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낙하하는 저녁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김난주가 번역한 책을 신뢰하는 사람이 많지만, 나는 원작이 에쿠니 가오리처럼 경쾌한 경우는 김난주를 택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에쿠니는 김난주 정도는 되어야 번역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는 김난주도 에쿠니 번역하기엔 감각이 굳었다고 생각한다. 딱 앞머리만 보아도 이런 생각이 안 들 수가 없다.
원작에는 일본어 특유의 표현도 있고 ('백 년 늦게 ...했다'), 영어 단어를 토막으로 끼워넣어서 다소 경박하지만 경쾌한 표현도 있다. ('크레이지 다케오는 ...했다')
전자는 요즘 흔해진 만화번역처럼 직역하기보다는 비슷한 상황에서 흔히 쓰는 한국어 표현으로 번역해야 맛이고(정말 이 번역 보면서 만화 슬램덩크 보는 착각이 들었다. 원작자가 본대도 적합한 한국어 표현이 없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후자는 무리하게 번역하느니 토막 영어단어를 그대로 살리는 편이 원작의 황당한 상황에서의 주인공의 심정이 제대로 느껴진다. 일본인들이 토막 영어 쓰는 거 아무리 좋아한대도 일본어 표현이 없어서 거기다 '크레이지 다케오'라고 쓰지는 않았을텐데, 그걸 직역해서 '미친 다케오'라고 하면 너무 무거워진다. 그 상황에서의 고유명사 변형이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글쎄, 김난주는 에쿠니보다는 좀 더 진지하고 말장난 같은 언어유희를 즐기지 않는 작가, 예를 들면 유미리 정도의 작품을 번역하는 편이 백 번 낫겠다. 그런 진지한 작가 작품의 장점이라면 익히 알려진 일어 번역법-특정 일어 표현에 특정 한국어 표현을 대입하기-라도 문제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원작은 아주 근사하다. 누구 번역으로든 읽을 맛이 난다. 겉으로는 일상 속에 조용히 흐르는 사랑이야기 혹은 이별이야기 같지만, 그리고 여주인공은 마지막까지 동거하던 남자인 다케오를 무척 아끼긴 하지만, 사실은 이야기의 중심은 떠나간 남자라기보다는 새로 들어온 낯선 여자이며, 작가는 일상에 고정되지 못하는(고정되지 않는 게 아니라 못 하는) 여자들의 감각을 아주 아름답게 그려내었다.
수많은 남자들을 아주 간단히 매료시키는 팜므파탈이면서도 그 자신은 그 남자들에게 애착이 없고 오히려 또 하나의 여주인공인 리카나 어린 나오토 소년과 지낼 때 더 솔직하게 맘 편해 하는 하나코, 그리고 그런 하나코에게 넋이 빠진 남자친구에게 차이고 나서도 연인같은 마음으로 친구지간 예절을 지키며 오가다가 결국엔 제멋대로 굴러들어온 하나코와 기묘하게 원만한 공동생활을 하는 리카, 또 이들의 사연을 반은 흥미로 지켜보며 충고나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유쾌한 료코.
거의 동년배인 이들은 친구지간 또는 룸메이트 정도의 관계를 넘어서 이상화된 자매같은, 또는 어느 차원에서 깊이 아끼고 서로의 심정을 느끼기에 마치 정신적 레즈비언같은 그런 관계를 가지고 있다. 둘 중에 어느 쪽에 더 가까운가 하면, 세 여자 모두 자기 ‘남자’가 있고 세련된 현대 일본인으로서 (도덕적은 아니라 할지라도) 정상적인 성취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후자에 더 가깝겠다고 할 수 있겠다.
그만큼 이 책은 여자들의 감성과 관계를 중심으로 한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리카와 하나코가 알게 된 연결고리인 건강한 청년 다케오는 말 그대로 연결고리라는 장치 정도일 뿐이다. 에쿠니는 건강한 청년 다케오나, 선량한 료코의 남편의 정신적인 면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 <냉정과 열정 사이>의 마빈이 독자에게 중요한 점이 모양 좋은 다리와 따스한 매너 정도였듯이.
'설계만 확실하다면 나머지는 시간을 들이기만 하면 된다'고 독백하는 리카의 작업처럼, 이 책은 탄탄한 설계 위에 느긋한 시간을 들여 여자들이 가지는 갖가지 감성을 때로는 암시하고, 때로는 대화하며 풀어놓고 있다. 맛있는 음식 한 접시와 즐기는 마실 것 한 잔을 가져다놓고 편안히 앉아 느긋하게 한 입 한 입 맛보는 듯한 느낌의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