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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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저녁 무렵에 막잔을 들이키고 남은 마른안주거리를 싸들고 기분이라며 치킨이라도 튀겨 들고 오시는 날엔 남동생이랑 나랑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나에겐 '아버지'보단 서른이 넘은 지금도 아빠로 머물고 있는 그는 이미 고인이 된지 15년이 훌쩍 넘었다. 얼마전 납골당 만료일이 다가와 또 한번 찾아간 그 곳엔 여전히 시간이 멈춰있는 듯 고요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다. 우리 아빠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세상과 자본주의에 힘을 다해 봉사하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자리. 가장이자 남편이자 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내 아버지를 단 한번이라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한 적이 있던가.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소설에선 수많은 아버지가 등장한다. 독재적 기질이 다분한 폭력적인 아버지, 존재감 없이 침묵하며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아버지, 생업을 위해서라면 치사함도 자존심도 버림은 물론이요, 타국에서의 객지생활과 참전의 투지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들....

지금 우리 세대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피부로 그닥 와닿지 않는 존재다. 이야기 속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라는 굴레가 현대의  아버지들의 목과 어깨를 짓누르는 지금. 더욱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하는게 당연지사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놓치고 보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인물들의 애환과 꿈, 희망 그리고 그들에게 노동이라는 짐을 끝도 없이 지워주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한다. 내가 읽은 게 틀리지 않다면 희한하게도 시인인 화자의 이름은 소설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소설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명우'라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아버지상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세 딸을 두었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자신과 결혼한 아내가 있다.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은 결코 불행하진 않았으나 만족스러웠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늘 딸들과 아내에게 밀려나 물주로서의 가치만을 인정받고 아빠니까 당연히 아플수도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없는 '붙박이 유랑자' 신세임을 자각한 어느 날, 그는 눈내리던 막내딸 시우의 생일날 소금푸대를 실은 트럭기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지난 날 기억 속 깊이 봉인되있었던 염부인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회한으로 남은 아버지의 임종을 기억하며 그는 불구가 된 김승민과 그의 가족에게 모든 걸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식구들과의 인연은 자연스레 끊어지게 된다. 한편, 아내인 혜란과 세 딸들은 명우가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건 그 동안 아버지와 남편에게 무심하고 잘못했던 과거의 후회와 이어진 사업실패로 인한 빚더미들 뿐이다.


시인인 '나'는 명우의 친딸 시우와 아버지 명우의 만남을 연결하는 결정적 인물이지만 그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아픈 그리움과 이혼이라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소설이지만 현대사회에 깊이 스며든 자본주의 구조의 잔인함에,  날카로운 비판과 작가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이야기가 우리 모두를 반성하고 또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도 인간이기에 첫사랑이 있었고 그 또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언제나 씩씩하고 강한 이미지만을 강요받는 자리이지만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걸 작가는 연이어 강조하고 있다.

명우는 원래의 가족에게 끝내 돌아가지 않는다. 그와 가족 사이에 놓인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가족과 그를 영원히 묶어지게 할 방법은 요원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기존의 생산성 지향의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과 이별하고 새 가족과 욕심없고 소박한 인생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귀가하지 않은 명우를 두고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좋지 않게 보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책을 덮고 이건 아니다 싶은 결말이었지만 명우가 비워두었던 공백기의 세월들이 원래의 가족들과의 간극을 이미 벌려놓을대로 벌려놓았고 그가 세운 나름의 철학 또한 대화로 풀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끝이라고 위안했다. 인생의 달고 시고 쓰고 짠맛을 경험하고, 어느 날 문득 느껴진 자신에게 부당하다 싶은 현실이란 폭풍 속에서 도피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길을 튼 주인공 명우는 진심 행복해 보였기에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싶다.

