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공 붕괴
해도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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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에도 감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해도연의 세계는 공들여 벼린 칼날 같다. 「검은 절벽」은 스페이스 오페라 장르를 떠올리면 흔히 기대하는 희망적이고 모험적인 분위기와는 다르다. 이곳의 우주는 그보다 비릿하고 씁쓸하다. 미지로 향하는 설렘보다는 미지이기에 드러나는 솔직함이 있다. 인간이 우주라는 공간에 갇혀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을 때, 지상의 감투를 벗어던지고 우주에서의 생존을 생각할 때, 날선 감각이 생동한다. 한편, 자칫 추악해 보일 수 있는 모습을 낭만적으로 바꾸는 것은 이 작품의 미덕이다. 말하자면 채 식지 않은 피를 우아한 와인글라스에 붓는 것이다. 라미도, 혜나도, 심지어 러브조이마저 그들이 좇는 사랑을 위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한다. 누군가는 인의를 버리고 누군가는 규제를 넘어선다. 단 하나의 옳은 명제는 사랑이다. 오로지 사랑을 위해서. 작가는 작품 말미에 불온하게 느껴질 만한 진실 하나를 흘리고 간다. 연구원들이 그토록 적대하던 외계 생명체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너희를 죽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이라고. 사랑은 인간의 '솔직한' 욕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우주는 계기만 주었을 뿐. 이는 「검은 절벽」의 잔혹한 낭만이다.


 "다이버전스 스네이크로 불리는 그 생물은 흉측한 겉모습과는 달리 매우 온화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추정합니다. 개미조차 무서워하는 카날로안 드래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도 하는데요. 이들이 시체를 먹었을 수는 있어도 사람을 죽였을 수는 없을 거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다이버전스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본문 78쪽)



 무너져야만 비로소 만들어지는 세계가 있다. 「텅 빈 거품」은 무수히 많은 가능성으로 이루어진 단편이다. '그리 멀지 않은 미래, 예컨대 다음 세대에 종말이 찾아온다면'이라는 질문을 필두로, 작중 인물들에게는 여러 선택지가 주어진다. 안락하지만 곧 붕괴될 유토피아에 있을 것인지, 붕괴로부터 끊임없이 달아나는 기생선에 오를 것인지. 어떤 선택을 해도 각각 수긍할 지점이 있다. 전자는 현재의 안락을 누릴 수 있고, 후자는 먼 미래를 도모할 수 있을 터다. 실제로 「텅 빈 거품」의 작중 인물 가운데 일부는 유토피아에 남아 가정을 꾸리고, 그 외 인원은 기생선에 탑승하기로 결정한다. 재밌는 점 한 가지는, 이 인물들은 어느 노선을 타든 백 년이라는 짧은 생을 살아가는 입장으로서 '진공 붕괴'를 겪을 일도, '진공 이후'를 알 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단편은 끊임없이 이들의 고민과 갈등을 보여준다. '인간이 무슨 수를 써도 우주는 박동하고 변화하며 이어진다'는 진리를 알면서도 더 나은 삶을 꿈꾸며 발버둥 친다. 그 몸짓은 마치 개미의 움직임처럼 작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우주는 개미를 휩쓸고 마는 거대한 물결과 같다. 자연의 섭리이든, 인간이 만든 카르마든 이유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것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임은 분명하다. 유토피아는 때가 되어 사라진다. '가짜 진공'이 있던 자리는 '진짜 진공'이 대신한다. 기생선은 지금도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가 탄생하는 것이다. 열린 결말로 내도 이상하지 않았을 이 단편은 140년 후 유토피아가 사라지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유쾌하고 짓궂은, 『진공 붕괴』식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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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다음 - 어떻게 떠나고 기억될 것인가? 장례 노동 현장에서 쓴 죽음 르포르타주
희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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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은 누구나 죽음과 가까워진다. 어떤 죽음은 이르게 찾아오고, 어떤 죽음은 때가 되어 다가온다. 하나 공통된 것은 '호상은 없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연사에 준하는 편안한 죽음을 호상이라고 부르지만, 헤어짐 앞에 호상이란 무의미한 단어다. 죽음이란 으레 그렇다. 고인은 삶과 단절되고, 유족은 고인과 헤어지는 것이 전제된다. 하지만 끝을 알고 살아가는 존재가 곧 인간이기에 우리는 모두 죽음을 대비하고 감각한다. 슬픔 속에서도 다음 스텝을 밟아야 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가치를 절차로 담아낸 것이 바로 장례라 할 수 있다. 죽은 자가 떠나는 과정, 산 자가 죽음을 수용하는 과정이다. 


