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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공약 - 표와 피의 잔혹사
김주석 지음 / 9월의햇살 / 2026년 5월
평점 :

선거철만 되면 온 동네에 현수막이 걸리고 후보들이 온갖 좋은 공약들을 쏟아낸다. 하지만 막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진짜 세상을 바꾸고 싶어서라기보다 어떻게든 표를 얻으려는 계산과 욕심이 가득해 보일 때가 많다. 김주석 작가의 소설 '살인 공약 - 표와 피의 잔혹사'는 바로 이런 겉과 속이 다른 선거판을 배경으로 한 엄청 묵직하고 리얼한 정치 스릴러다. 처음에 '살인 공약'이라는 제목을 봤을 때는 블랙코미디처럼 웃기면서도 뼈가 있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책을 펼쳐보니 진지하고 몰입감 넘치는 찐 정치 스릴러였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좋았던 건 영화를 보는 것처럼 대사 하나하나가 진짜 현실에서 사람들이 쓰는 말 같았다는 점이다. 특히 정치 성향이 아예 반대인 부부가 집에서 투닥거리며 싸우는 장면은 진짜 아는 사람들의 대화를 옆에서 몰래 엿듣는 것처럼 실감 났다. 게다가 유튜브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자주 보는 2찍, 매볼쇼, MZ, 엠코, 스윗영포티 같은 요즘 트렌디한 단어들이 살짝 변경되어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더 흥미진진했다. 이름만 살짝 바꿔서 나오지만 누구나 딱 보면 "아, 그 사람!" 하고 알아챌 수 있는 유명한 한국사 강사 출신 정치 유튜버도 등장하는데, 이런 현실적인 요소들 덕분에 소설이 아니라 지금 당장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졌다.
이야기는 피해자의 입안에서 '말의 물건'이 발견되는 소름 돋는 사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현직 도지사가 내걸었던 5대 공약에 맞춰서 연쇄 살인이 벌어지는데,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선거판 전체가 뒤집어진다. 그냥 범인만 잡는 뻔한 형사물이 아니라, 경찰 안에서 라인을 타고 줄타기를 하거나 권력자들끼리 뒤에서 머리싸움을 하는 과정까지 촘촘하게 그려져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양 팀장, 현장 감각은 좋은데 전형적인 TK 보수 꼴통이죠.
막내 서한솔은 온라인에 서식하는 이대남으로 번식을 포기한 여혐 종자입니다."
무엇보다 이 소설의 진짜 재미는 등장인물들이 다들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입체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 나오는 사람들은 단순하게 착한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뉘지 않는다. 보수나 진보, 혹은 이대남 같은 말 한마디로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인간들이다. 좌파든 우파든 저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와 명분이 다 있고, 반대편에서 서로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위선적인 모습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대비되어서 캐릭터 하나하나가 진짜 매력 있었다.
특히 주인공인 오승표 형사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 오 형사는 지금 돈이 없어서 빚더미에 앉아 있으면서도 제네시스 GV80이라는 좋은 차를 타고 다닌다. 이 카푸어 같은 모습이(물론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만) 처음에는 그냥 허세인 줄 알았는데, 읽다 보니 형사로서의 의무와 개인의 이득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오 형사의 상황을 딱 보여주는 상징 같아서 되게 신선했다.
오 형사는 수사를 하다가 만약 야당 후보가 당선되면 아버지가 남긴 땅값이 30억 원까지 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부터 엄청난 딜레마가 시작되는데, 범인을 잡아야 하는 형사가 자기 통장에 30억을 꽂기 위해 은근히 수사를 망치고 특정 후보가 떨어지기를 바라는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소름 돋았다. 돈 앞에서는 신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인간의 솔직한 밑바닥을 보는 것 같았다.
"범인 잡으세요. 오 형사님은 그게 어울려요."
하지만 욕망의 덫에 걸려 좌측 깜빡이를 켤지 우측 깜빡이를 켤지 치열하게 고민하던 오 형사는, 결국 온갖 유혹을 뿌리치고 돌고 돌아 형사로서 가야 할 바른길을 찾아간다. 그리고 진짜 사건 해결을 위해 뛰기 시작한다.
'살인 공약'은 전개도 엄청 빠르고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보여주는 웰메이드 소설이다. 선거철마다 "도대체 누굴 뽑아야 하지?" 하며 덜 썩은 사과를 골라야 하는 현실에 답답함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정말 누구나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평소 접하던 미스터리소설과는 결이 다른 정치스릴러만의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을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