 노 굿이니까 사람들은 오케이 컷들만 모여 있는 영화를 보러 간다. 우리가 ‘영화 같다’ ‘영화 같은 순간이다’라고 하는 것은 엉성하고 지루한 일상 속에서 오케이를 살아보는 드문 순간인 거다.


『GV 빌런 고태경』이 좋았던 이유는 여전히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미련하게 달려나가는 누군가에게도, 신기루처럼 자신의 꿈을 좇았지만 이제는 다른 행복을 붙잡고 있는 사람에게도 위로가 된다는 점이다. 그저 “내가 사랑하는 걸 미워하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걸 더욱 사랑하는 방향으로 가고 싶어.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뭘 위해서 이 모든 일을 하겠어?”


선택의 프로.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나는 앞으로도 실수하고 후회하고 반복하겠지만, 적어도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다.​


반복해서 후회하는 삶의 지점이 있을지 모른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지금 내 삶이 달라졌을 텐데. 지금 그 결정은 잘한 것일까? 그때 작가는 독자에게 말한다. “그런데 말이야. 사랑에 빠지지 않았더라면 이번 생에 뭘 더 좋은 걸 했겠어?”

맞아,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했던 그 시절이 내가 그 무엇이 되게 하지는 못했더라도 그 순간보다 더 좋은 걸 얻을 수 없었을 거야.


​👉 너무너무 추천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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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쓸모 있는 불안 - 불안한 히치하이커를 위한 마음 안내서
우보영 지음 / 국민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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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 동안 tvN '뜻밖의 여정'을 보았다. 아카데미 시상식의 시상자로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서 생활하는 동안의 일상을 담은 예능이었는데, 그중 오랜 시간 함께 방송해 온 제작진은 올해 42가 되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고민이 많다며 말을 꺼냈다. 어렸을 때는 좀 더 나이를 먹으면 경험도 쌓이고 하니까 판단을 내리는 게 쉬워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마흔이 되어도 그렇지 않아 고민이 많다는 것. 그 말을 들은 윤여정은 "근데 어쩌지… 나도 고민이 많아. 그래서 나도 잘 모르겠어. 하나도. 정답은 없어″라고 답한다. 이 진심 어린 조언이 왜 그리 뭉클하고 위로가 되던지.


​『존재와 무』에서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했다.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져 목적 없이 살아가는 인간은 오히려 그 때문에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만들어 가는 창조적 존재가 된다. 자유로운 사람은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민과 불안에 싸여 있다." _p.224


나를 불안하게 하는 것들이 있다. 어릴 때는 내가 간절히 소망하고 바라는 것, 예를 들면 원하는 대학, 원하는 성적, 원하는 직장을 얻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때로는 나 자신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불안해했다. 미래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하고, 내 지금의 선택이 인생의 모든 것을 바꿀 것처럼 두려웠다. 지금은 다를까? 최근에도 불안감에 잠을 설친 적이 여러 번 있다. 처음으로 민음북클럽을 쇼핑라이브로 얼리버드 론칭 준비를 할 때, 예상보다 많은 변수들 이을 해결해야 했다.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우면 새로운 돌발 상황들이 또다시 머릿속에 떠올랐고, 그렇게 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하지? 생각하다 보면 아침이 되었다. 일정이 다가올수록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는 상황이 엄청난 불안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십 년, 이십 년 후에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답을 알 수 없는 막연한 미래에 불안함을 느낀다. 직장 생활을 한 지도 십 년이 넘어 이제는 뭐든 능숙하고 쉬워질 줄 알았는데, 매번 마케팅툴은 새롭게 바뀌고 여전히 모르는 것 투성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이토록 쓸모 있는 불안』의 저자는 한 인터뷰에서 불안의 쓸모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불안은 정말 고마운 친구예요. ‘시간 낭비하다가 진짜 큰일 나겠다’ 하는 불안이 저를 움직이게 하고, ‘포기하면 죽도 밥도 안 되지’ 하는 불안은 꾹 참고 끝까지 하게 만들거든요. 비를 맞을까 봐 우산을 챙기는 것처럼 불안은 불편을 감수하고 행동하게 만드는 힘이에요. 비에 젖어도 그만인 사람들은 굳이 우산을 안 챙기잖아요. 이렇게 불안은 나에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가려 주죠. 그래서 불안은 쓸모 있을 뿐만 아니라 꽤 믿을 만한 친구예요. 나보다 나를 잘 알거든요."

예전에는 내가 '불안'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불안한 마음이 들고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무턱대고 낙관적인 미래를 상상하며 회피했는데, 그래서인지 나는 불안할 때마다 원인을 직면하지 못해 몸이 아픈 증상으로 돌아왔다. 그제야 내 불안과 마음에 관심을 가지고 여러 책들을 읽으며 공부했다. 내 불안을 인정하고 직면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그것들이 더 편안한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분명하다. 이제는 불안을 회피하지 않고 무엇이 불안한지 되물어보는 법을 익히고 있다.


