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 라흐마니노프 : 피아노 협주곡 2번 & 차이코프스키 : 피아노 협주곡 1번 - DG Originals
차이코프스키 (Peter Ilyich Tchaikovsky) 외 작곡, 카라얀 (Herbe / DG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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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좋아하고 사실 더 좋아하는 앨범은 따로 있지만 이 앨범은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의 영원한 기준이라고 (독특하지만) 볼 수 있을것 같아요. 반드시 한번은 듣고 다른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으며 취향을 찾아가시는걸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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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 개정판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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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뤄샤오밍이 짙었을 때는 솔직히 책에 재미를 붙이기 어려웠다. 뤄샤오밍의 추리는 홈즈를 모방하는 왓슨의 것과 같다. 천재적이기 보다는 배우고 익혀낸 것을 성실하게 풀어내며 '관전둬 였더라면'에 함몰되어 있다. 소재는 참신했지만 매력이 떨어졌다. 그러나 곧 이는 홍콩판 셜록 홈즈의 대단원을 마무리하는 가장 마지막 톱니바퀴임을 알게되며 드디어 훨씬 능숙하고 천재적인, 익숙한 아우라를 뿜어내는 셜록 관전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관전둬는 어쩌면 셜록 홈즈 보다 완벽하다. 동아시아인의 성실함일까, 관전둬는 단 한번도 옆길로 빠지지 않으며 천재적으로, 근면성실하게 임무를 성공으로 이끌어가며 패배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고 모든 순간에 도덕적이다. 그는 경찰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낸다고 하지만 이는 법의 테두리 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망정 그는 도덕과 신념에 따라 일을 행한다. 관전둬의 실력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관전둬는 너무나 완벽한 인물로 인자한 모습을 보이나 그리 인간적이지 못하다. 우리가 셜록 홈즈를 사랑했던 이유는 그가 천재적이긴 하지만 결코 완벽한 인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진 괴짜, 게으름, 예의 없음 등의 결함을 그대로 갖고있으면서도 천재적인 추리를 해냈기에 그의 사고를 따라가려하며 함께 숨죽려가며 읽었다. 하지만 위대한 관전둬를 보라, 이는 결코 악하지 않으며 모든 순간에 시민을 보호하고 생명을 지키며 자기가 속한 조직마저 정의를 위해 개선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을 향해 달려갔던 독자들은 드디어 이 신분을 밝히지 않은 아이가 관전둬 일 것을 기대하며 허물 한 점 없는 완벽한 히어로를 향해 팡파레를 울릴 준비를 한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영웅에게도 항상 과오는 있고 그 과오가 천재적이지만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따뜻한 경찰로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어 이 이야기의 모든 톱니바퀴가 꽉 맞게 흘러갔음을 알게된다.
그뿐만이 아니라 마지막 이야기는 다시 첫번째 이야기와 연결되며 이 이야기는 무한히 꼬리를 물며 시작과 끝의 구분을 없앤다. 이는 굳이?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 이야기를 이쯤에서 꽉맞게 끝내고 싶은 작가의 염원이라 보여진다.