 『죽은 다음』에서는 현장 기록자의 입장에서 맞닥뜨린 여러 상황이 등장한다. 사람마다 사연이 다양하듯이 죽음에도 이야기가 다양하다는 본문의 말 그대로다. 고인이 입고 가는 삼베 수의를 두고도 장례지도사들 간 의견이 다르고, 방식에 있어서도 전통과 현대식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생긴다. 그러나 첨예한 입장 차 앞에서 도리어 선명해지는 것도 있다. 죽음을 타자화하지 않고 이해하려는 태도다. 여기서 이해란 앎의 영역이 아니라 헤아림의 영역을 말한다. 요컨대, 죽음을 사람을 대하듯이 들여다봐야 한다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장례가 유족 중심이 되고 있다며 고인을 위해 좋은 삼베옷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 다른 관계자는 삼베보다는 고인이 생전에 즐겨 입었던 옷을 수의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두 사람의 스탠스는 상극으로 보이지만 본질은 같다. 애도하는 마음, 먼저 떠난 이를 지우지 않는 추모다. 이 핵심은 책이 줄곧 독자에게 건네는 질문과도 일맥상통한다. 종점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지. 주변인의 부고를 드물게 접하는 사람으로서 죽음을 떠올리면 어딘가 막연한 구석이 있었다. 죽음이라는 미지의 세계를 알게 모르게 경계했던 탓인지도 몰랐다. 이안나 장례지도사의 말이 나의 경계를 쉽게 허물고 들어왔다. "남의 죽음을 가까이에서 보면 어두울 거라 생각하잖아요. 아니요. 돌아가신 그분들로 인해 내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돼요. 내가 죽을 때도 행복하게 잘 죽을 수 있도록 늘 기회가 주어지는 것 같아요. (중략) 묵상하는 기회가 많아지죠." (본문 76쪽)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마지막이 있다. 모를수록 두려운 것이 보편적인 심리라면, 이제는 실체 없는 두려움에서 한 발 빗겨 나 눈앞에 놓인 기회를 잡아도 좋겠다. 죽은 다음을 예비할 시간이 아직 남아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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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골동품점
범유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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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마음 무슨 마음인지 알지, 책장을 넘기며 생각했다. 다 헤지고 낡은 물건이라도 '골동품'이라는 이름을 단 순간 괜히 더 신기해 보이고 관심이 가는 법이다. 아쉽게도 내가 살던 동네에는 호랑골동품점 같은 가게가 없었지만, 분리수거 날이면 동네 어르신들이 오래된 물건을 버리곤 했다. 그러면 나는 눈을 빛내며 그것들을 구경하러 갔다. 가구, 식기, 자개함 등 별의별 물건이 다 있었다. 죄 녹이 슬었지만, 왜인지 모르게 귀해 보였다. 세월이 주는 운치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누군가 두고 간 물건이라는 사실에 찝찝함을 느끼는 한편, 호기심을 멈출 수 없었다. 말하자면 분리수거장이 내 골동품점인 셈이었다. 어느 날은 올드한 스타일의 꽃무늬 컵을 발견했다. 이가 깨지지도 않았고 상태도 제법 괜찮았다. 고민 끝에 컵을 집으로 데려왔다. 책상 한편에 전시해두면 좋을 것 같았다. 집안에서 낯선 컵을 본 부모님이 어디서 난 거냐고 물어봤을 때는 우물쭈물하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버려진 걸 주워왔다고. 혼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어린 나는 이날 '물건 잘못 주워오면 큰일 난다'는 속설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호랑골동품점』을 읽으면서 새삼 기억이 났다. 골동품에는 그런 매력이 있지, 하고. 나를 미지의 곳으로 데려다주는 것만 같은 감각이다. 묘하게 꿈속 같기도 하다.


