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어린이.어른
폴 아자르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10월
평점 :
품절


나는 또 어린이들이 즐겨 머릿속에 그리는 것을 그대로 담은 책을 사랑한다. 온 세상 삼라만상 속에서 특히 어린이들의 취향에 맞추어 선택된 것, 어린이들을 해방시키고 기쁘게 하며 행복하게 하는 이미지, 눈 깜짝할 사이에 어린이들한테 덤벼들어 그들을 현실 세계의 굴레로 얽매어 버리지 못하도록 지켜 주는 신비의 세계, 그런 것을 어린이들에게 주는 책을 나는 사랑한다.

어린이들에게 감상이 아니라 감수성을 자각시켜 주는 책, 인간다운 고귀한 감정을 어린이들의 마음에 불어넣는 책, 동식물의 생명뿐 아니라 삼라만상의 생명을 모두 중시하는 마음을 심어 주는 책, 천지의 만물과 그 만물의 영장인 인간 속에 있는 신비스러운 것을 헛되이 하거나 소홀히 하는 마음을 결코 어린이들에게 심어 주지 않는 책, 그런 책을 나는 사랑한다.

폴 아자르 <책.어린이.어른> 60p


오랜만에 어린이 문학 이론서를 펼쳤다. 폴 아자르의 <책.어린이.어른>은 양질의 책만을 선별하여 번역하며 국내에 소개해 온 햇살과 나무꾼 편집팀의 번역서다. 사실 이것을 모를 때는 도대체 햇살과 나무꾼이 누구냐며, 누가 이런 필명을 쓰며 번역을 하는거냐는 우스운 호기심도 가졌다. 처음 만난 책이 <옛 이야기의 매력 1,2> 였고, 플래그가 부족할 정도로 나를 어린이 동화의 매력 속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나는 어느새 햇살과 나무꾼에서 펴낸 이론서들과 동화책들은 믿고 읽는 책들로 인정하였다.

<책.어린이.어른>은 1장, 어린이들이 어른들에게 보호받지 못했던 시간들에도 끊임없이 그들은 '날개'로 인식되는 '그들만의 책', '이야기'를 염원해왔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럼에도 어른들은 그들에게 그 이야기들을 온전히 안겨 주지 못하였다. 이런 어른들을 철저히 비판하고 위트있게 비꼬았다. 존 뉴베리의 서점이 시작된 이야기도 물론 빠지지 않고 들어가 있었는데 서점에 놓여진 그 당시 책들에 대한 이야기도 역시 흥미롭게 독자의 시선을 끈다.

그리고 2장 부터는 본격적으로 어린이 책에 대한 폴 아자르의 더 상세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로빈슨 크루소>, <걸리버>, <돈 키호테>의 이야기와 함께 아이들이 어른을 위해 나온 책을 스스로 어린이에게 오게 만든 이야기를 전한다. 비록 그 내용이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님에서 시작하였으나 어린이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할 것이 필요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오히려 어린이는 그들에게 필요했을 이야기들을 '지켜냈다'는 것에 응원을 보내는 어른의 입장을 전하는 느낌이다.

<걸리버 여행기>를 읽으면 치명타를 얻어맞은 기분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은 "저건 우리 거야, 저건 우리 거야." 하면서 바로 이 책을 가리킨다. 어른들이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내미는 달콤한 책은 어린이들 마음에 들지 않는다. 어른들에게는 쓰디쓴 음식으로 보이는 것을 어린이들은 자기 것으로 여긴다.

-위의 책 87p

원작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절대 훼손시키지 말아야 한다. 마치 점쟁이가 지하의 물줄기를 감지해 내는 것처럼 어린이들은 원작의 급소만은 확실히 붙잡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환상의 샘이 원작 어디에서나 용솟음쳐 나오는 것을 보면, 그것이 놀랄 만큼 풍부하고 균일하게 원작의 저변을 흐르고 있음이 분명하다. 또 환상은 기발하고 현실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지만, 완전한 논리가 떠받치고 있어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어떻게든 진실에 가까워진다.

