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이면 - 1993 제1회 대산문학상 수상작, 개정판
이승우 지음 / 문이당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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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랑을 한다는 것은, 배우고 익힘을 필요로 하는 기술과 다름은 또 무얼까요.

여기, 사랑받지 못해 사랑하는 법을 몰라, 소중한 사람을 놓쳐버린 안타까운 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유년기와 고향, 그리고 원죄로 남아 버린 아버지를 무한 부정하며 살아가는 고립된 존재 '박부길'. 소설 <생의 이면> 속 작가가 취재하며 탐구하는 액자 속의 또 다른 인물인 그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남과 다르고 자신 또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어려서부터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하고 통속적인 관념이나 세인들의 가치관에도 쉬이 따라가지 못하는, 그야말로 독특한 인자죠. 그저 체계없는 독서에의 탐닉과 어딘가 있을 자신과 같은 부류를 찾아 끝없이 더듬이질을 멈추지 않는 그에게, 세상은 냉정하고 만만찮은 곳이기만 합니다. 자신과 맞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해, 자신과 다른 남들 편의 선 세상에 한없이 절망하고 고뇌하는 부길의 심정은 소설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불쌍한 어머니. 우리는 이 땅에 잘못 내려진 겁니다. 불시착한 겁니다. 이 곳은 나의 땅이 아니고, 당신의 땅도 아닙니다. - p.133


 아버지의 죽음 이후 친정으로 쫓겨나 재가한 어머니는 홀로 남겨진 그에게 죄스러운 자책감을 애써 평생 짊어지고 눈물로 살아갑니다. 그는 그렇게 부족한 모성결핍이라는 퍼즐을 맞추려는 듯, 숙명과 같은 연상에의 동지를 언제부턴가 자신의 동반자로 그리며 꿈꾸게 됩니다. 비가 내리던 어느 치욕스런 밤, 고요한 예배당에서 그 운명적인 만남은 드디어 이루어지고 작가 이승우의 인물 내면묘사는 이 부분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와 그녀는 뭇 연인들과는 다른 차원의 연애를 하는데요, 그것은 남녀간의 사랑이라기보다는 마치 한 인간이 초월적 대상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기꺼이 헌신하는 모습 즉, 인간과 신의 수직적인 관계와도 같아 보입니다. 허나 소설 속에서 신격화(?)되고 있는 그녀는 그의 그런 태도가 무척이나 부담스럽습니다. 일찍이 사랑받은 적이 없고 그래서 사랑하는 법조차 몰랐던 그는 그녀를 자기만의 소유물로 간직하려 하고 심한 집착까지 보이며 그걸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었던 잘못된 방법론 때문이었지요.


그녀는 그에게 하나의 여자일 수만은 없었다.(...) 여러 가지 측면에서 그의 그녀에 대한 묘사는 에밀 싱클레어의 에바 부인에 대한 숭배의 냄새가 난다. 에바 부인은 여성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라 거의 신성으로서의 숭배의 대상이 되지 않던가. (...) 박부길이 그녀에 대해 맺고 있는 관계가 그러하다. 성의 구별이 무색한 자리에 그녀는 있는 것이다. - p.218


 그렇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있어 연인이기 이전에 자신과 같은 생각과 모습을 갖춘 동지이며 숭배의 대상, 곧 신성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소설의 배경으로 줄곧 교회가 자주 비치는 것도 이러한 의미가 내포된 내용을 더욱 강조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는 골방에 갇혀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과거를 떠나, 그녀를 통해 빛을 보았고 새로운 세상을 맛보았다고 말하지만 안타깝게도 둘은 함께, 하지만 각자 다른 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임재범의 <너를 위해>. 소설을 읽고 문득 생각나는 노래입니다. 남자는, 여자가 불면 날아갈까 어느 날 사라져버리진 않을까 전전긍긍 불안해 하고, 여자는 잦은 불화와 헤어짐의 위기에도 다져진 신앙심과 모성본능을 발휘하여 그의 모든 걸 감싸안으려 하지만 자신만의 노력으로 역부족인 위태로운 이 사랑이 계속 지속되어야 하는 것인지 심히 혼란스러워합니다.


이 소설은 다양한 의미로 읽혀질 수 있겠는데요, 종교적인 의미로써 신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 단순히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에 치중하여 연애소설로도 볼 수 있겠지요. 하지만 제가 유독 집중하여 생각하게 된 것은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에 대한 고찰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할때에는 그 배움이 필요한가. 소설은 응당 그래야 한다고 말합니다.


