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 일본 제국을 뒤흔든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정애영 옮김 / 이학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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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근현대사, 그 중에서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과 해방 후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자료를 찾아본다해도 종종 영화를 통해 처음 들어보는 인물들을 접하게 된다. 밀정에 나왔던 황옥이 그랬고 최근에 본 박열이라는 영화에서 박열이라는 인물이 그랬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서는 박열이라는 조선의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보다 그의 연인이자 동지 역할로 나온 가네코 후미코라는 인물에게 더 관심이 갔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가네코 후미코가 쓴 옥중수기가 번역되어 출간되었고 집 앞 도서관에 구비되어 있어 바로 빌려 볼 수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라는 사람에 대해 궁금했었고 가네코 후미코의 시선으로 본 박열이라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져 이 책을 읽었지만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을 만난 시점에 수기를 마쳤고 그 앞의 내용은 자신이 살아내었던 일생의 불행을 적어놓았다. 영화에서는 한없이 밝고 당차게 나오는 사람이었지만 그의 성장 스토리를 보면 그런 경험을 하고 어떻게 그런 밝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의아스러울 정도다. 가네코 후미코의 성장기는 부모로부터의 버림, 사랑의 결핍, 가난, 학대, 자유의 상실 등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불행의 총집합이라고 할만할 시간이었다.

그녀가 역사에 길이 남을 위인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지만 그녀의 삶은 위대해 보이고 삶의 모든 행적에 불행이 놓여 있는 것 같지만 그 모든 불행을 결국엔 다 지나오면서 박열을 만나는 것을 보면 그녀의 삶이 절망적이었다고만 단순히 말할 수는 없었다. 

 타인의 불행을 통해 나의 불행을 무디게 하는 것을 정신승리라고 불러야 할지 마음의 위로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녀의 삶이 불행을 견뎌내고 있는 사람에게 잠깐의 힘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밑줄, 생각
20쪽
그렇지만 인생에 대한 나의 첫인상은 그리 불쾌하지는 않았다. 

30쪽
나는 사람의 자식이고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함도 없었다. 그런데도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었다.  

75쪽
그렇다. 엄마는 결국 가버렸다.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를 두고. 이전에 아버지가 나나 엄마에게 했듯이.......  

97쪽
나는 아무것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아는 것은 내가 태어났고, 그리고 살아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렇다. 나는 내가 살아 있는 것은 확실히 알았다. 아무리 할머니가 나를 태어나지 않은 취급을 해도 나는 태어나 살아 있었던 것이다.  

149쪽
그래, 나처럼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고통을 주는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으면 안 돼. 그렇다, 죽어서는 안 된다. 

나이도 안 찬 불쌍한 소녀가 죽음을 결심하고 죽는 데 실패했다. 어린 풀처럼 쭉쭉 뻗을 나이에 구원을 죽음에서 구하려는 것도 무섭고 부자연스럽거니와 단지 복수하려는 희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도 얼마나 무섭고 또 슬픈 일인가. 

156쪽
 그렇다고 내가 이 헛간의 음침함을 싫어한 것은 결코 아니다. 가난과 고통에는 나는 매우 익숙하다. 나는 단지 그 ‘식모 방‘ 생활의 무의미함 때문에 초조함을 느꼈다.

158쪽
사랑받지 못하고 구박받았기 때문에 나는 뒤틀린 것이다. 모든 자유를 빼앗기고 억압당했기 때문에 꼬인 것이다. 

167쪽
조선에서의 나의 생활 기록이 너무 길어졌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나는, 나로서는 적어도 이 정도 일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나라는 사람이 조선에 있던 어언 7년 사이에 어째서 이렇게까지 꼬이고 뒤틀린 사람이 되었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서라도....... 

190쪽
절 생활은 겉으로는 평화스럽게 보인다. 하지만 청년에게는 평화만이 절대 가치는 아니다. 젊은이에게 평화는 아무것도 아니다.  

221쪽
 나의 진실한 바람! 진실한 목적!
 그것은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나 자신의 생명을 고양시키고 싶다는 것이었다. 

237쪽
나에게 딱 맞는 생활을 찾아, 어딘가 그런 생활이 있으리라 믿으며 나는 위선의 집을 버렸다.
 열일곱 살(1920년)의 봄이었다.
 안녕 아버지, 이모, 동생,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외삼촌, 지금까지 관계를 맺은 모든 사람이여 안녕, 안녕,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결별할 때입니다. 

239쪽
나를 부유한 가정에 태어나지 않게 하고 가는 곳마다 생활의 모든 범위에서 괴롭힐 만큼 괴롭혀준 나의 전 운명에 감사한다. 왜냐하면 만약 내가 나의 아버지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나 외삼촌 이모 집에서 아무 어려움 없이 컸다면 아마 나는 내가 그렇게도 미워하고 경멸하는 그런 사람들의 사상이나 성격이나 생활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국 나 자신을 찾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운명이 나에게 은혜를 베풀지 않은 덕에 나는 나 자신을 찾을 수 있었다.

