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지도
우케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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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우케쓰 작가의 네번째 작품인 이상한 지도로 올해 가장 기대하고 있던 작품이기도 하다.

우케쓰 작가의 이상한 집 1,2편과 이상한 그림을 모두 너무 재미있게 읽었고 소장하고 있는 입장에서 이제 우케쓰 작가는 믿고 보는 작가가 된 지 오래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며 우케쓰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평가를 보면 작품이 출간 될 수록 재미가 우상향 곡선을 그린다는 말이 많다.

어느정도는 공감하지만 사실 나는 첫번째 작품인 이상한 집 1부터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다. 첫 작품답게 부족한 점도 있지만 직접 도면을 보며 추리를 할 수 있는 체험형 미스터리소설 작품이란 면에서 그 재미만큼은 이미 완성형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직접 체험에서 오는 재미는 이번 작품 '이상한 지도'에서도 여전하다. 오히려 한 층 업그레이드 된 모습을 보여준다.

유투버 출신의 작가답게 우케쓰 작가는 이야기의 시작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듯 하다. 시간 상 작품의 중반부에나 등장할 지하철 사고를 소설의 초반부에 프롤로그처럼 등장시켜 단숨에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게 한다.

좁디 좁은, 피할 틈 하나 없는 오래된 터널 속에서 한 남자가 지하철을 피해 달아나는 모습을 무척이나 생생하게 표현해 공포감을 극대화시켰고 터널 내부의 모습을 표현한 삽화가 이를 한 층 더 실감나게 만든다.

이제는 우케쓰월드의 팬이라면 익숙하다 못해 친근할 구리하라가 등장해 자신의 외할머니의 죽음과 관련된 진실을 말 그대로 '이상한 지도' 한 장에 의지해 쫓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미스터리적인 재미를 뽐내는 요소는 그 지도 뿐이 아니다.

전작인 이상한 집에서는 설계도와 도면을, 이상한 그림에서는 각 단편에 어울리는 그림으로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면 이번 작품 '이상한 지도'에서는 단순한 지도만으로 승부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소설의 매력포인트다.

이제는 우케쓰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도면부터 시작해 터널의 그림과 소설 속 상황을 표현한 장면까지, 지도 외에도 다양한 삽화가 첨부되어 소설을 읽으면서도 영화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시각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었다.

가끔 추리소설을 많이 읽다보면 뇌가 피로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독자를 속이기 위한 작가의 온갖 트릭을 의식하며, 저 사람도 범인같고 저 문장도 의심스럽고를 반복하며 책을 읽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케쓰의 작품들은 다르다. 이번 신작 이상한 지도는 읽기 전부터 두근거리는 마음이 먼저 다가온다.

읽는 동안 막힘 없이 술술 읽힌다는 것이 어떤 건지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다.

단순한 미스터리소설을 넘어 이제는 감동과 여운까지 담아낸 우케쓰 작가의 차기작을 기대하며,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분들이라면 호불호 없이 즐길 수 있을 '이상한 지도'를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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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인형 놀이
마이크 오머 지음, 공보경 옮김 / 북로드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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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오머의 신작 '침묵의 인형 놀이'는 실종되었던 아이 캐시가 돌아오며 시작되는 기묘한 사건과 그 뒤에 숨겨진 인간 심리의 어두운 단면을 세밀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작품은 인디애나주의 작은 마을 베설빌에서 15개월 동안이나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아홉 살 소녀 캐시 스톤이 찢어진 잠옷 차림과 상처투성이 몸으로 살아 돌아오는 기적적인 순간으로 시작된다.

