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라는 직업 - 고통에 대한 숙고
알렉상드르 졸리앵 지음, 임희근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소수자로서의 체험이 우리가 지닌 조건을 넘어선 어떤 독특한 문을 열 수 있다. 존재 전체를 감당할 수 있는 마음 상태로 단련하기 위해 약자와 직면하기 시작하는 것. 그것이 이 여정을 설명하는 근본적이고 무모한 직관이다. - p.20


 장애를 지니고 태어난 이에게 운명이 부과하는 무게는 상상 이상으로 큽니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습관처럼 행하는 '옷 입기'. '볼일 보기'. '식사하기' . '대중교통 이용하기' 같은 소소한 일에서부터, 타인의 따가운 눈총을 감내하는 일까지 육체와 정신의 쉴새없는 전투로 하루 하루를 치열하게 맞이하고 또 마감합니다. 도전의 연속. 취업에 실패했다고 사랑에 상처받았다고 포기하는 정상인들의 그것과는 달리 포기가 곧 삶의 정지로 이어지고 마는, 이 사회의 소수자들. 이 책 <인간이라는 직업>은 선택받은 그들을 대표하여 장애인의 존재방식과 실존적 고뇌, 투쟁들을 절망이 아닌 기쁨으로 승화시키고자 했던 스위스의 작가 알렉상드르 졸리앵의 2002년 출간작입니다.


그는 태어나기 직전 탯줄에 목이 감겨 질식사 직전에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불행하게도 뇌성마비라는 후유증을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어린시절은 또래 아이들과 자신이 '다름'을 인지하는 과정에서부터 숱한 시련의 연속이었는데요. 단어의 뜻을 익히고 셈을 하는 것보단 당장 생활 속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이 그에겐 살기 위한 급선무였지요. 성치 못한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준 친구들과의 우정은 사지가 멀쩡한 친구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끈끈했음은 말할 것도 없겠죠. 17살의 어느 날, 그가 겪었던 한 책노인과의 만남은 오랫동안 그의 몸을 지배해왔던 고통에 대해 새로운 성찰과 자의식을 갖게 만드는 계기가 됩니다.


태어나자마자 고통이나 통증과 만나는 사람은 일생에 도움이 되는 현실주의를 갖추고 실존을 시작한다. 결정적으로, 인생이 어쩔 수 없이 고통과 함께라는 것을 너무 잘 알아버린 그는, 남들보다 쉽게 낙담하지 않고 전투의 필연성을 잘 되새기면서, 잔혹한 맞수를 받아들이며 그걸 좀 더 수월하게 피해간다. - p.36~37


인격이 형성되는 독특한 출발점은 우리를 완전히 벗어버리는 것이다. 즉 자신이 취약하며 개선의 여지가 있음을 인정하는 일이고, 불확실한 땅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며, 왜 싸우는지, 왜 기쁘게 싸우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 p.42


 누군가를 만나게 되면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그 사람의 외관인 덕에 예쁘거나 잘나지 못한 사람은 인간관계를 쌓아가며 많은 애로사항을 느끼게 마련이죠. 흑인, 환자, 극빈층, 장애인이라는 사회적 꼬리표는 본인이 어떠한 사람이라고 설명할 기회조차 박탈해버리고 몇 가지 서류와 잠깐의 훑어봄으로써 한 존재를 일각에 판단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존재를 구별짓는 언어는 철저히 단순합니다. 신분증 뒷자리의 숫자 1과 2의 차이처럼 인간을 나누는 기준은 무 자르듯 쉽게 나누어지는 게 아닐진대, 언어란 것은 미세한 존재들의 다름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역부족해 보입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의 육체만큼 '다름'을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이 또 어디 있을까요.


개인의 고유성을 부정하면서 인간을 규정하는 모든 축소는 본질과 우연을 혼동한다.(...) 청각장애인이나 다리를 저는 사람이나 모두 마찬가지다. 에티오피아인이나 언청이나 마찬가지고, 유대인이나 앉은뱅이나 마찬가지며, 맹인이나 다운증후군 환자나 마찬가지고, 이슬람교도나 노숙자나 마찬가지며 당신이나 나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인간'인 것이다! - p.50

 장애인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의 불편함이 아닌 정신적 수치와 고독, 일생을 겪어도 도무지 적응되지 않는 타인의 편견에서 오는 상처입니다. 그리하여 정상인의 무리 속에 섞여들길 거부한 나머지 자신만의 공간에 둥지를 틀고서 세상과의 단절을 선포한 일부는, 마땅히 누려야 할 세속의 기쁨조차 함께 등지고 맙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사람은 혼자서는 존재가 불가능하며 타인이 있기에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구분도 가능해지며 수많은 이념과 가치의 분류도 말해질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요. 하지만 이들에게 '타인'​이란 살아가는 동안 무거운 짐이자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치부되는 게 보통입니다.

주변인의 체험, 다름을 드러내는 자로 있어야 할 의무, 비정상으로 분류된 자로 살아야 할 의무, 이런 것은 복잡한 문제 제기를 축약한다. 일생 내내 그는 특수성을 받아들이려고 애써야 하며, 그 특수성을 하나의 장점으로 이용하려고 애써야 한다. - p.116 ~117


저자는 장애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그 독특함을 누리고 거기서 찾을 수 있는 기쁨을 발견하는 것으로 자신의 삶의 의미를 성찰하고 남다른 사색을 즐기는 것이 이 치열한 전투적 생에서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는 유일무이한 무기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비단 장애인 뿐만이 아니라 일반에게도 큰 깨우침을 얻게 하는 이 작은 책은 한 동안 베스트목록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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