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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고래
차재이 지음 / 차콜(도서출판) / 2026년 8월
평점 :

차재이 작가의 첫 소설집 '범, 고래'를 펼쳐 들었을 때, 눈길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에세이스트 출신 작가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깊게 파고드는 문장들이었다. 섬세하게 결을 다듬은 문장들은 인물들의 가슴 깊은 상처와 기억을 덤덤하면서도 묵직하게 전달해 주었다.
이 소설집에는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흔든 것은 단연 표제작인 '범, 고래'였다. 이 작품은 격변하는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남동생 용국과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상처를 안은 채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옥순의 이야기와, 그녀의 손녀인 은수의 시선이 교차하며 차분하게 진행된다. 세대를 건너뛰어 교차하는 두 여성의 서사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기억과 상처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엮여 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작품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고 또 가슴이 아팠던 대목은 단연 전쟁의 폭력성이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머니의 죽음 장면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옥순이 어머니를 잃게 되는 계기는 놀랍게도 북한군의 공격이 아니었다.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버린 국군이 몰고 나온 탱크에 의해 어머니의 목숨이 빼앗긴 것이다. 더없이 잔인하고 황망한 죽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명백한 가해나 범죄라 부르지 않았다. 주변의 모두가 그 참사를 그저 어쩔 수 없었던 '사고'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거대한 역사적 비극과 시대적 흐름 앞에서 한 개인의 삶이, 그리고 한 가족의 존엄이 얼마나 무력하게 짓밟힐 수 있는가를 이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싶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책임과 죄를 물을 수 없는 비극, 그것을 그저 일어날 법한 사고로 치부해 버리는 냉혹함은 시대를 초월해 현대의 우리 삶에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또한 사고를 낸 젊은 군인을 조금은 감싸주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우리 역시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외되고 상처받을 수 있는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소개하자면.
"이번에 가거든, 동행과 동백섬에 들러라. 바다가 예뻐."
가장 먼저 은수와 옥순의 시대가 교차하던 문장이었던 이 한마디가 기억에 남았고.
"진주는 조개의 상처에서 나온대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름답지요?"
이 문장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조그마한 위로로 다가왔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옥순이 평생 안고 살아온 그 기억의 파편들은 손녀 은수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며, 소외된 이들의 삶을 보이지 않게 연결한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진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끌어안고 견뎌내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해 낸다. 거친 파도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낸 여성들의 강인함, 그리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기억의 연대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