소설 극초반부, 캐시의 엄마 클레어가 딸을 되찾는 장면부터 느껴지는 몰입감은 단숨에 독자를 작가가 설계한 긴장감 속으로 끌어당긴다. 자식을 잃은 슬픔 속에서 화장실을 가는 일상적인 행위마저 하나하나 강하게 의식해야 할 수 있는, 말 그대로 하루하루를 겨우 버텨내던 클레어의 절망을 표현한 후, 평소처럼 무심하게 받든 전화기 너머로 "스톤 씨, 따님을 찾았습니다"라는 대사가 흐르는 순간의 극적인 연출은 이야기의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이 작품이 지닌 가장 큰 장점은 연쇄 살인범을 추적하는 전형적인 형사 수사물의 범주에 그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소설은 유괴되었던 아이가 돌아왔다고 해서 모든 것이 해결되는 단순한 해피엔딩을 거부한다. 살아 돌아왔지만 깊은 트라우마로 인해 말을 잃어버린 아이, 그리고 그런 아이를 치료하고 보호해야 하는 부모에게 남겨진 무거운 과제, 나아가 사건을 계기로 송두리째 바뀌어 버린 어른들의 삶을 담담하고 섬세하게 파헤친다. 아동 심리 치료사 로빈 하트가 그림과 모래 상자, 인형의 집을 이용해 치유의 시도를 이어가는 과정은 사건의 단서를 찾는 수사인 동시에 한 가족이 일상을 회복해가는 묵직한 드라마가 된다.

이야기의 긴장감을 유지하는 연출 방식 역시 매우 절묘하다. 소설 초반부터 극이 끝날 때까지 중간 중간 캐시를 유괴했던 진범의 시점에서 독백이 이어지는데, 이 독백 연출은 범인의 정체를 명확히 보여주는 대신 독자로 하여금 범인이 누구일지 계속해서 파헤치고 싶게 만드는 강렬한 추리욕구를 불러 일으킨다. 더욱이 범인은 안그래도 작은 마을 베설빌에서 로빈과 캐시를 끊임없이 지켜보는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이 숨막히는 장면이 긴장감을 한층 더 극대화한다.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평범한 이웃과 주변인 모두를 범인으로 의심해야 하는 데서 오는 심리적 압박감은 미스터리 장르 특유의 재미를 극대화한다.

또한 캐시가 실종되었던 당일의 과거와 사건을 파헤치는 현재를 끊임없이 교차하는 교차 구성은 자칫 단조로워질 수 있는 전개에 빠른 속도감과 입체적인 재미를 더한다. 장난감 인형의 행동을 통해 기억을 표현하는 아이의 기묘한 놀이와 실제 일어나는 살인 사건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독자는 자연스럽게 형사들과 함께 사건의 비밀을 풀어가게 된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 또한 깊은 여운을 남긴다. 소설은 잘못된 부모의 편협하고 비틀린 사랑이 한 사람의 인생, 나아가 주변 전체의 삶을 어떻게 처참하게 망가뜨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이를 보호한다는 명목 혹은 왜곡된 집착이 만들어낸 비극은 작품 내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마지막에 이르러 터져 나오는 숨겨진 한 방의 반전은 그동안 쌓아 올린 복선들과 절묘하게 연결되며 미스터리 장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선사한다. '침묵의 인형 놀이'는 단순한 형사 추리 소설을 넘어, 상처 입은 인간의 회복까지 날카롭게 포착해 낸 작품으로 스릴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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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은 자의 독 (애장판)
우사미 마코토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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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약 2년 전, 도서관에서 우연히 접하게 되어 책장을 덮은 후에도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묵직한 여운을 남겼던 우사미 마코토의 '어리석은 자의 독'을 이번 애장판 출간을 계기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나는 블루홀식스 출판사에서 나온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를 통해 우사미 마코토라는 작가를 처음 접했는데, 평소 미스터리 장르의 소설을 즐겨 읽으면서도 나이가 많은 기성세대 작가들의 작품보다는 80~90년대생 젊은 신예 작가들의 소설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감각적이고 전개가 빨라 속도감 있게 읽히며 무엇보다 즉각적인 독서의 보상으로 도파민을 줄 수 있는 소설에 더 익숙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사미 마코토의 작품들을 접하며 그러한 내 취향이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아이는 무서운 꿈을 꾼다'와 '어리석은 자의 독'을 포함해 총 다섯 편의 작품을 읽으며 느낀 점은 우사미 마코토 작가의 글은 요즘 젊은 신예 작가들의 작품처럼 단순히 가볍게 읽히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문장 하나하나에 실린 단단한 무게감 덕분에 읽으면 읽을수록 작품 속으로 빠져드는 몰입감이 뛰어났다.


이번에 다시 펼친 '어리석은 자의 독' 역시 마찬가지였다. 2015년과 1985년을 교차하며 과거의 사건이 현재를 어떻게 뒤흔드는지 담담하게 서술해 나가는데, 시대상에 대해 생생하면서도 참혹한 묘사가 단순한 미스터리 소설을 넘어 한 편의 깊이 있는 순문학을 읽는 듯한 기분마저 느끼게 된다.