사실 이런 자본주의 구조만을 탓할 현실은 아니지만 아직도 돈 때문에 가족 간의 존속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연을 끊거나 다투었다는 소식을 들을때면 작가와 같은 비관적 논리에 쉬이 빠질 수 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빨대'와 '깔때기'로 무장한 소비중심적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가장이 될 이 사회의 모든 젊은이와, 노동에 찌든 지금의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어려운 숙제를 나 또한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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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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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고래>로 유명한 소설가 천명관의 단편소설집이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고래>를 아직 읽지 못한 나는 이번 단편집을 접하면서 다소 거칠고 서슴없는 그의 문체에 짐짓 놀라면서도 빠르게 읽히는 가독성 좋은 이야기 구조와 심각하지만 여유있는, 그러나 곧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노동과 삶'이라는 적잖이 예민한 주제로 버무려진 이 책을 유쾌하게 읽어내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천명관이 괜히 이야기꾼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드라마시티>나 <베스트 극장>과도 같은 분위기로, 깊은 여운을 주거나 새초롬한 마무리로 뒷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형식을 취한다. 사람은 자신이 죽게 되면 곧 영혼은 어디론가 떠난다고 종교계는 말하고 있지만 <봄, 사자의 서>에서 과음 후 잔디 위에서 홀연히 죽음과 대면한 실직노동자의 육체는.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이승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슬프고 쳐연하기만 하다.

외딴 섬의 두 여인 경숙과 유자가 청일점 동엽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희극적 이야기 <동백꽃>은 섬여자들의 애환이 몇 대째 대물림되는 안타까운 현실과, 인생의 목표를 찾아 섬을 떠나려는 사내들의 아이를 배어서까지 행복을 탈환하고자 하는 발버둥이 결국엔 '사교병'이라는 헤프닝으로 인해 어이없게 실패로 마무리되는 허탈함에 헛웃음만 나오는 것이 오늘날 시골처녀의 삶과 다를 것 없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 경구는 현대인의 핵가족들처럼 식구들끼리 식사를 함께 하지도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없다. 이혼한 아내와, 지금은 얼굴도 보기 어려운 아들과 딸이 그의 초라한 마지막을 지켜줄지도 의심스러운 전부인 것이다. 이런 그에게 일상의 쌓였던 분노는 무심코 건네받는 칠면조가 불씨가 되어 전성기 시절의 상징이었던 트럭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편, 귀농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은골에서의 시골생활이, 감자농사 실패와 축사의 악취에 못 견뎌 이혼과 함께 파탄나 버린 비극을 그린 <전원교향곡>은 너도 나도 뛰어드는 귀농시도에 대한 대책없는 판단을 지적하는 듯 우리 인생이 다 우리 맘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또, 불면증에 잠 못 이루면서 하루 하루를 뜬 눈으로 살아가는 <파충류의 밤>의 수경이, 자살의 늪에서 건져올린 사춘기 아이는 그나마 삶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을 만한 무언가의 가치와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천명관 작가는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일탈, 이혼, 우울, 자살이라는 비극적 코드를 그저 심각하게 그리고만 있진 않다. <핑크>에서 대리기사인 주인공에게 손님으로 가장하여 시체의 운반과 자살시도를 생각하는 대범한 핑크색 뚱녀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주인공의 손길에 마지못한 듯 걸어나오지만 이 또한 훈훈한 결과로, 현실을 냉혹하기만 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면을 그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작가는 밤, 무덤, 육체노동자와 같은 비관적이고 어두운 단어들의 맞은 편에 봄과 꽃. 그리고 '달리다'라는 가능성이 담긴 형용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절망과 희망적인 뉘앙스를 동시에 암시한다. 때로는 손톱만한 알약에 의지해 아픔을 참으며 일해야 함에도 손에 들어오는 건 단지 몇 푼 밖에 안되는 대리기사. 믿을 건 몸뚱아리 하나뿐인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도 사람의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제각기 살아가면서 곧잘 하게 되는 생각이 자신보다 재수없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다시 없을 거란 자괴감 혹은 패배감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지만, 다 똑같은 인생이다.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를 보듬고 의지해 가며 걸어가야 하는 존재. 나약하지만 어차피 달려야 하는 인생이라면 웃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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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고 싶다 - 2014년 제10회 세계문학상 수상작
이동원 지음 / 나무옆의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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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본성을 연구한 실험과 역사가 오래된 지금도 그에 관한 영화, 드라마, 소설등이 인기리에 팔리고 되새겨진다. 그러한 도덕적 선악과 폭력, 사회 부조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군대라는 곳이 오늘 이 책의 주무대이다.