사랑도 배워야 하는가. (...) 인간은 삶에 필요한 모든 기술을 습득하려고 한다. 그런데 왜 사랑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사랑에 대한 생각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처럼 수월한 것은 없다거나 사랑은 자연 발생적인 것이므로 따로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따위의 안이한 생각에 빠져 있다.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은 많지만, 사랑에 대한​ 자신의 능력 부족이 실패의 원인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사랑을 유쾌한 감정 놀음이나 우연한 몰입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다. 사랑에도 기술이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술들을 배우고 익혀야 한다면, 사랑이야말로 그래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랑보다 더 소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 p.258


상대를 신격화하여 사랑하는 것, 자신의 인생이 통째로 뒤바뀔 만한 중대한 선택조차도 그 상대가 바라는 대로 아무렇지 않게 결정해버리는 것을 어떻게 봐야 할까요. 어려운 문제입니다. 더구나 주인공 박부길은 단순히 그녈 사랑해서가 아니라 완벽함의 이데아로 떠받듦으로써 자신과 그녀를 일체시켜버리는데요. 이런 사랑은 현실에서 지독한 사랑이고밖에 일컬어질 수 없을 듯 합니다. 결국 그는 이상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원래 자신의 자리였던 골방으로 숨어 돌아가 글쓰기에 미친 듯 천착합니다. 그리고 그 결실의 산물이 <생의 이면>소설 속에 고스란히 잠들어 있습니다. 


유난히 감명깊고 여운이 긴 거장의 작품을 만날 때면 작가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여태껏 보아왔던 책들 중 대단한 작품들의 작가들 다수가 이미 운명을 달리 해 버린 걸 너무 많이 목격해 와서 생긴 편견이라고나 할까요. 다행히 이승우 작가님은 지금도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고 계시고 글꾼들을 많이 배출한 전남 장흥 출신이시라 반갑기도 했습니다. 책장에 꽂혀 있는 <지상의 노래>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8월의 자유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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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이 책 왜 출간이 이리 늦죠?? 북펀드 참여하라고 한지가 언젠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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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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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악의 무의미함, 그 경계가 힘없이 무너지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이토록 담담하고 인간적이게 쓰여진 책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며 상상을 해보았다. 먹을 음식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어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물에 입을 대고 삶을 갈구했던 이들을. 그리고 지금의 내 안락함을.


비극적 상황묘사나 역사의 참상을 증오하면서도 때때로 관련서적을 찾아보는 이유는 그것을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굳이 변명을 해본다. 저자 프리모 레비는 악명 높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10개월여에 이른 감옥생활을 하며 이 책을 집필해 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군에게 포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유대인과 기타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학대하는 현장에서 끝까지 인간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사투가 눈물겹다. 배급된 빵 한조각과 죽 1리터, 닳아빠진 속옷이 그들을 구원하는 생명줄이며 때론 신경전의 원인이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사회에서의 도덕성따윈 일치감치 버려야 한다. 전형적인 정신병자 혹은 범죄자의 교활한 수법이 하루를 견디고 생을 이어가는 지름길이다그 곳은 법과 질서가 존재치 않는 적자생존의 원시공간이며 약삭빠르고 먹잇감을 노리는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짐승의 눈빛을 가진자만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곳이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매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 p.134


수인들을 대하는 간수들이 그들을 대하는 눈빛을 설명한 대목에서 유대인을 경멸하다 못해 마치 생물학적으로 하등한 종을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탐구와 호기심의 영역에서 그것을 탐구하고 분석해보고 싶어하는 저자의 관조섞인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p.162


아우슈비츠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식량부족과 질병, 체력고갈 사망등은 물론이고 내일이라도 당장 선발대열에 휩쓸려 가스실로 끌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이유로 수인들은 먹을거리가 생기면 냅다 쑤셔넣기에 바빴다. 서로간에 경쟁과 모멸, 증오을 부추기며 수치심을 잃어가는 인간존엄의 바닥의 끝을 달리는 수용소에서 끝까지 체제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동료 슈타인라우프의 메시지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큰 울림을 주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 p.57 ~ 58


감옥 내에서도 '조직'이란 이름으로 비밀스런 행동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왜 그들은 집단항거나 투쟁을 할 수 없었을까. 레비는 독자들의 한결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암묵적 경고로 가끔씩 눈앞에 펼쳐지는 공개처형은 일말의 탈옥 시도나 투쟁심을 일시에 잠재워버렸고 실체가 없는 듯한 나치즘의 공포세력은 그들의 무력감을 한층 더 돋구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련의 사회주의보다 몇 갑절 더 지독한 것이었다고. 이것이 인간인가. 고통을 가하는 인간도 그 고통에 무디어질대로 무뎌져 초점을 잃은 눈만 간직한 채로 짐승의 사체처럼 무력하게 놓인 수많은 인간에게서도 인간성은 불시에 자취를 감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 p.187


