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평점 :
품절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를 좋아하는데요. 지난 포스팅에서 이언 매큐언의 <속죄>를 다룬 뒤 소설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런 의미에서 고른 이번 에세이 <소설가의 각오>는 제목에서부터 그 모든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소설가로써 지녀야 할 책임, 의무, 윤리에서부터 문학의 본질에 이르기까지, 작가 마루야마 겐지는 자신의 올곧은 신념에 부쳐 강한 어조로 독자들에게 어필하고자 합니다. 그닥 기대를 걸지 않고 쓴 첫 작품이 신인상과 아쿠타가와 상을 휩쓸만큼, 어쩌면 그 속에 내재된 욕망은 처음부터 '글쓰기'였던 걸 뒤늦게 발견한 그가, 소설을 대하는 방식은 정도(正道)에서 한 치의 어긋남도 없어 보입니다. 적당주의를 혐오하고 문단의 타락을 안타까워하며 질책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이 글이 쓰여졌던 당시와 조금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오늘날에 깊은 한숨만 나올 뿐입니다.


관계자들은 초대형 베스트셀러 작가 하나만 등장하면 문학 전체가 구제받을 수 있을 것이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 편집자들은 자기 일에 넌덜머리를 내면서도 일단은 잡지의 쪽수를 채우기 위해 원고를 긁어 모으느라 분주하다. 필자는 그에 맞춰 날림으로 글을 쓴다. - p.268


이처럼, 문학이 쇠퇴하고 사람들이 활자를 멀리하게 된 이유를 영상과 기술의 발달에서 찾으려는 이들에게 가하는 일침은 통쾌하기까지 한데요. 자신이 믿는 바가 곧 소설이 되야 한다는 뚝심 아래, 그는 철저한 독고다이 생활을 고수하며 개 한마리와 함께 한적한 시골에 틀어박혀 규칙적이고도 소박한 삶을 오랜 세월 실천하고 있습니다. 글을 읽으며 참 제 잘난 맛에 산다는 오만한 사람이란 생각도 들었지만 작금의 문학실태를 딱 꼬집어 조목조목 회초리를 든 부분은 책을 사랑하는 입장에서 격한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앞이 뻔히 내다보이는 생활을 철저히 경계하고 글 또한 어떤 것을 쓸지 알 수 없는 과정에서 차차 그 형상을 빚어가는 작업이라고 말하는 대목에선 무릎을 탁 쳤다지요.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을 극히 냉정하게 무한한 미지로 놔두는 편이, 어떤 해괴한 것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도깨비 방망이처럼 취급하는 편이, '쓰는 힘'과 조우할 기회가 훨씬 많을 듯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 p.56


한편, 사회 곳곳에서 횡행하는 부조리와 젊은 청년들의 나태함에 대해서도 거리낌없는 독설을 내뱉는데요. 이런 관습이 문단으로까지 뻗쳐 지금의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분석인데, 흥미로운 건 일본인 특유의 온(효행)의 자세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선 부분이었습니다. 모두가 당연시하는, 전통적인 모국의 관습조차 그의 레이더망에선 안전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또, 현실 도피의 수단으로 문학을 바라보는 독자들과 방탕한 생활에 찌든 작가들, 극단의 위계질서에 물든 문학계를 향한 지탄은,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에 편승되지 않으려는 몸부림 그 자체로 보였습니다. 침묵, 절제, 고독을 벗삼아 그저 꾸준히 써나가는 그의 소설이 오히려 안 팔리는 게 마땅하다는 얘기를 들으며 깊은 씁쓸함을 삼키기도 했지요.


