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를 좋아하게 된 건 아버지의 <동물의 왕국> 사랑 덕분이었다.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다양한 동물들의 생태 모습에 어느새 나도 그 매력에 푹 빠져들었다. 동물의 왕국이 방영된 KBS와 더불어 EBS 다큐프라임은 국내 최고 다큐멘터리 제작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믿고보는 다큐, 그러나 아쉽게도 2011년 방영된 <생명, 40억년의 비밀>은 방송을 챙겨 보지 못했다. 이런 다큐 영상은 공들여 작업한 CG와 고속촬영 장면 등 화려한 영상미가 많다는 장점이 있고, 책은 중간 중간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완급을 조절하며 읽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두 방법으로 모두 봤으면 좋았겠으나 이번에는 책 시리즈인 《경계》 편으로만 내용을 접해본다.
46억년 전, 태양계의 3번째 궤도를 돌고 있는 행성인 지구가 만들어졌다. 그 후 물에서부터 생명이 태동한 이래 진화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경계>에서는 기존에 살고 있던 곳으로부터 밀려나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생물들의 처절했던 진화의 역사를 기록한다. 물에서 뭍으로 밀려난 식물과 동물, 다시 뭍에서 바다로, 하늘로, 그리고 땅 밑으로 밀려난 동물들, 끝으로 나무위에서 초원으로 밀려난 인류를 그려내고 있다. 거시적이면서 동시에 미시적인 관점으로 이 책을 읽어보자. 여기에 기록된 생명의 역사는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볼 것만이 아닌 현재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 상황과도 절묘하게 오버랩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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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란 ˝긴 시간 동안 일어난 유전자 빈도의 변화˝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진화의 개념에 덧붙여 한가지 반드시 집고 넘어 가야할 개념이 바로 `퇴화`이다. 퇴화는 진화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생존에 불필요한 기관이 점차 없어지는 것을 말한다. 일부 기관이 퇴화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종의 생존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면 이것이 바로 진화인 셈이다.
˝보통 퇴화는 진화의 반대방향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진화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는 데서 비롯된 오해다. 진화는 애초에 어떤 방향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다. (...) 당연히 한 기관의 퇴화는 그 기관을 가진 개체의 입장에서 보면 진화인 것이다.˝ (p.31)
진화는 방향성이 없다. 각자 주어진 환경에 알맞게 살아가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연속이다. 현재에 만족하는 생물은 진화하지 않는다. 환경이 변하고 경쟁자와 천적이 많아지면 불리한 생명만이 결국 밀려나 다른 살 곳을 알아봐야 한다.
현재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직업이란 생태계를 예로 들면, 생기고 없어지고 진화하는 직업들이 존재한다. 내가 하고 있는 분야에 경쟁자가 많아지고 환경이 변하고 있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전문직이 강조되어 온 탓에 지금 우리나라는 수 많은 `사`자 전문가들이 포화 상태를 이루고 있다. 이들도 살아남기 위해 진화를 한다. 더 이상 생태계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든 바뀔 수 있는 내,외부 환경과 경쟁자들에게 방심 하다간 멸종 당한다. 진화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것이 이 책에서 소개된 생명체들과 다를바 없다. 경쟁과 도태. 진화는 불리한 환경에 처한 생물들이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자기계발이다.