 『호랑골동품점』은 골동품의 이름을 소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익숙하면서도 어딘가 오싹한 맛이 있다. 소제목을 처음 읽으면 으레 골동품점에 있을 만한 물건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이다. 일례로 성냥.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소모품'으로 쓰고 버리기 일쑤인 물건이다. 하지만 이 작은 성냥 하나가 얼마나 큰 불을 낼 수 있는지, 얼마나 파란을 일으킬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미선은 꼭 성냥과 같았다. 모두가 쉬쉬하며 넘어가는 부당함에 제동을 거는 것, 성냥에 불을 피우는 것, 그리하여 사회적 불씨를 키우는 것. 미선은 콜센터의 유일한 불꽃이었다. 이 챕터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아는 서비스 직종의 명암을 지적한다. 모른 척하거나 알고도 내 일이 아니기에 넘어갔던 사회 풍조에 성냥갑 하나를 툭 던지고 간다. 버려도 버려도 다시 돌아올 거라고. 문제가 없어지지 않는 한 불은 또다시 타오를 거라고 말한다.


 「성냥」이 매운맛이라면 「그림자인형」에서는 짠맛이 났다. 금수만도 못한 인물의 행태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면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아내와 아이의 사연에 눈길이 갔다. 90년도는 백마 띠의 해였다. 백마 띠에 태어나는 여자아이는 기가 세다는 이유로 선별적으로 지워졌다. 9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내게도 이 말이 구전설화처럼 전해질 정도로 그 해에는 많은 아이가 빛을 보기도 전에 사라져야만 했다.  「그림자인형」에 나오는 일화가 픽션이 아닌 사실 기반이라는 점이 내게는 어떤 괴설보다도 괴설 같았다. 


 전반적으로 『호랑골동품점』은 산신의 능력을 가진 인간과 이형의 존재를 등장시킴으로써 판타지성을 강화하지만, 소재에 얽힌 에피소드에서는 세태 비판적 시선이 엿보인다.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그렇기에 실존하는 문제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는 작가의 고민이 잘 드러난다. 소재와 에피소드 간 유기성이 높아 작품의 지향점이 더욱 돋보였다. 또한 사부에서 이유오, 소하연으로 이어지는 '호미' 메인 스트림을 깔고, 각 챕터별 서브 스트림을 이끌고 가는 구성도 매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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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클 (반양장) - 제18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134
최현진 지음 / 창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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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실감은 눈과 닮았다. 소리 없이 쌓인다는 점에서. 조금 내리는가 싶더니 금세 수북이 쌓이고야 마는 것이다. 『스파클』에서는 상실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무언가를 잃었다는 속성 때문에 한데 묶였지만, 이들의 사정은 각자 다르고 복잡다단하다. 유리는 눈目으로 눈雪을 본다. 각막 이식을 받은 눈은 잠잠한데, 다른 눈에서 이상이 발견된다. 표면적으로 유리의 상실은 눈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상이 발생한 곳이 다름 아닌 '자신'의 한쪽 눈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눈보라처럼 자욱한 흰 연기, 눈에 들어간 유리 조각, 화재 현장에서 남동생을 업고 사라진 할머니의 뒷모습. 과거의 잔재가 트라우마처럼 모여 지금의 눈을 만들었다. 그리고 눈송이가 내린다. 사고에서 벗어나 일상으로 돌아온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알려주듯이. 


 그게 내가 자꾸 벤치로 향하는 이유야

 하지만 나는 그만할 수 없어

 스크롤을 올렸다.

 엄마는 이제 형 얘기를 그만하래

 흰 화면이 꿈속의 설원처럼 움직였다.