크게 아쉬운 점을 꼽자면 인물이 플랫 하다는 점이다. 관전둬의 Arch-enemy 로 보이는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악한 인물로, 이는 거의 모든 주변 인물 또한 반전은 있으나 성격 자체가 다면적이지는 못하다. 작가는 관전둬 이외의 인물에게 크게 따스함을 보이지도 않으며 전반적으로 입체적 캐릭터의 서술에는 익숙치 않은듯 하다. 한편 이는 명확한 권선징악이 가능하게 하며 이야기가 단순하고 통쾌하게 질주하게 한다. 독자는 누구를 동정할 필요도 뒷 이야기가 있을거라 걱정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앞만 보며 질주한다. 마지막에서는 살짝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지적했던 평면적인 캐릭터를 갑자기 입체적으로 만들려 하며 설정이 약간 삐그덕 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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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사람
최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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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최진영 작가님의 작품은 ‘구의 증명’과 ‘단 한 사람’ 밖에 읽지 않았지만 작가의 말과 같이 그녀는 언제나 ’언젠가 사라져버릴 당신과 나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 이 소설을 썼습니다.‘, 사랑하기 위해, 기억하기 위해 쓰는듯 하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내가 일찍이 알지/깨닫지 못했던 사랑을 마주한다. ‘단 한 사람’에서 그녀는 ‘어떤 사랑은 끝난 뒤에야 사랑이 아니었음을 안다. 어떤 사랑은 끝이 없어서 사랑이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어떤 사랑은 너무 멀리 있어 끝이 없다. 어떤 사랑은 너무 가까이 있어 시작이 없다.‘ 라고 적는다. 이 구절에서야, 일화를 바라보는 월화의 ’알아. 나도 너처럼 그렇게 내 몸에 얼굴을 파묻고 이 지긋지긋한 인생을 구덩이에 다 묻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어. 엊그제도 그랬고 어쩌면 내일도 모레도 그럴 수 있겠지.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을게. 너를 보고 있을게. 네가 네 손으로 네 인생을 파묻지 않도록 내가 감시해 줄게.‘ 라는 구절에 다다라서야 나는 내 동생의 사랑을 느낄 수 있다.

그녀의 글은 담담한 필체로 그려놓은 감정이 짙어서 눈물을 떨어뜨리며 읽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어나가야만 하는데, 그 이유는 그녀가 서술한 것 처럼 영원히 사랑하기 위해서이다. 상상력이 풍부한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나를 울렸던 단 하나의 이야기가 되기 위해서.
죽음은 그녀의 질문이자 답을 도출해내가는 과정이다. 죽음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극단적인 이벤트 이기도 하지만 삶의 필수적인 구성요소이기도, 그래서 가장 평범한 것이기도 하다. 그녀의 소설에서 등장인물은 모두 죽음을 겪어내며 성장한다. ‘구의 증명’에서는 죽음마저 나의 몸으로 온전히 안아내며 그를 사랑하고, 하나가 되는 지점에 다다른다. ‘단 한 사람’ 에서는 죽음을 지켜보기도 구해내기도 하는 나는 엄마와 할머니 와는 다른, 더이상 나아가지 않고 열심히 살리며 단순히 기적이라고 단념하거나 겨우 한명만 구해내는 저주라는 분노를 쏟아내고 냉소를 퍼붓는 사람이 되기 보다는 담담히 하나 하나의 개별적 죽음을 존중해 나가는이로, 더 나아가 죽고싶어하던 이는 나를 돕고 싶어서, 살리고 싶어서 선택한/선택받은 이를 키워내기에 이른다. 죽음은 모두의 삶을 폭풍우처럼 쓸고간다. 그 폭풍우 안에서야 우리는 질문을 하기도, 답을 찾기도, 또는 답은 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는 그녀가 죽음이라는 소재를 이용하는 것도, 그러면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통찰을 드러내는 것도 모두 좋다. 우리는 죽음에 대해 지나치게 터부시한다. 또는 죽음을 충분히 긍정하지 못한다. 우리는 단순히 삶의 끝 이라는 고루한 죽음의 정의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한다. 죽음을 삶과의 대척점이 아니라 삶의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는 그 순간에 이르러야 ’영원한 건 오늘뿐이야. 세상은 언제나 지금으로 가득해.‘라는 뜻을 이해하게 된다.

혹자의 리뷰를 읽다보면 이야기에 걸맞지 않은 허무한 엔딩이라는 평이 있는데, 나는 감히 반기를 들어본다. 이 글은 전체적으로 엄청난 반전이나 대단원의 마무리가 걸맞는 거대한 글이 아니다. 작가는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고 매일 글을 썼다고 한다. 이 글의 구성은 이전에 읽었던 ’구의 증명‘에 비해서도 다른 촘촘한 작가들의 이야기에 비해서도 매우 성글다. 이 글은 담담하고 듬성듬성 틈이 있는, 그 순간을 기록해야 하기에 쓰여진 찰나의 기록이기에 빽빽할 수도, 따라서 대단한 마무리를 할 수도 없다. 어쩌면 모든 이야기의 시작점일 수도 있는 금화의 실종조차 작가는 성글게 마무리 짓는다. 더이상 금화의 이야기는 중요한것이 아니다. 모든 죽음은 개별적인 것이지만 동시에 죽음은 모든곳에서, 모두에게 일어난다. 질문과 답을 찾기 보다는 그대로 존중하고 보내주는 것이 남겨진 자들의 몫이다.
