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지음 / 창비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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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작품 <고래>로 유명한 소설가 천명관의 단편소설집이다. 

하지만 그 유명하다는 <고래>를 아직 읽지 못한 나는 이번 단편집을 접하면서 다소 거칠고 서슴없는 그의 문체에 짐짓 놀라면서도 빠르게 읽히는 가독성 좋은 이야기 구조와 심각하지만 여유있는, 그러나 곧 이야기에 빠져들게 되면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게 만드는 '노동과 삶'이라는 적잖이 예민한 주제로 버무려진 이 책을 유쾌하게 읽어내게 만드는 재주를 가진 천명관이 괜히 이야기꾼 소리를 듣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다. 


이 책은 총 8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언젠가 tv에서 보았던 <드라마시티>나 <베스트 극장>과도 같은 분위기로, 깊은 여운을 주거나 새초롬한 마무리로 뒷이야기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형식을 취한다. 사람은 자신이 죽게 되면 곧 영혼은 어디론가 떠난다고 종교계는 말하고 있지만 <봄, 사자의 서>에서 과음 후 잔디 위에서 홀연히 죽음과 대면한 실직노동자의 육체는. 자신의 영혼이 완전히 몸을 벗어나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이승의 기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슬프고 쳐연하기만 하다.

외딴 섬의 두 여인 경숙과 유자가 청일점 동엽을 사이에 두고 각축을 벌이는 희극적 이야기 <동백꽃>은 섬여자들의 애환이 몇 대째 대물림되는 안타까운 현실과, 인생의 목표를 찾아 섬을 떠나려는 사내들의 아이를 배어서까지 행복을 탈환하고자 하는 발버둥이 결국엔 '사교병'이라는 헤프닝으로 인해 어이없게 실패로 마무리되는 허탈함에 헛웃음만 나오는 것이 오늘날 시골처녀의 삶과 다를 것 없이 느껴진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의 주인공 경구는 현대인의 핵가족들처럼 식구들끼리 식사를 함께 하지도 대화를 나누는 시간도 없다. 이혼한 아내와, 지금은 얼굴도 보기 어려운 아들과 딸이 그의 초라한 마지막을 지켜줄지도 의심스러운 전부인 것이다. 이런 그에게 일상의 쌓였던 분노는 무심코 건네받는 칠면조가 불씨가 되어 전성기 시절의 상징이었던 트럭과 함께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한편, 귀농의 부푼 꿈을 안고 시작한 은골에서의 시골생활이, 감자농사 실패와 축사의 악취에 못 견뎌 이혼과 함께 파탄나 버린 비극을 그린 <전원교향곡>은 너도 나도 뛰어드는 귀농시도에 대한 대책없는 판단을 지적하는 듯 우리 인생이 다 우리 맘같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다. 또, 불면증에 잠 못 이루면서 하루 하루를 뜬 눈으로 살아가는 <파충류의 밤>의 수경이, 자살의 늪에서 건져올린 사춘기 아이는 그나마 삶의 끄트머리를 부여잡을 만한 무언가의 가치와 희망을 대변하는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천명관 작가는 이야기에서 주로 등장하는 일탈, 이혼, 우울, 자살이라는 비극적 코드를 그저 심각하게 그리고만 있진 않다. <핑크>에서 대리기사인 주인공에게 손님으로 가장하여 시체의 운반과 자살시도를 생각하는 대범한 핑크색 뚱녀는, 마지막 희망과도 같은 주인공의 손길에 마지못한 듯 걸어나오지만 이 또한 훈훈한 결과로, 현실을 냉혹하기만 한 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면을 그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인다.


작가는 밤, 무덤, 육체노동자와 같은 비관적이고 어두운 단어들의 맞은 편에 봄과 꽃. 그리고 '달리다'라는 가능성이 담긴 형용사를 사용함으로써, 이야기의 절망과 희망적인 뉘앙스를 동시에 암시한다. 때로는 손톱만한 알약에 의지해 아픔을 참으며 일해야 함에도 손에 들어오는 건 단지 몇 푼 밖에 안되는 대리기사. 믿을 건 몸뚱아리 하나뿐인 공사판 일용직 노동자의 입장에 서 있어도 사람의 인생은 다 거기서 거기 아닐까. 제각기 살아가면서 곧잘 하게 되는 생각이 자신보다 재수없고 힘든 삶을 사는 사람이 다시 없을 거란 자괴감 혹은 패배감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지만, 다 똑같은 인생이다. 일확천금의 주인공이 아닌 이상 우리는 서로를 보듬고 의지해 가며 걸어가야 하는 존재. 나약하지만 어차피 달려야 하는 인생이라면 웃음과 희망을 잃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 하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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