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 스트라이크
구병모 지음 / 창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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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스트라이크』는 날개를 가진 ‘익인(翼人)’들과 도시 사람들 간의 갈등을 중심으로 불완전하게 태어나 멸시 가운데 외롭게 자라온 익인 비오와 도시인 루가 서로의 차이를 혐오와 구분이 아니라 존중과 이해로 받아들이며, 세계와 맞서 성장해가는 이야기이다.

어느 날 고원 지대의 익인들이 도시까지 날아와 시 청사 건물을 습격한다. 익인 가운데 작은 날개로 태어나 비행 능력이 부족한 비오는 습격 직후 도시인에게 붙잡혀 청사에 갇히고 만다. 병환으로 누워있는 시행과 비서 사이에 태어나 청사 내에 숨겨져 살고 있던 루는 익인이 잡혔다는 소식에 익인이 갇혀있는 곳을 찾아간다. 경비병들에게 묶여있던 비오는 사람들이 방심한 틈에 루를 인질로 삼아 청사 밖으로 탈출하고, 루를 사막에 혼자 두고 갈 수 없어 함께 고원지대로 돌아간다. 고원지대에서 익인들과 지내면서 익인들이 시 청사를 공격한 이유와 익인들의 삶을 이해하게 되고, 익인과 도시인 사이의 오랜 반목의 역사에 대하여 듣게 된다. 또한 익인과 도시인 사이에서 작은 날개로 태어나 차별받고 자라온 비오와 시행과 비서 사이에 태어나 이유없이 모멸받으며 살아온 루는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가까워지고, 불완전할지라도 서로 존중하고, 인정하며 서로의 삶의 방식을 통하여 조금씩 성장해간다.

 

시행과 비서 사이에 태어난 루는 자신이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휴고(현 시행)를 비롯한 일가로부터 눈밖에 나있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루가 태어난 후 줄곳 외조부에게 맡기고 일년에 서너 번쯤 휴가를 얻어 만나러 왔을 때만 만났던 어머니는 외조부가 떠난 뒤 루를 청사로 불러들여 지내게 했다. 병환으로 누워있는 시행을 대신하여 아들인 휴고가 대신 시행 역할을 하고 있는 청사에서 불려온 루는 청사 별관에서 지내며 외부 노출이 극도로 제한된 채 혼자 지내게 된다. 휴고는 루가 탄과 같은 동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또 다른 자식일 뿐이라는 식으로 선을 긋는 태도를 공공연하게 드러내었다. 루의 마음 안에는 웅장하고 경직된 청사 안에서 아무도 자신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숨 쉬는 것 말고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자신이 원해서 그곳으로 간 것이 아닌데도 여전히 자신이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한 마음과 육친 사이에서도 느끼게 되는 근본적인 소외감이 마음 안에 자리잡았다.

 

익인과 도시인 사이에 잉태되어 남들의 반도 안 되는 크기의 날개를 가지고 태어난 비오는 초원조의 축복을 다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태어났다는 이유로 익인 사이에서 온전히 섞이지 못하고 자라왔다. 지장은 익인들의 존재와 전통을 지켜야한다는 이유로 비오를 다른 익인들과 똑같이 축복하지 않고, 일정 수준 이상의 권리를 박탈해왔다. 비오가 아이를 낳으면 더 작은 날개를 가지고 태어날 것이라 생각해 혼인을 금하였고, 비오는 이러한 처사와 이유를 그 누구보다 이해하고 받아들여왔다. 비오의 마음에 자신은 익인이나 익인들과는 다른 존재라는 소외감이 자리잡고 있었다.

 

이러한 태생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는 비오와 루는 마음 깊은 곳에 소외감이 자리잡고 있다. 요즘 많은 청년들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몸은 성인이 되었으나 진정한 의미의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느끼는 것 같다. 자신이 머물러도 괜찮은 자리를 찾지 못했다는 불안함과 스스로가 지닌 결함을 받아들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나 또한 내가 성숙한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어른'이 어떠한 상태인지 정의내려진 의미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작품을 통해 '성장한다는 것',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어른이 된다는 것, 그것은 불완전한 자신을 용납하는 것

 