문학은 쓰는 것이지, 논하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소설쓰기를 목표로 하는 자는, 문학론 따위와는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리해야 한다. - p.207


고독을 이길 힘이 없다면 문학을 목표로 할 자격이 없다. 세상에 대해, 혹은 모든 집단과 조직에 대해 홀로 버틸 대로 버티며 거기에서 튕겨나오는 스파크를 글로 환원해야 한다. - p.207


삶을 대하는 태도, 인간관계에서 오는 진실함에서 소설의 영감을 찾고자 하는 그만의 지론은 명쾌합니다. 이러쿵 저러쿵 평을 하는 무리들에게 부화뇌동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의 소신을 따라 외로운 글쓰기에 천착하는 것. 출세와 명예, 돈, 지위에 대한 욕심을 일체 버리고 한 길을 가는 그에게 소설은 마치 산을 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등정할 때 필요한 건 오직 시간과 체력, 약간의 여비, 그리고 볼펜이 전부죠. 최근 글쓰기에 대한 책이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요. 그 기법을 배우기에 앞서 글을 대하는 태도를 갖추는 게 우선이라고 봤을 때, 마루야마 겐지는 마음만 앞서는 예비 작가지망생들에게 길잡이로써 바른 초심을 주입해 주는 한편, 서두르지 말고 긴 호흡으로 일관된 톤을 유지하며 작품 집필에 임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그 환경 또한 지루하고 단조로운 나날의 연속일 테지만 견뎌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높은 산을 오르려 하는 자에게 자연광 이외의 빛은 걸림돌이 될 뿐이었다. 또 나는 문학상이란 빛에 홀린 독자들을 상대로 소설을 쓰고 싶지도 않았다. - p.330


조금은 미안해졌습니다. 몇 개월에서 길게는 몇 년에 걸친 대장정으로 소설을 완성해나갔던 그 과정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을 보며, 그들의 문학적 지식과 경험, 상상력과 창조력을 단 몇 푼의 돈으로 교환해 얻으면서 정작 그 작품의 가치는 과소평가하고 비싸다고 징징대던 제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소설에 지나치리만큼 엄격한 잣대를 드리우고 현실과 타협의 여지 하나 두지 않는 그는, 틀어진 오늘날 문단의 마지막 보루와도 같습니다. 요즘엔 본인이 지향하는 글만을 써서는 먹고 살기 힘들다고 작가들은 말합니다. 대중성과 영화화 추세에 따른 트렌드도 익혀야 한다고도 하죠. 흔히 배고픈 직업이라 일컬어지는 험난한 그 작가의 길을 정도대로 걷고자 애쓰는 마루야마 겐지의 모습에서 아직은 괜찮아질 수 있을 거란 가능성을 느껴보려 합니다.


영상 문화가 범람하는 현 시대에도 문자로 표현하고 습득해야 그 감동이 제대로 전해지는 무언가가 있기에 끝내 문학이 뿌리 뽑히지 않고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라 믿습니다. '쓸 만큼 썼으니 이제 더는 쓸 것이 없다'는 말은 그에겐 핑계에 불과합니다. 여전히 캐지 못한 문학의 광맥은 다음 세대에도, 그 다음 세대에게도 넉넉하리만큼, 그 끝을 알 수 없이 풍부하다는 게 꾸중 일색이었던 작가의 유일한 희망적 메시지였기 때문이죠. 저 역시 그 주장에 격한 공감을 표하고 싶고 그것을 증명할 의무는 다름 아닌, 독자와 작가 모두에게 있다고 생각합니다. 글을 사랑하는 분과 문단관계자들을 포함해 인간관계나 비즈니스 생활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 분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하는 바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속죄
이언 매큐언 지음, 한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고민이 될 때는 즐겨듣는 팟빵 <빨간책방>에서 다뤄진 책들을 꺼내들곤 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소개할 책은 방송의 최대 수혜를 입었던 이언 매큐언의 <속죄>라는 작품인데요. 독서에 그닥 취미가 없으신 분들께는 528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과 고전과 같은 빽빽한 자간에 지레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겠군요. 저 역시 구입 후 한 달 이상을 묵혀 놓고 8월 중순부터 시작한 대장정의 마침표를 어제부로 힘겹게 찍었답니다. 살다 보면 어떤 생각과 행동에 이르게 된 경위를 나 자신조차 설명하기 애매한 경우가 있죠. 철들지 않은 13살 소녀 브리오니. 아이와 어른의 경계지점에 선 그녀는 문학적 감수성이 풍부하고 공상하기를 좋아하며 다가올 자신의 앞날(어른)에 대한 호기심으로 들끓었던 만큼 그러한 내적 혼란을 글쓰기와 이야기로 배출시키고 싶어했습니다.


