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고래의 흼에 대하여
홍한별 지음 / 위고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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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어떤 대상에 대한 개인적 고찰을 담은 글은 그닥 선호되지 않는다. 공감의 부재가 가장 큰 이유인데 이 책은 공감가는 부분이 꽤 많았고 생각해 볼 지점도 꽤 있어서 최근 읽은 책 중 아주 만족스러운 편에 속하게 되었다.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면서 우리는 번역의 문제에 더 자주 부딪힌다. 내 세대를 포함해 그 이후의 세대는 사실상 한국어를 모국어로 그리고 영어를 제1 외국어로 또는 소수는 제2 모국어로 구사할 줄 안다. 학교를 다니면서 영어 지문을 해석할 때에도 거리를 걸으며 쓰여있는 영어 광고 문구를 해석할 때에도 우리는 어떻게 영어를 우리의 모국어로 번역할지 고민한다. 물론 글쓴이 만큼의 문학적 번역은 아니지만 우리의 삶에 번역이 그만큼 크게 들어와 있다는 소리이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영어를 번역하는데 고민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읽어볼만 하다.
눈에는 선하지만 손에는 잡히지 않는 그 흰 고래는 어떤 존재인가. 글쓴이는 명확한 하나의 정의를 내리기 보다는 번역의 여러 면모를 비유적으로 제시한다. 동시에 글쓴이는 지속적으로 흰 고래에 더 가까워지기 위해 고뇌한다.
이 글을 읽으면서 번역은 시시포스의 형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한 번역은 산 정상에 위치한다. 우리는 직역과 의역의 길 중 하나를 선택하여(어느정도 더 중점을 둔다는 말이다.) 돌을 굴리며 산을 오른다. 그러나 그 정상에 돌을 올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돌은 다시 떨어진다. 지나쳤기 때문이다. 언어가 나의 머릿속을 모두 표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여러해 했다. 언어로 생각을 한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생각은 완전히 언어로 치환되지는 않는다. 나의 생각조차 나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이의 말을 나의 말로 표현하는 것은 어떠한 일일까?
이러한 번역의 불완전성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벨탑을 세운것이 기쁘다. 그로 인한 형벌이 언어의 다양성이 되었기 때문에, 공통의 언어가 아닌 수많은 언어가 서로 통하지 않을지라도 각자의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개성있는 언어들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몇년 전 1984를 읽고 굉장히 충격받은적이 있다. 그 수많은 디스토피아의 묘사 때문이 아니었다. 단 하나, 언어를 줄여갔던 부분이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언어는 생명체이고 변화하고 나아가야 한다. 그런데 1984의 디스토피아는 언어를 가두고 죽이고 축소했다. 언어의 축소, 언어의 단순화는 우리 생각의 폭마저 줄이고 우리 감정, 인식의 폭마저 줄여버린다. 문화가 최고조로 발전한 사회에서 인문학이 꽃피우듯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의사소통 수단을 넘어서는 문화이고 우리의 정체성이고 모든것이다. 만약 1984의 디스토피아가 하나의 나라가 아닌 여러 나라를 통합한 것이거나 지구 전체를 통합한 것이라면? 우리는 결국 금수 이하가 될것이다. 하층인류는 빠르게 퇴화하고 하층이 무너지면 상층도 오래 버틸 수 없다. 결국 우리는 돌고래에게 밀려나게 될 수도.

어떠한 텍스트를 원문과 번역문으로 읽는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경험이다. 원문의 텍스트는 나를 그 곳으로 끌어당기지만 번역문은 나의 삶으로 텍스트를 끌어당긴다. 번역된 셜록홈즈를 읽고 있자면 물론 배경은 런던인 것을 알고 있지만 서도 우리나라의 어느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곳에 셜록홈즈가 게으르게 누워있는 쇼파가 있을 것만 같다. 덕분에 나는 손쉽게 그 다양한 양분을 나에게 끌어당겼고 이렇게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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