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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 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지음 / 돌베개 / 2004년 12월
평점 :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 서구의 인본주의 자체가 반자연적인 것이다. 생성을 무시한 것.
이 세계의 어떤 것도 중심이 될 수 없다. 순환할 뿐.
인간은 관계 속에 존재한다. 관계
시경, 서경, 초사
시경의 국풍부분, 이야기는 허구이나 노래는 진실이기 때문에. 그 진실이 여러 사람이 공감을 얻는 진실이었기에 여태까지 이어올 수 있었기에.
쥐야, 쥐야, 큰 쥐야. 내 보리 먹지 마라.
오랫동안 너를 섬겼건만 너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구나.
맹세코 너를 떠나 저 행복한 나라로 가리라.
착취가 없는 행복한 나라로. 이제 우리의 정의를 찾으리라.
여보시오 군자님들 공밥일랑 먹지 마소
나의 좁은 체험의 세계를 부단히 열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를 읽어라.
시경은 황하 유역의 북방문학이다. 북방 문학의 특징은 4언체의 보행리듬. 이는 노동이나 생활의 리듬으로 춤의 리듬인 6언체와 대조를 보인다.
사관에는 좌우 2사가 있는데 좌사는 왕의 말을, 우사는 왕의 행동을 기록하였다. 이것이 각각 상서와 춘추가 되었따.
서경.
먼저 노동의 어려움을 알고 그 다음에 편안함을 취해야 비로소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여 살아가는가를 알게 된다. (회사를 운영함도 같지 않겠나)
한 사람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어떤 생각을 하는가로 규정되는 것이지 무엇을 소비하느냐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백날 돈으로 스웩을 해봤자 말에, 삶에 고뇌가 묻어나지 않으면 어떤 울림도 주지 못한다.
현대인은 이제 떠돌이 유목민이지만 그 경험은 과거의 흉노나 몽고와는 달리 기록되고 무서운 속도로 전파된다. 유목의 경험이 쌓인다. 이는 즉 한 장소에서 반복적인 경험으로 고정적이고 규칙적인 깨달음을 바탕으로 했던 지식이 그 공간과 시간의 한계를 넘어 불규칙하고 전방위적으로 섞여나가지만 손실되지는 않는 창조적이고 그 흐름이 고정되지 않는 융화된 지식과 문화를 양산하게 되는 것.
77p.
여러분은 무엇이 변화할 때 사회가 변화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고 여러분은 미래가 어디로부터 다가온다고 생각합니까? 미래는 과거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미래는 외부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내부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변화와 미래가 외부로부터 온다는 의식이 바로 식민지 의식의 전형입니다. 권력이 외부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곳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오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나이에 해야 할 여행은 미천한 경험의 폭을 더 넓힐 수 있는, 더 넓은 더 다양한 더 고되거나 더 훌륭한 세상을 접해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더 힘들어야 하고 더 다양해야 하고 더 넓어야 하고 더 깊어야 한다. 나의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장소의 일상으로 들어가야 한다. 여행을 가서 완벽하게 일상에서 유리된다면 그건 여행이 아니라 관람이고 경험의 폭을 넓혀주지 못할 뿐 아니라 그 곳이 제공하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어떠한 것도 느끼지도 꺠닫지도 못하고 편견으로만 가득차게 될 것. 일상으로 들어가자. 자연과 환경과 문화와 문명의 다른 곳의 전혀 다른, 그러나 결국 같은 일상으로 들어가자. 나에게서 벗어나 드디어 나를 발견하고 일상에서 벗어나 일상을 알게 되는 것.>
<멀리 보면 지금 내가 잘못 내딛은 한 두 걸음은 아무것도 아니다>
주역
88p.
나는 점치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점치는 사람은 기본적으로 약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적어도 스스로를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물론 이러한 사람을 의지가 약한 사람이라고 부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부류의 의기방자한 사람에 비하면 훨씬 좋은 사람이지요. ‘나 자신을 아는 사람’은 못되더라도 자신의 한계를 자각하고 있는 겸손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요. 사실은 강한 사람인지도 모르지만 스스로 약한 사람으로 느끼는 사람임에 틀립없습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종교나 점이나 미신 같은 것에 신뢰를 보이는 행동, 사람들을 속으로 가끔은 겉으로 멸시하는 행동을 보인다. 그러나 사실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사실은 진실이라는 그림의 한 조각일 뿐인 것을. 더 들어가서 보면 그 하나 하나의 행동, 한 명 한 명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고 사연이 있고 힘듦과 고통, 위안과 치유가 있을텐데.