-위의 책 88p

우리가 늘 이야기해오던 '원작', 완역본의 중요함을 폴 아자르가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부연 설명도 없이 아주 깔끔하고 확실하게 전하고 있다.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아이는 그 동화들 속에서 길을 잃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은 현실과 밀접하게 연결될 길을 찾아낸다.

이 책에서 또 인상적인 것은, 프랑스가 자국인 본인의 입장에서도 전혀 프랑스를 옹호하려 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남쪽 나라와 북쪽 나라로 구분지으며, 영국인들의 어린이들과 어린이 책을 향한 시선에는 그것이 옳다고 적극 지지하였다. 반면 프랑스의 모습에서는 적극적으로 객관적인 시선으로 비판하였다. '민족적인 특색'이라는 제목의 4장에서는 이탈이리아, 프랑스, 영국 그리고 모든 나라들(물론 동양은 포함되지 않았지만)로 구분을 두어 그 나라 고유의 민족적 특징들 때문에 생겨난 어린이를 향한 시선과 책들의 차이들을 말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어린이가 바라는 이야기들과 영웅 이야기들을 남기며 긴 서사는 끝을 낸다. 폴 아자르는, 아주 철저하게 객관성을 지키려 노력하였다.

어린이들을 곁에서 지켜보는 어른들에게는, 따끔한 지침서로 존재할 책이다.

한 번의 완독으로 두기에 아쉬워 또 읽어보고 생각날때마다 이곳 저곳을 펼쳐보게 될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동화의 왕, 안데르센(본 책에 실린 제목이 "동화의 왕, 안데르센"이다)에 대한 이야기에서는 모든 글을 다 줄 긋고 싶을 만큼 좋았었고 아껴둔 안데르센 동화집을 펼쳐볼 때가 되었나보다 싶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질기고 억센 삼베 같은 마음, 부드러우나 역시 질긴 명주 같은 마음, 지나간 세월이 억세고 부드러운 반복으로써 서희를 놓았다 붙잡았다 하는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싶기도 했다. 묘향산이나 구천이를. 잊어버리고 싶을 뿐 잊어지는 일은 아닌 것이다. 지나간 세월은 세월이고 또 술을 들고 있는 눈앞의 사나이는 누구냐, 이 사나이는 처자를 버리고 떠날 사나이냐, 이쪽과 저쪽 사이의 깊은 도랑은 결국 메워질 수 없단 말인가. 아집이 고개를 치켜들고 아우성을 친다. / 숨이 껄떡 넘어가기까지 울부짖었던 어린 계집아이는 아직 서희 마음속에 그 편린을 남겨놓고 있었다."

"두 대의 마치는 빤하게 난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남은 여자들은 손수건을 흔들고, 그리고 속력을 낸 마차는 활시위에서 떠난 화살같이 가는 것이었다."

-박경리 <토지 9>

월선의 죽음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 김두수의 끈질긴 생. 입원하여 그동안 참아온 모든 감정을 토해내듯 통곡하는 그의 모습, 환과 길상의 동행이 지나가고 서희는 환국이와 윤국이를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구천이를 다시 만나고 그에 대한 이야기를 길상에게서 전해 듣지만, 길상은 끝내 하얼빈으로 떠났고 서희만이 아이를 데리고 돌아간다.

서희의 떨리는 목소리, 눈물. 울음. 남편을 용서하지 않는 마음속의 울분에 가득 찬 말들. 도도하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여자는 아이의 말에 결국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또 안으로 삭힌다.

어느 인물 하나도 하찮고 사사롭지 않은, 우리들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 듯한 것을 읽는 내내 느낀다.

갈수록 몰입이 되는 소설을, 이런 대작을 남겼다는 것은 아직도 어느 누구도 쉽게 여길 수 없는 일이다.

사실, 역사는 나에게 너무나 높은 벽같이도 느껴지고 역사를 들여다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뿐 잊고 싶은 '사실'로만 치부해왔었다.

하지만 누구나 아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것이겠지.

조금씩, 과거를 들여다보고 거기서 현재를 살아가고 미래를 기다리는 의미를 발견하는 것에 대해 더 많은 용기를 내어본다.

토지가 그 시작이라면 시작이겠지.

토지 속 이들에게 역사는 그들의 '삶' 그 자체였으니 어찌 그냥 흘려보낼 수 있었을까.