˝진화란 현재의 생태계에서 불리한 여건에 처한 생물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만족한 생물이 만드는 것은 아니니 말이다.˝ (p.14~15)
˝진화란 그러한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과 무수히 많은 시도를 담보로 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시도들은 지구 역사의 한 장면으로만 남게 된다.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렇게 무수한 `그침`속에 단 하나 `이어짐`의 역사다. 하지만 그 후손이 이어지지 않고 멸종했다고 해서 그들이 실패했다고 단정하지는 말자. 그들은 그저 그 장소, 그 시간에서 유전자의 이어짐을 `그쳤을 뿐이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그 수많은 유전자 중 운 좋게 이어진 후손 중 하나일 뿐이다.˝ (p.ix)
현재 지구 생태계 피라미드의 꼭대기에는 인간이 있다. 이런 인간이 진화의 축복일까? 반면 지렁이는 여지껏 진화해서 아직도 땅속이나 기어다니는 불쌍하고 미개한 존재일까? 그렇지 않다. 생명체의 목적은 자신의 DNA를 유지하고 후대에 남겨 오랫동안 보전하는 것이다. 인간과 지렁이 둘 중 누구의 DNA가 더 오래 남을지는 모를 일이다. 한가지 확실한건 지구 생명체의 역사를 살폈을때, 덩치가 커질수록 멸종에 가까워 졌다는 것과, 최종 포식자는 언제든 사라지고 바뀐다는 것이다.
약 1만년전 인류의 조상은 도구도 사용할 줄 모르는 유인원이었다. 지금으로부터 1만년 후 인류는 어떤 모습일까? 외형은 물론 생활습관, 문명, 과학기술 등이 지금 우리와 전혀 달라질 것은 당연하다. 과연 그들을 인류의 후손이라 부를수나 있을까? 아직도 무슨 원숭이가 우리의 조상이냐며 기겁을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1만년 후 신인류는 현재 인류가 자신들의 조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나 않을까? 문득 그 모습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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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다. 저쪽은 그나마 나으려나? 에라 모르겠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일단 가보자.
새로운 환경으로 이주의 원인은 다양하다. 급작스런 환경의 변화, 늘어나는 경쟁자들과 포식자들 때문에. 경계의 끝에 몰린 생명들은 새로운 환경이라는 낭떠러지로 과감하게 뛰어든다. 같이 뛰어든 대부분의 동족들은 비참하게 죽어나간다. 그래도 일부는 살아남고 적응하여 후손을 남겼다. 그렇게 그들은 새로운 환경의 지배자가 되어 역사 속에 기록된다.
˝당시 바다에서 최강의 포시자였던 판핀어류와의 경쟁이 힘겨웠던 경골어류들은 포식자를 피해 민물로 자신의 영역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p.66)
˝이들은 필사적으로 살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 과정에서 육기어류와 조기어류는 살 곳을 찾아 조간대로, 민물로, 그리고 육지로 떠밀리게 되었다.˝ (p.68~69)
˝생태계의 끝에서 끝으로, 물에서 뭍으로 내몰리기만 했던 동물들이 몇천만 년에 걸친 노력의 대가로 육지 전체를 얻게 된 셈이다.˝ (p.96)
멸종은 피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우주에서 날라오는 운석을 막을 수 없었던 것처럼 인류의 출현도 막을 수 없지 않은가. 인류의 역사가 기록된 후부터 멸종된 생물들, 그리고 현재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생물들에게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일 것이다. 이제와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살 수 있는 조그마한 땅이나 남겨놓고 표본을 만들고 기록하는 것 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 만으로 소임을 다했다고 책임을 회피하기에는 너무 무책임하다. 피할 수 없는 운명이지만 문제는 그 파괴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생명들이 경계를 넘어 이주 할 시간이 부족하다. 그렇게 그들은 빠르게 멸종해간다. 특정 국가나 단체를 탓하자는게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잘못이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잘못이며 우리 모두의 잘못이다.
