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브라더의 자리를 빅데이터가 차지한다. 물샐틈없는, 삶의 총체적 기록은 투명사화를 완성한다. 그 사회는 디지털 파놉티콘인 셈이다. - P46

울리히 샤흐트는 일기에 이렇게 쓴다. "획일화를 뜻하는 새 단어: 투명성". - P53

반면에 생명은 수용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산출할 수 있죠. 바로 이것이 생명의 경이로움이에요. 생명은 그래요. 생명은 정신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기계와 다른 것이고요. 그런데 모든 것이 기계화될 때, 모든 것이 알고리즘의 이에 지배될 때, 생명은 위험에 처하죠. 레이 커즈와일을 비롯한 탈인본주의자들이 어렴풋이 꿈꾸는 기계화된 불멸의 인간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닐 거예요. 어쩌면 우리는 언젠가 기술의 도움으로 불멸의 도달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그 대가로 생명을 잃겠죠. 우리는 생명을 대가로 치르고 불멸에 도달하게 될 것입니다.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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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에 나는 이렇게 살았다 - 책을 통해. 나는 책 속 이야기에 스스로를 가두었고, 밤에는 등장인물들의 꿈을 꾸었으며, 내가 그들인 양 행세했다. 책은 현실의 매서운 칼날을 막아주는 나만의 갑옷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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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에서 언어를 배울 때 으레 우리는 좌우로 나란히 적은 영어 단어들과 외국어 단어들을 대응해 암기한다. 작은 이중어 사전들도한 단어를 다른 단어의 등가(等價, equivalence)로 제시한다.
이 두 가지 요인 모두 한 단어가 다른 단어를 ‘의미한다‘고, 가령 ‘courir‘가 ‘run‘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우리의 습관을 강화한다. 이것은 지극히 효과적인 어휘 학습법이지만, 오해를 낳는 편법에 의존한다는데 유의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courir‘의 의미가 아니다. 우리는 ‘courir‘의 번역어로 쓰닐 수 있는 한 단어를 배우는 것이지 결코 전부를 배우는게 아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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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우리는 자유의지로 발가벗는다. 10P

상호평가 사회에서는 친절도 상업화된다.••• 자본주의가 공산주의를 상품으로 판매하는 순간, 자본주의는 완성에 이른다. 상품으로서의 공산주의야말로 혁명의 종말이다. 14P - P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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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의 벽 -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철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
박신양.김동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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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의 책 이었다. 감히 평가하고자가 아니라 느낀바가 있어 몇 자 적고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역할‘이 아닌 ‘인간‘이 보였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하고, 그리고, 쓰고... 당나귀 처럼 끊임없이, 묵묵히 그 짐을 지어나가는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모두가 껍데기(가면)만을 쓰고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이미 끝없는 방황을 통해 세계를 깨고 나오는 이도 있다.

그림을 그린 이유는 그리움이었고, 그리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들 때문에 점점 스스로 설 자리를 양보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림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의 캐릭터가 실제의 나보다 훨씬 더 커져 가면서 사실상 사람들과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교류는 물론 대화조차거의 불가능해져 갔다. 점차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캐릭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한없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실제의 나보다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를 접하는 사람들이 월등히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나를 캐릭터로 대하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략•••
캐릭터나 이미지의 가면이 얼굴에 붙어 버린 경우는 조금 심각한 경우이며 가면인지 자신의 얼굴인지도 혼동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일어나기도 한다. •••중략•••
이런 상황은 연기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벌어진다. 과도하게 자신의 자리를 사회적으로 형성된 캐릭터에게 내주고 그 역할을 이유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흔해 보인다. 나도 가끔 가면의 도움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매우 겸연적고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중략•••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나’는 원래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하나가 아니며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여러 개이다. 또한 그 각각의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불변의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 여러개의 나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고 유동적으로 흘러가며 여럿의 ‘나’끼리,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시작이 매우 잘못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미 고정되고 원형적인 내가 어딘가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은 오해를 포함하고 있다. •••중략•••
누구나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 역할만으로도 우리는 힘겹다. 한마디로 역할 이외의 시간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지 못한다.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삶의 임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역할이 나 자신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캐릭터들은 절대로 나 자신일 수 없으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선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수행일 뿐이다. 나와 우리는 그렇게 여러 이유로 규정되고 한정 지어진다. 정해진 규정들을 넘어서 역할 이외에, 그리고 역할을 넘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노력을 왜 하는가에 대해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지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관심에 대한 애정의 지속과 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진심을 쏟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품은 열정이 곧 그 사람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역할을 넘어서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캐릭터라는 말은 뭔가 독특한 면을 가진 극 중 등장인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람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극에 등장하는 무언가 특징적인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그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정한 사람, 진정한 캐릭터가 되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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