그들은 그 시간을 살아 왔던 수많은 이들의 목소리를 조금이나마 내어준다.

많은 속내들을 모두 말하진 못하겠지만 !

차라리 돈이라도 있어서 친일파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라도 해봤으면 좋겠다는 넋두리가 그래서 더 아리게 느껴지기도 하고.

그저 자신의 삶이 하나의 소명으로 변해가는 것조차도. 때로는 울음을 토해내고 때로는 모든 걸 안으로 안으로 숨기고.

그래서, 이 책은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었고, 가슴이 아려감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휘파람 부는 사람 - 모든 존재를 향한 높고 우아한 너그러움
메리 올리버 지음, 민승남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가는 자신이 아는 것, 잘 아는 것에 대해 쓴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반드시 그런 건 아니다. 작가는 자신이 갈망하거나 꿈꾸는 것, 억누를 수 없는 꿈속에서 몹시도 상세하고 가혹하리만큼 솔직하게 나타나는 것에 대해 쓸 수 있다.


메리 올리버 <휘파람 부는 사람>


주말 내내 손에 힘을 주고, 이것만이 지금 나의 마음을 진정시켜 주는 것이라며 

책의 글자에 하소연하는 마음으로 이 책에 매달린 것 같다.

온전히 이 책의 글자에만 집중하지 못했던 것을 고백하는 것은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용기내어 건네는 말이라고.


그동안의 그녀의 책과 또 다른 느낌이다.

목공으로 집을 지어보이며 월든을 이야기하기도 하며 작은 집에서 몇 편을 썼지만 "나는 그 집을 짓기 위해 지었으며 그 집 문지방을 넘어 떠나버렸다."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늙어감에 대해 "우리의 시간은 이미 꽤 지났고, 남아 있는 시간은 아주 활동적으로는 아니더라도 우아하고 세심하게 보내야한다."라고 말한다. 쓸모없어진 목재들에 대한 애정으로 몸의 시간이 흘러버림을 바라보는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만난 거북이와 집 안 지하실에서 바라본 거미에 대해 아주 세심하게 그려내고 살아가는 것의 경이로움을 그대로 풀어낸다. 


"거북이는 연못 바닥에서 오래도록 누워 휴식을 취했다. 그러다 몸을 돌렸고, 근처에서 움직이는 것이 보이자 공포도 슬픔도 없이, 지상의 신 가운데 으뜸인 식욕의 탐욕스러운 품 안에서 자신이 해야만 하는 것, 모든 존재가 해야만 하는 것을 했다. 모든 것은 분해되고 대체된다. 지금 이 순간은 아니지만 곧 우리는 새끼 양이고 나뭇잎이고 별이고 신비하게 반짝이는 연못물이다." <휘파람 부는 사람> 43~44p


이 뿐이 아니지.


그녀는 에드거 앨런 포, 로버트 프로스트, 제라드 맨리 홉킨스, 월트 휘트먼의 삶과 작품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건넨다. 그들의 삶과 그들의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아진 작품들에 대해서 그녀가 가진 모든 것을 나누어 주고 싶었다는 듯이 세심하게.


책을 덮을 즈음이면 그녀의 새로운 글을 더 많이, 만날 수 없어진 것이 내내 마음에 걸리고만다.


갈증난 감정에 물을 넣듯이 급하게 읽어나갔다. 다시 또, 읽었던 그녀의 책을 새로 펼쳐들겠지. 내가 미처 놓친 것, 글들을 다시 찾아내고 또 가슴이 두근거리고 싶어서.


"이제 초록 바다가 푸른 봄의 빛깔을 띠고 봄의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지치고 졸린 겨울은 긴긴 밤에 천천히 달을 윤나게 닦고 북쪽으로 물러난다. 겨울의 몸이 줄어간다. 녹아간다. 해묵은 수수께끼 뭉치가 또 한 해 풀리지 않고 그대로 남는다." <휘파람 부는 사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 주었으면 - 메마르고 뾰족해진 나에게 그림책 에세이
라문숙 지음 / 혜다 / 2020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록 서툴고 어눌할지라도 내 속을 통과해서 나온 언어들은 그냥 사라지지 않고 남아서 씨앗이 된다.