˝신생대 중반 이후 기각상과(물개, 물범, 바다코끼리 등)에 속하는 해양 포유류는 지구의 모든 해안선에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며 즐거운 삶을 살게 되었다. 북극의 차가운 해안가에서 살얼음이 낀 바다로 뛰어들어 먹이를 구한 지 몇천만 년 만에 지구 전체의 해안을 정복한 정복자로 그 위엄을 뽐내게 된 것이다. (...) 그러나 그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못했다. 이번에도 주범은 인간이다. (...) 물범과의 남방물범아과에 속하는 16개의 속 중 10개 속이 이미 멸종했다. 남은 속 중에서도 3~4개의 종이 멸종하여 지금 남아 있는 종은 겨우 8종이며 이마저도 멸종의 위게에 처해있다.˝ (p.161)
˝거의 2억 년에 달하는 중생대의 기나긴 시간을 전부 합쳐 멸종한 해상파충류의 종보다도 더 많은 종이 짧은 1만 년의 인류 역사 속에 일어나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생명이 같은 생명에게 이토록 폭력적인 역사를 가질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p.163)
˝너무나 강력한 경쟁자인 인간의 등장은 생태계의 모든 종들을 경계로 몰아붙이는 것도 모자라, 모든 생태계를 파괴해 나가며 경계를 넘어갈 수 있는 기회까지 차단해 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생물들은 지금 엄청난 속도로 멸종해 나가고 있다. 지난 역사 속의 5대 멸종 중 가장 거대한 규모의 멸종이었던 페름기 대멸종보다도 더 빠르게 생명종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p.273)
˝옛날 마을의 울타리는 사자나 호랑이와 같은 맹수들로부터 인간을 보호한다는 측면이 강했지만, 이제 새로운 경계는 생물이 그 안에서는 그나마 안심할 수 있는, 인간으로부터 보화되는 곳이라는 표지이자, 이 경계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금지의 표지가 되었다.˝ (p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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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고등학교 생물 시간이 생각이 난다. 고등학생때 이런 책을 봤더라면 무조건 암기하지 않고도 재미있게 배울 수 있었을 텐데... 교과서와 문제집만 읽고 암기했던 그 시절의 나는 왜 이런 교양서들을 읽을 생각도 못했고 여유도 없었을까. 비록 낯선 생물들의 이름과 용어들이 많아 지루할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펴낸 것이기에 묘사가 생생하여 재미있다. 예를 들어 129쪽을 읽다 보면, 고래의 조상인 한 포유류가 강가를 어슬렁 어슬렁 뒤지다가 점점 물속으로 들어가면서 진화하는 모습이 상상이 된다. 다큐멘터리 영상이 눈 앞에 펼쳐지고 나래이션을 듣는 듯한 느낌이다.
˝먹이가 부족한 혹독한 시기, 사냥 실력이 부족했던 동물들은 다른 방법을 찾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사냥 실력이 뛰어난 다른 육식동물들이 없는 곳을 찾아 이동했고 바다에 닿았다. 바닷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썰물 때가 되면 내려가 미처 바다로 내려가지 못한 물고기를 줍고, 조개를 캐서 빈속을 채웠다. 뒤뚱거리는 게를 잡다 게의 집게발에 코를 물리기도 하고, 망둥이를 쫒기도 했다. 점점 조금 더 깊은 물속으로 내려가서 그 바닥의 조개를 캐고 저서생물들을 잡기도 했다.˝ (p.102~103)
˝인간의 선조들에게는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것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무리를 지어 나무타기에 알맞게 진화된 손으로 돌맹이를 쥐고 다녔다. 다행히 나무를 타면서 이들의 손은 엄지가 다른 손가락과 다른 방향으로 돌아가 뭔가를 쥐기에는 적합한 모양이었다. 사자가 사냥에 성공해 먹이를 먹고 있으면 괴성을 지르며 돌맹이를 던졌다. 너무 일찍 다가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자가 가장 맛있는 내장 부위와 부드러운 살코기로 어느 정도 배를 채워 포만감을 가질 때를 기다리지 않았을까? 배가 불러 사자가 달려들지 않고, 날아오는 돌멩이에 귀찮음과 약간의 위험을 느껴 자리를 뜨도록 말이다. 사자가 자리를 비키면 사자가 남긴 사냥물의 껍질과 뼈에 붙은 살코기을 먹고, 뼈를 부셔서 골수를 빨아먹기도 했을 것이다.˝ (p.25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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