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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사주
강성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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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그랬다. 신을 자처하는 사람이 왜 한둘이 아니냐고. 그 말처럼, 교주를 재림 신이라 주장하는 사이비가 적잖이 있다. 하늘이 내려보낸 신의 아들이 이렇게나 많던가.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하지만 그들이 일삼는 반인륜적인 행위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리와는 대척점에 서있다. 오히려 착취와 지배에 대한 욕망에 가깝다. 지배자에 반기를 들지 않는 순한 양. 불의에도 순응해야 하며 그러지 않을 시 집단 린치를 가하는 시스템. 통상적인 종교에서 말하는 사랑이나 평화, 화합은 찾아볼 수 없는 기이한 모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탈인간을 말하는 교주는 인간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너희가 안 믿어서 걔들이 죽는 거야. 그게 바로 지옥이야. 힘을 잃을까 두려워 아버지 선생님은 울부짖고, 믿음을 잃을까 두려워 신도들은 눈을 감는다. (본문 251)

 

 - 잘못을 바로잡을 기회를 주는 거야.

원장의 목소리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그런 짓을 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러니 잘못을 바로잡을 필요도, 그럴 기회를 줄 이유도 없다는 것을 몰랐다. (본문 81)

 

 『파사주에는 가상인 듯 아닌 듯 혼란스러운 서술이 곧잘 등장한다. 이러한 문장 뒤로 보이는 것은 소름 끼치도록 적나라한 현실의 그림자다. 어떤 장에서는 현실에 발붙이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가 등장하는 한편, 어떤 장에서는 눈 뜨고 꾸는 꿈처럼 낯선 세계가 드러난다. 3인칭에도 불구하고 본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에 한계가 생기는 것이다. 때문에 독자는 전지적으로 작중 상황을 이해하기보다는 유림의 시선과 해석에 기대어 받아들인다. 간혹 판타지처럼 느껴지는 요소들도 유림이 세상을 바라보는 프레임을 반영한 것이라면 일견 납득이 간다. 다만 유림이 목격한 것이 단순히 메타포에 그치지는 않는다. 어린 가인을 지키는 양옥집 주인들, 돌탑에서 유림과 해수를 둘러싼 가인들, 파사주 게임을 제안한 굴댕이, 숲의 신당에서 마주한 사슴. 그리고 마침내 땅속에서 솟아오른 가인들. 유림이 아는 면면들.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는 이름들이 살아나 사슴 형상을 한 아버지 선생님을 무찌른다. 유림이 마주한, 이 거대한 은유의 세계는 베일을 한 겹 둘렀을 뿐 현실과 다름 없다.

 

 대호가 있었고, 정우와 미란이, 맹상도 있었다. 그리고 이름 모를 가인들도. 유림은 그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늘 잊으려 했고, 지우려 했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어코 돌아왔다. 쫓아온 게 아니라 함께하려고 돌아온 것이었다. 유림 곁에, 바로 이 순간 그 자리에 서서 그것에 맞섰다. (중략) 일어나 같이 가자! 일어나 같이 가자! 일어나 같이 가자! (본문 253-254)

 

 익숙한 품에서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알에 갇힌 이에게 자신을 둘러싼 껍데기는 너무 견고해 보이므로. 학대여도 학대임을 모르고, 안다 해도 저항하기에는 두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해수는 알았다. 다들 속고 있어. 아버지 선생님을 따르는 자들에게 몸이 짓밟히면서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모두가 ''라고 답하는 성전에서 이건 '아니'라고 외쳤다. 해수의 마지막을 본 유림에게도 균열이 생겼다. 눈앞의 생생한 비극을 지켜보며, 유림은 해수의 바통을 이어받는다. 파사주의 시작이다. 이 여정은 죽은 친구를 보내주는 과정이다. 갇힌 유림과 해수를 꺼내는 한풀이다. 넓은 세계로 떠나는 모험이기도 하다. 살아감에 있어 허락을 구해야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냥 내가 되기 위해서. 여정의 종착에 다다라 유림은 해수의 뼛가루를 날린다. 정해진 규칙을 파한다. 보란 듯이.

 

 - 저건 우리 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이 일은 별거 아니고 자기는 곧 돌아올 거라고.

 - 그럼 우린 어떻게 해?

 - 그냥 우리 삶을 살면 돼.