군대 내 부당폭력으로 인한 자살, 탈영, 하극상등이 뉴스거리가 되어 오르락내리락 거린게 어제 오늘 일이 아닌 반면, 한편에선 요즘 군대 많이 좋아졌다고 예비군들이 호강에 겨워 젊은 군인들 군기가 다 빠졌다고 혀를 차며 자신의 왕년 현역시절을 회상하곤 한다.

소설은 내용이 다분히 예상되는 듯한 '살고 싶다' 란 제목부터 독자의 이목을 잡아 끈다. 스토리의 배경이 되는 곳은 군대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국군통합병원이라는, 군병원에서 발생한 연쇄자살사건을 둘러싼 의혹과 그를 파헤치는 주인공 이필립의 내적, 외적갈등이 핵심적으로 다루어진다. 누구보다 지적, 도덕적 우월감으로 똘똘 뭉쳤던 이필립은 입대 후 '관심사병'으로 낙인찍히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박대위의 제안을 받아들여 친구의 자살원인을 알아내고자 안 그래도 자주 들락거려 눈치보기 급급한 광통으로의 세번째 후송을 가게 된다.


친구 선한의 죽음이 단순자살이 아닌 병실 내 모함과 오해로 얽힌, 괴소문에 의한 죄책감으로 인해 발생한 결과임이 밝혀지게 되는 과정에서, 이어지는 사병들의 자살및 자살시도에 대해 무뎌진 감정과 사건해결에만 급급한 냉혈인간이 되버린 자신을 돌아보며 주인공 필립은 내면에서 올라오는 구역질나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소설은 묘하게도 기독교적 세계관과도 어렴풋이 닿아있는데 여기서 '기도'라는 행위는 군대내의 부당한 분위기에 자연스레 동화되어 저지르게 되는 폭력과 정신적 살인등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자기반성을 하거나 회개하는, 일종의 죄의식 청산의 의미가 크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러한 분위기에 적응하는 속도가 더디고 빠름에 '부적응자'과 약삭빠른 '일반병사'로 양분되는 게 오늘날의 변하지 않는 군대현실이다. 그 곳은 분명히 강자가 지배하는 권력의 남용지대지만 그러한 권력을 쥐고 흔드는 실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물갈이되고 어느새 이병이 상급자가 되어 자신이 당했던 일을 그대로 되갚아주는 악순환이 종종 자행되는 현실에, 계급과 특수한 상황에 한없이 유동적인 인간의 본성이 때론 얄궂게 느껴지기도 한다.

사회에서 겨우 스물 남짓한 인생을 살아온 한국의 남자들은 아직 직장생활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채 덜컥 군대라는 계급집단에 하루아침에 떨궈져 낯선사람들과 환경에 뒤섞이게 된다. 누군가는 자신의 가치를 재발견하고 누군가는 오만했던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된다는 군대. 작가는 그 조직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실상들 중에 자살과 우울이라는 결코 유쾌하지만은 않은 소재를 가지고도 소위 군필자들과 현역들은 알만한 군대 특유의 속어와 은유법을 잘 버무려 때론 유머스럽게 사실적으로 다가오게끔 독자들을 요리한다. 


