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전 후 식민지에 거주하고 있던 일본인들은 피식민지민들에게는 정복자, 일본 본토인들에게는 대륙 침략의 첨병이자 일자리를 빼앗고 식량을 축내는 민폐 집단으로 인식되었던 반면 그들 스스로는 패전의 피해자라고 생각했다. 라고 한다.
어찌 그러한 정체성 중 단 하나만을 택해서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까. 그들은 그 세 가지 정체성 모두를 지니고 있으며 때문에 귀찮음을 무릅 쓰고 입체적으로 그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물론 나는 피식민지 경험을 했던 국가의 흐름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들을 정복자라고 생각하고 보겠지만 공감의 범위를 확장시켜 그 당사자들의 마음이 되어, 본토 일본인들의 마음이 되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는 있겠다. 그것이 그 시대를, 역사를, 인간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건을, 시간을, 인물을 다각도로 살펴보려는 귀찮음을 포기하는 순간 일본인들에 대한 감정은 단순히 분노하기 위한 분노일 뿐이며 그들을 비난함으로써 정신적인 만족만을 느끼게 될 것이다.
모든 역사 속의 혼돈의 시기를 바라볼 때 슬픈 것은 정작 그러한 혼돈을 만들어낸 인간들은 역사에 이름을 남겨 존경과 비난, 추종과 멸시를 한 몸에 받지만 정작 그 혼돈에 휩쓸려 피흘리던 사람들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뿐더러 시대에 무기력하게 스러질 뿐이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대할 때 사건을 단순화 시키기 위해 사건의 연단 위에 세워진 한 인물만을 바라보지 않고 그 아래 있던 수많은 고통받던 사람들을 바라봐야 할 것이다.
사실, 패전 후 조선을 떠나던 일본인들이 피해를 입고 친일파들이 보복을 당한 사건들이 있었다고 해도 전체적으로 일본인들은 성공적으로 퇴각 작전을 펼쳤고 대부분의 피식민 국가들의 친일파들은 일본인들이 떠난 자리를 틀어잡고 득세하였다. 이런 망할 역사의 흐름이란. 사마천이 말한대로 정말 하늘의 뜻은 미미하다.
정의가 승리하고 기회주의가 패배한 역사를 본 적이 없다. 단지 권력의지가 강한 자들 중 승리한 자들이 역사를 써갈뿐인 것 같다.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전에 목차만 읽어봐도 그 주제는 너무나 흥미진진하다. 시험공부 해야 하는데..
8쪽
미군은 대부분의 일본인을 1946년 2월까지 집단 송환했다. 그러나 소련군은 한반도에 진주하자마자 일본인의 이동을 전면 통제한 가운데 남성들을 만주와 소련으로 데려가 강제 노역에 종사시켰다.
6장에서는 식민지의 가해자가 전후 일본 사회에서 전쟁피해자로 둔갑하게 되는 과정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생생하게 엿볼 수 있을 것이라고 이야기 한다. 이러한 흐름에서 요코 이야기가 쓰여지지 않았나 싶다. 요코 가와시마 윗킨스라는 사람도 자신을 일본의 군국주의와 세계대전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겠지만 그녀 역시 가해자의 이름표를 떼어낼 수는 없지 않나 싶다. 사실 세상에서 가해자와 피해자가 무 자르듯 뚜렷하게 갈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나 싶다.
16쪽
8월 17일 비밀리에 총독부 부인 일행이 부산에 도착했다. 이들은 곧바로 도청 측에서 마련한 배에 몸을 싣고 일본으로 향했다. 운행 도중에 배가 한쪽으로 점점 기울기 시작했다. 부인 일행이 조선에서 수집한 귀중품들을 어떻게든 일본으로 가져가려고 무리하게 실은 나머지 배가 미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었던 것이다.
22쪽
전시에 패색이 짙은 쪽의 지도자들이 백성을, 국민을 버리고 도망 가는 것은 이승만만 그랬던 건 아니었나보다. 이것 역시 일반적인 인간의 모습인가보다.
27쪽
패전 후 본토로 돌아간 일본인 중 적잖은 사람들이 자신이 태어났거나 오랜 기간 생활하며 정들었던 조선에 대한 막연한 그리움을 피력하곤 했따. 그런데 이들이 회고록을 통해 쏟아내는 조선에 관한 이야기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조선인에 대한 기억이나 조선인과 무언가를 함께했던 기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이들에게 조선인은 과거를 회상할 때 어렴풋이 떠오르는 한반도의 수목산천과 다를바 없는 그저 풍경의 일부일 뿐 동등한 사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악인에 대한 폭력을 통쾌해 하는 것은 비인간적인 것일까.
좋아해야 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해방 후 빠르게 과거의 모습을 찾아가는 조선인들의 모습에 그래도 36년이라는 시간이 우리의 정체성을 말살하지는 못했구나라고 안도하게 된다.
51쪽
그는 마지막 날 일기 말미에 ˝광고한 민족 대이동의 비극을 보았다˝고 적었다. 하지만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체험하게 될 비극은 아직 펼쳐지지도 않은 상태였다.