싸잡아서 비판하는 것은 편하지만 옳지는 못하다. 귀찮아지자. 하나 하나를 가려자. 아니. 하나 하나를 가려내어 이해하자. 절대악은 없고 절대선도 없으니.
인문학에 대한 수요. 모든 것을 내던지고 오로지 발전에 목매어 전 국민이 생각하지 못하고 일만 하며 살았는데 발전은 한계에 부딪혔고 내가 없는, 내 삶의 목표가 없는 삶을 돌아보게 된다. 발전이라는 목표가 사라지자 다른 목표를 찾는데 하 방향으로는 그 목표가 돈이 되고 한쪽으로는 인간다운 삶을 찾고자 하는 것. 돈이라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혹은 살아가는 외형에 있어서 나를 규정하지만 그 속은 허해진다. 그 허함을 채우는 것. 인문학.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 없는 질문을 탐구하는 것.
철학을 한다고 해서(생각을 한다고 해서) 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답이 없는 이유는 알게 된다던 교수님의 말처럼, 정말 어떤 답이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과정을 거치지 않고는 이 깨름칙한 기분을 없앨 수는 없을 것.
전망이 불확실할수록 불변의 진리에 대하 탐구가 절실해지는 것. 우리가 지금 그렇지 않은가.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 것은 지식자랑을 하기 위함이 아니라 역사관을 성립하기 위한 것. 역사관은 세계관과 인간관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역사를 공부하여, 올바른 역사를 공부하여 기회주의적인 행태를 배척하고 공감의 범위가 넓고 타자의 아픔을 내재화 할 수 있는 세계관과 인간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행복을 투쟁적으로 성취하고자 하고 좀 더 나은 삶을 추구하는 것이 욕심이 아님이었으면 좋겠다.
직접 경험처럼 강력하게 내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책이 아무런 역할을 못하는 것은 아닐 것.
주역 부분 읽다 말았음. 어려워..’
논어
증자왈, 나는 매일 세 가지를 반성한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일하되 그것이 진심이었는가를 반성하고, 벗과 사귐에 있어서 불신 받을 일이 있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고, 전하기만 하고 행하지 않고 있지는 않은가 반성한다.
전문성을 기르지 말라. 한 분야에만 전문성을 갖는 것은 노예에게 요구되는 것이었다.
집단적 타락 증후군, 모든 사람이 범죄자라는 사회적 분위기. 적발된 사람만 재수 없는 사람이 되는 상황. 다른 하나는 유명인의 부정이나 추락에 대하여 안타까워하는 마음 대신에 고소함을 느끼는 단계. 타인의 부정과 추락에 대하여, 그것도 사회 유명인의 그것에 대하여 오히려 쾌감을 느끼는 단계가 집단적 타락 증후군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부정이 오히려 자신의 부정을 합리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는 것.
사회의 본질은 부끄러움이며 부끄러움은 인간관계의 지속성에서 온다. 일회적인 인간관계에서는 그 다음을 고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끄러워 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사회란 지속적인 인간관계가 존재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사회성 자체가 붕괴된 상태라고 해야 하는 것.
-수 천 전 전의 책에서 비판하는 사회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게 느껴질 때, 인간 사회의 타락성의 정도는 일정하게 유지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기술의 발전에 따라 그 타락성이 더욱 심각하게 구현될 수는 있겠지만
착하고 나쁨과 같은 인간성, 도덕은 인간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 아니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능력적 고하 역시 인간관계에 속해있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가지지 못한다. 결국은 관계.
미의 상품화. 아름다움은 항상 희소한 것이기 때문에 가치를 가지게 된다. 그건 수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한가지일 것. 미의 상품화도 수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같지 않을까.
정치란 경제, 군사 그리고 백성들의 신뢰이다. 그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군사를 버리고 그 나머지 둘 중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경제를 버려야 한다. 예부터 백성이 죽는 일을 겪지 않은 나라가 없었지만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면 나라가 설 수 없는 것이다.
무신불립. 無信不立
정치의 목표는 정권 창출을 위한 것이 아니다. 정치란 그 사회의 잠재적 역량을 극대화하는 것. 인간적 잠재력의 극대화는 인간성의 최대한의 실현이다. 정치란 신뢰이며 신뢰를 중심으로 한 역량의 결집이다.