소설 '어리석은 자의 독'은 1985년 직업 소개소의 실수로 우연히 만나게 된 생일이 같은 두 여자, 요코와 기미가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친구가 되며 시작한다. 그리고 2015년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 노부인의 독백과 교차하며 소설은 1965년 폐광마을에서 벌어지는 비참한 참극까지 거슬러올라가며 죄와 죄책감 그리고 업보의 순환을 장엄하게 그려나간다.


소설을 읽다 보면 작품의 초중반부에서 이 소설의 반전에 대해 조금은 눈치챌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결점이 아니라, 반전이라는 일회성 장치에 의존하지 않고도 서사를 끌고 갈 수 있다는 작가의 강력한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작가는 트릭 외에도 이야기 자체의 힘과 등장인물들의 세밀한 내면 묘사로 작품 전체를 정교하게 이끌어간다. 그렇다고 결코 반전이나 트릭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다. 일회성 반전을 넘어 여러 이야기들이 얽히며 드러나는 진상은 충격적이고 미스터리 장르의 재미를 제대로 충족시켜 준다.


무엇보다 시대적 굴레 속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내려야 했던 인물들, 그리고 자신이 저지른 행동에 대한 책임감과 죄책감을 평생 안고 살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씁쓸함과 가슴 아픈 응원의 감정을 동시에 불러일으킨다.


평범한 미스터리 소설이 자극적인 반전으로 순간적인 도파민을 선사한다면, '어리석은 자의 독'은 그에 더해 씁쓸하지만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묵직한 여운까지 전한다. 단순한 사건 해결을 넘어 인간 내면에 대한 정교한 탐구와 서사의 깊이를 느끼고 싶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멋진 양장본 애장판은 그냥 서재에 꼽아두는 것 만으로도 내 미스터리소설 책장이 훨씬 고급스럽게 느껴지게 하는 효과까지 있다는 점을 추가로 자랑하고 싶다.


"가슴속에 독을 품으십시오. 어중간한 현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야말로 그 독을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자의 독입니다."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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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X 밀실의 죽음 한국추리문학선 25
황정은 지음 / 책과나무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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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은 책은 배가본드X 밀실의 죽음으로 내게는 살인오마카세 이후 두번째로 접하게되는 황정은 작가의 신작 추리소설이다.

배가본드X 밀실의 죽음은 제목부터 궁금증을 유발하는데, 여기서 배가본드X는 이 작품의 주요 소재로 등장하는 차량의 이름이다. 배가본드라는 단어 자체가 라틴어 헤매다에서 유래된 영어단어로 방랑자라는 뜻을 가졌다고 하는데 그 이름에 걸맞게 작품속 배가본드X는 함께 곳곳을 누비며 차박을 하기 좋은 차로 표현된다.

그리고 이 차를 타고 차박을 즐기던 사람들이 무작위로 차량 내부에서 질식사로 사망하게 되며 이 작품의 제목 뒷부분 '밀실의 죽음'이 이뤄지며 이야기는 전개된다.

본격적인 사건은 57세 물리학과 교수의 스무살 연하의 외국인 아내가 죽으며 시작된다. 현실의 펠리세이드 이상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는 배가본드X에서 벌어진 의문의 사망에 형사들도 사건을 쫓지만 배가본드X의 개발자인 박석환 역시 경찰의 자문을 맡으며 차량의 흥행가도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 위해 사건에 뛰어들게 된다.

그리고 연달아 배가본드X에서 차박중이던 사람들이 사망하며 이제 이 사건은 누군가의 살인일지 아니면 배가본드X 차량의 공조장치 결함에 의한 사고일지가 중요한 관건으로 자리잡는다.

무엇보다 황정은 작가님의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은 이전 작 살인오마카세에서도 느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을 무척 디테일하게 표현한다는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번 작품 역시 3건의 사건의 피해자와 용의자들의 일상을 과거부터 무척 세밀하게 표현해 몰입을 돕는다.