사람을 불행에 빠뜨리는 것은 사악함과 음모만이 아니었다. 혼동과 오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들 역시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똑같은 존재라는 단순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불행을 부른다. - p.66-67


1935년의 어느 여름밤, 영국 서리지방의 탈리스 가 저택에서 15살 소녀 롤라가 강간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용의선상에 오른 이들은 당시 실종된 쌍둥이들을 찾아 집을 나선 모든 남자들. 유일하게 현장을 목격한 브리오니는 도망치던 그림자의 실루엣과 그 날 오후 일어났던 일련의 사건들을 머릿속으로 조합하여 범인을 파출부 아들 로비라 단정짓고 가족과 경찰 모두에게 확신에 찬 발언을 하게 됩니다. 사실 그녀가 몇 시간 전에 보았던 분수대와 서재에서의 일들은 로비와 그녀의 언니 세실리아의 불꽃 튀는 사랑의 시작에 불과했으나 아직 그녀가 이해하기엔 버거운 어른들의 세계를 소리없는 무언극으로, 섹스라는 행위를 단 몇 초간의 시각적 경험에만 의존해 해석한 결과, 정신병자가 휘두르는 무자비한 폭력이라는 커다란 오해로 바뀌어 비극의 시초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브리오니는 압력이나 위협을 받았다고 자신을 위로할 수는 없었다. 사실 압력이나 위협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녀는 자기가 만든 미로 속에 자신을 가두고 맹목적으로 걸어 들어갔으며, 너무나 어렸고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해주고자 하는 마음이 컸기 때문에 갔던 길을 되돌아 나올 엄두를 내지 못했다. - p.245

 

매번 엇갈리고 말았던 두 남녀의 마음은 그렇게 한 소녀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그 사랑이 확인되자마자 기약없는 생이별로 이어집니다. 비록, 단 몇 분이었지만 중단된 사랑의 대화는 세실리아에게 로비가 범인이 아닐 거라는 확신을 주었고 범인 지목에 일조한 탈리스 가와 의절을 하고 간호사로 살아갈 용기를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죠. 한편, 감옥에 억울하게 투옥되어 5년의 시간을 보낸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프랑스로 징집되어 비참한 전쟁통에 눈 앞에 쌓여가는 수많은 시체들과 악취, 쉴새없는 폭격이 난무하는 곳에서 로비는 자신을 향했던 브리오니의 증언에 대해 증오를 품으면서도 죽음이 일상이 되버린 전시 상황에 비하면 그녀의 뒤늦은 증언 번복 결심이나 유죄가 무죄로 바뀌는 것 따위야 어찌됐건 사소한 일에 불과하다고도 생각되는 현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즘 같은 때에 죄란 과연 무엇인가? 별 의미가 없었다. 누구나 다 유죄이기도 하고 무죄이기도 했다. (...) 우리는 매일 서로의 죄를 목격하면서 살고 있다. 아무도 죽이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죽게 내버려둔 적도 없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죽게 내버려두었나? - p.368-369


그곳에 다다르면 플랑드르 여인과 그녀의 아들에게 그가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인간은 오만에서 나오는 자기 비난의 감정에 휩싸이면 너무 많은 책임을 떠안으려 하는 수도 있기 때문이다. - p.370