 떨어지는 눈이 형이었으면 좋겠다고

 시온의 말은 거꾸로 읽어도 완전했다. 나는 이 형제가 궁금하다 

 (본문 59쪽)


 한편 『스파클』은 서사를 풀어가는 키로써 수학 용어를 가져온다. 유리함수와 x축, y축은 생명을 부여받아 인물 자체가 되기도 하고, 인물의 상태가 되기도 한다. 좌표평면 위에서 길을 잃고 둥둥 떠다니던 유리는 x축인 영준, y축인 시온을 찾아 나서면서 제자리를 찾아간다. 유리는 시온에게 '너를 만나면서 눈송이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라고 하지만, 시온의 편지를 읽고, 그의 소망을 현실로 가져온 것은 온전히 유리의 몫이다. 유리는 스스로 자신 안의 x와 y를 구하러 간 것이다. 그렇게 무너져 있던 축을 세웠다. 삶을 수학에 빗댄다면, 이것은 유리의 풀이 과정인 셈이다. 


 나의 행운이 누군가에게는 불행이라는 것. 그건 내게도 아픔이니까.

 "이시온, 기다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내게 눈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난 이영준의 동생이 아니라, 한 명의 시온에게. 같은 병실의 한나가 수술실에서 돌아오지 않아 신을 믿지 못하고, 의지했던 뜬구름 형이 크리스마스이브에 뇌사에 빠져 산타를 믿지 못하는. 기적과 행운은 다른 이의 희생이라는 걸 아는 시온을 향해서. 영하의 바람을 맞으며 그동안의 편지가 머릿속에 영화 자막처럼 펼쳐졌다. (본문 86쪽)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있지만, 유리를 일으킨 것은 시간이 아니다. 삶의 목표를 잃은 사람에게 시간은 멈추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유리는 멈춘 시간을 다시 흐르게 하는 법을 알았다. 죽다 살아난 자신과 뇌사상태인 동생을 비교하며 떠안는 부채감, 떠밀리듯 선택한 의사라는 꿈. 소거법으로 오답을 하나씩 지워간다. 이제 유리는 자신에게 맞는 루트가 무엇인지 점검한다. 유리는 이미 '비행기가 순항 고도로 진입할 때 기울어지는 게 하늘과 수평이 되기 위함'임을, 흔들림이 무서울 수 있지만 '중심을 잡으려면 흔들림은 필연적(159)'임을 알고 있다. 기내에서도, 삶에서도. 모든 것을 관통하는 하나의 진실이었다. 한 아이가 열일곱이 된 유리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그러면 유리는 피하지 않고 대답한다. "하늘을 나는 사람." 비로소 지상에서의 점검을 마치고 이륙하는 것이다. 


 "구름을 피하지 못하면 어떡합니까."

 송신.

 대기.

 "같이 진입하겠습니다. 저는 캡틴의 눈이니까요."

 (본문 197쪽)


 눈이 녹고, 언 땅이 녹으면 활주로가 열릴 것이다. 찬란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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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학자의 숲속 일기 - 메릴랜드 숲에서 만난 열두 달 식물 이야기
신혜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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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대, 살아가면서 한 식물에 관심을 두고 유심히 바라본 일이 드물다. 구에서 공기 정화를 위해 심어놓은 가로수길, 유원지에서 인위적으로 조성해둔 화단을 보면서도 잘 해놨네, 정도의 감상일 뿐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식물 문외한인 사람이 보기에는 이 나무나 저 나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 높은 장벽은 아무래도 감흥이 없어서였을 것이다. 메신저 프로필로 풍경 사진을 걸어두는 것조차 이해를 못 했다. 하고많은 오브제 중에 굳이, 했다. 그러던 내가 식물 앞에서 기웃기웃거리며 사진을 찍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지인은 '우리가 나이를 먹어가는 방증'이라고 했다. 나는 이 말에도 일견 동의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마음의 여유를 찾고 싶어서라고 덧붙였다. 자극적인 요소가 주류가 되는 콘텐츠로부터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다. SNS를 떠나 내 주변에서 조용히 머무르고 있는 것에 시선을 두려고 노력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루었던 산책을 했고, 점점 걷는 범위를 넓혀갔다. 일전에는 걸어서 숲에 다녀오기도 했다. 도파민에서 멀어져 일상을 살아가니 그간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색이며 잎매며 모양이 신기한 꽃이라든지, 풀숲을 부스럭대며 지나가는 청설모라든지. 소소하게 아름다운, 내가 놓치고 살았던 세상이었다.