언뜻 보기에는 화목해보이는 부부처럼 보일 수 있지만 결국은 그 당사자들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끈적끈적한 살의가 존재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는 또 하나의 중요 요소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이 작품을 읽게 되면 나와 같이 느낄 수 있겠지만 세번째 장 '모두 동일한 차종에서'에 등장하는 서민호파트는 추리장르를 넘어 호러 스릴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은 추리소설로서 추리소설의 팬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다. 결국 이 작품은 읽고 있으면 이 책의 결말을, 그러니까 결국 반전을 계속해서 의심하고 추리하게 된다.

본격추리소설에도 종종 주요 트릭으로 등장하는 요소를 비롯해 살인의 동기와 의심스러운 용의자까지, 책을 읽는 동안 계속해서 결국은 누가 범인일까를 의식하면서 읽게 된다는 점이 이 작품이 추리소설로 제 기능을 잘 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싶다.

이제는 믿고 보는 한국 추리소설 작가로 내게는 자리매김한 황정은 작가의 배가본드X 밀실의 죽음을 읽어보시길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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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 고래
차재이 지음 / 차콜(도서출판)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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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재이 작가의 첫 소설집 '범, 고래'를 펼쳐 들었을 때, 눈길을 먼저 사로잡은 것은 에세이스트 출신 작가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깊게 파고드는 문장들이었다. 섬세하게 결을 다듬은 문장들은 인물들의 가슴 깊은 상처와 기억을 덤덤하면서도 묵직하게 전달해 주었다.

이 소설집에는 두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나의 마음을 가장 강렬하게 흔든 것은 단연 표제작인 '범, 고래'였다. 이 작품은 격변하는 현대사의 흐름 속에서 남동생 용국과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상처를 안은 채 노년의 삶을 살아가는 옥순의 이야기와, 그녀의 손녀인 은수의 시선이 교차하며 차분하게 진행된다. 세대를 건너뛰어 교차하는 두 여성의 서사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기억과 상처라는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엮여 있음을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작품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고 또 가슴이 아팠던 대목은 단연 전쟁의 폭력성이 가장 비극적인 형태로 드러나는 어머니의 죽음 장면이었다. 한국전쟁이라는 참혹한 소용돌이 속에서 옥순이 어머니를 잃게 되는 계기는 놀랍게도 북한군의 공격이 아니었다. 전쟁의 공포와 트라우마로 인해 미쳐버린 국군이 몰고 나온 탱크에 의해 어머니의 목숨이 빼앗긴 것이다. 더없이 잔인하고 황망한 죽음이었지만, 그 누구도 이를 명백한 가해나 범죄라 부르지 않았다. 주변의 모두가 그 참사를 그저 어쩔 수 없었던 '사고'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거대한 역사적 비극과 시대적 흐름 앞에서 한 개인의 삶이, 그리고 한 가족의 존엄이 얼마나 무력하게 짓밟힐 수 있는가를 이보다 명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있을까 싶었다. 분명히 존재하지만 누구에게도 책임과 죄를 물을 수 없는 비극, 그것을 그저 일어날 법한 사고로 치부해 버리는 냉혹함은 시대를 초월해 현대의 우리 삶에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또한 사고를 낸 젊은 군인을 조금은 감싸주는 따뜻함도 느껴졌다.

우리 역시 거대한 사회적 시스템이나 역사의 소용돌이 앞에서는 언제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소외되고 상처받을 수 있는 무력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구절들을 소개하자면.

"이번에 가거든, 동행과 동백섬에 들러라. 바다가 예뻐."

가장 먼저 은수와 옥순의 시대가 교차하던 문장이었던 이 한마디가 기억에 남았고.

"진주는 조개의 상처에서 나온대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아름답지요?"

이 문장은 알게 모르게 나에게 조그마한 위로로 다가왔다.

남겨진 사람의 기억은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는다. 옥순이 평생 안고 살아온 그 기억의 파편들은 손녀 은수의 삶으로 자연스럽게 흘러 들어가며, 소외된 이들의 삶을 보이지 않게 연결한다. 이 소설은 단순히 과거의 비극을 진혼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대의 가장자리에 내몰린 이들이 서로의 상처를 어떻게 끌어안고 견뎌내는지를 정밀하게 포착해 낸다. 거친 파도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지켜낸 여성들의 강인함, 그리고 그 밑바닥에 흐르는 서글프도록 아름다운 기억의 연대는 책을 덮은 후에도 오랫동안 깊은 여운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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