세월이 흐르면서 지난 날 자신이 내렸던 오판이 크나큰 재앙을 불러왔음을 직감한 브리오니는 뒤늦게나마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언니에게 사죄의 편지를 써 법적인 절차를 밟으려 합니다. 또 케임브리지 진학을 포기한 뒤 군 전담 병원에서 수련 간호사로 고군분투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에 대한 속죄를 시작합니다. 두 남녀의 사랑을 갈라놓고 한 남자의 인생을 망가뜨린 가해자로써 조금이나마 죄책감을 덜고자 선택한, 그러나 누구도 원치 않았던 고행과도 같은 삶을 자기위안으로 삼으며 살아간 브리오니를 보며 아직도 자기감상에 젖은 유년시절의 기질을 버리지 못했구나 하고 혀를 차기도 했지요. 특히 짬짬히 틈을 내어 완성한 소설원고를 잡지 편집장에게 거절당하며 조목조목 지적받는 회신엔 그녀의 삶과 소설에서 진정으로 존재해야 마땅한 것이 빠져있음을 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그녀는 보잘것없는 글재주로 하찮은 소설 하나 펴냄으로써 그 사실을 감출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 그녀는 정말로 남을 모방한 소위 현대적 글쓰기 양식 뒤에 숨어서 의식의 흐름속에 죄책감을 익사시킬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녀의 소설에 없는 것은 그녀의 삶에도 없었다. 그녀가 삶에서 정면으로 부딪히기 싫어했던 것은 소설에서도 빠져 있었다. 진정한 소설이 되기 위해 빠져서는 안 될 것이 바로 그것이었는데도 말이다. (...) 그녀에게 부족한 것은 소설의 척추가 아니었다. 그녀 자신의 척추, 그녀 인생의 척추였다. - p.449


60여년의 세월을 담아낸 이 장대한 서사 구조 속에서 제1부는 단 하루에 걸쳐 일어난 일들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 날의 일들로 인해 파생된 이후의 시간들은 단 한순간도 과거 그 시점의 굴레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죠. 이 엄청난 일들의 책임을 브리오니 한 사람에게만 전가시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습니다. 겉으로는 로비를 위하는 척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외면했던 에밀리와 잭, 진짜 범인을 알면서도 피해자로 남아 모든 진술을 거부하고 브리오니가 증언을 하게끔 침묵한 롤라, 세계대전이 격동했던 당시 시대상황등이 얽히고 설키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파국으로 치닫고 만 모든 일들은, 어쩌면 여름밤의 저녁을 함께 했던 모두가 나눠 가져야 할 책임의 소산일것입니다.


소설을 쓴 이언 매큐언은 등장인물의 복잡내밀한 심리묘사와 영화처럼 생생히 눈앞에 펼쳐지는 것만 같은 상황설명에 탁월한 재주를 지니고 있습니다. 브리오니, 로비, 세실리아 세 사람의 시점에서 마치 각각의 인물들의 마음 속에 들어가 보기라도 한 듯이 칭찬받기 좋아하고 상상력 풍부한 사춘기 소녀의 감정을 디테일하게 그려내는가 하면, 파편적인 사랑의 기억에 의지해 무력하고 절망적인 상황을 버텨내려는 로비의 심정을, 어린 나이였던 것을 감안하고도 첫사랑의 배신과 질투에 의한 결과라고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브리오니의 행동을 어쩔 수 없이 증오하고 마는 그의 고뇌를 섬세한 남성적 필치로 묘사하기도 합니다. 특히, 온전히 사료조사에만 의존한 2부의 전시 퇴각 과정의 에피소드들은 작가 본인조차 경험하지 않았지만 독자들 모두를 처참한 살육현장에 이끌고 와 있는 듯한 현실감으로 책장을 넘기는 손에 속도를 붙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브리오니는 비극적 결말에 자신의 소설로나마 속죄하려 했습니다. 한낯 문학 따위가 무슨 힘이 있을까 싶지만 결국 사건의 발단 역시 한 사람의 상상력에서 기인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그녀의 글이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겠지요. 책 속에는 까무러칠 만한 반전이 몇 번 나오는데요. 아직 읽지 않은 독자분들을 위해 언급하진 않았습니다. 잔잔한 원작의 감동을 충분히 즐기고 싶은 맘에 영화로 각색된 <어톤먼트>도 보지 않았는데 영상화된 이야기는 또 어떨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대장정을 시작하기 전에 책의 길잡이가 될 빨간책방 <속죄>편을 참고하시면 더욱 좋은 독서가 되실 것 같습니다.