54쪽
일본인의 해외 이주는 더 나은 삶을 찾아 나선 개인의 욕망과 이들을 통해 영토 확장을 꾀하려는 국가의 욕망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1945년 8월 해외에서 패전을 맞이한 일본인들을 상대로 일본 정부는 어떠한 태도를 보였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현실이 허락하는 한 최대한 `그곳에서 버티라는 것`이었다.
55쪽
일본 정부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외교적 협상을 통해 해외 식민지를 유지할 수도 있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그 같은 태도를 취했던 것이다.
73쪽
각 도의 세화회 가운데 특히 경성일본인세화회는 총독부와 조선 주둔군이 무력화된 이후 남북한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원호를 실질적으로 담당한 일종의 총본부였다.
세화회는 조선에서 오래 생활했고 잔류를 희망하는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인본인들의 원호를 목적으로 만들어진 조직이었다. 그러나 점령군에 의해 잔류 가능성이 원천 봉쇄됨에 따라 총독부 관료의 추방과 조선군 송환에 따른 행정, 치안 공백을 메우고 점령군의 송환정책에 협조함으로써 일본인의 안전한 귀환을 도모하기 위한 조직으로 바뀌어갔다.
75쪽
원죄가 부른 보복
78쪽
결국 패전 후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는 구체적 귀환 계획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채 조선군의 물리력을 적절히 활용하며 치안을 확보한 뒤, 통화 증발과 수송을 통해 모라토리움 위기에서 벗어나고 그 돈으로 점령군에게 로비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유리한 귀환 환경을 창출하고자 했다. 그리고 형식적이나마 조선근로동원원호회를 남겨둔 것은 한반도의 일본인과 해외 조선인들이 상호 귀환 국면에서 갈등 관계에 놓일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상과 같은 조치를 통해 조선총독부는 조선에서 패전에 따른 위기를 그런대로 넘길 수 있었으나, 그 과정에서 일으킨 각종 사건과 의혹은 조선인에게 또 다른 상처를 남겼다.
98쪽
해방 후 해외에 있던 조선인들이 돌아오자 주택 문제가 붉어졌고 그러한 불만이 조선거주 일본인들에게 귀국하라는 압박으로 표출되었다.
105쪽
러취Lerch 군정장관은 1946년 1월 23일부로 일본인의 총철퇴력을 내렸다. 이로써 조선은 더 이상 일본인들이 살 수 있는 땅이 아님을 명확히 했다.
108쪽
1945년 8월 말 마을의 젊은 처자들이 황급히 고량 밭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미처 집을 빠져나가지 못한 사람들은 다락과 지하실로 들어가 문을 굳게 걸어 잠갔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여자들은 모두 머리를 잘랐다. `머리를 빡빡 깎은 여성은 건드리지 않는다`라는 소문에 모두 까까머리를 한 것이다. 이것은 평안남도 강계에 소련군이 처음 진주하던 날 벌어진 마을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요코 이야기에서 이러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110쪽
북한 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미군과 달리 모든 것을 현지에서 조달했다. 이에 따라 불필요한 대민 접촉이 잦아졌고, 그 과정에서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하기 일쑤였다.
: 서류상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은 해방군이었고 남한에 들어온 미군은 점령군이었지만 그 행태에 있어서 소련군이 이북의 해방을 위한 정의의 군대는 아니었나보다. 당연하게도. 오히려 현지조달이라는 미명하에 더욱 가옥한 지배 행태를 보였나보다.
114쪽
소련군 관계자는 상부로부터 일본인 송환에 관한 지시를 받은 적이 없지만, 일본인들을 그대로 돌려보내기에는 `매우 귀중한 노동력`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이것은 거류 일본인에 관한 미소 양국 점령군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에다.
미군의 일본인 송환 정책은 군사적 관점에서 한반도와 일본열도를 분리하는 데 중점을 두고 신분에 따라 순차적으로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계획 송환이고, 궁극적으로는 모두 돌려보냈다는 점에서 일괄 송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면 소련군의 일본인에 대한 정책은 일괄 `이동 금지` 후 필요에 따른 선별적 `활용과 방치`였다고 볼 수 있따.
190쪽
귀환자, 제대군인, 소개민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다.
192쪽
(일본) 정부는 1945년 9월 귀환항 바로 옆에 있는 규슈대학 의학부의 산부인과 의사를 소집해 만주, 북한 등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여성들을 대상으로 문진을 거쳐 강제 낙태 수술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처럼 해외에서 돌아온 여성을 맞이하는 `조국` 일본의 첫 인사는 바로 강제 낙태를 위한 채혈 검사로 대체되었따.
194쪽
귀환자 수용소는 해당 지역사회에서 어느새 소외된 `섬`으로 자리 잡고 잇었따.
218쪽
북한 지역에서 돌아간 여성들의 체험은 시기는 약간씩 다르지만 대개 소련군과의 전투 -> 피난 -> 소련군의 진주와 폭행, 약탈 -> 체류 기간중 사건(가족과의 이산, 사별, 강제 노역) -> 목숨을 건 탈출 -> 남한의 임시 수용소 -> 귀환이라는 일정한 형태로 구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