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명과 인권을 배제한 것이라면 그 어떠한 발전적인 주장이라도 듣고싶지 않다.
잉여 생산물이 생기고 그것의 불균등한 배분으로 인해 계급이 분화되면서부터 누군가는 노동하고 누군하는 지배하기 시작했다. 지배하는 자는 땀 흘려 노동하지 않아도 되는 특권을 얻었고 당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반면 지배당하는 자는 감사해야했고, 만족해야했고, 검소해야했고, 땀 흘려 노동해야했다.
빈곤과 굶주림은 자연적인 것이지만 인간은 이를 해결할만한 힘을 이미 수백년 전에 얻었음에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1984년에 이미 인간은 120억 명을 먹일 수 있는 식량을 생산하고 있었다.
기아문제가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논리로 볼 수 없는 것은 그것이 구조적인 문제이지 굶주리는 자들의 생득적인 한계로 발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패한 것은 시스템을 지배하는 자들이고 도태되어야 할 것은 이미 충분한 식량이 있음에도 그것의 균등적 배분을 가로막는 자들이다.
자연은 배부른 자들이 맑은 공기를 마시게 하기 위해 수억명의 사람들을 기아에 빠뜨리지 않는다. 그들을 기아에 빠뜨리는 것은 배가 터질만큼 먹어놓고도 더 먹으려고 하는 유아적인 자들의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지. 배탈난다.
빈곤의 비참함이 자연법칙이 아니라 우리들의 사회제도에 의해 비롯되었다면, 우리의 죄는 중대하다
밑줄, 생각
152쪽 기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각국이 자급자족경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이룩하는 것 외에는 진정한 출구가 없다고 아빠는 생각해.
169쪽 세계경제의 모든 매커니즘은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한 가지 대전제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168~171쪽 기아에 관한 한 시장의 자율성을 맹신하는 것은 불합리하다 못해 죄악이다. 우리는 기아와 투쟁해야 한다. 기아문제를 시장의 자유로운 게임에만 방치할 수는 없다. 이에 세계경제의 모든 매커니즘은 한 가지 명령에 복종해야 한다. 한 가지 대전제는 바로 기아는 극복되어야 하며 지구상의 모든 거주민은 충분한 식량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국제적 구조가 마련되어야 하고 규범과 협약이 마련되어야 한다. 장 자크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약자와 강자 사이에서는 자유가 억압이며 법이 해방이다.˝라고 썼다. 시장의 완전한 자유는 억압과 착취와 죽음을 의미한다. 법칙은 사회정의를 보장한다. 세계시장은 규범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이것은 민중의 집단적인 의지를 통해 마련되어야 한다. 경제의 유일한 견인차는 이윤지상주의라는 입장, 신의 보이지 않는 손에 맡겨두면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허구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이 시대의 급박한 과제다. 시카고의 곡물거래소는 문을 닫아야 하며, 협의 등을 거쳐 제3세계에 대한 식량 공급로가 확보되어야 하고, 서구 정치가들을 눈멀게 만드는 어리석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는 폐지되어야 한다. 인간은 다른 사람이 처한 고통에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진정한 인간성의 회복 하지만 과연 서로의 동료로서 인간의 고통을 공감하고 급진적인 연대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은 현실적일까? 그것이 가까운 미래에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역사는 그런 질적인 도약을 알고 있다. 국가의 성립도 그에 대한 한 예다. 먼 과거에 인간들은 가족, 씨족, 그리고 한 마을 사람들끼리만 연대감을 느끼고 동일시하였따. 연대감은 신체적으로 가까이 있는 친한 사람들에게만 제한되었다. 그러다가 국가가 성립되면서 인간은 처음으로 알지 못하는, 평생 알 일이 없을 다른 사람들과 연대하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민족 정체성, 공동체 의식, 공공시설,그리고 모두에게 구속력을 발휘하는 법이 탄생하였다. 이제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살고 인간적인 지구를 만들기 위해 한 걸음만 더 앞으로 나가면 된다. 이를 위해 맬서스의 생각 같은 선입견이 없어져야 한다. 이 책은 그것에 기여하고자 쓰였다. 동일성은 다른 사람과의 진짜의, 혹은 상상의 만남, 단결행위 등 한마디로 공유된 의식으로부터 생겨난다. ˝잘못된 것 안에 올바른 삶은 없다˝라고 했던 아도르노의 말마따나 고통으로 가득 찬 세계에 행복의 영토는 없다. 우리는 인류의 6분의 1을 파멸로 몰아넣는 세계질서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지구에서 속히 배고픔이 사라지지 않으면 누가 인간성, 인정을 말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인류로부터 배제되고 남모르게 파멸해가고 있는 이런 ˝고통스런 분파˝는 다시 인류 속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소수가 누리는 자유와 복지의 대가로 다수가 절망하고 배고픈 세게는 존속할 희망과 의미가 없는 폭력적이고 불합리한 세계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정의를 누리고 배고픔을 달랠 수 있기 전에는 지상에 진정한 평화와 자유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서로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는 한 인간의 미래는 없을 것이다.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정의에 대한 인간의 불굴의 의지 속에 존재한다. 파블로 네루다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그들은 모든 꽃들을 꺾어버릴 수는 있지만 결코 봄을 지배할 수는 없을 것이다.˝
176 배고픔의 숙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가난한 나라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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