이 글을 읽어내려가며 한 가문의 여자들에게 내려진 무언가를 기적, 겨우, 단 한사람, 기도로 대하는 변화를 보며 원동력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된다. 나 혼자 겪어내야 하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옆의 동반자가, 나와 함께 모든것을 겪어내는 사람이, 나와 같은 사람이 있다는 것. 나를 사랑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것을 감당해내기에 충분치 않은 경우도, 나와 같은 일을 겪지는 않지만 내 존재의 분신인, 둘이지만 언제나 하나인 경우도, 나와 같은 것을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나의 경험과 나 자신마저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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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채석장 시리즈
마틴 푸크너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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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얼마전 귀국 비행기에서 제인 오스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제인 오스틴은 뛰어난 풍자가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사회상을 잘 비틀어 보여준다는 의미) 나는 사실 그런점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소설속의 세계로만 단절시켜가며 읽었다.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수만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이기에 나는 그녀의 작품이 이 세계에 발 닿아 있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관찰한 실제 세계를 그녀의 문학 안에 온전히, 약간 비틀어서 또는 흐릿하게 담아낸다. 문학은 아무리 상상속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하더라도 인간이 서술하기 때문에 그들이 숨쉬고 사는 실제세계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한편 문학이 담아내는 세계는 대체적으로 정복자의 세계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문학이 얼마나 주류의 시각에 찌들어 있었는지 새삼 느꼈다. 소수자를 위한 문학도 결국은 다수에 대비한 소수자의 삶을 그리며, 인간 이라는 종 자체가 정복자이므로 이에 벗어나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시각은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가.

나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 주체를 위한 문학이 주류를 이룰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해야하는 작업은 어렴풋이 비추는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인간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 어떤 영향과 상처를 남겨왔는지 깨닫는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는 종말의 시계를 전혀 늦출 수 없을 것이고 종국에는 절멸로 향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노력은 불가능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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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하는 행성 지구를 위한 문학 채석장 시리즈
마틴 푸크너 지음, 김지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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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 담아내고 있는 세계는 무엇인가. 얼마전 귀국 비행기에서 제인 오스틴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제인 오스틴은 뛰어난 풍자가로 유명하지만 (그만큼 사회상을 잘 비틀어 보여준다는 의미) 나는 사실 그런점은 전혀 아랑곳 하지 않고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소설속의 세계로만 단절시켜가며 읽었다. 그녀의 많은 작품들은 수만은 신데렐라 스토리의 원형이기에 나는 그녀의 작품이 이 세계에 발 닿아 있지 않기를 원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를 통해 그녀는 그녀가 관찰한 실제 세계를 그녀의 문학 안에 온전히, 약간 비틀어서 또는 흐릿하게 담아낸다. 문학은 아무리 상상속의 이야기를 담아낸다 하더라도 인간이 서술하기 때문에 그들이 숨쉬고 사는 실제세계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한편 문학이 담아내는 세계는 대체적으로 정복자의 세계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문학이 얼마나 주류의 시각에 찌들어 있었는지 새삼 느꼈다. 소수자를 위한 문학도 결국은 다수에 대비한 소수자의 삶을 그리며, 인간 이라는 종 자체가 정복자이므로 이에 벗어나는 세계를 그려낼 수 있는 시각은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가.

나는 인간이 아닌 비인간 주체를 위한 문학이 주류를 이룰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부터라도 해야하는 작업은 어렴풋이 비추는 현실의 그림자를 통해 인간이 이 세계를 어떻게 이용해 왔는지, 어떤 영향과 상처를 남겨왔는지 깨닫는 것이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나치게 빠르게 흘러가는 종말의 시계를 전혀 늦출 수 없을 것이고 종국에는 절멸로 향하게 되겠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인간적인 노력은 불가능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여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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