비오와 루는 이중적으로 배타적 입장에 놓여있다. 익인과 도시인이라는 서로 대립하는 관계로서의 입장과 익인 무리에서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소외된 비오, 가족 내에서 배다른 형제로 소외되고 멸시당하는 루의 입장이다. 사람들은 이들을 의도적으로 배척하지 않더라도 '자신'과 다름에 대하여 배척하고 때로는 노골적으로 혐오를 드러낸다. 그로인해 비오와 루는 어느 곳에도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한다. 하지만 이들은 함께 지내는 시간동안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자신의 감정을 말하고 시인하며 서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평범'하다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아픔도 있고, 또 세상에 나만 다른 무언가 때문에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자신의 기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수 있고,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가족과 불화를 겪으며 생애가 불행해지기도 한다. 휴고는 아버지인 시행이 갑작스럽게 병환으로 눕게되자 대행으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러나 정식으로 취임을 한 것도 아니고, 대행으로서 존재하는 자신의 자리에 불안해한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에 자존심 상해하고, 이복동생 루의 등장에 불편한 심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휴고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했다.

 

'진정한 어른'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스스로가 완벽하다고 여기는 자아도취나 이정도면 괜찮다고 여기는 만족감이 아니라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게 된 '결함', 불완전함을 용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순간에 스스로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불안을 느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이해하고 용납하는 것 ,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닐까? 자신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이 누군가를 위해 마음을 다하여 자신이 가진 한 줌의 체온이라도 나눠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비오와 루의 성장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용납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익인들이 초원조 이후로 이어온 삶의 방식을 그대로 받아들여 안주하고 살아가지 않고, 다른 익인들보다 작은 날개로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을 향하여 비행을 시작한다. 태어난 순간부터 정해져 있던 자신의 미래가 아닌 진짜 자신만의 삶을 찾기 위해 날개를 펼친다. 아직은 정의내릴 수 없는 혼돈이 남아있지만 진정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알기 위하여 그리고 남은 자신의 삶의 방식을 스스로 결정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고 확신한다. 어느 곳에서도 단단하게 뿌리내리지 못했던 비오는 이제 스스로 단단해졌다. 그렇게 훌쩍 떠난 비오를 루는 기다리지 않는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평생의 인연을 기다림 가운데 보냈던 '사와'와 달리 루는 다른 선택을 한다. 루는 '자신의 한계를 명확히 알고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움직임을 준비한다.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의 휴식처로 남을 마음이 없"(p.259) 다는 고백이 자신만의 비행을 앞둔 루만의 성장을 보여준다. 불완전하지만, 알 수 없는 미지의 땅으로 내딛는 발걸음이 불안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휘청거리지 않고 날 수는 없”다는 문장처럼(p.203) 절벽 너머로 도약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아직 진정한 어른이 되지 못해도 괜찮다. 비록 늦었다고 생각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성장할 수 있고, 앞으로도 성장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용납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면서부터 그 애에게 주어진 몫으로 내가 해소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고 비오도 나를 탓하지는 않아. 세상의 모든 엄마가 자식을 낳아 놓은 것에 대해 일일이 죄책감을 느끼거나 사죄하면서 사는 건 부당하고도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하거든. 사람은 누구나 그날그날의 감정에 충실할 권리가 있고, 그 결과로 인한 짐을 제 것이 아님에도 나눠서 져야 할 때가 있지. - P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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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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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특권은 아마도 '자유 의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하는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다스리고 지키는 청지기의 역할과 권한을 인간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 후 역사적으로도 인간은 수많은 피를 흘리며 '개인의 자유'를 지켜왔다. 이 작품의 작가 번지스는 당신에게 질문한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이 작품 속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스는 성(性)과 돈, 그리고 유희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절도, 마약, 강도, 폭력과 강간 등 극단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어느 날,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사 는 할머니의 집에 침입했다가 범죄 현장에서 잡혀 혼자 교도소에 수감된다.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새로운 교도 방식인 '루도비코 요법'의 실험 대상에 자원하는데, 루도비코 요법은 조건반사 원리에 바탕을 둔 세뇌 훈련을 통해 이 전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 악행을 저지를 수 없도록 만든 교도 방식이다. 국가는 이러한 교도 방식과 알렉스의 상태를 선전함으로 다음 정권에도 우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버지스는 국가권력이 어떠한 한 개인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 태엽 장치를 달아 통제하는 것을 비유하여 <태엽감은 오렌지>로 표현하여, 독자에게 '국가가 개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강제로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신부는 알렉스에게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고 말한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다만 태엽 달린 오렌지처럼 수동적인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설령 폭력적이고 악한 것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과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 글쎄.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젠더 범죄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만약 성폭행범에게 이러한 루도비코 요법을 통하여 다시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이 시행한다면 당신은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반대할 것인가? 다시 거꾸로 생각해보자. 최근에는 개인정보 보호의 문제가 중요시되고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CCTV와 편리를 위하여 사용하는 신용카드, 휴대폰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들이 때로는 나의 알리바이가 되거나 범죄 발생시 범인을 잡는 것에 요긴하게 쓰기이도 하는데 그렇다면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침해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석방되어 사회에 나온 후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받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간다. 이 전처럼 충동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을 떠올리면 즉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의 행동에 제한을 받고 자신의 욕망과 선택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없을까?

