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태엽 오렌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2
앤소니 버제스 지음, 박시영 옮김 / 민음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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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특권은 아마도 '자유 의지'일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선과 악을 알게하는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만물에 이름을 붙이고, 다스리고 지키는 청지기의 역할과 권한을 인간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그 후 역사적으로도 인간은 수많은 피를 흘리며 '개인의 자유'를 지켜왔다. 이 작품의 작가 번지스는 당신에게 질문한다.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이 작품 속 주인공이자 화자인 알렉스는 성(性)과 돈, 그리고 유희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절도, 마약, 강도, 폭력과 강간 등 극단적인 행위를 일삼는다. 어느 날, 고양이를 키우며 혼자사 는 할머니의 집에 침입했다가 범죄 현장에서 잡혀 혼자 교도소에 수감된다. 알렉스는 교도소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새로운 교도 방식인 '루도비코 요법'의 실험 대상에 자원하는데, 루도비코 요법은 조건반사 원리에 바탕을 둔 세뇌 훈련을 통해 이 전처럼 폭력적이고 잔인한 행동을 하려고 할 때마다 고통스러워 악행을 저지를 수 없도록 만든 교도 방식이다. 국가는 이러한 교도 방식과 알렉스의 상태를 선전함으로 다음 정권에도 우위를 차지하고자 한다.

버지스는 국가권력이 어떠한 한 개인에게 육체적 또는 정신적 태엽 장치를 달아 통제하는 것을 비유하여 <태엽감은 오렌지>로 표현하여, 독자에게 '국가가 개인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강제로 제한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신부는 알렉스에게 '선택할 수 없는 인간은 인간이 아니다'고 말한다. 개인의 선택과 자유의지가 없다면 인간은 더 이상 온전한 인간일 수 없으며 다만 태엽 달린 오렌지처럼 수동적인 기계 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설령 폭력적이고 악한 것을 택한다고 하더라도 한 인간에게 주어진 '선택'과 '자유'는 반드시 지켜져야 하는 것일까? 글쎄.

개인의 자유를 옹호한다면, 폭력의 자유까지 인정해야 하는가?

최근 우리 사회에는 젠더 범죄가 심각한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만약 성폭행범에게 이러한 루도비코 요법을 통하여 다시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국가권력이 시행한다면 당신은 개인의 자유를 위하여 반대할 것인가? 다시 거꾸로 생각해보자. 최근에는 개인정보 보호의 문제가 중요시되고 있다.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한 CCTV와 편리를 위하여 사용하는 신용카드, 휴대폰이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다. 이러한 기록들이 때로는 나의 알리바이가 되거나 범죄 발생시 범인을 잡는 것에 요긴하게 쓰기이도 하는데 그렇다면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하여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 침해할 수 있을까?

알렉스는 석방되어 사회에 나온 후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통제받는 무기력한 인간이 되어간다. 이 전처럼 충동적으로 폭력적인 상황을 떠올리면 즉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이제 자신의 행동에 제한을 받고 자신의 욕망과 선택보다는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게 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를 제한하는 것은 없을까?

나는 우리 사회가 다른 국가에 비해 훨씬 '시선'에 의하여 개인의 자유와 선택이 제한되는 사회라고 생각한다. 생각보다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드러나는데, 진로와 직업부터 배우자, 입고있는 브랜드들 하나하나 우리는 '시선'에 의하여 내 자유 의지가 제한된다. 요즘 모두가 바라는 욕망을 보면, 남들 다 아는 대기업에 취업해야하고, 남들 다 할 때 결혼하길 원하고, 결혼해서는 좋은 (브랜드)아파트에 거주하고, 명품까지는 아니어도 유명한 브랜드의 옷과 신발을 사서 아이에게 입히고 싶은 욕망들. 사실 그 욕망이 정말 내 안에서 나오는 욕망일까? 나는 사회적 시선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그 시선은 우리의 생활 전반에서 선택해야하는 순간마다 의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 사회적 시선의 대다수는 미디어를 통하여 습득되었고, 또 일부는 국가의 통제하에 미디어를 통하여 주입되었다고 생각한다. 어쨋든 개인의 자유는 꽤 많이 제한되었다.

아직 나는 '자유'와 '통제', '침해'와 '보호' 사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한지는 모르겠다. 버지스가 이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과 달리, 요즘 같아서는 현실에도 루도비코 요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이미 내가 모르는 사이 꽤 많은 자유 의지를 상실했으니, 지금처럼 무방비하게 폭력적인 사회적 환경에 놓여있는 것은 막았으면 좋겠다는 이기적인 생각.

이 작품이 수많은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제 고전으로 자리잡은 것은 우리에게 너무도 중요한 질문을 던져주기 때문이 아닐까. 개인의 자유를 위해 폭력의 자유도 인정해야 할까? '양심'이라는 개인적 통제만으로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면 참 좋았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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