소설가가 결과를 결정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과 같은 존재라면 그는 과연 어떻게 속죄를 할 수 있을까? 소설가가 의지하거나 화해할 수 있는, 혹은 그 소설가를 용서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소설가 바깥에는 아무도 없다. 소설가 자신이 상상 속에서 한계와 조건을 정한다. 신이나 소설가에게 속죄란 있을 수 없다. 비록 그가 무신론자라고 해도. 소설가에게 속죄란 불가능하고 필요 없는 일이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속죄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이다. - p.5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분노사회 - 현대사회의 감정에 관한 철학에세이
정지우 지음 / 이경 / 2014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먹이를 취하고 있거나 임자(?)가 있는 암컷을 건드리면 으르렁대는 것과 같이 짐승들은 우리 인간과는 달리, 본능적인 분노만을 표출하며 살아갑니다. 살인적 기근이나 천재지변, 전쟁이 닥치지 않는 한 현대인들이 사는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러한 생존의 위협에 따른 분노가 다시 들끓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하지만, 이제는 발전된 문화, 가치관, 이념, 이상의 대립으로 집단과 계층, 세대간의 갈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소위 정신적 차원의 분노사회가 극에 달한 시대가 눈 앞에 와 있는 것 같습니다. 하루에도 몇번씩 화를 내면서도 그 본질적인 이유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해 보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과연 분노란 무엇이고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인지 그 배출구와 해답은 무엇인지 오늘의 책 <분노사회>를 통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분노는 인간이 언제나 관념을 향해있고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가 되는 감정이다.​ 만약 한 사회가 분노로 넘쳐나고 있으며, 그 분노가 만성화되어 있고, 심심치 않게 분노가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면, 문제는 그 사회의 관념에서 찾아야 한다. - p.14

​분노는 기분에 따라 좌우되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그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관념'의 문제와 밀접하게 닿아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만들 수 없듯, 한 개인이 믿고 추구하려는 관념과 이 사회가 지향하는 관념이 항상 같을 수는 없겠죠. 분노는 바로 그런 사회와 개인이 바라보는 관념의 갭에서 온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를 정당한 방법이 아닌 무차별적 증오로만 해결하고자 한다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살인, 범죄, 자살과 같은 극단적 파괴로만 치닿고 말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주변의 온갖 불만들을 사회의 탓으로 돌리고 나와 내 가족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적인 생각과 맹목적 집단주의에 매몰되어 진정한 자신을 보지 못하는 이들로 이루어진 사회를 이미 많이 겪어왔고 지금도 진행중입니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유명한 속담이 있죠. 지금 한국엔 수많은 사공(집단과 개인)들이 제각기 자기 목소리만을 높여 서로의 이익을 쌓기 바쁘고 정작 그 목소리를 높인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만이 있는 현실입니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전후 독재정권 시기를 거쳐 급격한 경제성장의 시기를 지나오기까지 사회적 기반이 되었던 집단주의는 여전히 우리 의식 속에 남아 있어 틈만 나면 편을 가르고 각잡힌 위계질서를 당연시하는 분위기로 흐르곤 합니다. 허나 X세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때 지난 고정관념이며 기성세대들에겐 지켜야만 하는 자신들만의 방어벽이라 이들의 갈등으로 인한 분노 역시 불가피한 현상입니다.

특히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집단에 의지하여 자신의 존재감을 얻고 특정한 반대 집단을 지목해 공격하고 비난하는 현상에 대해 '개인주의의 퇴보'라 일컬으며 지적한 부분은 생각할 거리가 많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 사회는 사회대로 떼어놓고 생각하기보다는, 내 삶을 지배하는 분노의 원천인 잘못된 교육 제도나 정책에 대해 관심을 갖고 각자의 영역에서 타개책을 모색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한 개인이 사회를 바꾸려는 시도는 무모해 보일지도 모르지만 이 시대의 사회란 것도 결국 쪼개놓고 보면 개개인의 모임이니 각자의 의식전환이 중요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다는 이유겠죠. 그런 점에서 본다면 연일 뉴스에서 터져나오는 사건, 사고에 반응하는 요즘 우리들을 보면 나만을 위한 이기적 분노가 아닌 도덕적이고 바른 사회를 위한 정당한 분노에 불씨가 당겨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시민 의식이 합리적 수단과 맞물려 사회의 밑바닥부터 바꿔나간다면, 역사적 혁명과 같은 단시간의 변화는 아닐지라도 우리가 바라는 사회상에 조금이나마 다가설 수 있는 계기가 되겠지요.

