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의 벽 -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가 박신양과 철학자 김동훈의 그림 이야기
박신양.김동훈 지음 / 민음사 / 202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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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 이상의 책 이었다. 감히 평가하고자가 아니라 느낀바가 있어 몇 자 적고싶어졌다.
책을 읽으면서 ‘역할‘이 아닌 ‘인간‘이 보였다.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사유하고, 그리고, 쓰고... 당나귀 처럼 끊임없이, 묵묵히 그 짐을 지어나가는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보였다.
가끔은 모두가 껍데기(가면)만을 쓰고 자신을 잃어가고 있다는 두려움이 스치는 순간이 있다. 그래도 이미 끝없는 방황을 통해 세계를 깨고 나오는 이도 있다.

그림을 그린 이유는 그리움이었고, 그리움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던 건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들 때문에 점점 스스로 설 자리를 양보해 가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은 작가 자신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림은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생각할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나의 캐릭터가 실제의 나보다 훨씬 더 커져 가면서 사실상 사람들과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교류는 물론 대화조차거의 불가능해져 갔다. 점차 그 이유를 알게 되었는데 내가 캐릭터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다. 그 너무도 당연한 사실이 나에게는 한없이 생소하게 느껴졌다. 실제의 나보다 내가 만들어 낸 캐릭터를 접하는 사람들이 월등히 더 많아졌기 때문이었다. 나를 캐릭터로 대하는 사람들과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중략•••
캐릭터나 이미지의 가면이 얼굴에 붙어 버린 경우는 조금 심각한 경우이며 가면인지 자신의 얼굴인지도 혼동하는 안타까운 경우가 일어나기도 한다. •••중략•••
이런 상황은 연기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에게도 벌어진다. 과도하게 자신의 자리를 사회적으로 형성된 캐릭터에게 내주고 그 역할을 이유로 자신의 진짜 모습을 포기해야 하는 경우도 흔해 보인다. 나도 가끔 가면의 도움을 빌려야 할 때가 있다. 매우 겸연적고 안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것 같은 불편함이지만 피할 수 없는 경우가 자주 있다. •••중략•••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잘못된 질문이다. ‘나’는 원래 있지 않다. 고정되어 있지 않다. 나는 하나가 아니며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았더라도 나는 여러 개이다. 또한 그 각각의 나는 고정되어 있지 않으며 불변의 성질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 여러개의 나는 매우 다양하게 변화 발전하고 유동적으로 흘러가며 여럿의 ‘나’끼리, 그리고 세상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관계도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시작이 매우 잘못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이미 고정되고 원형적인 내가 어딘가에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은 오해를 포함하고 있다. •••중략•••
누구나 각자의 위치에서 역할을 해내야 한다. 그 역할만으로도 우리는 힘겹다. 한마디로 역할 이외의 시간을 만들어 내거나 사용하지 못한다. 역할에 충실하는 것은 삶의 임무와 책임이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 역할이 나 자신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만든 캐릭터들은 절대로 나 자신일 수 없으며 캐릭터를 만들어 가는 것은 또 다른 나이기도 하지만 그것 또한 나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선택하고 나에게 주어진 역할의 수행일 뿐이다. 나와 우리는 그렇게 여러 이유로 규정되고 한정 지어진다. 정해진 규정들을 넘어서 역할 이외에, 그리고 역할을 넘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리고 그것을 해내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하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노력을 왜 하는가에 대해 어떤 생각과 관심을 가지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 관심에 대한 애정의 지속과 근거에 대해 얼마나 많은 진심을 쏟고 있는가가 그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가 품은 열정이 곧 그 사람이다. 나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역할을 넘어서는 사람이기를 바란다. 캐릭터라는 말은 뭔가 독특한 면을 가진 극 중 등장인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본래는 사람 자체를 말한다. 그러니까 극에 등장하는 무언가 특징적인 인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그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나를 포함한 모두가 진정한 사람, 진정한 캐릭터가 되는 기대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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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당나귀의 등은 굽어 가고 딱딱해져 간다.
딱딱해질 때까지 피 나고 곪고
다시 새살이 돋고 파리들이 왱왱거렸다.
당나귀는 그것도 모른다.
자기가 아팠는지 딱딱해졌는지,
그가 꾸는 꿈처럼 처음 같은 색깔이고
처음 같은 피부일 거라고 알고 있다.

당나귀가 헤치고 나아온 게 짐인지 세상인지
시간들인지 손가락질들인지
파란 바다인지 새벽 안개였는지
차가운 냉대들이었는지 모른다.
당나귀에겐 그저 꿈이 중요하다.
아니, 집이 중요하다.
이젠 짐을 져서 꿈을 꾸는 건지,
꿈을 꾸기 위해서 짐을 져야 하는 건지,
그것도 모르겠다.
당나귀에겐 꿈도 집이고 질도 꿈이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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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오후의 국철 승강장에 서서 죽음이 몇달 뒤로 다가와있다고 느꼈을 때, 몸에서 끝없이 새어나오는 선혈이 그것을증거한다고 믿었을 때 그녀는 이미 깨달았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는 것을. 그녀의 고단한 삶은 연극이나 유령 같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선죽음의 얼굴은 마치 오래전에 잃었다가 돌아온 혈육처럼 낯익었다. -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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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알았습니다. 이 프로젝트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이 프로젝트를 위해 글을 쓰려면 시간을 사유해야 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먼저 나의 삶과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고, 필멸하는 인간의 짧디짧은 수명에 대해 생각해야 하고, 내가 지금까지 누구를 위해 글을 써왔는가를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을. ‘언어‘라는 나의 불충분하고 때로 불가능한 도구가, 결국은 그것을 읽을 누군가를 향해 열려 있는 통로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자각해야 한다는 것을.
- P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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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나에게 말했지.
병실의 벤젠 냄새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 아니라면 누구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을 거라고.
아름다움은 오직 강렬한 것, 생생한 힘이어야 한다고.
삶이란 게, 결코 견디는 일이 되어선 안 된다고.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를 꿈꾸는 건 죄악이라고.
그러니까, 너에게 아름다운 건 붐비는 거리였지.
햇빛이 끓어넘치는 트램 정류장이었지.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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