특이할 만한 점은 프리모 레비가 화학자로서 비상한 머리를 지녔었고 비교적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서 생존자로 살아남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지녔던 건 사실이지만 글을 쓰는 직업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서술 방식이나 당시를 회고한 대목 하나 하나에 빨려들어갈 정도의 흡입력과 문장력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업성을 염두해 두고 출판한 다른 소설이나 유명작가의 글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피해자이며 생존자로써 처참했던 상황과 그 시대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무와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필사적인 진술과 같은 글력으로 발휘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프리모 레비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다고 해도 시대의 대변자가 되어 그의 역할을 대신했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죽음에서의 사투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그는 자택에서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름없는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이기에 더욱 우리에게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증언문학의 한 획을 그은 이로써 그의 죽음과 남긴 저서들은 600만여명의 유대인의 혼을 기리며 이후로도 쭉 그 빛을 발할 것이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7월의 테마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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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의 세계사
가와기타 미노루 지음, 장미화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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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역사 혹은 ~의 세계사와 같은 이름이 붙은 책은 항상 날 설레게 한다. 이런 책은 일상의 물건이나 관습, 문화가 과거로부터 어떻게 현재까지 이르게 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설명하고 그 전반에 걸친 관련 역사까지 폭넓게 알 수 있어 흥미로운 독서 겸 공부가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달 외우기 식이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부분을 중점으로 역사나 세계사를 익힐 수 있다면 좀 더 재밌고 이해가 쏙쏙 될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렸을 때 단 것을 싫어했던 사람이 있을까? 달달한 초콜릿, 과자, 사탕, 빵에 이르기까지 설탕이 들어간 음식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사랑받는 대표적 식품으로 자리잡아 왔지만 오늘의 책 <설탕의 세계사>에 등장하는 과거 역사 속의 설탕은 '세계상품'으로써 그 패권을 쥐고 흔들려는 서구 열강들의 탐욕적 수단으로 이용되어 처참한 살육과 노예무역을 활성화시켰던 주 원인이었다. 설탕의 원료가 되는 사탕수수는 그 특성상 적절한 기후와 강수량, 토지 그리고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바 당시 카리브 해 일대와 남아메리카 부근 지역에 많은 식민지를 확보했던 영국과 포르투갈, 프랑스가 중심이 되어 설탕과 그 설탕으로 인한 교환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쌓기에 여념이 없었다.


때문에 증기기관차나 공장 등의 최신기계 설비도 보다 많은 설탕 생산을 목적으로 도입, 사용되었고 모든 지대를 뒤덮은 사탕수수의 단일경작은 다른 일상 식품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는데 해안가에 위치한 지도 위의 무수한 플랜테이션이 그걸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설탕이 대량 생산 모드로 전환되었을 때까지도 그 비싼 몸값에 상류층과 귀족들의 권위를 상징하는 과시용과 약품등의 용도로 오랜기간 사용되었을 뿐 일반 대중들이 그 달콤한 맛을 보기까지는 그 후로도 꽤 긴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그리고 정치와 경제를 논하던 살롱이나 카페문화가 번지면서 차와 커피를 만난 설탕이 그 담소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다. 특히 영국은 유독 많은 설탕 수입량을 자랑했는데 신분이나 계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식생활과 '스테이터스 심벌'을 선망한 많은 이들의 상류층 따라하기의 일환으로 널리 대중에게 빠르게 퍼져 나간 것이 그 이유였다.


19세기 들어 농촌의 인구가 도시로 급격히 밀려들면서 사람들의 생활습관은 규칙적인 리듬으로 바뀌게 되고 하루 세끼의 식사와 티타임에서 노동자들이 즉효성 있는 칼로리 보급원으로써 설탕에 대한 의존력이 높아진 것은 과거 왕실과 상류계급이 누리던 사치식품으로 즐겨졌던 설탕이 지니게 된 또다른 모습이었다. 이 시기에는 설탕으로 부를 쌓은 대부호들이 왕가 못지 않은 사치를 누리고 당대 정치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한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번다는 옛말처럼, 땀과 고통으로 얼룩진 흑인노예들의 노동력이 없었다면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던 유럽 식문화의 발전을 꽃피운 달콤한 설탕의 아픈 역사는 그 맛이 달기에 더욱 안타깝게 느껴진다. 우리 식탁에 올라오는 많은 음식들은 가깝게 보면 농부들의 땀과 유통과정으로 대변될 수 있겠지만 더 멀리 본다면 과거 먼 역사에서부터 이렇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할 수도 있다는 것. 윤리적 소비가 강조되는 오늘날 더욱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일 것이다.