글을 쓰는 동안 내 몸속에 숨어있던 씨앗들은 싹이 트고 자라서 꽃으로 피어났다.

라문숙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주었으면>

그림책을 마당이 보이는 거실에 앉아 가만히 넘겨보는 손길이 느껴진다.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보기도 하고, 때로는 그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한마디씩 건네지 않았을까하는 다른 존재들의 마음도 읽어보려 애쓴다.

홀로 있기를 원하던,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 와서 가만히 곁에 있어주기를 원하던 존재들의 안쓰러움을 안아주기도 한다.

우정과 함께라는 이름으로 곁에 있어줘서 다행이라며 미소를 지어보고 가슴을 쓸어내린다.

지나온 여행에서, 지나온 시간들에서 놓친 것을 다시 잡아보려 애쓰고 떠나게 될 인연들에게 슬픔만을 던지지 않는다.

그녀가 그림책으로 자신의 마음을 보듬는 과정에서 나도 함께 용기를내어볼 것들이 아닌가하면서

샤워를 마치고 바디워시의 향이 남아 있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라고 말하면서도 이 향이 또 사라지는 것은 못내 아쉬운

아주 사소로운 것에도 기쁨보다 미련을 더 남기게 마련이지만.

한 송이 꽃(아름다움)만으로 도시 전체를 밝힐 수는 없겠지만

꽃눈같이 작은 것들을 놓치지 않는 섬세함이야말로

희망을 움켜쥘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라문숙 <가끔은 내게도 토끼가 와주었으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깊이에 눈뜨는 시간
라문숙 지음 / 은행나무 / 2019년 10월
평점 :
절판


삶에서 나를 길어올리는 것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게 많은 세상, 미처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내달리는 일상이 버거울 때가 왜 없을까?

꽃은 두어 달이 넘도록 자신을 지키다가 꽃잎 하나도 떨어트리지 않은 채 서서히 시들었다.

이제는 그만 떨어져도 좋겠다 싶어 빛이 사라져버린 꽃송이에 손을 대는 순간,

꽃이 야무지고 딱딱한 씨앗을 남겼음을 알았다.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점점 여물고 단단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만은 아닌 걸 크리스마스로즈는 온몸으로 보여준다.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우연히 펼쳐들었던 책에서 온 마음을 빼앗기는 경험을 또 했었고 온전히 제 시간을 갖기 힘든 나날들이 이어지면서 또 찾게 되었어요.

많은 이들에게 소개해 주고 싶었고 그 생각대로 건네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생각했지요.

저도 다시 읽었는데 이번에는 더욱더 힘을 빼고, 필사를 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오는 어깨 힘 들어간 모습에서 벗어나,

한 장 한 장 넘기며 조용히 작가님과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죠.

저보다 조금 더 시간을 보낸 이에게서 듣는 살아가는 이야기들이라고 생각하면서.

책은, 총 3가지 이야기 속에 잔가지들이 드리워져 있는 듯합니다.

삶의 단순한 리듬을 찾는 시간,

오랜 시간을 보내는 집에서. 부엌에서. 서재에서. 일상의 모든 시간들에서 그저 시간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잘 살아내려 했던 그 마음의 움직임과 몸의 움직임들을 전하고 있죠.

우리 집을 계속 두리번거리며 여러 번 둘러보게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좀 더 나은 구석을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내가 이 공간들을 어떤 마음으로 대해왔었는지 나의 시간들이 그저 흘러가기만을 바랐던 만큼

이 공간들이 저에겐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네요.

작은 공간인데 저의 취향이 조금씩 생기면서 기존의 모든 모습이 지우개로 지울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기도 하였고

요리는 도저히 못하겠다며 손 놓기도 한 순간들이 찰나처럼 스쳐 지나갑니다.

제 얼굴은 순식간에 화끈 달아올라버리고 말죠.

그런데 이제서야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막막해지고 답답해진 순간이 지나자

금방 이 집의 모든 공간에 발걸음을 더 하고 싶어지고 그냥 스쳐보내고 싶지 않더군요.

아이가 엄지 척 올려주는 요리를 해 주고 싶어지고 하루 세 번 설거지를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지기도 하고요.