나는 우리 사회가 다른 국가에 비해 훨씬 '시선'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제한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진로와 직업부터 배우자, 입고있는 브랜드들 하나하나 우리는 '시선'에 의하여 내 자유 의지가 제한된다. 요즘 모두가 바라는 욕망을 보면, 남들 다 아는 대기업에 취업해야하고, 남들 다 할 때 결혼하길 원하고, 결혼해서는 좋은 (브랜드)아파트에 거주하고, 명품까지는 아니어도 유명한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사서 아이에게 입히고 싶은 욕망들. 사실 그 욕망이 정말 내 안에서 나오는 욕망일까? 나는 사회적 시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선택해야하는 순간마다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시선의 대다수는 미디어를 통하여 습득되었고, 또 일부는 국가의 통제하에 미디어를 통하여 주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개인의 자유는 꽤 많이 제한되었다.

아직 나는 '자유'와 '통제', '침해'와 '보호'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버지스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달리, 요즘 같아서는 현실에도 루도비코 요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꽤 많은 자유 의지를 상실했으니, 지금처럼 무방비하게 폭력적인 사회적 환경에 놓여있는 것은 막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이 작품이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제 고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의 자유를 위해 폭력의 자유도 인정해야 할까? '양심'이라는 개인적 통제만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면 참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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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의 미숙 창비만화도서관 2
정원 지음 / 창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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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 나를 돌아보면 나는 정말 미숙한 사람이었다. 아마도 이런 나의 미숙함이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위로한다며 건넸던 '어떠한 말'이 돌아보니 상처가 되었을 것 같고, 친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이해한다고 했을 때 내가 진심이 아니었음을 분명 알았을 것이고, 나에게 자신의 상처를 고백했던 친구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해주지 못했던 것 같다. 나는 그 순간, 내가 내뱉고 행했던 것들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나를 아프게 했고, 사과하고 싶었다. 그 때는 내가 미숙하다는 것조차 모를만큼 미숙해서 너에게 상처주는 것조차 몰랐다고.

 

미숙이 자라왔고, 또 우리가 자라왔던 시간들 속에서 만났던 사람들은 아마도 자신이 스스로 기대하는 것보다는 미숙한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들의 미숙함이 당신의 마음에 쓰라린 상처를 남기고도 여전히 모르거나, '그 때 왜 날 때렸어?'라고 묻는 미숙에게 그저 고개를 돌린채 '미안해'라고 밖에 말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미숙의 아버지는 오래 전 시집을 출간한 시인으로 '시대를 성찰하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그 이후 평생을 가족의 생계도 내팽겨치고 매달려도 다음 시집을 낼 수 없었다. 스스로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과 아들이 없다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이 딸들을 더욱 미워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미숙의 어머니는 자신의 꿈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지 않는 남편을 대신하여 부업을 하며 가족들을 부양해야하는 것에서 오는 삶의 고단함과 남편의 폭력 앞에서 딸들을 사려깊게 돌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이에서 언니 정숙은 사춘기가 되어가고 점점 반항적으로 변해간다. 미숙은 누구에게도 상처주고 싶지 않아서 그저 가만히 있는다.

 

시간이 지나 미숙에게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생겼다. 전학 온 재이는 이혼한 부모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는데 자신의 아픔을 드러내면서 당당하게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든다. 재이와 함께 어울리며 지하철을 타고 홍대에 가보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놀고, 단 둘이 여행을 떠나기도하며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그렇게 진심을 나누고 서로의 상처를 이야기하며 우정을 이어가지만, 미숙이 재이에게 고백했던 자신의 상처, 가족 이야기를 재이는 소설로 써서 발표한다. 자신의 진심을 이용했다고 느낀 미숙은 예상치 못한 상처를 겪고 재이와 절교한다. 그렇게 미숙은 더욱 자신에게 몸을 움츠린다.