 (본문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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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뚝들 - 제30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홍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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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세상이라고 했다. 그러니 같이 살아가야 한다고. 하지만 지금 이 시대에도 유효한 말인지 자문해 보면 선뜻 답이 나오지 않는다. 주기적으로 불거지는 정치·산업 재해 앞에서 우리는 때때로 무기력해진다. 비보를 내 일처럼 안타까워하는 의식은 소모품처럼 닳아, 소식을 듣고도 무감해지기에 이른다. 외면은 쉽고 달다. 나 하나 살기에도 팍팍하다, 그래봤자 남의 일이 아니냐며 불패의 변명을 던진다. 그러나 진실은 다르다. 같은 땅을 딛고 살아가는 우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름조차 모르는 상대에게 선의의 명함을 내민 장처럼, 우리는 이름 모를 동료 시민으로 살아왔다. 내가 손을 내밀지 않아도 누군가는 내게 손을 뻗고 있었다. 연대하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한편 세월호와 이태원, 이름만 다른 사건들 앞에서 나는 아무 말도 주워 담지 못했다. 설명할 길 없이 망연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이제 그만 잊자'는 언론이 나올 때에야 알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고. 어느 한 축이 흔들린 채 사는데 그게 도통 회복이 안 된다고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이어져 있다는 방증이었다.

 

 누군가에게 말뚝은 전복된 선박의 선원이었고 부모였다. 바다에 가라앉은 자식이었고, 길에서 죽은 청년이었으며, 정리 해고로 생명줄이 끊긴 노동자였다. 그게 전부 살아남은 사람의 기억으로 쓰여 있었다. 지우는 사람이 기록하는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본문 248)


말뚝들에서는 죽었지만 죽지 않은 '말뚝들'이 전국을 들썩이게 한다. 통제하려고 해도 막을 수 없는 보도처럼, '말뚝들'은 시시각각 등장해 재난 상황을 알린다. 죽어도 눈 감을 수 없는 숨, 그리하여 말뚝으로 돌아온 사람들. 한때 사회가 외면했던 그들의 말은 '말뚝'이라는 형상을 통해 사방에 퍼진다. 해안에, 도심에, 끝내는 광장 하늘에 도달한다. 잊어야 한다고 해도 기어이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듯이, 묻으려 해도 반드시 일어서는 존재도 있는 법이다.

 

 테믈렌, 당신 끝까지 내 돈 갚지 않고 가네요. 조심히 가요. 내 빚 갚지 말고 계속 안고 있어요. 그걸로 당신 계속 기억할 테니 서러워 마요. (본문 279)


 언젠가 광장이 빛과 소리로 가득한 날이었다. 아닌 것을 아니다 말하는 데 있어 물러섬이 없는 목소리. 이 목소리를 지지하는 수많은 불빛. 어떠한 폭력도 그걸 방해할 수 없었다. 내가 광장으로 나갔을 때, 특별히 대단한 걸 쟁취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의 몫을 하고 싶었다. 이 사회를 살아가는 시민으로서 필연적으로 오는 슬픔을 나눠가지고 싶었다. 광장에 있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는 목격이 아닌 기록을 해나갈 것이다.

 

 일제히 해금됐다. 모두가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시간이 왔다. (본문 2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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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의 책 - 괴테에서 톨킨까지, 26편의 문학이 그린 세상의 정원들
황주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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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원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이다. 프랑스 영화와 친하지 않은 나로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영화로부터 받은 인상이 흐릿하다. 하지만, 따뜻한 나무색과 짙은 푸른색을 마주할 때면 어김없이 영화 속 한 장면이 떠오르고는 한다. 향수에 가까운 감각이다. 가진 적 없는 추억이 생긴 것 같다. 숲도 아니고, 산도 아니고, 정원. 이는 오롯이 정원만이 주는 환상이다. 가보지 않았어도 그리운 장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은 이를 가능케 한다.


책머리에서 저자는 '가든 라이팅'이라는 용어를 가져온다. 쉽게 말하자면 정원이라는 소재를 작품 안에 담는 것이다. 저자는 가든 라이팅을 설명하며 '그저 배경일 때도 있지만 정원이 없으면 안 되는 작품도 있고, 정원이 숨은 주인공이기도 하다'라고 덧붙인다. '숨은 주인공'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생각난 소설이 있다. 표지마저 『정원의 책』과 닮아있는 『지구 끝의 온실』이다. 