아이와의 시간이 더해지는 것이 이제는 너무나 편안해져서 금요일에는 함께 뒹굴뒹굴,

몸이 체력의 한계를 느끼더라도 웃으면서 함께 몸을 눕히고 놀았네요.

모든 것에 완벽히 시간을 정하여두고 계획대로 하지 않아도,

몸이 기억하는 대로 어느새 움직여지는 순간에 느껴지는 더 큰 만족감을 모른척하기 싫어요.

대단한 것이 아니어도 나만의 리듬을 찾는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으로도 의미 있는 날들이겠죠.

읽고 쓰며 나 자신이 되는 시간

작가의 글들이 지면을 채우게 되는 순간을 이야기합니다.

괜찮을 거라 믿던 시간들을 지내오던 그녀가 친구의 말 한마디에 가슴이 찌르르 해지는 순간에 저도 동시에 찌르르합니다.

모호했던 감정이 문장이 되는 순간들, 감정의 정체가 드러나고 자신의 하루를 돌아보며 지난해 보이는 시간들 속에서

너무나 많은 이들과 엮여있고 얼마나 많은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바라보게 됩니다.

홀로 동떨어져있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외롭게 느껴지던 순간이 많았는데 그 순간을 다시 돌이켜보기도 합니다.

"하루, 때로 며칠 동안 가슴을 짓눌렀던 감정들을 한바탕 쓰고 나면 삶과 내가 다시 보인다. 그렇게 조금씩 느긋해지고 단단해진다. 글쓰기가 주는 선물이다." -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몸은 몸대로 체력이 바닥나고 나의 모든 가능성에 의심이 가기 시작했을 때 주저앉아버리고 싶었습니다.

써야 해서, 써야 할 것 같아서 책에서 찾은 문장을 쓰고 한 마디. 조금씩 보태봅니다.

처음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나의 이 표현이 너무나 사소로운 것은 아닐지, 나에게 의미 없는 시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나더군요. 그런데 손이 키보드 위를 두드리는 소리가 익숙해질 즈음 글은 마지막을 말하고 있었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는 순간에

한 쪽에 웅크리고 있던 감정이 말랑해지는 것이 느껴졌어요. 대단한 글을 쓴 것도 아닐 테고 저의 삶에서 큰 변화를 주는 순간이 아닐 텐데도.

그런 순간이 느껴지는 날 올까 했는데, 오기도 하더군요.

삶과, 나의 생각들을 다시 모으는 순간. 조금씩 더 느긋해지고 단단해진다는 것을 믿는 순간 이미 글을 쓰는 행위는 선물일지 모릅니다.

좋아하는 곳에서 힘을 모으는 시간

작가는, 문을 열고 나서면 바로 보이는 마당에서 힘을 모읍니다. 심지어 마당 뒤 소홀한 시선에서 보이는 작은 풀들조차 허투루 볼 수가 없습니다.

공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만큼, 숨통을 트이는 공간이고 이곳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녀에겐 힘을 모을 수 있는 시간이겠죠.

"가을인가 싶었는데 여름 못지않게 덮고 한여름에 긴 옷을 찾을 만큼 서늘한 밤도 있는 걸 잊지 않기만 하면 된다고, 사는 건 원래 그런 모습이라고, 누구나 서툴고, 실패가 그리 드문 일은 아니며,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으니 겁낼 필요는 없다는 걸 알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없다.

나는 언제나 진심이고,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게 최선이라는 말만 겨우 할 수 있으니 사프란 구근에서는 사프란이 싹트고, 개양귀비 씨앗에서는 개양귀비 싹이 나온다는 소박한 믿음에 이토록 매달리는 걸까?" - 라문숙 <깊이에 눈뜨는 시간>

저도 제 공간을 다시 둘러보고, 다시 책을 펼쳐보고 노트를 펼쳐봅니다. 빈 페이지가 더 많은 노트를 한 장 두 장 차르륵 넘겨보기도 하고 종이 질감을 만져보기도 합니다.

누구나 서툴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에 마음을 다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을 겨우 한다고 하는 문장에서,

도리어 저는 희망을 발견하고 미소를 짓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