 

친구들이 '미숙아'라고 놀려대며 자신의 주번을 대신하게 할 때도, 언니가 이유없이 자신을 때릴 때도, 부모님의 폭력적인 부부싸움을 볼 때도 미숙은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않는다. 그래서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 나약한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지만, 사실 미숙은 그들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지 않으려 노력한다. 언니 정숙이 불안하고 두려울 때마다 습관적으로 허벅지를 꼬집으며 고통을 참는 모습을 지켜보며 언니의 반항심과 분노를 이해했고, 어머니가 느낄 삶의 무게와 고달픔을 이해했으며, 진돗개라고 애지중지 키우던 개가 진돗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절미’를 홀로 돌본다.

 

비록 미숙은 사람들에게 '미숙아'로 불리지만, 그들 중 가장 성숙한 사람일지 모른다.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이지만 똑같이 상처를 돌려주지 않고, 그들과 다른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어른으로 자랐으니까.

 

이 작품에는 모두가 '미숙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 등장하는 '미숙한 사람'들의 모습이 낯설지만은 않다. 때론 나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던 누군가의 모습이거나, 나도 모르게 상처를 주었던 내 모습이기도 하니까. 가족과 평생 살아오면서 가족들에게 상처 한 번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때론 그 마음의 상처가 너무도 커서 감당하지 못할 때도 있고, 그 원망으로 많은 시간을 살아가기도 한다. 그러한 그들의 '미숙함'을 무조건 이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누구든 언제고 '미숙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로.

 

단단하고 성숙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언젠가 가족의 폭력 속에서 자라온 자신의 상처를 어렵게 꺼내보였던 친구가 있었다. 그 때 나는 뭐라고 했던가. 그냥 같이 울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말 중에는 건낼 수 있는 말이 없어서, 내가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서. 그리고 성숙하지 못한 그 사람들이 미워서. 지금이라면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똑같은 사람이 되지 말자, 우린 더욱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이 되자.

 

매일 자신의 똥을 먹던 '절미'는 미숙과 살아가며 점차 자신의 똥을 먹지 않게 되었다. 절미도 미숙의 사랑을 받으며 조금씩 성장했다. 그래서 이 미성숙한 사람들의 이야기에도 조금은 희망이 있는 것 같다. 우리도 언젠가는 더디더라도 성장할테니까.

언니는 내 우상이었고 인내였다.
그런 언니가 변하기 시작했다. 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무너지고 있었다. 눈에 띄게.
그렇게 희망이 절망하고 있었다. - P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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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2 - 완결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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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변에 잘 정돈된 공원들이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주변에 산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배낭에 물통을 가득 넣어서 심부름으로 약수물을 뜨러 산에 올라가곤 했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는 '인왕산'이 곁에 있는 홍제동에서 살았는데 할머니와 함께 약수터에 자주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 산길이 무척 높고 가파르다고 생각했는데, 크고나서 생각해보니 아마 야트막한 동산 높이에 약수터가 있었던 것 같다. 추석이면 약수터를 지나 인왕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솔잎을 따오기도 했다. 내가 딴 솔잎이 가득붙은 송편을 가족과 나누어 먹으며, 기특해하는 어른들의 칭찬 한 마디에 내 마음만큼은 풍성한 한가위를 보냈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에 우리 식구까지 대가족이 함께 살다가 2학년 때 분가하여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개봉동에는 '매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약수터가는 길에 있는 미나리밭에서 친구들과 올챙이를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이면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가 밤과 도토리를 줍기도 했고, 겨울에는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얼어붙은 길에서 포대자루를 썰매삼아 하루종일 놀곤했다. 아빠가 밤나무를 마구 흔들어 떨어트린 밤송이를 발로 밟아서 알맹이만 주워모아 삶아 먹었던 따뜻한 밤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 작품이 만화뿐 아니라 영화로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것은 아마도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에는 모르는 일본 요리들이 많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정서는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단단한 토마토를 설탕에 절여 먹었던 간식, 엄마가 추운 겨울에 밥통에 찹쌀을 넣고 오랜 시간 정성들여 만든 후 밖에 놓아둔, 살얼음이 동동 떠있던 식혜. 이번 설에 시장에서 오랜만에 식혜를 사먹으면서 '우리 집도 식혜 안만들어 먹은지 오래되었네'하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난다. 이제는 예전처럼 명절마다 왁자지껄 모여드는 가족들도 없고, 편리한 것이 최고로 여겨지지만 지금껏 나의 뼈대를 세우고 나의 살을 찌워 지금까지 자라게 한 것들은 아마도 할머니가 빚어주신 만두,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냉면,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는 줄 알았던 엄마의 요리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할아버지 등을 꼭 붙잡고 타던 자전거에서 맞은 바람, 열심히 물을 주며 옥상에서 키웠던 상추와 고추가 상에 오를 때의 뿌듯함, 봄이면 꼭 심었던 봉숭아꽃을 빻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잤던 밤이 '나'라는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낸 모든 시간들일 것이다. 어쨋든 나는 토마토처럼 때론 연약하지만 단단하게 잘 자랐다.