 "지금부터는 실험을 해야 해. 내가 가르쳐 준 것, 그리고 우리가 마을에서 해온 것들을 기억해. 이번에는 우리가 가는 곳 전부가 이 숲이고 온실인 거야. 돔 안이 아니라 바깥을 가꾸는 거야. 최대한 멀리 가. 가서 또 다른 프림 빌리지를 만들어. 알겠지?" (『지구 끝의 온실』, 242쪽)


 기후 재난이 닥치고 모든 일상이 무너져버린 2058년, 나오미와 아마라는 긴 여정을 떠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을 찾아서. 하지만 둘 앞에 놓인 것은 가시밭길이다. 처참한 생존 환경이, 인간의 악의가 도처에 깔려있다. 방심하는 순간 죽는 것은 예삿일이다. 그럼에도 두 사람은 살아내고자 한다. '온실'에서의 기적을 직접 목격했던 그들이다. 인간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보았지만, 인간이 서로의 삶을 부여잡고 다시금 터전을 일구어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끈질긴 생에의 의지와, 긴밀하게 연결되는 유대를 배웠다. 그래서 그들은 기꺼이 내일로 향한다. 프림 빌리지에서 들고나온 씨앗을 품은 채로. '온실 밖'으로 나온 씨앗은 둘의 바람처럼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이 예상했던 것보다도 말이다. 씨앗은 경계를 넘어 세계로 뻗어가고, 시간마저 넘어 2129년 아영에게까지 가닿는다. 프림 빌리지 주민들만의 '온실'은 더 이상 한 공간에 한정되어 있지 않았다. 세상 곳곳에서 피어오른 모스바나의 불빛이 이를 증명한다. 어느 것보다 푸르른 빛. 생존하여 마침내 실재하는 희망이다.


 이들은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지구를 떠나거나 포기하지 않고, 그 모퉁이마다 씨앗을 심었다. 지수의 말처럼 그들이 가는 곳 전부가 프림 빌리지의 숲이고 온실이 되었다. 이들은 약속을 지켰고, 그러자 이들을, 우리의 세계와 미래를 지켜주었다. 이 '지구 정원사'들이 나누었을 다정하고 "온기 어린 이야기"와 약속들을, 그리고 지금도 어딘가를 비추고 있을 것만 같은 온실의 불빛을 상상해본다. (본문, 262-263쪽)


 앞서 저자는 '모든 것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소비되는 시대에도 정원과 문학처럼 시간과 관심을 기울여 살펴야 하는 것이 여전히 있음을 기억해주길(10쪽)' 바란다고 언급한 바 있다. 그 말처럼, 책을 읽는 동안 정원을 향한 온정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여러 문학을 통해 약동하는 정원의 힘을 아는 독자라면, 저자의 마음과 기꺼이 함께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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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 번의 힌트
하승민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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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솔러지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던 까닭은, 읽는 취향이 너무나 확고한 탓이다. 내게는 '그간 입맛에 맞았던 작가의 신간 찾아보기'라는 안전한 선택지가 있었다. 하지만 때로는 즉흥적인 독서를 하고 싶다. 이를테면 매번 가는 길에서 샛길로 빠지고 싶은 충동이다. 이번 앤솔러지에는 세간의 평이 양극으로 갈려 읽기를 꺼려 했거나, 이름조차 처음 접해보는 작가가 더러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서른 번의 힌트』를 읽고자 한 계기가 되었다.


 김희재의 「잠도 가는 길」은 밀도 높은 서사를 보여준다. 전작인 『탱크』를 읽지 않아도 작중 배경과 인물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음에, 작가가 세계관을 탄탄하게 쌓아 올린 것이 드러난다. 본편에서 힘을 소모하고 후속에서 시들해지는 경우가 허다한 반면  「잠도 가는 길」은 도리어 본편에 생명력을 실어준다. 바다의 짜고 습하고 일렁이는, 한편으로는 잔잔하고 평온한 상반된 두 속성이 '탱크'라는 기이한 소재를 만나 시너지를 낸다. 맹목과 상처, 용서와 회복.  「잠도 가는 길」은 그런 물결로 다가온다.


