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위병들의 `부르주아`나 십자군의 `이교도`들이나 우리나라의 `종북세력`이나 결국엔 다 그냥 같은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정의라고 믿는 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사람들을 적으로 돌리고는 싸잡아 이름 붙혀 마녀사냥 하는 것.
문화대혁명이나 전쟁이나 이익을 얻는 것은 지도자들이고 피를 흘리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백성들, 국민들이다.(북한이 도발해댈 때 전쟁 한 판 벌이자고 용감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볼 때면 저들은 자신들이 장기판의 왕이나 차 정도는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실은 다 졸일 뿐이고 의미 없이 죽어갈텐데)
《중국의 붉은 별》에 기록 된 마오쩌둥과 해방군의 모습과 《홍위병》에서 그려지는 마오쩌둥과 그의 홍위병들은 어찌 이리 다를 수 있는 걸까. 세계의 수많은 민족주의적인 독립운동가들은 독립 후, 해방 후, 광복 후 어찌 그리 다들 미쳐 날뛰게 되었을까. 자신의 희생을 보상받고 싶었던 걸까. 미국의 조종 때문일까.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김구 선생이 대통령이 되었으면 그 역시 다른 수 많은 제국주의 피지배국가들의 독립운동가 출신 독재자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히려 안두희에게 암살을 당함으로써 역사의 영웅으로 남을 수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씁쓸한 마음이 들기도 하고.(역사에서는 죽음의 시기와 방법이 한 개인을 영웅으로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 케네디와 박정희가 그렇게 죽지 않았다면 지금과 같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을까)
수 백, 수 천 만의 홍위병 중 한명인 저자는 주위 사람들과 자신의 가족에게 닥쳐온 불행으로 당시 상황을 한 발짝 뒤에서 관조하며 바라볼 수 있었고 이렇게 책을 통해 당시 상황을 그려내었지만 그 밖에 더 많은 수의 홍위병들은 아직도 그 시대를 꿈꾸거나 위대한 지도자를 찬양하고 있을 것이다. 베이징 한 가운데 신처럼 모셔져 있는 모택동은 그러한 인민들의 경험과 깨지지 않은 망상, 현재 체제를 유지하려는 현 지도세력의 의도가 합쳐져 아직도 뭍히지 못하고 그렇게 전시되고 추앙받고 있는 듯 하다.
영화《킹덤 오브 헤븐》에서 예루살렘을 탈환한 살라딘에게 주인공은 예루살렘이 당신에게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 도대체 예루살렘이라는 도시가 무슨 의미이기에 그 무수한 무의미한 희생을 감수하는 것이냐는 거다. 대답은 ` nothing, everything`이란다. 실체보다는 상징이 중요하고 사람들은 그 상징을 지킴으로써 혹은 탈취하려는 목표를 가짐으로써 쉽게 통치되고 통치되는 사람들 역시 무의식적으로는 그러한 목표하는 허상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그들에게는 모든 것인. 홍위병들이 붉은 혁명을 외치는 장면에서 왜 이 장면이 떠오른 걸까.아마 그들에게 전부였던 그것이 끝나는 순간 그것이 옳은 것이었든 아니었든 그들의 상실감은 참담했을 것이다.
p. 139 `이제 귀뚜라미 아저씨의 말이나 행동은 광대짓으로만 보였다.`
절대적인 신념에 휩싸여 진실을 바라보지 못하고 내달리는 사람은 그 옆에 비켜서 있는 사람에게는 광대로 보일 뿐인가보다.
세상 모두가 광대짓을 하고 있으면 그건 뭔가 잘못되고 있는 거지만 나 혼자 광대짓을 하고 있다면 그건 인생을 잘 살아내고 있다는 증거일까. 모두가 술에 취해 있을 때 나 혼자 깨어 있으면 어색한 건 어쩔 수 없고 남들 모두 깨어 있을 때 나 혼자 취해있다면 비웃음 거리가 될 것. 내가 지금 술에 취해 광대짓을 하는 것인지 모두가 광대짓에 취해 있는데 나 혼자 깨어있는 것인지. 답은 시간이 지나봐야 아는 것이겠지. 답이 무엇이든지간에, 내가 취해 있는 것이든 세상 모두가 광대짓을 하고 있는 것이든 세상이 그런 게 아니었단 걸 깨달았다고 해서 그 광대짓을 멈출 수 있을까.
책을 읽고 있자니 《아홉살 인생》이 생각난다. 두 책 모두 한 아이가 성장해가는 이야기이기 때문일까. 모르겠다.
책을 읽으면서, 책을 읽고나서 떠오르는 생각을 두서 없이 그대로 북플에 옮겨놓다보니 글이 모자이크 같아지는 듯 하다. 생각이 떠오르는 그때 그때 쓰다보니 독서 속도는 너무나 더뎌진다.
209p에서 리링은 니체의 책과 군주론을 `모든 것을 다 다룬다고도 할 수 있지만 또 아무것도 다루지 않는다고도 할 수 있다`라고 한다. 정말이지 그렇다.
저자는 베이징에서 문화혁명을 하면서, 하방운동으로 산촌에 보내졌을 때도,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도, 대학에 가서도 계속해서 죽음을 접한다. 과연 그의 인생이 특별히 기구해서일까. 그가 코난도 아니고 그가 가는 곳에만 죽음이 따랐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게 당시의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이 겪던 일상의 모습일 것이다. 현재의 북한도 그러하겠지. 정치와 권력이 종교나 무슨 무슨 주의와 결합하는 순간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간다. 그건 비단 중국이나 북한만 그러한 것은 아닐테다. 과거 카톨릭이 그랬고 한국전쟁 당시 남북한이 그랬고 현재의 중동이 그러하고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현재 아내가 있는 사람이 자기가 좋아했던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은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것 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으리라.
(책을 읽으면서 적다 보니 션판과 리링이 결혼하고 사별했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역사적 사건으로써 공부했던 중국의 붉은 시대를 한 개인의 이야기를 통해 더 생생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다. 여전히 위대한 지도자나 공산당 정부에 대한 비판이 금지되어 있는 중국이지만 더 확장되는 개방과 함께 그만큼의 자유와 민주주의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가 사회 곳곳에 스며들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급속한 성장이 더뎌지는 순간 스며들어온 자유와 민주화에 대한 열기는 폭발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또 무수한 인민(국민, 시민)의 피 위에 자유와 민주주의가 세워지거나 베이징 천안문 광장에 누워있는 위대한 지도자를 위시한 새로운 세력이 다시 한 번 나라의 고삐를 쥐어잡거나 하겠지. 언제까지 역사가 진보하기 위해 무고한 사람들이 피를 흘려야할까.
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 `당`을 `신`이나 `주님`으로 바꿔 읽어보았는데 전혀 문장이 어색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체제의 폭력에 저항하며 자신이 의도하는 바를 관철시키려고 하는 모습이(그것이 아주 당연한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고 슬프기까지 했다면 탕구에서 벗어나 톈진으로 와 미국으로 가는 과정은 대단하고 멋있었다.
삶을 싸워가며 살아내는, 결국에는 승리한 션판의 인생. 대견하고 멋지다.
나는 안락한 불행 속에서 무엇을 탓하고 있는 건가.
오랜만에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고전이 아닌 책을 읽었다.
그가 그토록 탈출하고 싶었던 중국이 지금은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 중심으로 돌아가는 국가가 되었으니, 저자는 그런 중국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자신이 치열하게 싸워왔던 시간들이 허망할까 아니면 드디어(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제 모습을 찾아가는 나라가 대견할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