한 집단은 그들을 이끄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가 신뢰라는 고리를 통해 단단히 엮여 있어야 한다. 신뢰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건 희생에서 오는 것 아닐까. 내가 나의 잇속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를 위해 희생을 할 수 있는 사이라는 것, 자기의 이익보다는 공동의 가치를 더 우선시 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 그를 위해서 리더는 희생해야 하고 자기보다는 공동체의 가치를 우선시해야 할 것. 다시금 되새기지만 윗사람, 리더, 선임, 상사, 사장, 뭐가 되었는 어떤 집단에서 위에 있는 사람은 그 팀의 누구보다 희생해야 한다. 리더의 희생을 뿌려야 팀원들의 헌신이 자라는 것. 단, 리더의 희생에 헌신이 아닌 나태로 반응한다면 그건 팀원의 조정이 필요할 수도.
인문학이 중요한 이유는. 지식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은 사람을 아는 것, 즉 지인이다. 때문에 지인을 실현시킬 수 있는 인문학이야 말로 지식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지식인 것. ?
내가 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이상. 그 사람이 나에게 마음을 열고 나를 대하지 않는 이상 한 사람에 대해서 이해할 수는 없다. 애정 없는 타자와 관계없는 대상에 대하여 알 수 있다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자왈. 부귀는 사람들이 바라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이 아니면 그것을 누리지 않으며, 빈천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지만 정당한 방법이 아니면 그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는다.
경험이라는 대지 위에 발을 딛고 만들어내는 견고한 주관적 확신은 스스로의 경험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한 믿음이 확고할 수 밖에 없지만 맹신하지는 말 것. 그것은 단지 주관적인 편견일 수 있다.
이론과 현실의 조화는 어떻게 이뤄야 하는 것일까. 단지 물리적으로 시간을 쪼개어 반은 이론 공부에 반은 현실 체험에 배분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 그렇게 간단한 것이라면 그 많은 사람들이 오랜 시간 고민하고 답하지 못하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텐데. 또한 전문가가 될 것인가 아니면 제너럴리스트 음, 박학다식하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도 아마 답이 쉽지 않은 문제일 것이다. 즉 결국 모든 것에 있어서 그 중심점을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 만큼 어려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 지금의 내 생각은 어디에 두어야 한다는 답은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딱 그 가운데 어딘가에 방점을 찍고 그 곳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 아니라. 그냥 내가 마음이 가는 곳, 지금 내가 있는 곳에 방점을 두고 열심히 하되 부족한 점이 느껴진다면 그 방점을 옆으로 조금씩 옮겨가면 나 스스로의 균형점이 만들어지지 않을까.
어리석음이 앎의 최고 형태이다.
진정한 지란 무지를 깨달을 때 진정한 지가 된다는 사실. 자기의 지가 어느 수준에 있는 것인가를 아는 지가 참된 지라는 거.
소크라테스의 말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 듯 하다.
분명히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지 못하다. 그 사람도 나도 아름다움과 선한 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도, 그 사람은 자기가 모른다는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나의 경우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따. 대수롭지 않은 점이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보다는 지헤로운 것이 아닐까?
세상을 나에게 맞추는 사람과 나를 세상에 맞추는 사람. 무엇이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을 나에게 맞추려는 사람들의 우직한 노력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변해가는 것이라고.
모든 사람은 모든 것을 알고 있다.
과거의 사상을 비판할 경우 우리가 가장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는 것이 바로 비판의 시제이다.
그러나,! 반대로 그러한 고전(종교도 포함)의 과거의 시제를 그대로 들어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것 역시 조심스러워야 하지 않겠나. 따라서 원리주의자들이나 경전주의자들의 행태는 오늘 날 이해받을 수 없는 것. 원전의 자구 하나 하나는 당시의 상황을 반영한 것일 테니.
모든 사상은 역사의 산물이다. 내가 하고 있는 생각 역시 역사의 산물인 동시에 내가 살고 있는, 내가 접하는 것에 의해 한계지어질뿐이다. 근대 이전의 사람들에게 노예와 귀족의 구분이 당연하였으나 그것이 개혁되어 인권의 개념이 생겨나고 평등의 사상이 퍼진 것처럼 오늘날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차별적 인식 역시 후에는 구태로 여겨질 것이고 미개한 것으로 여겨질 것. 동물과 자연에 대한 인식이나 성적 차이, 우주에 대한 이해 등등 내가 가지고 생각은 결국 내가 살고 있는 시공간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