 '그 애라면 정말 그곳에 갔을 거예요.' (본문 55쪽)


 강성봉의 「진홍: 박수 외전」은 창작계에 일고 있는 무속신앙 붐 사이에서 시큰둥한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하다. 이야기의 아름다움은 무엇보다 강력한 설득이며 해당 단편은 그 일례다. 과거의 광부가, 그의 소매 끝에 달린 나비가 지금의 박수무당을 살게 하는 한 축이 된다. '나는 나의 외로움으로서 너를 사랑하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으니 사랑하는 것이다(68쪽)'는 말이 오랜 시간을 건너 박수에게로 간다. 그리하여 박수는 혼자가 아닌 둘이 된다. 사람은 사라져도 사랑은 남아 자리를 지킨다. 


 '우여 슬프시다. 나는 너를 죽였는데 너는 나를 살렸구나.' (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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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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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의 삶이 다가온다는 것은 가볍지만은 않은 일이다. 처음에는 으레 그렇다. 보고 있으면 사랑스럽고,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은 마음. 하지만 자라나는 애정과 걱정은 비례한다. 지금 이 친구 인생이 통째로 나한테 오는 거라고? 그런 질문과 스스로에 대한 의심이 가지를 뻗는다. 더욱이 인간은 독립하기 마련이지만, 동물은 그렇지 않다. 나는 이 친구의 유년기와 성장기, 그리고 노년기까지 함께하게 될 것이다. 모든 반려인들이 한 번쯤 했을 고민이 내게도 있었다. 한 생명을 온전히 책임질 수 있을까. 그러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에 만남은 이르게 찾아왔다. 내 '어린 친구'는 햄스터였다. 지인이 기르던 햄스터가 새끼를 낳았다. 지인의 입양 권유에 우리 가족이 새끼를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입양 며칠 전부터 햄스터 공부를 하느라 몸이 열 개라도 부족했다. 톱밥, 먹이, 물통, 이갈이 용품, 케이지 등 햄스터가 살기 편안한 환경을 만들어보려고 다들 용을 썼다. 이럴 거면 준비를 더 하고 데려올걸, 하는 아쉬운 소리도 나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맞이할 준비'라는 건 평생 되지 않는다는 것. 초보 반려인 입장에서는 아무리 준비해도 부족해 보이는 법이다. 그래서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떤 어려움이 있든 하나씩 헤쳐나가 보자고. 벌써부터 무서워하지 말고. 우리는 그 아이 삶에서 한평생, 장거리 레이스를 할 사이니까.


 정이현 작가의 『어린 개가 왔다』는 나의 아주 오래된 페이지를 펼쳐보게 했다. '어린 친구'와 같이 살던 날. 모든 게 낯설고 새로워 겁내기도 하고 들뜨기도 했던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지금 정 작가의 모습은 과거의 내 모습이기도 했다. 종이 다를지언정 반려인들이 하는 생각은 놀랍게도 비슷했다. 특히 루돌이를 작명하는 대목에서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리 가족이 막 데려온 햄스터의 이름을 '봄'으로 할지, '군밤'이로 할지 선택의 기로에 놓인 날이 떠올랐다. 정작 나의 어린 친구는 이름보다도 당장 먹을 견과류가 중요했겠지만, 나는 정말이지 그 친구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주고 싶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고집이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었나 보다. 작명에 열을 올리는 정 작가의 가족 이야기를 읽으며 가슴 한편이 따끈해졌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무엇보다 선명한 '환대의 기운'이 거기 있었다.


 어쩐지 맑은 환대의 기운이 주변에 깃드는 것도 같았다. 이름을 한 번 부를 때마다 아, 이 아이가 이런 아이구나 알게 되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담아 나는 자꾸 그 이름을 불렀다. (본문 81쪽)


 돌프를 보며 좋아하는 견과류를 갉작거리다 톱밥 사이에 숨겨놓던, 내 어린 친구의 모습이 불쑥불쑥 생각났다. 그러면 행복하다가도 그리워졌다. 어떻게 보면 이번 독서는 반려동물과 함께 했던 기억을 복원하는 여정일지도 모른다. 어린 친구와 내가 처음 만났던 날, 서로를 알아보고 반겼던 날이 다시금 눈앞으로 다가온다. 빛바래지 않은 선명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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