우리 각자는 홀로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란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나의 세포를 이루는 몸은 부모로부터. 성격, 가치관, 꿈, 생활패턴, 바라는 이상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은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은 것은 전무하고 그렇게 탄생한 개개인이 모여 한 사회를 이루고 있는 것이죠. 이러한 사회와 자신의 연계점을 찾고 바람직한 '내'가 모여 만드는 사회야말로 모든 이가 꿈꾸는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참고로 책의 저자 정지우씨는 팟캐스트 <뼈가 있는 책>에서 만나 볼 수 있는 작가인데요. 시대를 정면으로 분석하고 날카롭게 비판한 이 책을 집필했다고는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젊고 당찬 젊은이인 듯 합니다. 목소리만 들어선 30대 중반 내외로 짐작되는데 그의 다른 저서들 또한 깊이가 만만치 않은 것 같습니다. 책과 함께 들어보시길 추천해 드립니다.

사회는 개인들이 그 사회를 믿고, 생활 속에서 그 사회를 실현하고 있을 때만 존재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는 그저 온갖 집단 갈등들로 넘쳐나는 군중집합체밖에 되지 않는다. - p.82​

현대 사회 개인의 소외라는 것은 내면을 간직하고자 하는 개인, 그러나 내면의 소통이 차단되어 있는 현실이라는 요소들을 통해 이해되어야 한다. - p.89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는 분노에 휩싸여 있을 때 자기 자신을 돌아본다면, 거의 반드시 잘못된 우리의 인생 과정, 즉 잘못된 가정교육과 공교육에 지배당해왔던 지난날들을 떠올리게 된다. 우리는 그 지점으로 돌아가야 한다. - p.1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소수자로서의 체험이 우리가 지닌 조건을 넘어선 어떤 독특한 문을 열 수 있다. 존재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단련하기 위해 약자와 직면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이 여정을 설명하는 근본적이고 무모한 직관이다. - p.20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이에게 운명이 부과하는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습관처럼 행하는 '옷 입기'. '볼일 보기'. '식사하기' . '대중교통 이용하기' 같은 소소한 일에서부터, 타인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는 일까지 육체와 정신의 쉴새없는 전투로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맞이하고 또 마감합니다. 도전의 연속. 취업에 실패했다고 사랑에 상처받았다고 포기하는 정상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포기가 곧 삶의 정지로 이어지고 마는, 이 사회의 소수자들. 이 책 <인간이라는 직업>은 선택받은 그들을 대표하여 장애인의 존재방식과 실존적 고뇌, 투쟁들을 절망이 아닌 기쁨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스위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2002년 출간작입니다.


그는 태어나기 직전 탯줄에 목이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불행하게도 뇌성마비라는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어린시절은 또래 아이들과 자신이 '다름'을 인지하는 과정에서부터 숱한 시련의 연속이었는데요. 단어의 뜻을 익히고 셈을 하는 것보단 당장 생활 속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그에겐 살기 위한 급선무였지요. 성치 못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친구들과의 우정은 사지가 멀쩡한 친구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끈끈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17살의 어느 날, 그가 겪었던 한 책노인과의 만남은 오랫동안 그의 몸을 지배해왔던 고통에 대해 새로운 성찰과 자의식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태어나자마자 고통이나 통증과 만나는 사람은 일생에 도움이 되는 현실주의를 갖추고 실존을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인생이 어쩔 수 없이 고통과 함께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버린 그는, 남들보다 쉽게 낙담하지 않고 전투의 필연성을 잘 되새기면서, 잔혹한 맞수를 받아들이며 그걸 좀 더 수월하게 피해간다. - p.36~37