오늘 하루, 긍정적인 사람과 긍정적인 대화를 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길었나? 무엇으로부터 혹은 누구로부터 에너지와 위안을 얻고 있는가? 에너지를 쓰는 시간과 얻는 시간의 균형은 잘 맞는가? 공감의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공감의 에너지를 보내고 있는가? 하루의 마무리에 스스로를 잘 다독이고 돌보았는가? _p.198


고민이 있을 때마다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유튜브를 찾거나 책을 검색해 본다. 어쩌면 다 비슷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래도 그 이야기가 위로가 된다. 불안과 마음에 관한 많은 책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오랜만에 읽어보니 또 새롭게 마음에 닿는다. 불안이 쓸모 있다고? 생각해 보니 그렇기도 하네. 윤여정 선생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인생은 진짜 한 번 살아볼 만은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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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41
한정현 지음 / 현대문학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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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현의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를 읽는 동안, 우연히 내가 즐겨보는 유튜브 <김복준의 사건의뢰>에서 1920년대 일어난 '김정필 사건'을 다루었다. 김정필은 1924년 함경북도 명천에서 결혼한 지 한 달 만에 남편을 살해한 사건으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언론에는 김정필이 자기 남편 김호철의 얼굴이 곱지 못하고 무식하며 성질이 우둔한 것을 비관하여 번민을 느껴오던 중 남편을 없애고 이상적 남편과 살아보고자 주먹밥에 랏도링(쥐약)을 넣고 먹여 사망케 하였다고 발표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의사 구도 다케키는 조선 특유의 범죄 형태를 총독부 통계 자료를 분석해 『조선특유의 범죄 : 남편 살해범에 대한 부인과학적 고찰』이라는 책을 내었는데, 당시 서대문형무소 살인범의 성비는 100명당 남성이 53명, 여성이 47명으로 여성 대부분은 남편 살해범이라고 한다. 당시 조혼이나 억지 결혼으로 남편, 시댁과 갈등을 빚는 여성들이 많았음을 감안해도 매우 놀라운 통계라고 느껴진다. 물론 역사 기록 그대로 당시 여성이 처한 여러 상황에 비추어 타국에 비해 남편 살해가 많았던 시기일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강자에 의해 쓰인 기록이 아니던가.



​"윤박 교수는 미군이 들어오면서 주장한 공창제 폐지에 힘을 싣고 있었다. 그는 신문에 여러 차례 사설을 실어 여성 권익 향상에 앞장서고 있었다. 물론 그 사설의 말미에 항상 '사실 여성들도 남성들에게 전적으로 기대어 살았기에 일어난 문제이니만큼 독립적 성향을 키우는 게 중요하다'를 갖다 붙이긴 했지만 말이다. 미군정 이후 커지는 여성의 목소리에 남성들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_p.82



『마고 : 미군정기 윤박 교수 살해 사건에 얽힌 세 명의 여성 용의자』에서 살해된 윤박 교수는 미국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다 해방 후 귀국한 엘리트 남성으로, 동료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양준수 형사와 미군정 조사관인 이든 대위는 윤박이 미군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미군정에 대한 여론이 악화될 것을 우려하여, 다른 자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한다. 그 희생양으로 떠오른 세 명의 여성 용의자는 『모던조선』의 편집장 선주혜, 현재는 가정 주부이지만과거 윤박의 집 식모이자 성 판매 여성이었던 윤선자, 그리고 윤박의 제자이자 자살한 신인 여성 소설가 현초의다. 

"나라에 그런 비극이 일어나면 가장 위험해지는 것은 여성과 어린아이, 노인이나 변태 성욕자, 길거리 노동자처럼 보호받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 _p.148

​"여성들이 저에게 잘 보이려고 화장하고 그러는 것이 별로여서요. 특히 일본 여성이나 조선 여성들은 과하게 순응적이죠." 이든은 미소를 지었지만 운서와 가성의 표정은 동시에 어두워졌다. 순응하지 않으면 죽이잖아요. _p.85

역사적 기록은 누가 범인이고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가가 중요했을지 몰라도, 한정현은 자신의 소설을 통해 그 사이의 누락된 약자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김정필은 어떨까? 김정필은 재판 당시 랏도링을 구매한 것은 맞지만 남편에게 먹이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시댁에서는 시집 온 며느리가 아들에게 독약을 먹여 살해했다고 고발했고, 경찰은 체포 당시 김정필이 '죄송합니다'라고 말해 죄를 인정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당시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물론 그가 진짜 범인일 수도 있다.)


1920년대 본부(남편) 살해가 많이 일어난 이유는 무엇일까? 추측해 보자면,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자신이 살기 위해 남편을 죽였을 수 있다. 혹은 남성이 누군가를 살해했을 때 이해하고 용납해 줄 이유는 차고 넘치지만, 여성은 작은 모함에도 상황을 빠져나가기 어려웠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생 아내를 폭행해 온 남편이 그날도 폭행을 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아내가 사망해서 감형이 될 수 있지만, 평생 맞아온 아내가 저항하다 남편이 죽인 경우에는 계획범죄로 가중 처벌을 받는 지금과 비슷한 것이다.


​사실 내가 범죄에 치중해서 리뷰를 썼지만, 이 작품에서 중요한 것은 윤박 교수의 살해도, 이 사건의 범인도 아니다. 한정현은 이러한 사회 구조적인 약자들이 착취당하고 위협을 당하는 현실 속에서도 서로를 구해내려고 애쓰는 인물들을 그려낸다. “이게 바로 낙관이야. 우리는 낙관할 수 있어. 우리가 잊지 않고 있으니까.”(p.183) 지워진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지금도 약자인 당신을 구해내기 위해 누군가 애쓰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여전히 낙관할 수 있음을 소설을 통해 보여준다. 결국 사랑이, 선의가 우리를 구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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