 그러나 제 소임을 다 하고 나면 누구도 꽃잎이 떨어지는 걸 막을 수 없다. 벚꽃처럼 한 장 한 장 휘날리든, 무궁화처럼 꽃잎을 단정히 말아 내려놓든, 동백꽃처럼 아직 싱싱한 꽃을 통째로 떨어뜨리든 꽃은 때가 되면 미련 없이 꽃잎을 버린다. 시든 꽃잎이 제때,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남아 있는 나머지 꽃 부분에 해를 줄 수도 있다. (본문, 59쪽)


 찬 기운이 가셨나 했더니 일찌감치 벚꽃이 피었다. 지난주부터 벚꽃 명소에 나들이 인파가 가득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가족도 그 대열에 합류하려고 했지만 각자 시간이 맞지 않았다. 치일 피일 일정을 뒤로 보내다가 이번 주가 되었다. 주말에 가보자, 그렇게 말하면서. 문제는 3일 내내 비바람이 몰아칠 거라는 기상 예보였다. 하필이면 날짜가 딱 주말을 끼고 있었다. 다들 시무룩한 얼굴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비바람이 그친 다음에는 꽃이 다 떨어져 있을 테니까. 그래도 한 번 나가보자는 나의 제안은 통하지 않았다. '꽃이 중요하다고, 꽃이.' 가족은 꽃이 나무의 진가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꽃이 다 지고 난 후에 올라오는 파릇파릇한 잎도 예쁜데. 눈치껏 속으로 말을 삼켰다. 겸연쩍어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식물학자의 숲속일기』 4월 편에서, 저자는 넌지시 답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벚꽃잎이 쏟아져 내린 나무를 쳐다보며 이런 생각도 한다. 화려한 꽃잎들이 떨어져 꽃이 모두 사라진 듯 보이지만 나무엔 어린 열매들이 남겨져 있다고. 또한 꽃잎이 떨어져 상처 난 자리마다 열심히 치료 중이며, 땅에 떨어진 꽃잎은 흙에 사는 다른 생물들의 먹이가 되고 결국 나무로 다시 돌아갈 것이라고.' (본문, 60쪽)


 내가 안고 있는 문제와 부정적 감정들이 갑자기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리고 숲 바닥에 켜켜이 쌓여 있는 검은 잔해들에 대해 곰곰이 다시 생각했다. 자연에서 맞고 틀린 건 없는 것 같았다. 죽은 식물을 보면 슬프고, 바이러스나 세균과 같은 미생물이 내 몸에 나쁘다고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건 인간인 내 입장에서의 감정과 판단일 뿐이다. 그래서 슬프고 나쁜 것도 없는 것 같았다. (본문, 96쪽)


 '숲속의 어두움으로부터' 챕터를 폈을 때 나는 퇴근길 지하철 안이었다. 회사에서 업무를 망치고 기분이 우중충해진 채였다. 소위 말하는 독서로 현실 도피를 해보려던 찰나에, 이 챕터를 만났다. 답답한 마음에 숲속을 걷는 저자와 활자 사이를 활보하는 내가 얼핏 겹쳐 보였다. '마음이 힘들어서 그랬는지 어둡고 음울한 것이 눈에 띄었다'는 저자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나는 저자의 눈을 빌려 숲의 어두움을 가만 응시할 수 있었다. '썩은 나뭇가지들과 낙엽들, 그것들과 버무려진 흙과 미생물들.' 저자의 시야에 따르면, 이들은 겉으로 보기에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 다른 개체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사실은 식물과 상호작용한다고 한다. 식물이 흙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끔 성장하는 데 도움을 주는 셈이다. 설명 끝에 저자는 '숲속에는 맞거나 틀린 것, 좋고 나쁜 것, 기쁘고 슬픈 것이 없을 거라고' 말한다. 한 가지 면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기에는 너무 단편적이라고 말이다. 저자의 이야기에 괜히 위로를 받은 듯했다. 인간사는 자연과 비슷한 구석이 있다. 사람은 한순간만으로 삶을 평가받지 않고, 어떤 일이 생겨도 주변의 다른 이들과 연결되어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간다. 사람도, 자연도. 이치가 다 그런 모양이다. 숲속의 어두움으로부터 배운 게 있다면, 일희일비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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