주인공 필립과 자살한 친구 선한의 공통점 역시 군대 내에서 자신의 가치 재증명이라는 처절한 자기구원에 있었다. 시인이라는 꿈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계기가 된 선한의 여장교를 향한 짝사랑, 하지만 다수를 이끌어야 하는 병실장의 입장에서 수치심으로 가득찬 소문이 퍼짐에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자살을 택한 선한이 마지막으로 찾은 이는 ....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오버랩되어 생각나는 이 소설은 최근 군대조직내 위계질서를 심하게 왜곡해 보여준 미디어와 예능과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며 진행된다. 표면적으로 사라진 듯한 이러한 부정부패 관습은 군대뿐만이 아니라 권력이 존재하는 사회 어느곳에서나 찾아 볼 수 있다. 전쟁을 대비하고 평화를 위해 만들어진 집단 모임이 아니러니하게도 구타와 살인, 탈출이라는 음습한 사회현실의 반영이 되는 대표적인 곳이라는 것이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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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읽기를 권함 - 2004년 2월 이 달의 책 선정 (간행물윤리위원회)
야마무라 오사무 지음, 송태욱 옮김 / 샨티 / 200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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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나오는 책들은 수도 없이 많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책들을 살아 있는 동안 다 읽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책을 많이 소유한 장서가들 또한 수없이 많다. 우리가 책을 탐하고 글자를 읽어들이는 행위에 대해 속도전이 붙은 건 대체 언제부터일까.

이 책의 저자 야마무라 오사무는 독서 자체의 즐거움을 모른 채 그저 본 책이 쌓여가는 완독의 뿌듯함만을 추구하는 '속독가'들과 다독가들이 득세하는 요즘 오히려 느림의 미학을 독서법에서 찾으라고 권한다. 나는 평소에 심심하면 문화블로그나 책 쇼핑몰에서 남이 쓴 서평 보기를 즐겨 하는데 하나같이 빠르게 책을 읽어내는 그들의 이해할 수 없는 독서속도가 종종 궁금하기만 했다. 활자중독증은 아니지만 남들에 비해 유난히 책을 보는 속도가 더딘 나는, 하나의 책이 끝나지 않으면 다른 책을 펼치지 못하는 강박때문에 더욱 그 스피드란 것이 날 수가 없다. 작가 야마무라는, 속독법이 필수요건이 되어야만 하는 직업인들은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목적 없이 읽는 독서 또한 중요하다고 말한다. 책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그 하루 해가 기우는 것, 독서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여유롭고 순수하게 즐겨야 한다고 말이다. 

요즘엔 책을 하나의 수단으로 여기는 독자들과 그에 대응한 실용서들이 유독 많다. 논문의 준비로 직업상 봐야 하는 책, 요리책, 취미서적, 자기계발서등은 보통 그 책을 찾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독자가 있는 책으로,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진정한 독서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 야마무라씨의 의견이다. 또 한 권의 책을 끝맺지 않고 훑어보거나 중단에 그만둔다면 그것 또한 완전한 독서를 했다고 보긴 어렵다는 글은 나도 같은 생각이라 동질감이 느껴진 부분이었다.


