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세계에서도
이현석 지음 / 자음과모음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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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큼 다양한 삶을 그리면서, 우리가 멀리 있다고 느낀 다른 세계의 모습을 이렇게 깊은 속들을 말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해본다.

언니가 내뿜은 연기가 길 위로 흩날렸지요.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

나도 언니를 빤히 쳐다봤습니다. 언니가 지어 보인 웃음은 곤란함만 간신히 감출 뿐이었는데, 그를 바라보는 내 얼굴이 어떠한지 가늠이 되지 않아 나는 순간적으로 멍해졌습니다. 뒤이어 언니가 "그러니까 네 생각은 조금 미뤄둘 수 있을까?"라고 묻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나지만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다만 아직도 선명히 떠오르는 것은 "너무 춥다. 어서 가!"라며 흔들던 언니의 손과, 먼발치에서 돌아보니 겨울바람에 휘날리며 은색으로 빛나던 언니의 단발머리.

이 두 가지만큼은 여전히 내 눈앞에 아른거립니다.

- 이현석 <다른 세계에서도> 57 / 58p

우리가 흔히 바라보는 시선 이면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단편 소설집이다. 성소수자, 낙태, 60년대의 근대화, 북한, 법조계, 노동. 지금도 여전히 사회적으로 외면받아 왔던 이들의 이야기를 그들 곁에서 혹은 그들과 거리를 둔 이들과 함께 바라보게 한다. 이런 이야기를 보는 것을 힘들어하는 나 같은 독자들에게 봐달라고 소설로 나왔을 테다.

처연해지는 심정으로 바라본다. 이들이 여전히 지금도 존재하는 것을 알고 있기에 모른척하기도 두 팔 걷고 도움을 주려 나서기도 용기가 나지 않는다. 나는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변화시킬 수 없다고 해도 내가 책을 읽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

고전이나 사회 분야의 책을 읽을 때는 꼭 드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읽는 것은 이야기로 계속 이어져야 하는, 우리가 외면하지는 말아야 할 이야기들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야기로 인식하고 있고 난 뒤에야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때 색안경을 쓰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완벽한 이해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이해하려는 노력을 해볼 수 있는 용기를 내게 한다.

언젠가 한 번은 지금은 제목이 생각나지 않지만 자신의 어린 시절 친족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하고 그것을 쉬쉬하며 살아온 한 여인의 이야기를 읽었다. 물론 소설이었다. 그 여성 역시 결혼을 하고 딸을 낳지만 딸의 성조숙증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불편한 감정을 삭히는 것을 그려냈다. 큰 창으로 내보여지는 모습과 안에서 밖을 향해 바라보는 시선에 얽힌 그 불편한 감정에 씁쓸한 뒷맛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나는 그런 어두운 이야기는 모두 피하고 싶었던 심정이었을 것이다. 좋은 것만 보기에도 너무 짧은 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과 함께 읽은 후에 들 '책임감'이라는 감정을 어떻게 해야 될지 몰랐다. 불편함과 책임감, 연민과 이해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가 못나 보였다. 여전히 지금도 나는 모든 것의 앞에 서서 부르짖지는 못할 테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제는 이야기 듣기를 피하지는 않으려 한다. 나의 용기는 이것에서 시작될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피해 왔던 수많은 이야기들, 죽음이나 병, 사회, 윤리적인 이슈들을 이야기로 만나고 전하는 것에서 용기를 내어보자고 생각하는 것이 이전보다 한 걸음 더 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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