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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 - 박범신 장편소설
박범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 아버지는 막걸리를 좋아하셨다. 저녁 무렵에 막잔을 들이키고 남은 마른안주거리를 싸들고 기분이라며 치킨이라도 튀겨 들고 오시는 날엔 남동생이랑 나랑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는데. 나에겐 '아버지'보단 서른이 넘은 지금도 아빠로 머물고 있는 그는 이미 고인이 된지 15년이 훌쩍 넘었다. 얼마전 납골당 만료일이 다가와 또 한번 찾아간 그 곳엔 여전히 시간이 멈춰있는 듯 고요했다.
소설을 읽으면서 많이 울컥했다. 우리 아빠도 그런 심정이었을까. 세상과 자본주의에 힘을 다해 봉사하고 가족들을 위해서라면 무엇도 마다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자리. 가장이자 남편이자 한 집안의 기둥이었던 내 아버지를 단 한번이라도 나와 같은 사람으로서 생각한 적이 있던가.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소설에선 수많은 아버지가 등장한다. 독재적 기질이 다분한 폭력적인 아버지, 존재감 없이 침묵하며 묵묵하게 제자리를 지키는 아버지, 생업을 위해서라면 치사함도 자존심도 버림은 물론이요, 타국에서의 객지생활과 참전의 투지도 마다하지 않는 아버지들....
지금 우리 세대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피부로 그닥 와닿지 않는 존재다. 이야기 속에서 문제시되고 있는 소비자본주의라는 굴레가 현대의 아버지들의 목과 어깨를 짓누르는 지금. 더욱 그것을 생각해 봐야 하는게 당연지사겠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작가는 이렇게 우리가 놓치고 보지 못하는 아버지라는 인물들의 애환과 꿈, 희망 그리고 그들에게 노동이라는 짐을 끝도 없이 지워주는 비정상적인 사회구조를 비판한다. 내가 읽은 게 틀리지 않다면 희한하게도 시인인 화자의 이름은 소설에서 끝내 나오지 않는다. 대신 주인공 남자가 자신의 소설로 쓰고자 하는 이야기의 중심에 '선명우'라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아버지상이 투영되어 있다. 그는 세 딸을 두었고 유복한 집안에서 자라 자신과 결혼한 아내가 있다. 가족끼리 보내는 시간은 결코 불행하진 않았으나 만족스러웠다고 말하기도 어려웠다. 늘 딸들과 아내에게 밀려나 물주로서의 가치만을 인정받고 아빠니까 당연히 아플수도 희로애락을 느낄 수도 없는 '붙박이 유랑자' 신세임을 자각한 어느 날, 그는 눈내리던 막내딸 시우의 생일날 소금푸대를 실은 트럭기사와 우연히 마주치게 되면서 지난 날 기억 속 깊이 봉인되있었던 염부인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게 된다. 회한으로 남은 아버지의 임종을 기억하며 그는 불구가 된 김승민과 그의 가족에게 모든 걸 희생하기로 결심하고 식구들과의 인연은 자연스레 끊어지게 된다. 한편, 아내인 혜란과 세 딸들은 명우가 없어진 다음에야 그의 존재에 대해 소중함을 느끼지만 그들에게 남겨진 건 그 동안 아버지와 남편에게 무심하고 잘못했던 과거의 후회와 이어진 사업실패로 인한 빚더미들 뿐이다.
시인인 '나'는 명우의 친딸 시우와 아버지 명우의 만남을 연결하는 결정적 인물이지만 그 역시 아버지에 대한 아픈 그리움과 이혼이라는 과거사를 가지고 있다. 등장인물 중 어느 누구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에서 행복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우울한 소설이지만 현대사회에 깊이 스며든 자본주의 구조의 잔인함에, 날카로운 비판과 작가 자신의 확고한 가치관이 뚜렷이 드러나 있는 이야기가 우리 모두를 반성하고 또 불편하게 한다. 아버지도 인간이기에 첫사랑이 있었고 그 또한 주체적인 삶을 영위할 권리가 있다는 걸, 그리고 언제나 씩씩하고 강한 이미지만을 강요받는 자리이지만 외롭고 쓸쓸한 존재라는 걸 작가는 연이어 강조하고 있다.
명우는 원래의 가족에게 끝내 돌아가지 않는다. 그와 가족 사이에 놓인 자본주의라는 '괴물'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의 가족과 그를 영원히 묶어지게 할 방법은 요원하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신, 그는 기존의 생산성 지향의 앞만 보고 내달리는 삶과 이별하고 새 가족과 욕심없고 소박한 인생으로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귀가하지 않은 명우를 두고 소설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좋지 않게 보는 독자들이 많을 것 같다. 나 역시 책을 덮고 이건 아니다 싶은 결말이었지만 명우가 비워두었던 공백기의 세월들이 원래의 가족들과의 간극을 이미 벌려놓을대로 벌려놓았고 그가 세운 나름의 철학 또한 대화로 풀어갈 수 없을 거란 생각에 너그럽게 받아들여지는 끝이라고 위안했다. 인생의 달고 시고 쓰고 짠맛을 경험하고, 어느 날 문득 느껴진 자신에게 부당하다 싶은 현실이란 폭풍 속에서 도피와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길을 튼 주인공 명우는 진심 행복해 보였기에 그것으로 나는 만족하고 싶다.
사실 이런 자본주의 구조만을 탓할 현실은 아니지만 아직도 돈 때문에 가족 간의 존속범죄가 자주 일어나고 연을 끊거나 다투었다는 소식을 들을때면 작가와 같은 비관적 논리에 쉬이 빠질 수 밖에 없단 생각이 든다. '빨대'와 '깔때기'로 무장한 소비중심적 자본주의 세상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현명한 태도는 무엇일까. 누군가의 아버지가 되고 가장이 될 이 사회의 모든 젊은이와, 노동에 찌든 지금의 아버지들에게 주어진 어려운 숙제를 나 또한 함께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