그렇다면 천천히 읽는다는 것과 속독의 기준은 무엇일까. 그것을 소설로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 어떤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에서 그 그림이 충분이 연상, 상상이 되지 않거나 다시 재독했을 때 기억나는 소절이 없다면 그 책은 읽은지 너무 오래 된 것이 아니면 속독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할 부분이다. 사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책들을 모두 이런 방식으로 읽는다면 지식의 습득은 너무나 편협한 수준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속독이 필요한 책과 그렇지 않은 책을 골라내는 지혜가 필요한데 그래서 책을 고를때의 신중함의 중요성과 속독술이 있다면 중요한 책은 걸러내기용으로 이용하는 현명함이 필요한 것 같다. 소위 킬링타임용이라 불리는 시간 죽이기책 또한 생산자(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또한 창작의 결실로 맺어진 중요한 산물일 것이다. 작가가 말하기를 '내가 읽고 싶은 책이면서 속독이 가능한 책은 한 권도 없다'고 하는데 그 말인 즉슨,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읽고 싶은 책을 후루룩 대충 읽고 싶은 사람이 어디겠느냐는 뜻일 것이다. 그는 일본의 유명한 장서가이자 속독술에 능통한 다치바나 다카시를 예로 들며 그들의 독서법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은 없으나 분명히 속독이 아닌 느리게 읽음으로서 얻을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 속독을 하면 유머스럽고 통쾌하며 때론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깨달음의 순간에서조차 무심히 지나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독서를 하며 웃고 감탄사를 연발하고 그런 행위를 동반하는 건 독서를 즐기고 있다는 반증일 것이다. 작가는 음식과 독서 그리고 거시적인 측면에서 삶까지 연결되는 부분이 있다고 본다. 음식과 책을 생산하는 사람들에 비해 그것을 소비하는 시간이 극도로 짧은 점은 유난히도 닮은 면이 있다. 우리가 인생에서 조절할 수 있는 행동의 몇 안되는 부분 중 독서라는 행위를 강박적으로 빨리 해치울 필요는 없지 않은가. 우리 주위에는 다독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한달에 몇권, 일년에 몇권을 목표로 그것만을 향해 미친듯 달려가는 사람들 또한 많다. 나 또한 그러한, 누가 칭찬해주지도 않는 목표달성에 흐뭇해하며 양적인 독서에 집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책을 얼마만큼 읽었다는 것에 만족을 느끼기보다는 어떤 책을 보기전에 드는 설레임, 읽는 동안의 즐거움, 다 읽고 난 후의 행복을 두루 갖춘 독서가 이루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양질의 독서를 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작가는 한 주의 시작을 새로운 책으로 시작함으로써, 그리고 마지막을 완독의 즐거움으로 마감함으로써 나름의 독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시간과 독서의 교화를 느낀다고 말한다. 책을 읽는 시간이 아깝고 두렵다면 아예 독서를 해야 할 이유도 없어지는 것이다.어차피 세상에는 죽기 전엔 읽지도 알지도 못할 많은 책들이 존재하는데 이왕 독서를 할 바에야 몸에 부대끼는 많은 양의 책을 읽으려고 몸부림치는 책의 대식가이기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책을 선정하여 천천히 맛을 음미하듯 때론 한가롭게까지 즐기는 여유를 가지고 하는 독서가 필요하다는 그의 말에 요즘 부쩍 속도가 붙은 나의 독서에 제동을 거는 요인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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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은 왜 나쁜 사회를 만드는가 - 철학이 묻고 심리학이 답하는 인간 본성에 대한 진실
로랑 베그 지음, 이세진 옮김 / 부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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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심리학에 대해서, 더 구체적인 영역으로 말하자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래서 가끔 신문사회면을 장식하는 패륜범죄나 뉴스, 인터넷보도로 접하게 되는 감동적인 사연등을 보며 일차적으로 느끼는 안타까움, 존경심 외에 학문적으로 그것들을 파헤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곤 한다. 이 책은 그러한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른 행동을 하게 되는 사람의 심리, 배경, 사회적 지위등의 수많은 조건화가 끼치는 영향을 실험을 통해 알아보고 도덕성에 관련된 우리의 고정관념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주는 교정서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나 자신에 대한 도덕성을 깨우치기 시작하는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이상하리만치 타인보다 본인에 대해 도덕적으로 관대한 면이 있다. 상황적으로 그럴수밖에 없었다거나 상대방의 의도가 처음부터 나빴다거나 하는 이유를 대며 종종 나는 다른사람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착각을 하곤 한다. 또한 외모나 말씨, 학벌과 지위에 따라 어떤 사람을 표면적으로 좋고 나쁘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투명사회'라고 불리는 요즘, 자신의 모든 신상이나 인터넷에 남긴 흔적등이 맘만 먹으면 네티즌수사대에 의해 털릴 수 있는 감시체제에서 우리는 항시도 맘의 고삐를 풀지 않고 도덕적으로 신중한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사회에 직면해 있다. 과거 지하철막말녀나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는 '땅콩회항', '갑질논란'등의 사건을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윤리적으로 어긋난 행동을 하는 순간 다수의 악플과 논란을 피해갈 길이 없는 것만 봐도 연예인, 공인이라서 몸을 사리고 조심해야 한다는 말이 이젠 일반인이라고 예외일 수 없는 없는 것 같다. 누군가 늘 지켜보고 있다는 이런 감시효과는 확실히 사람들이 도덕적 규칙을 위반하려는 유혹에 빠지는 걸 막을 수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사람들이 규칙을 준수하고 법을 어기지 않는 이유가 개인의 선함, 도덕적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그런것이라고만 단정지을 수는 없다. 이러한 선의를 가장해 악행을 저지르는 사회악들도 분명히 존재하고 우리의 고정관념인 착한 사람의 이미지를 이용해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도 있다. 아무리 개인적으로 흠잡을 데 없이 윤리적인 사람이라 해도 어느 집단에 속하여 그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되리란 예측은 하기 어렵다. 과거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했던 총지휘자나 수많은 전쟁에 투입됐던 군인들은 개개인으로 보면 평범하기 그지없거나 오히려 선한 이미지에 가까웠다고 학자들은 전한다.


