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과 악의 무의미함, 그 경계가 힘없이 무너지는 전쟁이라는 참혹한 현장에서 이토록 담담하고 인간적이게 쓰여진 책이 있었던가. 책을 읽으며 상상을 해보았다. 먹을 음식은 고사하고 마실 물조차 없어 시궁창 냄새가 진동하는 물에 입을 대고 삶을 갈구했던 이들을. 그리고 지금의 내 안락함을.


비극적 상황묘사나 역사의 참상을 증오하면서도 때때로 관련서적을 찾아보는 이유는 그것을 잊지않고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굳이 변명을 해본다. 저자 프리모 레비는 악명 높은 독일의 나치 수용소에서 10개월여에 이른 감옥생활을 하며 이 책을 집필해 냈다.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독일군에게 포로로 끌려가 그 곳에서 유대인과 기타 정치범들을 고문하고 학대하는 현장에서 끝까지 인간성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의 사투가 눈물겹다. 배급된 빵 한조각과 죽 1리터, 닳아빠진 속옷이 그들을 구원하는 생명줄이며 때론 신경전의 원인이다. 수용소에서 살아남으려면 사회에서의 도덕성따윈 일치감치 버려야 한다. 전형적인 정신병자 혹은 범죄자의 교활한 수법이 하루를 견디고 생을 이어가는 지름길이다그 곳은 법과 질서가 존재치 않는 적자생존의 원시공간이며 약삭빠르고 먹잇감을 노리는 본능적이고 이기적인 짐승의 눈빛을 가진자만이 마지막 승리자가 되는 곳이었다.


'누구든지 가진 사람은 더 받을 것이며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는 잔인한 법칙을 실감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인간이 홀로 존재하며 삶을 위한 투쟁이 원초적인 매커니즘으로 축소되어버리는 수용소에서, 이 불공평한 법칙은 효력을 발휘하며 모두에게 인정을 받았다. - p.134


수인들을 대하는 간수들이 그들을 대하는 눈빛을 설명한 대목에서 유대인을 경멸하다 못해 마치 생물학적으로 하등한 종을 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고 술회한다. 그리고 보복의 차원이 아니라 탐구와 호기심의 영역에서 그것을 탐구하고 분석해보고 싶어하는 저자의 관조섞인 태도가 인상적이다.


그 시선은 두 명의 인간 사이에 흐르는 시선이 아니었다.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두 존재 사이에 놓인, 수족관의 유리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 같은 그 시선의 성질을 속속들이 설명할 수 있다면, 나는 제3제국의 그 거대한 광기의 본질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 p.162


아우슈비츠에서는 그 어떤 것도 장담할 수 없다. 식량부족과 질병, 체력고갈 사망등은 물론이고 내일이라도 당장 선발대열에 휩쓸려 가스실로 끌려가 쥐도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이유로 수인들은 먹을거리가 생기면 냅다 쑤셔넣기에 바빴다. 서로간에 경쟁과 모멸, 증오을 부추기며 수치심을 잃어가는 인간존엄의 바닥의 끝을 달리는 수용소에서 끝까지 체제에 굴복하지 않으려 했던 그의 동료 슈타인라우프의 메시지는 내 가슴 속 깊은 곳에 큰 울림을 주었다.


수용소는 우리를 동물로 격하시키는 거대한 장치이기 때문에,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곳에서도 살아남는 것은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에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똑똑히 목격하기 위해 살아남겠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서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가 노예일지라도, 갖은 수모를 겪고 죽을 것이 확실할지라도, 우리에게 한가지 능력만은 남아있다.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 - p.57 ~ 58


감옥 내에서도 '조직'이란 이름으로 비밀스런 행동이 이루어지는 마당에 왜 그들은 집단항거나 투쟁을 할 수 없었을까. 레비는 독자들의 한결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암묵적 경고로 가끔씩 눈앞에 펼쳐지는 공개처형은 일말의 탈옥 시도나 투쟁심을 일시에 잠재워버렸고 실체가 없는 듯한 나치즘의 공포세력은 그들의 무력감을 한층 더 돋구었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것은 소련의 사회주의보다 몇 갑절 더 지독한 것이었다고. 이것이 인간인가. 고통을 가하는 인간도 그 고통에 무디어질대로 무뎌져 초점을 잃은 눈만 간직한 채로 짐승의 사체처럼 무력하게 놓인 수많은 인간에게서도 인간성은 불시에 자취를 감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인간이 아니다. 그들의 인간성은 땅에 묻혔다. 혹은 그들 스스로, 모욕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줌으로써 그것을 땅에 묻어버렸다.(...) 독일인들이 만든 광적인 위계질서의 모든 단계들은 역설적이게도 균등한 내적 황폐감에 의해 연결되어 있었다. - p.187


특이할 만한 점은 프리모 레비가 화학자로서 비상한 머리를 지녔었고 비교적 강인한 체력의 소유자로서 생존자로 살아남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지녔던 건 사실이지만 글을 쓰는 직업과는 전혀 무관한 인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서술 방식이나 당시를 회고한 대목 하나 하나에 빨려들어갈 정도의 흡입력과 문장력을 자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업성을 염두해 두고 출판한 다른 소설이나 유명작가의 글과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에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당시의 피해자이며 생존자로써 처참했던 상황과 그 시대를 정확히 전달하려는 의무와 사명감이 그로 하여금 필사적인 진술과 같은 글력으로 발휘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리고 만약, 프리모 레비가 아니라 다른 누구였다고 해도 시대의 대변자가 되어 그의 역할을 대신했을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죽음에서의 사투에서 힘겹게 살아남은 그는 자택에서 돌연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이름없는 포로 '174517'이 아닌 생존자 프리모 레비의 자살이기에 더욱 우리에게 무언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된다.

역사의 산증인으로, 증언문학의 한 획을 그은 이로써 그의 죽음과 남긴 저서들은 600만여명의 유대인의 혼을 기리며 이후로도 쭉 그 빛을 발할 것이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7월의 테마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