인격이 형성되는 독특한 출발점은 우리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이 취약하며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고, 불확실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며, 왜 싸우는지, 왜 기쁘게 싸우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p.42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사람의 외관인 덕에 예쁘거나 잘나지 못한 사람은 인간관계를 쌓아가며 많은 애로사항을 느끼게 마련이죠. 흑인, 환자, 극빈층,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꼬리표는 본인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설명할 기회조차 박탈해버리고 몇 가지 서류와 잠깐의 훑어봄으로써 한 존재를 일각에 판단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존재를 구별짓는 언어는 철저히 단순합니다. 신분증 뒷자리의 숫자 1과 2의 차이처럼 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무 자르듯 쉽게 나누어지는 게 아닐진대, 언어란 것은 미세한 존재들의 다름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역부족해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육체만큼 '다름'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개인의 고유성을 부정하면서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축소는 본질과 우연을 혼동한다.(...) 청각장애인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에티오피아인이나 언청이나 마찬가지고, 유대인이나 앉은뱅이나 마찬가지며, 맹인이나 다운증후군 환자나 마찬가지고, 이슬람교도나 노숙자나 마찬가지며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 p.50

 장애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의 불편함이 아닌 정신적 수치와 고독, 일생을 겪어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타인의 편견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그리하여 정상인의 무리 속에 섞여들길 거부한 나머지 자신만의 공간에 둥지를 틀고서 세상과의 단절을 선포한 일부는, 마땅히 누려야 할 세속의 기쁨조차 함께 등지고 맙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사람은 혼자서는 존재가 불가능하며 타인이 있기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도 가능해지며 수많은 이념과 가치의 분류도 말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들에게 '타인'​이란 살아가는 동안 무거운 짐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는 게 보통입니다.

주변인의 체험, 다름을 드러내는 자로 있어야 할 의무, 비정상으로 분류된 자로 살아야 할 의무, 이런 것은 복잡한 문제 제기를 축약한다. 일생 내내 그는 특수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며, 그 특수성을 하나의 장점으로 이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 p.116 ~117


저자는 장애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 독특함을 누리고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남다른 사색을 즐기는 것이 이 치열한 전투적 생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무이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단 장애인 뿐만이 아니라 일반에게도 큰 깨우침을 얻게 하는 이 작은 책은 한 동안 베스트목록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네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열두 마음 - 일 년, 열두 달, 365일의 느낌표
세상의 모든 명언.최재성 엮음 / 프롬북스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개인적으로 자기계발서나 명언집을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요, 누구라도 살다 보면 이런 류의 힐링 서적에라도 마음을 의지하고플 때가 언제든 있게 마련이죠. 음악과 영화, 책을 즐기는 사람들의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속에서 만인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메세지는 희망, 용기, 사랑, 도전, 극복...이라는 밝은 미래와도 같은 상징임을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 대중가요나 미디어는 '남녀간의 사랑' 에 유독 그 스토리가 치우치고 있는 모습인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이미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사나 스타에게는 그들만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잘 되지 않았고 가난과 시련, 타인의 조롱과 비웃음이 종종 뒤따랐다는 사실이지요. 이런 어려움을 헤쳐나가기란 너무나 삭막해져버린, 지금 현 시대에 이 한 권의 책은 샘물과도 같습니다.


미래를 핑계로 몸 사리지 마세요. 우리에게 내일은 안 올 수도 있어요. 음악을 하는 제게 사람들은 물어요. '낭만적으로 사는 게 뭐죠?' 오늘이 내 마지막 하루라고 생각하고 사는 사람. 여러분,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당장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세요. - p.51