 

<리틀 포레스트>가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내가 으레 당연하게 먹고 자란 그 음식들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깨닫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의 이치코도 코모리에서의 생활이 그런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나는 엄마의 레시피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바쁘게 산다고 또 잊어버리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어떤 날 꺼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눈에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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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틀 포레스트 1 세미콜론 코믹스
이가라시 다이스케 지음, 김희정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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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주변에 잘 정돈된 공원들이 있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주변에 산이 많았다. 일주일에 한 번은 배낭에 물통을 가득 넣어서 심부름으로 약수물을 뜨러 산에 올라가곤 했다. 태어나서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는 '인왕산'이 곁에 있는 홍제동에서 살았는데 할머니와 함께 약수터에 자주 올라갔던 기억이 난다. 그 때는 그 산길이 무척 높고 가파르다고 생각했는데, 크고나서 생각해보니 아마 야트막한 동산 높이에 약수터가 있었던 것 같다. 추석이면 약수터를 지나 인왕산 더 높은 곳까지 올라가 솔잎을 따오기도 했다. 내가 딴 솔잎이 가득붙은 송편을 가족과 나누어 먹으며, 기특해하는 어른들의 칭찬 한 마디에 내 마음만큼은 풍성한 한가위를 보냈다.

 

어릴 적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에 우리 식구까지 대가족이 함께 살다가 2학년 때 분가하여 개봉동으로 이사를 했다. 개봉동에는 '매봉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약수터가는 길에 있는 미나리밭에서 친구들과 올챙이를 잡으며 놀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가을이면 가족과 함께 산에 올라가 밤과 도토리를 줍기도 했고, 겨울에는 물이 흐르는 개천을 따라 얼어붙은 길에서 포대자루를 썰매삼아 하루종일 놀곤했다. 아빠가 밤나무를 마구 흔들어 떨어트린 밤송이를 발로 밟아서 알맹이만 주워모아 삶아 먹었던 따뜻한 밤이 아직도 생각난다.

 

이 작품이 만화뿐 아니라 영화로도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은 것은 아마도 잊고 살았던 어릴 적 기억이 되살아나기 때문이 아닐까? 이 만화에는 모르는 일본 요리들이 많았지만 결국 말하고자 하는 정서는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단단한 토마토를 설탕에 절여 먹었던 간식, 엄마가 추운 겨울에 밥통에 찹쌀을 넣고 오랜 시간 정성들여 만든 후 밖에 놓아둔, 살얼음이 동동 떠있던 식혜. 이번 설에 시장에서 오랜만에 식혜를 사먹으면서 '우리 집도 식혜 안만들어 먹은지 오래되었네'하고 이야기했던 게 생각난다. 이제는 예전처럼 명절마다 왁자지껄 모여드는 가족들도 없고, 편리한 것이 최고로 여겨지지만 지금껏 나의 뼈대를 세우고 나의 살을 찌워 지금까지 자라게 한 것들은 아마도 할머니가 빚어주신 만두, 외할머니가 만들어주셨던 냉면, 세상에서 요리를 가장 잘하는 줄 알았던 엄마의 요리들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할아버지 등을 꼭 붙잡고 타던 자전거에서 맞은 바람, 열심히 물을 주며 옥상에서 키웠던 상추와 고추가 상에 오를 때의 뿌듯함, 봄이면 꼭 심었던 봉숭아꽃을 빻아 손톱 위에 올려놓고 잤던 밤이 '나'라는 사람의 모양을 만들어낸 모든 시간들일 것이다. 어쨋든 나는 토마토처럼 때론 연약하지만 단단하게 잘 자랐다.

 

<리틀 포레스트>가 그런 소중한 순간들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 작품을 사랑한 것이 아닐까. 내가 으레 당연하게 먹고 자란 그 음식들이 얼마나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었는지를 알게 되면서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는지 깨닫게 된다. 아마 이 작품의 이치코도 코모리에서의 생활이 그런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나저나 나는 엄마의 레시피를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떡하지..

 

바쁘게 산다고 또 잊어버리고, 세상에 나 혼자인 것 같다고 느껴지는 어떤 날 꺼내보면 좋을 것 같아서 눈에 잘 보이는 책장에 꽂아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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