285쪽
기독교의 가르침은 정말 옳은 것일까? 그것은 오직 사람 마음을 속이는 마취제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인간의 성의나 사랑이 타인을 움직이고 그것이 인간 세계를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기여하지 않는 한, 그런 가르침은 결국 기만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305쪽
아 나는.................해주고 싶다. 우리 불쌍한 계급을 위해 내 전 생명을 희생해서라도 싸우고 싶다. 

324쪽
지금까지 ‘주의자‘라는 사람은 뭔가 조금 특별하고 훌륭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공상이었는지를 나는 지금 너무나 확실히 알게 된 느낌이었다. 

334쪽
˝그저 지금의 사회에서 훌륭하게 되는 데에 흥미를 잃었어요.˝

˝글쎄요. 그 일에 대해서는 요즘 계속 생각 중이에요...... 난 뭔가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게 어떤 일인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쨌든 그것은 고학 따위를 하는 것은 아니에요. 내게는 꼭 해야 할 일이 있어요.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요. 그리고 난 지금 그걸 찾고 있어요......˝

지금 세상에서는 고학 같은 것을 해서 훌륭한 인간이 될 턱이 없다는 것을. 아니 그뿐이 아니다. 소위 훌륭한 인간만큼 하찮은 것도 없다는 것을. 남들이 훌륭하다고 하는 일에 무슨 가치가 있을 것인가. 나는 남들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나 자신의 진정한 만족과 자유를 얻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아닌가. 나는 나 자신이지 않으면 안 된다. 

335쪽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많은 타인의 노예로 살아왔다. 너무나 많은 남자의 노리개였다. 나는 나 자신의 삶을 갈지 않았다.

나 자신의 일이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알고 싶다. 알아서 그것을 실행하고 싶다. 

336쪽
하지만 실제로 나는 결코 사회주의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사회주의는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사회의 변혁을 구한다고 하지만, 그들이 하는 바가 진실로 민중의 복지가 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의문이다.
 ‘민중을 위하여‘라고 하며 사회주의는 동란을 일으키리라. 민중은 자신들을 위해 일어선 사람들과 함께 일어나 생사를 같이 하리라. 그리하여 사회에 하나의 변혁이 도래했을 때 아아, 그때 과연 민중은 무엇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지도자는 권력을 장악할 것이다. 그 권력으로 새로운 세계의 질서를 세울 것이다. 그리고 민중은 다시 그 권력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혁명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하나의 권력을 대신하여 다른 권력을 가져오는 일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340쪽
그렇다, 내가 찾고 있던 것,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그것은 확실히 그의 안에 있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찾고 있던 사람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내가 할 일을 갖고 있다. 

352쪽
˝내가 학교를 졸업하면 우리 바로 함께 살아요. 그때는 내가 언제나 당신 곁에 있을 겁니다. 결코 당신을 병 같은 것으로 고통받게 하지 않을 거예요. 죽을 거면 함께 죽읍시다. 우리 함께 살고 함께 죽어요.˝

353쪽
머지않아 나는 이 세상에서 나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질 것이다. 그러나 모든 현상은 현상으로서는 멸해도 영원의 실재 중에는 존속하는 것이라 나는 생각한다. 

361쪽
후미코는 시몬 베유처럼 많이 배우거나 체계적인 사회운동을 지도했던 엘리트 여성운동가는 아니다. 그렇기는커녕 아 이렇게 지지리 복도 없는 인생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혹한 환경에 놓인 존재였다. 불꽃처럼 살았다기보단 아프게 살다 간 한 여인의 삶이 오롯이 수기에 새겨져 있다. 

362쪽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대역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천황의 ‘은사‘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23살 나이에 옥중에서 죽은 아나키스트이다. 간토대지진으로 일본 국민이 공황에 빠지자 일본 치안 당국은 조선인들과 사회주의자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음모를 꾸민다. 이에 따라 수천 명의 조선인이 대학살을 당하고 수많은 사회주의자가 검거된다. 그 와중에 가네코 후미코도 박열과 함께 검속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폭탄 유입 계획 등이 드러나며 천황을 해치려 했다는 대역죄, 즉 메이지헌법의 가장 중죄로서 삼심제도 적용되지 않고 사형이 선고되는 대역죄를 뒤집어쓰게 된다. 

가네코후미코의 이 옥중 수기는 오롯이 자신의 출생에서부터 박열을 만날 때까지의 자전이자 고난과 역경을 딛고 아나키스트로 성장해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363쪽
이 옥중 수기는 박열과 만나 생각을 같이하는 부분에서 끝난다. 

365쪽
중대한 사상이 정규 교육제도 안에서 근면한 학습을 통해서만 세워진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가네코 후미코의 수기는 누군가 대신 써준 위서처럼 보일 것이다. 누가 써주었는가 하면 일본의 국가가 쓰게 한 것이고 국가에 대해 혼자 맞선 그녀가 이 수기를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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