지금 일하고 있는 곳의 보수보다 다섯배를 준다며 한달만 일해달라고 당신을 유혹하는 사업대표자가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 사업체는 유령회사이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는 약물을 취급하고 탈세혐의를 받고 있다고 하면 선뜻 그 제안에 응할 수 있겠는가. 아마도 개인의 소신이나 성격에 다르겠지만 누구라도 들킬 위험이 매우 적고 보상이 큰 이런 파격적적 제안에 맘이 동요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성폭행을 당한 여성 피해자에게 '그런 옷을 입고 다니니 그런 일을 당했지'라는 얘기를 종종 듣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은 피해자에게 어느 정도 도덕적 책임을 묻는 건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질병이나 사고에 의해 몸져 누웠을 때에도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느냐에 따라 그 사람에 대한 동정이나 연민을 쏟는 관심도는 달라진다. 대구 지하철 참사, 최근의 세월호 침몰 사건은 이 모두가 사건의 원인을 차치하고서라도 어느 정도 윗사람에 의해 피해를 최소화 할수 있었던 통제 가능한 상황이었기에 법적인 처벌과 여론의 뭇매를 피할 수 없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헬기조종사가 촌각을 다투는 추락 직전에도 인파가 적은 곳으로 이동해 죽음을 맞이하고 대참사를 면한 사건은 그 의미가 특별하고 안타깝기 그지 없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나라면 그 상황에서 절대로 그런 짓을 하지 않았을 거라는 성급한 예상 또한 '권위에 대한 복종'현상이나 상황의 가변성등이 그러한 가정을 무력하게 만드는 대표적 요인이다. 관객이 많은 상황에서 큰 싸움이 벌어지거나 도박판의 판돈이 커지고, 지위가 올라갈수록 도덕적 규범위반에 대해 관대해지는 사람을 발견할 때,우리는 한치앞을 예측할 수 없고 내일의 일 또한 알 수 없기에 도덕적 사유와 행동을 요구하는 약속은 언제나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함을 잊지 말아야 것이다. 사람들은 은연중에 악행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의 사람의 심리를 매우 궁금해한다. 그래서 <그것이 알고싶다>와 같은 시사교양 프로가 매주 적지 않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고 떠오르는 사건마다 영화화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보는 것은 때로는 불편하고 꺼림칙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편으론 나 자신에 대해 알고자 하는 욕구와 별반 다르지 않다. 나를 성찰하고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 이러한 습관은 사회에 정의를 실현시키는 대의 만큼이나 중요한 일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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