또한 산업혁명의 중심지로 지금도 반듯한 이미지의 신사의 나라로 알려져 있는 영국이란 나라가 과거 제국주의로 똘똘 뭉쳐 식민지 쟁탈과 노예무역을 일삼은 오욕의 역사를 통해 다시 한번 씁쓸한 진실을 알아버린 듯한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7월의 자유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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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다 - 김영하에게 듣는 삶, 문학, 글쓰기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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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하 작가의 글을 접한 건 이번이 다섯번째다. <살인자의 기억법>,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 <보다>에 이어 이번 산문집 <말하다>에 이른 것인데 처음 앞의 두 작품을 읽었을 때 받았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 작가 대체 뭐지?'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해 서평도 못 썼다. 살인이니 파괴니 하는 코드가 소재주의자로 느껴질 만큼 강한 이미지로 다가왔기에 '김영하'라는 사람 자체에 궁금증이 막 일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음울한 소설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소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며 이 사회에 대해선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해서 펼쳐본게 두 산문집이었던 것이다.


팟캐스트에서도 얼핏 들었던 얘기지만 그는 작가가 될 만한 그 어떤 요소도 없던 인물이었다. 그저 무난한 중산층의 인생. 군인 아버지에, 굳이 작가가 되지 않았어도 밥벌이는 충분히 할 수 있었던 배경을 갖췄지만 계시처럼 이 길은 내 길이 아니라며 뛰쳐나온 것이다. 요즘 세상같으면 전혀 상상도 못할 무모한 짓이지만 가능성이 넘쳤던 경제성장의 시기였기에 그 무모함이 먹혔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작가로서의 정석대로를 밟지 않고 작가가 되었기에 체감하는 좋은 면도 분명히 있다고 한다.


분명 그렇다. 작가를 준비하며 거치는 전공교육을 통해서는 글을 기술과 일, 방법으로 대할 뿐이지만 글 쓰는 작업이 주는 본연의 기능, 말하자면 글을 쓰면서 자신이 느끼는 변화나 힐링의 효과에 대해서는 무신경하기 쉽다. 소설이라는 것은 엄연히 출판시장에 속해있고 판매량과 독자들의 반응, 비평등에 영향을 받기 쉬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가 글쓰기 본연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 직업적인 피로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좀체 어려운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작가 김영하의 작품 세계는 가히 지치지 않는 즐거움의 세계같아 보인다.


작가는 그런 존재라고 생각해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상상력 안에 갇혀 있을 때 작가들은 더 멀리 나아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감히 꿈꾸지 않는 것, 감히 경험하지 않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들을 대신 경험하고 그 경험을 사회로 가져오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해서 그것을 이야기해주는 것입니다. - p.112


한번은 재미로 유서를 한번 써 볼까 했던 적이 있는데 관두었다. 혹여라도 내 글이 누구 눈에라도 보이게 되면 심상찮은 일로 오해받기 딱 좋으니까. 소설가의 장점은 이 모든 발칙한 상상을 자신의 글에서만큼은 얼마든지 표출할 수 있고 그것을 통해 자기해방감을 느낀다는 데 있을 것이다. 이 '자기해방'이라는 표현이 아주 맘에 들었는데 책을 읽는 사람들은 점점 줄고 있지만 글을 쓰는 행위의 자유로움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켜 일기나 웹등에선 물론 자기만의 책을 출판하는 것이 꿈인 사람도 많아지고 있다.


 또 '늙지 않는 발레리나'라든지 극장의 문지기등으로 작가를 비유한 표현은 김영하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작가관'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쓴 글과 독자들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든 대목이었다. 소통이란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와 작품 사이에서만 있어도 충분하다는 그의 논리는 지금보다 작가가 신비주의에 갇혀있었던,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았던 예전을 떠올리게도 만들었다.


소통과 공유라는 단어가 만연해지고 개인만의 내밀한 세계 구축이 갈급한 상황에서 책은 중요한 의미를 띠게 되었다.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는 것과 같은 규칙적인 일상 이외에 우리가 온전히 혼자서만이 할 수 있는 생산적인 활동은 무엇이 있을까. 문학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백이면 백 모든 이들의 감성을 포용하는 즐거운 고독의 장이라는 김영하의 작가적 세계관이 앞으로도 그의 작품을 반갑게 찾아볼 수 있게 되는 동기가 될 것 같다.


저는 글을 잘 쓰는 것은 어떤 기술의 문제도 아니고, 기법의 문제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순간에 인간이 자기 서재, 아무도 침입해 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에서 자기 자신을 대면하고 정직하게 쓴 글에는 늘 힘이 있고 매력이 있어요. - 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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