언젠가 지난 날을 돌이키며 포스팅을 한 글이 문득 생각나는군요. 젊은 날 좀 더 열정적이고 무모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며 써내려간 그 글을 오늘 다시 보면서 그 땐 겨우 20대중반을 막 지나고 있었을 뿐인데 무에 그리 늦었다고 세상 다 산 것처럼 회한에 찌든 글을 썼던 건지 참 부끄럽기만 합니다. 특히, 태어나면서부터 남들과는 불리한 조건을 지니고 세상에 나온 이들이 사회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사례를 보면 그에 비해 앞선 출발선상에 섰다고 할 수 있는 제 자신이 별 것 아닌 이유로 꿈을 회피해 온 건 아닌가 하는 반성도 하게 되지요. 저의 나쁜 버릇은 지난 과거의 일을 애써 다른 길로 가정해서 상상해 보는 일인데요, 최근 보았던 대중매체에서도 타임슬립물 이야기가 큰 인기를 끌었었죠. 허나, 이런 드라마와 영화를 제작한 기획의도는 지극히 상업적일지 몰라도 그것을 시청하는 각 개인의 입장에선 좀 더 깊은 의미로 받아들여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나온 삶을 돌이켜 후회한다는 것은 지난 삶의 선택이 잘못되었다고, 정답이 아니었다고 분별하는 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다. 지금 이 자리가 정확히 내 자리가 맞다. - p.76


비록 아무도 과거로 돌아가 새 출발을 할 순 없지만 누구나 지금 시작해 새 엔딩을 만들 수 있다. - p.249 (칼 바드의 말 인용)


캐나다 출신의 테리 폭스는 어릴 적부터 탁월한 운동 신경을 발휘하며 또래 소년들에 비해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18살 때 골육종이라는 청천벽력같은 진단을 받고 한 쪽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됩니다. 가족과 지인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는 세상 모든 암 환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북돋워 주기 위해 정상인들도 힘들다는 마의 풀코스 42.195km를 매일같이 달리기 시작합니다. 끈기와 인내로 계속된 침묵의 땀방울은, 조롱과 비아냥으로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 모두를 응원의 함성으로 돌려세웠고 지역 곳곳의 기부 릴레이로 점차 그 희망의 씨앗은 캐나다 전역으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에 이릅니다. 누가 뭐래도 내 갈길을 묵묵히 가는 것, 포기를 모르는 7전8기의 성공 신화는 다름 아닌 인생의 장애를 피하지 않고 맞서 싸우는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역경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피해야 할 장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을 저의 그림자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 p.98


'행복 강박증'이란 말 들어보셨을 겁니다. SNS와 같은 네트워크나 개인 홈피가 넘쳐나는 요즘 다들 하게 되는 착각이 자신 외엔 모두 행복하게 사는 것 같다는 열등감이 아닐까 하는데요, 적어도 억소리 나는 재산과 지금 자신의 나이를 바꿀 마음이 없는 창창한 나이라면, 아직은 행복이란 지극히 본인의 선택 여부에 달린 의지적인 문제라고 책에서는 말하고 있네요. 하지만 멋 모르던 어릴 때와는 달리 우리는 나이를 먹어가면서 선택의 결과가 어떠할지 미리부터 걱정하고, 변화를 두려워하며 현실에 안주하려는 계산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에 점점 익숙해져 갑니다. 단 10%의 생존율에 의지해 수술실로 들어가는 환자의 마음처럼, 절실하고 두근거리는 마음이 없다면 우리의 생은 지루함 그 자체의 연속이 아닐까요.


지금보다 절실한 나중이란 없다. 나중이란 영원히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눈 앞에 와있는 지금이 아닌 행여 안 올지도 모를 다음 기회를 얘기하기엔 삶은 그리 길지 않다. - p.175


저는 숱한 사랑 이야기보단 희망찬 내일을 얘기하고 용기를 주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는 내용의 가요를 즐겨 듣습니다. 스윗소로우의 <so cool>, 이승환의 <가족>, 강산에의 <넌 할 수 있어>등이 그것이지요. 이런 노래들은 반짝하고 뜨는 효과보다는 오랜 세월 대중의 꾸준한 관심을 받는 스테디 음반인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힐링해 주고 다독여 주는 이와 같은 대중 가요가 좀 더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구요. 더불어 <열 두 마음>과 같은 책이 사람들에게 뜬구름잡는 얘기로만 읽혀지지 않는 세상이 되길, 누군가에겐 기적의 책이 되길 간절히 바래봅니다.



[해당 서평은 반디펜벗 8월의 테마서평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